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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검 다리
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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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had Kember, Jr

신약성경에서 방언을 주제로 다루는 가장 긴 구절은 고린도전서 12-14장입니다. 고린도인들은 방언을 말하는 것에 과도한 우선권을 부여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의 주장은 매우 뛰어나서 그것들 중에 몇 가지만 검토해도 우리 시대의 소위 방언 운동은 하룻밤 사이에 거의 중단될 것입니다. 제시된 원칙들은 오늘날 전 세계적으로 성경적으로 모인 신자들의 모임들에 여전히 남아 있는 은사들에도 적용되며 그렇기 때문에 매우 귀중합니다.

 

서론: 과거와 비교한 방언(12:1-3)

방언을 말하는 것은 성경 지식, 성령님의 인도, 진리를 전달하시는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주되심에 의해 지배되어야 합니다. “너희가 모르기를 원치 아니하노라” 그리고 “깨닫게 하노니”라고 말한 것은 성경 지식의 결핍이 많은 교리적인 오류의 원인임을 강조합니다. 그들의 회심 이전과 회심 후 영적 활동들 사이에 대조가 두드러집니다. “이끌림을 받은 대로 끌려 갔느니라”와 “말 못하는 우상들”을 주목하십시오. 방언을 말하는 것이나 그것들을 남용하는 것이 이것과 공통점이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그들은 성령님이 아닌 그들 자신의 영이나 또 다른 영에 의해 타락되었습니다. “끌려 갔느니라” 그것은 무작위 적이었고 그것들이 통역되지 않았기에 침묵하는 편이 더 좋았을 수도 있었습니다. 세 구절은 아마도 구원을 받아들이거나 거절하는 유대인의 핵심적인 문제를 상기시켜줍니다, 즉 예수님이 저주받았나요?(갈 3:13) 또는 예수님이 주님이신가요?(롬 10:9; 행 9:5). 고린도인들은 방언을 사용하여 자기를 높이고 있었습니다. 성령님은 회중 안에서 그가 회심할 때에 하신 일을 즉 예수님을 주님으로 높이도록 행할 것입니다.

 

하나님 위(位)들의 상호작용: 삼위일체와 방언 비교(12:4-7)

여기서 우리는 성령님, 그리스도와 하나님 아버지께서 진정한 영적 나타남의 근원임을 배웁니다(고전 12:1). 그분들은 각자의 역할을 따라 하나로 움직이시며 모두를 위한 “공동의 유익”을 일으키십니다. 고린도인들이 은사들을 사용했을 때, 그들은 자비로운 삼위일체 하나님의 통일성과 조화되는 특성을 반영할 필요가 있었으며 그것들의 사용에 대한 능력(4절), 기회(5절), 힘(6절)(은사, 4절)을 주셨습니다. 고린도에서 방언의 남용은 하나님께 대한 불명예가 되었고 하나님과 사람의 상호작용하는 방식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습니다. 이 장에서 성령님에 대해 충분한 강조하고 있지만 방언이나 다른 형태의 기도는 성경에 어디에서도 성령님을 향한 기도로 언급된 적이 없습니다.

 

은사들의 지침: 다른 은사들과 비교되는 방언 (12:8-10, 28-30)

이 장에서 은사들 중 세 가지 목록에 첫 번째보다는 마지막에 방언을 두고 있습니다. 몸의 설명에서 방언은 언급조차 되지 않습니다. 다른 것을 제외하고 한 은사에 대해 과도하게 강조하는 것은 한 지체에서 몸을 격하시키는 것과 같을 것입니다. 몸집만 한 눈이 길바닥에서 당신을 향하여 튕겨져 내려오는 것을 상상해보십시오. 어떤 지체도 열등감을 느껴서는 안됩니다(14-18), 또한 다른 사람들보다 충분하고 우월하다고 느껴서도 안 됩니다(19-26). 몸은 상호간에 의존, 관계, 상호작용, 필요, 존중, 배려, 연민, 그리고 기쁨을 보여줍니다. 약한 지체들”은 더욱 존중함으로 배려되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임에서 동일한 모본과 계획으로 실제적인 몸을 “구성하셨습니다”: “더 분열이 없어야 할 것이지만, 지체들은 또 다른 것에 대해 한 가지 동일한 염려를 가지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마지막에(30) 바울은 “다 방언을 말하는 자겠느냐?”라고 질문합니다. 대답은 “아니오” 입니다.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는 자기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모임을 위해서 사모하라는 의미입니다. “큰 은사들”은 방언이나 어떤 다른 기적의 “표적” 은사들도 포함되지 않을 것입니다.

 

몸의 진리의 중요성: 방언과 성령 침례(12:12-13)

성령님의 침례는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었습니다. 오순절 이후부터 휴거까지 구원받은 모든 혼들이 그 안에 있습니다: “모두 한 성령에 의해 침례를 받아 한 몸 안으로 들어왔으며”(13절). 성령님의 침례는 오순절 날에 예루살렘에서 단 한 번만 일어났으며, 성령님이 아닌 그리스도에 의해 행해졌습니다(마 3:11). 회심할 때 성령 침례를 받았다고 하는 어떤 신자도 없습니다. 갈보리나 오순절 사건은 회심할 때마다 반복되지 않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혜택을 받을 수 있습니다. 오순절에는 다락방에서 오직 120명만이 문자 그대로 성령님으로 침례를 받은 것을 경험했습니다. 같은 날 구원받은 3,000명은 문자 그대로 그 경험을 한 것이 아니지만 여전히 그리스도의 몸의 한 부분이었습니다. 그들(그리고 이후의 모든 신자들)은 그리스도를 영접함으로 그 안에 들어왔습니다. 모든 사람이 성령님으로 침례 받은 것으로 보지만 모두 방언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30절), 따라서 방언을 말하는 것은 성령님으로 침례 받았다는 증거가 아닙니다(J. 헌터, 성경이 가르치는 것. 146 -148쪽에서 일부 발췌).

 

내적인 특성과 방언 말함: 사랑에 비교된 방언(12:31-13:13)

성과에 기반한 기독교는 겸손과 하나됨이 아닌 교만과 경쟁을 부추깁니다. 성령님의 열매의 첫째요 으뜸가는 열매인 사랑은 “영적인” 것의 유일한 척도는 아니지만 “모든 다른 것들을 초월하는 삶의 방식”입니다(웨이머스). 이 부분은 매우 웅변적이고 감동적이며, 그 아름다움이 너무나 뛰어나고, 그것은 그리스도를 생각하고 더욱 그분처럼 닮고 싶다는 생각을 하지 않고는 깊이 생각할 수 없습니다. 기독교적 은혜의 탁월한 특징인 사랑은 모임의 모든 집회 전이나 집회 중에 모두 추구되어야 합니다. 사랑은 운전 면허증 같으며 그것이 없이 은사를 사용하는 것은 불법입니다. 고린도 교회의 실패는 신약성경 전체에서 가장 강력하지만 사랑으로 책망하는 것 중 하나로 이어졌습니다. 사랑은 “보다 뛰어난 탁월한 방법”(12:31 다비)이다. 방언이 영성을 측정하지 못하지만 사랑을 측정할 수 있습니다. 방언과는 달리 모든 사람이 이 은혜를 받을 수 있고 또 받아야 합니다. 방언과는 달리 진정한 사랑은 과도하게 우선권을 부여할 수 없습니다. 사라진 방언과는 달리 사랑은 그치지 않고 지속합니다. 다른 은사들에 비해 열등했던 방언과는 달리 사랑은 은사들 중 으뜸입니다.

posted by 징검 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