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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검 다리
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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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데니슨

집회가 시작하려고 합니다. 모든 교회 지체들은 블록에서 단거리 선수같이 바라봅니다. 각 사람은 시, 교리, 방언, 계시, 또는 통역을 가지고 왔습니다(26). 먼저 한 형제는 찬송가로 모두를 인도합니다. 곧이어 다른 형제가 기도로 뒤를 잇습니다. 그가 끝나기도 전에 다른 형제가 몇몇 이상한 언어로 기도합니다. 그 때 한 여성이 제 이 언어로 찬양하기 시작합니다. 열정이 확산되며 그것은 곧 많은 라디오가 재생되는 것처럼 들리지만, 모두가 서로 다른 방송입니다. 아마도 고린도 교인들은 “영적으로 활력이 넘친다”는 느낌을 가지고 집회들을 떠났을 것이고, 동시에 방문자들은 두려워하거나 혼란스러워하거나 심지어 이 기독교인들이 어떤 정신과적인 도움을 받을 수 있기를 바라면서 나갔을 것입니다(23절).

 

오늘날 많은 신실한 신자들이 그들의 은사주의적 경험이 영적인 “불 세례”로 느끼며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방문하는 신자들이나 불신자들은 은사주의적 집회들이 약간 두렵고, 무질서하고 혼란스럽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것이 모두 감정적이며 전혀 하나님의 것이 아니라고 주장할 것입니다. 누가 옳을까요?

 

의견이 다를 때, 우리는 “온전히 준비된 마음으로 말씀을 받아들이고 그것들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 기록들을 탐구하므로”(행 17:11) 베레아 사람들처럼 해야 합니다. 한 가지 가장 중요한 원칙은 성령님은 할 수 없는 것이 있으며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에 어긋나게 하는 일을 행하도록 신자를 인도하지 않을 것입니다.

 

방언으로 말하는 이유들

이유 1: 세움

고전 14:1-12에서 바울은 모든 은사들의 사용에 대한 첫 번째 이유를 소개합니다: “교회가 덕 세움을 받게 할 수 있습니다”(5절). 그는 예언(사람들의 언어로 가르쳐진 계시), 방언(외국어로 가르쳐진 계시)과 함께 비교합니다. 전자는 그들의 언어로 말하고 있기 때문에 교회가 세움을 받을 것입니다, 반면에 후자는 비록 그것이 이전에 밝혀지지 않았던 무언가를 신비함으로 말했다고 해도(4절) 그것은 알지 못하는 언어이기 때문에 어떠한 덕 세움의 영향력이 전혀 없을 것입니다. 그런 다음 바울은 고린도의 참여자들의 목소리가 불협화음으로 들리는 것과 달리 피리, 하프와 나팔소리 등의 실례들을 사용합니다. 나팔소리로 군사들에게 보내는 메시지는 명확하게 확인할 수 있어야 했습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고린도인 집회들의 모든 소음 속에서 하나님께서 보낸 메시지들은 사라졌습니다. 바울은 그 다음 모든 인간의 대화들과 모든 언어들이 동등한 가치로 이어지지만 언어 장벽으로 인해 전달될 수 없는 메시지일 때 좌절과 무의미함에 대해 말합니다. 따라서, 그는 참여자들이 무엇을 느끼거나 경험하는 것에 관계없이 “교회의 덕 세우기를 위하여 풍성하기를 구하라”(12절)고 결론짓습니다.

 

이유 2: 이해

고린도 모임에 참여했던 한 신자는 자신이 심지어 무슨 말을 하는지조차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바울은 이 신자가 먼저 통역할 수 있도록 기도를 해야 한다고 말할 정도로 이해를 강조하는(13절) 이유는 말하는 사람조차도 이해할 수 없는 말을 말하는 것은 시간의 낭비이기 때문입니다(14절). 따라서, 참여자가 기도하고 있든지 찬송하고 있든지, 그 자신이 직접 해석을 하거나 주님이 제공하시는 통역자에 의해 통역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목표는 모든 사람들이 동의하고, “아멘!”하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라도 어린 애의 횡설수설하는 소리처럼 들리는 것을 지성적으로 “아멘!”하고 말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바울은 “이해하는 일에는 어른이 될지니라”(20절)며 영적 성숙을 위해 호소합니다.

 

방언으로 말하는 규정

그런 다음 바울은 만일 그것이 성령님으로 인도되는 참여가 되어야 한다면 충족되어야 하는 사항의 목록을 매우 명확하게 제시합니다. 우리는 오늘날 사람들이 방언으로 말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모든 종교 집회들에 이 테스트를 적용할 수 있고 또 적용해야 합니다.

 

첫째, 바울은 “만일 어떤 사람이 알지 못하는 언어로 말하거든 두 사람이나 많아야 세 사람이 순서대로 하고”(27절)라고 말합니다. 통역에 의해 말하는 것은 더 집중을 필요로 하며, 그래서 이해하고 덕 세움에 중점을 두기 위해 참여자의 수를 두 세 명으로 제한하는 것이 첫 번째 지침입니다. 외국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의 메시지나 기도가 많아지면 정말 하나님의 것인지를 의심하게 될 것입니다. 왜 그럴까? 성령님은 이 지침에서 그분의 말씀에 모순되지 않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둘째, 그는 다음 규정을 부정하지 않을 것입니다, “순서대로 하고…”(27절 하). 외국어로 참여는 제한적일 뿐만 아니라 그것들이 있을 때 그들은 교대로 참여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이 한꺼번에 여러 일을 들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계십니다. 하나님이 모임에 진리를 전달하려는 인적 도구들을 선택하실 때, 다양한 사람들을 사용하실 수 있지만 그분은 항상 그들을 한 번에 한 사람씩 사용하십니다.

 

셋째 규정은 “한 사람은 통역할 것이요”(27절 하)입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외국어로 말했기 때문에 무슨 말을 하려는지 모른다면 무엇보다도 그는 자신이 먼저 이해하도록 기도하는 것이었습니다. 만약 그가 개인적으로 그것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면 그는 다른 사람이 그것을 통역할 수 있는지를 확인해야 할 것입니다. 영적으로 주어진 은사들은 결코 사람들이 자신을 통제하지 못하고 그들이 말하는 것을 멈출 수 없도록 성령님을 로봇으로 바꾼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 가르침은 “예언하는 자들의 영이 예언하는 자들에게 제재를 받나니”(32절). 만일 통역하는 자가 없으면 그들은 잠잠하고(28절). 성령님은 통역이 없는 경우 결코 누군가 말할 것을 강요하지 않을 것입니다, 성령님은 이 영감 받은 지침을 결코 어기지 않을 것입니다.

네 번째 제한은 오늘날도 똑같이 중요합니다. 바울은 “너희의 여자들은 잠잠할지니”(34절)라고 썼습니다. 이것은 문화적 규범이나 여성에 대한 모욕이 아닙니다. 여성에 대한 바울은 가르침은 여성들을 고양시키고 그들이 신성하게 주어진 역할에서의 최대의 유용성과 성취를 가능하게 합니다. 성령님은 신약 교회의 공적 섬김에 참여하려는 여성에게 결코 동기 부여를 하지 않으셨는데 왜냐하면 그것은 그분 자신의 말씀에 위배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이 간단한 4가지 요점 목록을 오늘날의 어떤 은사주의 집회에 적용할 수 있다면, 계속되는 위반 사항을 발견할 것입니다. 참여자들은 그것이 얼마나 좋은 기분인지 얼마나 큰 힘을 느끼는지 그것이 얼마나 유익한지를 말할 수 있지만 우리의 책임은 성경적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성령님이 하나님의 말씀에 모순될 수 없다고 확신을 가지면 이러한 경우 우리에게 명확한 분별력을 갖게 됩니다.

 

방언의 결과들

광적인가 확신인가?

바울은 모임의 일반적인 집회들에서 현재 사람들을 교회의 지체들, 불신자들, 아직 사도의 교리를 배우거나 받아들이지 않은 자들의 세가지 범주로 구분했습니다. 모든 모임 집회들에서 우리는 관찰되고 있습니다. 만약 누군가가 거의 이해하지 못하거나 불신자인 사람이 그들이 이해할 수 없는 언어나 소리를 들으면 그들은 어떻게 생각할까요? 그들이 하나님께 확신이 있다고 생각할까요? 바울은 그들이 지역 교회에 있는 신자들이 미쳤다고 생각할 가능성이 더 높다고 경고합니다(23절).

그러나 그들이 자신들의 언어로 말(예언)하거나 방언을 통역하는 것으로 진리를 듣고 이해한다면 모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들은 머리 숙여 예배를 하면서 “진실로 하나님께서 너희 안에 계신다”(25절)라고 말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우리가 추구하는 그 결과는 교회의 참여자들이 정신적으로 안정되어 있는지 혼란스러워하거나 의문을 품는 것이 아니라 죄와 무지에 대한 확신입니다.

 

영광을 돌리는가, 만족하는가?

바울은 그가 곧 알 수 없는 방언으로 일만 마디 말보다 이해할 수 있는 말 다섯 마디가 낫다고 말했습니다(19절). 자신을 위한 자기 만족이거나 하나님과의 교감을 느끼거나 성령님의 권능을 받게 하는 것이 결코 아니었습니다. 그 대신 믿지 않는 혼들, 특히 자신의 유대 민족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한 수단이었습니다(21-22절). 궁극적으로 바울의 갈망은 하나님께서 모임의 신자들이 덕세움을 입고, 불신자들이 구원받고, 그리고 배우지 못한 신자들이 교훈 받는 것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 돌리기를 갈망했습니다.

 

혼란인가 복인가?

모임들은 우리 하나님의 성품을 반영하는 거울과 같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혼란의 창시자가 아니요, 화평의 창시자시니라”(33절), 고린도 모임은 그들의 집회들에서 모든 소란과 무질서로 하나님을 올바르게 나타내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평화의 하나님을 제대로 반영하도록 바울은 “모든 것을 품위 있고 질서 있게 행할지니라”(40절)고 경고합니다.

 

먼저 고린도전서 14장은 동시에 현대 방언 운동을 평가하기 위해 구체적이고 객관적인 기준을 제시합니다. 하나님께서 신성한 기준을 감정이나 경험으로 대체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과 일치하므로 옳은 것에 머리를 숙이도록 참여하는 교회가 되도록 은혜와 용기를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posted by 징검 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