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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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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10. 8. 17:33 말씀 안으로

믿음의 성장을 가져오는 복음의 원리

 

홍동식

주님의 말씀하심을 따라 인도함 받기를 원합니다. 어쩌면 지금부터 나가는 말씀은 여러 성도들이 몇 번 들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기본적으로는 하나님 말씀의 기초에 대해서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어쩌면 폭이 너무 넓어서 정리하기가 너무 어려울지도 모르겠지만 그러나 기본은 복음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구원을 받고 나서 지금까지 지나오면서 구원받았다는 사람이 구원 받음에 걸맞게 성장하는데 많은 장애가 있다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그리고 지금부터 13,4년 전에 어떤 형제님이 저에게 이런 부탁을 했습니다. 그 당시에 교회 진리에 대해서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조직을 만드는 사람들이 활동하는 때였습니다. 어떤 형제님이 저에게 전화를 하여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형제님! 제가 보니까 훈련원이라던가 신학교라던가 그리고 조직 같은 경우에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것은 알겠는데 하나님의 말씀은 뭔지 좀 알려주십시오라는 부탁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이 부탁을 받고 여러 형제들과 접촉을 하면서 기도를 해 왔습니다. 그때가 1999년이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오늘날까지 교회진리에 대한 몇가지 인도함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교회진리에 관한 말씀을 받고도 이 말씀을 지식적으로는 받았지만 실제로는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이런 원리는 교회진리뿐만 아니라 복음에도 동일하게 나타난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왜 그럴까요? 왜 구원의 복음을 받았는데 왜 그 복음에 걸맞게 성장을 하지 못하는 것인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주님 인도하시는대로 여러 모임들을 인도를 받아 뉴욕, 밴쿠버, 샌프란시스코, 일본도 홋카이도로부터 큐슈우까지 40여 모임들에서 교제를 십몇여년 동안에 나누었습니다. 한국뿐 아니라 해외에 나가보아도 동일한 문제를 발견할 수 있었으며 그 문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도 그 말씀을 하나님이 말씀하시는대로 듣지 아니하고 자기 식으로 이해하는 사람이 의외로 많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이 시간에는 복음에 대해서 이런 관점으로 살펴 보고자 합니다. 왜 이런 말씀을 드리는가 하면 이 자리에 계신 분들은 모두 구원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복음에 대한 이해는 성도들마다 다 다르리라고 생각합니다. 이 이유 때문에 성도들이 성장하는데 장애를 입지 않나 생각합니다.

 

이 시간에 로마서를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합니다만 로마서를 보기 전에 우선 복음을 비롯해서 이전시간 형제님의 교회진리의 한 부분이라던가 이런 전체적인 것을 이해하는데 근거는 말할 것도 없이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이와 같이 우리가 한 권의 성경책을 손에 들고 있습니다만 구약은 39권이고 신약은 27권인 것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내용에 대해서도 간단히 요약해서 흐름을 파악하면 두 가지 파트로 나눠지는데 구약은 39권인 것을 다 알고 있으며, 하나는 역사적인 파트이고, 또 하나는 말씀인 예언적인 파트입니다. 역사적인 파트는 대부분이 역사가들이 기록하는 역사의 기록방법 중에 하나로 편년체라고 하는 역사기록 방식이 있습니다. 그 사건이 일어나는 순서를 먼저 기록하고 이어서 일어나는 사건을 기록하는 방식을 말하고 있으며 성경도 한 부분은 그 방식을 따르고 있습니다. 그 부분은 창세기부터 에스더까지가 편년체식 역사 편찬방식으로 기록한 말씀입니다. 그 다음에 에스더 다음에 나오는 욥기부터 말라기까지는 시간 순서가 아니며 때로는 량이 많은 것부터 기록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39권중에 기억하기 좋게끔 역사적인 부분에 해당하는 책이 17, 욥기부터 말라기까지를 다시 둘로 나누면 욥기에서 아가서까지는 시입니다. 언어 중에 가장 해석하기가 어려운 것이 시이며 가장 수준 높은 것도 시입니다. 따라서 찬송은 대부분 시로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시를 구약 성경 가운데 한 가운데 배치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사야부터 말라기까지가 17권입니다. 합해서 역사가 17, 예언서가 17, 중간에 시가 5, 39권입니다. 이 구성을 보면 하나님께서 놀라운 구성을 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역사 즉 창세기에서 에스더까지 역사에 관한 기록을 읽으면 욥기부터 말라기에 들어가는 모든 책들은 창세기부터 에스더의 어딘가에 위치를 가지고 있습니다. 성도들이 이런 위치를 알고 보면 영적으로 훨씬 더 풍요로워질 것이며 앞으로 이러한 것들을 묵상해 보면 좋을 것입니다.

 

또 하나 이 시간과 관련된 중요한 포인트는 역사서 가운데 가장 마지막 부분에 해당하는 부분인 특히 에스라, 느헤미야, 에스더에서 특히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무슨 일을 시키셨고 그 역사의 마지막에는 무엇이 핵심적이었는지를 알게 되면 신약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는데 크게 도움이 됩니다. 말할 것도 없이 에스라와 느헤미야 그리고 에스더가 편년체로 기록되었지만 사실 에스더는 느헤미야의 6,7장 사이에 들어가는 역사이기 때문에 실제적으로는 느헤미야가 역사의 마지막입니다. 결국은 에스라 느헤미야의 성경기록에서 역사 기록으로는 끝나게 되는데 이 기록 속에 어떤 요소가 들어있었겠습니까? 아시는대로 에스라는 성전을 재건하는 일을 맡았습니다. 느헤미야는 성곽을 재건하는 일을 맡았습니다. 놀랍게도 신약에서 하나님의 교회를 설명할 때 몸이 되는 몸된 교회나 지역교회를 일컬어서 성전이라는 용어를 쓰셨다는 것을 마음속에 두면 하나님께서 역사에서 어디에 초점을 두고 운용하셨는가를 알게 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신약도 맨 마지막에 요한계시록이 쓰여졌습니다. 요한계시록은 누구를 위하여 왜 쓰여졌겠습니까? 요한계시록 22:16절에 그 답이 있습니다.

 

나 예수는 교회들을 위하여 내 사자를 보내어 이것들을 너희에게 증거하게 하였노라 나는 다윗의 뿌리요 자손이니 곧 광명한 새벽 별이라 하시더라

이 말씀을 보면 좁게는 요한계시록이 누구를 위해서 왜 쓰여졌는지를 주님께서 분명히 밝히셨습니다. “나 예수는 교회들을 위하여라고 했습니다. 이점이 바로 구약성경이 왜 성전과 성곽 재건으로 끝났는가를 우리에게 말해주는 요소입니다. 성도들이 이것을 알고 복음과 구원을 이해하게 되면 앞으로 내가 어떻게 살고 어디에 초점을 맞추어서 삶을 살아야 하는지를 아는데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구약에서 원래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람을 만드신 목적이 있습니다. 그 목적 가운데 사람 중에 하나님을 위해서 가장 아름다운 열매를 맺은 사람은 아담 이후로 천년왕국이 끝날 즈음에 마지막 사람까지 해서 오직 한 사람 밖에 없습니다. 그 사람이 누구냐 하면 요한복음 15:1에서 볼 수 있는 이 분 밖에 없습니다. “내가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그 농부라에서 1인칭 대명사로 내가라고 말씀하신 주 예수 그리스도 이십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 만이 참 포도나무입니다. 포도나무는 사사기 9:13에 따르면 하나님과 사람을 기쁘게 하는 나무라고 말씀에서 게시하셨습니다. 사실 이런 면에서 모든 사람도 포도나무 중에 하나이지만 참 포도나무는 주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습니다. 왜 그럴까요?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모두 죄가 있기 때문입니다.

 

구원을 받고 나서도 우리의 연약함을 복음을 통해서 구원 받은 것을 알지마는 우리의 연약함과 고집스러움을 우리 스스로가 잘 모르는 것 같습니다. 따라서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축복을 받았어도 우리는 죄 없는 가운데 생활하는 생활을 이해하는 것이 참으로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아담 이후부터 성경이 말하는 전 인류가운데 죄 없는 삶을 경험한 사람은 세 사람 밖에 없는데 한 사람은 아담이고 또 한 사람은 하와이며 또 한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며, 그 외의 사람은 한 사람도 죄 없는 삶을 경험해보지 못했기 때문에 죄를 용서 받아도 죄가 없다는 경험이 항상 부족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아담과 하와는 죄 없는 삶을 잠시 살았지만 죄를 범해 버렸습니다. 그러나 처음부터 끝까지 죄없는 삶을 사신 분은 한 분 밖에 없는데 그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십니. 모든 인류는 예수그리스도를 따라야 되는 이유를 여기서 알게 되는 것입니다.

 

복음을 받고 죄 용서를 받아도 많은 성도들이 죄 용서 받았다는 사실에 대해서 저의 짧은 연륜과 경험을 통해서 보면 대부분이 자기 중심적으로 이해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다른 문화권에 있는 사람들도 그들의 문화에 젖어서 죄 용서를 이해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이런 부분에서 자유로워지겠습니까? 물론 100%는 주님이 공중에 오시는 순간에 변화되어야 될 것입니다. 그러면 그 전에는 우리가 포기를 해야 되는 것입니까? 그것은 아닙니다. 주님은 마태복음 28장 마지막 절에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고 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주님 오시는 순간까지 구원받았기 때문에 말씀의 가르침을 받는 것이 좋습니다. 우리가 말씀의 가르침을 받으면 받을수록 이전에 알던 복음에 대한 이해력이 훨씬 더 높아질 것입니다. 이 복음에 관한 이해력이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개인의 삶의 질이 높아집니다. 개인의 삶의 질이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교회의 진리의 질이 높아집니다. 그런데 교회 진리가 나가도 많은 경우에 이 교회진리를 성경적으로 받지 못하고 자기 식으로 받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러면 어디서부터 출발해야 되겠습니까? 말할 것도 없이 복음으로부터 출발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로마서로 가겠습니다. 로마서 1:1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

1절에 복음이라는 말이 최초로 로마서에서 나옵니다. 로마서에는 복음의 말이 14번 나옵니다. 그 중에 첫번째가 1:1이고, 14번째는 16:25,26 “나의 복음과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함은 영세 전부터 감취었다가 이제는 나타내신 바 되었으며여기서 14번째의 복음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로마서에서 사용되는 14번째의 복음이라는 말을 잘 살펴보면 복음의 말 앞에 수식어가 붙어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첫번째는 하나님의 복음이라고 앞에 하나님 수식어가 있고 14번째 복음은 바울은 분명히 나의 복음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복음에 관한 수식어의 변화입니다. 첫번째는 하나님의 복음에서 마지막에는 나의 복음이라고 언급되어 있는데 왜 이렇게 수식어가 변하였겠습니까? 여러가지 해석이 가능하겠지만 이 시간에 우리가 교제하는 주제와 연결시키면 하나님의 복음이 한 개인의 복음이 되었습니다. 이 복음이 한 개인에게 적용이 되어서 그 개인의 인생을 바꾸었습니다. 따라서 이 복음이 한 개인에게 인격화 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어떤 형제님의 교제에서 말씀을 지킨다고 하는 것은 어떤 의미이냐? 많은 사람들이 교회진리를 지킨다. 하나님의 말씀을 지킨다고 말하지만 말씀을 지킨다는 의미가 무슨 뜻인지를 이렇게 설명해 주셨습니다. 말씀을 지킨다고 하는 것은 그 말씀으로 말미암아 지배를 받는 것이다. 이것이 말씀을 지킨다는 의미이지 말씀을 아는 것을 지킨다고 하는 것은 안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을 주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나는 너를 모른다고 했습니다. 그 사람은 예수님이 주라는 것을 알았지만 그 사람의 삶을 예수님이 지배하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그 사람은 말씀을 지키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즉 복음을 알고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 속에 간직하고 보전하고 지킨다는 말은 복음으로 말미암아 지배를 받는 삶을 의미한다고 보면 틀린 말이 아닙니다. 그러면 로마서에서 왜 하나님의 복음이 나의 복음으로 바뀌었을까요? 사도바울은 복음에 의해서 지배를 받은 사람입니다. 따라서 바울은 거리낌없이 나의 복음이라고 말할 수 있었습니다. 이와 같이 구원받은 성도가 복음을 자기 머리 속으로 이해하는 것과 자기가 중심이 되어 있으면서도 복음에 대해서 동경하고 복음에 대해 마치 자기를 양보하는 양 하는 이런 태도는 로마서가 전하는 복음의 의미가 아닙니다.

 

로마서 1:15그러므로 나는 할 수 있는 대로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제가 구원 받은 직후부터 여러 선배 형제님들로부터 이 말씀에 대한 여러 설명을 들었습니다. 대부분 형제님들이 이 말씀을 설명할 때 하시는 말씀들이 왜 로마에 있는 성도들에게 복음을 전할 필요가 있는가? 복음은 믿지 않는 자들에게 전하는 것이지 왜 바울이 믿는 자들에게 복음을 전할 필요가 있는가?’라는 질문을 하면서 설명을 해 주시는 것을 들었습니다. 오랜 시간이 지난 다음에 형제님들의 말씀을 통해 이 말씀을 보고 묵상해 볼 때 이유가 있었습니다. 바울은 로마에 있는 성도들에게 다른 지역에서처럼 로마에 있는 성도들이 열매를 맺기를 바랬다고 1장에서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들에게 바울은 빌립보서 1장에서는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복음에 걸맞은 열매가 그 사람에게서 나오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따라서 복음을 갖고 있지만 이 자리에 있는 여러 성도들이 대부분 동의하리라고 생각합니다. 복음에 관한 이해를 하나님의 말씀이 복음을 말하는 것보다도 내가 이해하는 복음을 통해서 사는 사람이 많지 않나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구원받은 성도들이 구원받지 않았다는 말이 아닙니다. 복음을 모른다는 말이 아니라 성경이 말하는 이해력이 높아지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 말을 하기 위해 로마서를 기록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로마서를 천천히 읽고 사도 바울의 복음 안에 해설을 들으면 이미 구원은 받았지만 자기가 구원받은 원리를 자신이 지금까지 알고 있는 것 보다 훨씬 더 성경이 말하는 대로 근접하게 이해하게 될 것이며 이로 말미암아 구원받은 성도들은 복음에 합당하게 삶을 사는데 합당하게 변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것과 또 한가지 강조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으로 말미암아 로마서가 말하는대로 복음을 받아들이고 구원을 받았습니다. 구원을 받는 것은 정말 놀라운 일이고 이 세상에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에베소서 2:8을 이런 관점에서 되짚어 보고 주님 은혜를 한 번 더 생각해 봅시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구원은 분명히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구원받은 자체를 자랑하지 말라는 의미라기보다도 구원이 선물이기 때문에 선물이 아닌 것처럼 자랑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선물을 자랑하는 것은 가능하지만 선물이 아닌 것처럼 자랑하게 되면 문제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말씀을 자세히 살펴보면 혹시 구원받은 사람이 소홀하게 여길 수 있는 가능성이 무엇이냐 하면 구원은 내가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고, 또 어디서 뺏어 오는 것도 아니고 구원은 얻는 것입니다. 구원을 얻는다면 명백하게 이 말씀이 증거하는 포인트 중에 하나는 구원을 얻도록 구원을 주시는 분이 있습니다. 그런데 많은 구원받은 성도들이 대화를 나눠보면 구원받은 것을 자랑하지만 많은 경우에 구원을 주신 그분을 소홀히 하는 것을 많이 보게 됩니다. 그러면 구원 받은 이후에 왜 성장이 없는가 하는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여기에 원인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구원 자체를 구원해 주신 분 보다도 더 소중히 하는 구조적인 모순에 빠졌다고 생각합니다. 구원은 감사함으로 받고 구원을 주신 분은 거들떠 보지도 않는 사람이 많다는 것을 봅니다. 왜 말씀을 순종하지 않고 말씀에 관심이 없는가를 보니까 구원에 대해서 첫째는 구원에 대한 지식만 듣고 구원을 안 받는 사람도 있고 구원은 받았지만 구원하신 분을 소홀히 하는 영혼들이 많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만약에 구원 받은 사람이 구원 자체보다도 구원하신 그분을 더 소중히 생각하게 된다면 그 사람의 삶은 100% 바뀌게 되어 있습니다. 어떻게 바뀌게 되겠습니까?

 

베드로전서 1:8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사도 베드로는 흩어져 있는 유대인 성도들에게 특히 환난 가운데 있는 성도들에게 구원받자마자 생득적으로 갖고 있는 구원받은 사람의 기본적인 특성을 알려 주었습니다.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구원을 받은 사람은 자기를 구원하신 구원의 주를 보지 못했지만 사랑한다는 사실을 알려 주었습니다. 이것을 가르쳐 주지 않아도 구원받은 사람은 예수님을 사랑하게 되어 있습니다. 마치 불순종의 자녀들은 순종의 자녀에 대비되는 말이기 때문에 불순종의 자녀에게 아무리 순종을 가르쳐도 그 사람들은 순종을 할 수도 없고 순종을 흉내 낼지라도 순종을 기뻐하지 않습니다. 그 사람들은 생득적으로 불순종을 성질로 갖고 있습니다. 그들의 본성은 불순종입니다. 그래서 불순종이 자연스럽고 순종이 어색한 것입니다. 이것이 믿기 전에 상태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을 종교인을 만들어 놓으면 원래 그들의 본성은 불순종이 자연스러운데도 불구하고 순종을 흉내 내니까 힘들 것입니다. 반대로 믿는 사람들을 바울은 분명히 순종의 자녀라고 말했습니다. 성도들 스스로 생각해 보십시오. 순종하는 것이 즐겁습니까? 고통스럽습니까? 고통스러우면 사실 문제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거듭난 사람은 순종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순종의 자녀에게는 가감 없이 순종에 관한 말씀을 하는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 형제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언제까지 교정만 하겠는가. 바울이 명령을 했다고 했습니다. 왜 명령을 하는 것입니까? 순종의 자녀이기 때문에 명령에 따른다는 정의에서 하는 것입니다. 불순종의 자녀에게 명령은 안 통하는 것입니다. 순종하기 때문에 명령이 통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구원받은 성도는 생득적으로, 즉 영적으로 출생하자 마자 아무도 가르치지 않았지만 그 사람은 순종하는 마음을 갖고 있습니다. 그리고 베드로전서 1:8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보지 못했지만 사랑하게 되어 있는 것이지요. 이것을 살리는 것입니다. 만약에 베드로가 전한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보지 못했지만 사랑한다는 것은 무슨 뜻이겠습니까?

 

사도 요한은 요한복음 14:23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구원받은 성도들이 구원의 복음을 받고 나서 교회진리를 왜 알아야 하고 왜 순종해야 할까요? 교회진리를 순종하지 않으면 하나님께 징계나 벌을 받기 때문입니까? 그 동기가 무엇입니까? 무엇 때문에 교회진리를 추구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추구합니까? 그 동기는 예수님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성도들이 지금부터 생각해 보면 참으로 유익할 것입니다. 나는 정말 구원을 받았는데 나는 나를 구원하신 그분하고 나의 구원하고 어느 쪽에 내가 무게를 두고 있나를 생각해 보십시오. 만약에 중요도를 내가 판단하건대 구원하신 분을 무시하거나 소홀히 하고 구원자체만 소중히 생각한다면 그 사람은 균형이 올바르지 않습니다. 그분은 자라는데 상당한 장애를 가질 것입니다. 대부분의 경우에 복음에 합당한 생활을 못하는 이유는 바로 복음 자체 중에서 복음의 핵심이 주님과 그리고 주님께서 구원하신 구원하고의 관계에서 주님 쪽에 무게를 덜 두기 때문이라고 보면 거의 맞을 것입니다. 이것 하나만 해결되면 그 성도는 이제부터 하나님의 말씀에 관심을 갖게 될 것이며 그리고 진리에 대해서도 주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추구하게 될 것이며 요한복음 15장처럼 하나님이 원하시는 열매를 맺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요한복음 15장에 나오는 그 열매는 무엇이겠습니까? 포도의 열매는 조금 전에 말씀드린대로 사사기 9:13 말씀처럼 하나님과 사람을 기쁘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왜 참포도나무입니까?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 아버지를 기쁘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를 지시기 전부터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를 기쁘시게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침례요한에게 침례를 받고 물에서 올라올 때 하나님께서는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그 순간까지 예수 그리스도는 열매를 맺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십자가라고 하는 더 큰 열매를 맺기 위해서 나아가셨던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하나님 아버지를 순종하는 동기가 무엇입니까? 하나님 아버지를 사랑하기 때문이라는 것이지요. 왜 우리가 진리를 추구합니까? 세상 사람들이 진리를 무시하기 때문입니까? 교파가 진리를 거부하기 때문입니까? 채플 사람들이 진리를 거부하기 때문입니까? 그것 때문에 진리를 추구한다면 얼마 못 가서 쓰러질 것입니다. 왜 진리를 추구합니까? 예수님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진리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8장 마지막에서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이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이 이렇게 두껍지만 조금도 짐으로 생각하지 않는 것이 정상입니다.

 

매키온 형제님이 이러한 교제를 하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구원받고 하나님의 말씀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전제하신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말씀의 양()이 너무 많다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비유로 설명해 주셨는데 살아있는 새에게 두 날개는 절대로 그 새에게 짐이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처럼 정말로 예수님을 사랑하는 구원받은 자는 하나님의 명령과 말씀이 절대로 짐이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만약에 말씀이 짐이 된다면 그 사람은 정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하나님 아버지를 사랑해서 십자가를 지시고 말씀을 순종했던 것처럼 구원받은 성도들은 이 점을 스스로 점검해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앞으로 아무리 좋은 말씀이 나올지라도 이 점에 기초가 확보가 안되면 오래 못 갈 것입니다. 복음도 그렇고 교회진리도 그렇고또 복음을 주님께서 전하라고 명령하신 것을 전하고자 하는데 게으른 생각이 들고 귀찮은 생각이 들고 자기 중심적인 생각을 하는 이유가 어디 있겠습니까? 구원은 가져가지만 구원하신 분을 놓치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만약에 구원받은 사람이 구원하신 분을 정말로 사랑한다면 성경에 아무리 말씀이 많아도 그 많은 말씀은 그 성도에게 축복일 것입니다. 참고로 말씀드리면 오래되신 형제님들과 교제를 해보니까 제가 아는 분 가운데 구원 받은지 60여년이 넘으신 분들이 있습니다. 이분들과 교제하면서 느낀 것이 있습니다. 60년을 성경을 공부해도 계속 성경을 공부하고자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만약에 이 세상에 공부처럼 어느 정도 과정을 마치면 졸업을 하게 된다면 사람들은 성경을 빨리 떼고 싶을 것입니다. 아마 빨리 성경공부를 떼고 싶은 그런 분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그러나 조심하기 바랍니다. 성경은 평생 공부해도 하나님께서는 졸업장을 안 주십니다. 평생이 아니라 영원히 묵상해야 될 내용입니다. 아마 졸업장을 생각하고 공부하는 사람들이 생각할 때 지겹다고 생각할 것인데 그 점이 문제인 것입니다.

 

주님께서 말씀을 이렇게 많이 주신 것은 이 말씀에 열중되어 있으면 어떤 좋은 일이 있는가 하면 우리는 죄없는 삶을 한 번도 살아본 적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구원을 받아도 죄성에 젖어 있던 습관 때문에 죄에 관한 부분에 유혹될 가능성이 참으로 높습니다. 어떻게 죄를 범할 성질을 가진 존재인데 죄를 범하지 않겠는가 입니다. 주님은 아무리 죄가 유혹해도 죄를 범할 수가 없으신 분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다르게 죄에게 노출되면 당장 넘어질 수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죄를 범하지 않을 기회를 타겠습니까? 그 중에 가장 모범적인 사람이 사도 바울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의 삶을 보면 자신의 삶이 죄성이 있다고 고백을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 바울은 죄를 범한 기록이 성경에 없습니다. 출교받은 적도 없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가능했을까요?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말씀에 바빴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공부하는데 사실 바빴습니다. 제가 아는 어느 형제님의 일상 가운데 말씀을 연구하는데 시간을 거의 보내시는 분들이 계십니다. 이런 분들의 특징이 뭐냐 하면 죄를 범할 가능성이 없는 것이 아니라 아주 낮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주님을 사랑하게 되면 요한복음 14:23 말씀처럼 주님의 말씀을 지키게 되는 것입니다. 이 지키는 말씀을 새의 두 날개처럼 이것을 쓰면 쓸수록 그 성도는 힘이 더해질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가나안 땅으로 들이실 때에 신명기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독수리가 그 보금자리를 어지럽힘 같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독수리가 보통 절벽에다가 둥지를 틀고 알을 낳고 부화시켜 새끼를 기르는데 날개가 돋을 무렵 날개의 근육이 생겼다고 어미가 판단하면 새끼를 날도록 정보를 주는데 새끼는 한 번도 날아본 경험이 없어 힘이 있는데도 사용하지 않기에 그래서 독수리는 둥지를 없애버립니다. 실제 기록을 보니까 독수리가 둥지의 나무를 모두 버린 다음에 발로 새끼를 절벽 아래로 차버린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새끼는 죽는 줄 알고 날개를 퍼덕입니다. 이때부터 자기에게 주어진 능력을 인지하고 날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때때로 우리에게 이와 같은 일을 하실 것입니다. 이 때를 잘 생각하십시오. 독수리 어미가 그 새끼가 못 날 때는 절대로 발로 차지 않습니다. 어미가 새끼가 날수 있다는 것을 인지하게 될 때 어미는 그 둥지를 없애고 발로 새끼를 절벽 아래로 차는 것입니다. 그러면 새끼는 처음에는 떨어지지만 그러나 죽지 않으려고 날개를 퍼덕여 보니까 날개가 기동을 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주님께서도 성도들로 하여금 주어진 생명을 인지시키기 위해서 때로는 둥지에서 밑으로 떨어트릴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주님의 사랑이 들어있고 주님이 주신 생명을 경험하라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점을 마음 속에 생각하면서 인도하심을 받으면 큰 축복이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구원받은 성도들의 문제는 여러 모임들의 성도들과 상담을 해보면 한가지 성도들의 특징이 발견됩니다. 개인의 삶이나 모임의 생활에 대해서 감사하는 성도들보다 불만을 말하는 성도가 점점 더 많아진다는 사실입니다. 어떤 다른 모임에 가면 자기가 속해 있는 모임의 장로에게 상담 못하는 불만을 상담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분들을 판단하지는 않습니다만 한가지 관찰되는 것입니다. 성도의 마음 속에 감사가 구원받은 순간부터 많아지기는커녕 점점 더 감사가 줄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보고 들은 통계에 의한 것입니다. 다 그렇지 않을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런 광경을 보면서 주님께 기도했습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집니까? 구원받은 햇수가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사도바울은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고 했는데 또 감사가 넘치게 하라고 했는데 감사가 넘치게 하라는 말은 성도의 귀에 더 이상 들어오지 않는 것처럼 보입니다. 시간만 있으면 불만을 말하고 싶은 좋지 않은 이러한 마음이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왜 그런 것일까요?

 

로마서를 보면서 한가지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로마서가 기록된 이유와도 연관된 부분인데 누가복음 7:47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저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저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이 말씀을 보면서 한 가지 원리가 파악이 되었습니다. 구원받은 성도들이 구원받은 이후에 두 부류로 나뉘어지는 것으로 보입니다. 어떤 성도는 구원받은 후에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주님께 나가는 관심이 적어지는 것 같은 사람이 보입니다. 이것을 이렇게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구원받은 순간부터 이후에 시간이 지날수록 감사가 많아지고 커지는 성도가 있는 반면에 감사가 적어지는 성도가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느 쪽입니까? 사실은 중간은 없으며 감사가 늘어나거나 아니면 감사가 줄어들거나. 누가복음 7:47 말씀에 따르면 감사 즉 사랑하는 양이 많아지는 것과 적어지는 관계를 주님께서는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사도 바울이 로마서를 설명해 갈 때 1장에서 5장까지는 대략적으로 하나님의 의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6~11장까지는 구원받은 사람들이 하나님께로부터 어떻게 은혜를 입었는가를 이스라엘을 포함해서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12장부터는 구원받은 사람의 실제적인 삶을 다루고 있습니다. 이 전체적인 흐름 가운데서 사도 바울은 1 1~17절까지를 서론적으로 놓고 18절부터 본격적으로 복음을 해설해 들어가기 시작합니다. 사도 바울이 복음을 해설할 때 가장 먼저 언급한 것은 18절에서 마지막 절까지를 보면 죄를 다루고 있습니다. 어떤 분은 1장은 이방인의 죄고 2장은 유대인의 죄이며 3장은 유대인과 이방인을 합친 죄를 지적했다고 표현합니다. 이 말도 틀린 말은 아니지만 오늘 우리가 교제하는 주제와 연결시키면 왜 사도바울은 1장에서 죄를 다루었느냐 하는 것입니다. 물론 복음이기 때문에 다루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구원받은 성도에게 복음을 해설할 때 1 18절에서 마지막 절까지 죄를 다룬 이유는 누가복음 7:47과 관련이 있다고 보면 거의 맞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죄를 사함받아도 사함 받은 크기가 얼마나 되는지 혹시 생각해 본 적이 있습니까? 그리고 이 근거를 어디서 찾은 적이 있습니까? 사도 바울은 이 점을 로마에 있는 성도들에게 맨 먼저 복음을 해설 할 때 든 것입니다. 성경 전체를 놓고 볼 때 이렇게 말씀할 수 있는 것이지요. 물론 바울은 로마에 있는 성도들에게 우리라고 말하며 믿지 않는 자와 비교했지만 그 속에는 우리도 믿기 전에는 죄인이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바울 자신의 생애 가운데서 바울이 어떻게 죄의 크기를 인식했는가를 보게 되면 우리도 그와 같이 생각을 할 수가 있고 바울처럼 감사가 시간이 갈수록 넘치는 사람으로 변할 것입니다. 이런 성도가 그 지역 모임에 한 사람이라도 더 많으면 그 모임은 주님을 나타내는데 아주 유익함이 될 것입니다.

 

첫번째로 사도 바울이 고린도전서 15:9나는 사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라 내가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을 받기에 감당치 못할 자로라사도는 부활을 증거하면서 자신이 주님의 부활하심을 본 맨 마지막 사람인 것을 증거한 다음에 9절에 와서 자신을 사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라고 평가하고 자신을 낮추었습니다. 이 광경을 보면 바울은 사도 중에 자기가 가장 작다고 여겼음을 알 수 있습니다. 얼른 들으면 바울이 자기를 위선적으로 인위적으로 자신을 낮추어서 겸손하게 보이려고 하지 않았나 생각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그러나 나머지 성경들을 보면 바울이 그런 자가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왜 바울이 사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라고 자기를 낮추었겠습니까? 그 이유는 뒤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을 받기에 감당치 못할 자로라바울은 자기 죄를 생각한 것입니다. 그것도 단순한 도덕적인 죄를 넘어서는 믿기 전의 죄였지만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한 사실을 떠올렸습니다. 교회진리를 알림 받은 바울로서는 대단히 충격적이었을 것입니다. 자기가 믿기 전에 얼마나 큰 죄를 지었는가를 이 광경을 통해서 드러낸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는 사도라 칭함을 받기에 감당치 못한다고 말할 뿐만 아니라 사도 중에서는 지극히 작다고 여겼습니다. 이것을 잘 보면 사도 바울은 자기를 비교할 때 고린도전서 15장 단계에서는 어디까지나 사도라는 범위에서 자신을 제일 아래에 놓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사도는 하나님의 교회를 세워야 될 사람인데 이 교회를 핍박했기 때문에 자신은 자격이 없었다는 말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자기의 죄가 너무 컸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에베소서 3:8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에게 이 은혜를 주신 것은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을 이방인에게 전하게 하시고고린도전서 15장에 비하면 훨씬 더 생각의 폭이 넓어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상황변화는 에베소서는 바울이 로마에서 죄수로 갇혀 있을 때 기록했습니다. 환경적으로는 고린도전서를 쓸 시절이 훨씬 자유로웠습니다. 그러나 에베소서를 쓸 때에는 이미 자유의 몸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에베소서 어디를 보아도 갇혔다는 말은 있지만 자유롭다는 말은 없습니다. 그렇지만 조금도 불만을 찾을 수 없습니다. 오히려 감사가 넘치는 것을 보게 되고 때때로 예배가 넘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왜 이렇게 변했을까요? 여러가지 관점이 있습니다. 그 중에 본 받을 한 관점 즉 우리가 구원을 받았어도 우리의 죄의 크기가 얼마나 컸는가를 심각하게 고민한 적이 없거나 있다 할지라도 주님께서 말씀하신 양() 만큼이 아니었을 가능성이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고 말했습니다. 오늘 이 시간에 저는 이 점에서 바울을 본받기를 원합니다. 즉 바울이 자기의 죄 용서가 얼마나 큰가를 시간이 지나면서 더욱 깨달아서 그 다음에 낮아졌습니다. 모임에서도 많은 문제가 교만이 문제가 되어 있습니다. 교회진리가 나와도 교만이 문제가 되는 것을 보며, 복음에서도 교만이 문제입니다. 왜 낮아지지 않을까요? 왜 자꾸 교만해지려고 할까요? 자기를 모르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우리 스스로가 죄용서 받은 그 크기를 혹시 잘 생각하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요? 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을 쓸 때에는 사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라고 자기를 낮추었습니다. 이것은 바울에게는 절대로 위선이 아니었습니다. 바울은 주님과의 교제를 통해서 자신을 알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에베소서는 상황이 더욱 나빠져서 로마에 죄수로 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8절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에게바울은 여기서 몸된 교회를 생각했기 때문에 교회에 속하지 않은 구약의 성도들도 생각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앞 뒤를 보면 몸된 교회를 통해서 구약에 속한 성도들, 7년 환난 중에 구원받는 성도들, 천년왕국에 잇는 성도들을 포함해서 교회를 바라보고 바울은 묵상했기 때문에 바울의 머리 속에는 몸된 교회에 속한 성도뿐만이 아니고 모든 성도가 바울의 머릿속에 떠올랐다고 생각합니다. 다른 말로 말하면 아담때부터 천년왕국 때에까지 속하는 교회에 속하지 않는 모든 성도들까지 교회에 속한 모든 성도를 다 포함해서 생각한 가운데 바울은 말하기를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다고 자신은 말했습니다. 어떻게 이 말이 가능했을까요? 바울은 이 말을 생각할 때 이미 1장에서 죄용서를 언급했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바울 자신이 죄용서함을 받은 죄의 크기를 생각했음에 틀림이 없을 것입니다. 바울이 이와 같이 겸손할 수 있었던 것은 자기가 얼마나 큰 죄인인가를 알았던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5장에서는 사도들을 다 떠올린 가운데 사도들 중에는 자기 죄가 제일 많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따라서 가장 작은 자로 내려갔습니다. 그 다음에 바울은 로마 죄수 신분에서 감옥에서 주님과의 깊은 교제를 나누면서 하나님의 전 경륜을 계시 받았습니다. 그리고 머리 속에 떠올렸습니다. 아담 때부터 시작해서 쳔년왕국이 끝날 때까지 인정되는 마지막 성도까지 생각하면서 그 중에 가장 작은 성도를 떠올리면서 자신은 그보다 더 아래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바울이 자기의 죄가 그만큼 크다는 것은 인지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형을 당하기 바로 직전 서신이 디모데전서입니다. 디모데전후서를 기록하고 얼마 있다가 바울은 사형당한 것으로 역사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특히 디모데후서를 기록할 때는 바울의 사형 판결이 이미 내려졌고 행정 집정관이 바울을 사형하기 위해서 이미 거리를 나섰다는 소문을 들은 이후라고 합니다. 디모데전서 1:15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디모데전서는 에베소서보다 나중에 쓰여졌습니다. 에베소서는 고린도전서보다 나중에 쓰여졌습니다. 바울은 디모데전서를 쓸 때 에베소서보다 더 바울의 마음은 낮아지고 겸손해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바울은 자기의 죄의 크기를 주님께로부터 다시 한 번 계시 받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고린도전서에서는 사도를 중심으로 생각을 했고, 에베소서에서는 성도들 중심으로 바울이 생각했습니다. 이번에 디모데전서에서는 바울은 창세기 2장의 아담부터 시작해서 천년왕국이 끝나고 흰보좌 심판이 개설되기 직전까지 살아있을 수많은 죄인들을 머리 속에 떠올린 다음에 바울은 자기가 그 중에 가장 큰 죄인이라고 자신을 자리매김했습니다. 이것은 다른 말로 하면 바울이 죄용서에 대한 크기를 가졌다는 것을 말합니다. 따라서 바울은 이 죄의 크기를 생각하는 것과 비례해서 주님에 대한 사랑과 감사는 커졌던 것입니다. 다른 말로 말하면 겸손해졌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이것이 바울의 성장의 배경입니다. 바울이 로마서를 쓴 것입니다. 바울이 로마서를 쓸 때 1:18에서 마지막절까지 죄를 다루었는데 이 죄는 구원받은 자들로 하여금 자신이 얼마나 큰 죄인인가를 생각하게 만드는 출발점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죄에 대한 크기를 생각하면서 주님에 대한 사랑의 크기를 가늠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히브리서 10장에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저희 허물과 죄를 기억지 않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을 어떤 형제님이 재미있는 설명을 붙였습니다. 이 말을 보고 많은 사람들이 내 죄를 주님이 잊어버렸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이 형제님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잘 기억하십시오. 내가 너희 죄를 기억하지 않겠다고 말했지 죄를 잊었다고 말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십자가의 사랑의 크기는 죄용서의 크기와 비례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이 왜 나를 본받으라고 하는지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이 바울을 본 받아서 내가 사함 받은 죄의 크기를 시간이 갈수록 점점 더 바울처럼 깨달아 나간다면 우리 가운데는 주님이 높아질 것입니다. 그리고 구원받은 년수가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그 성도는 겸손해 지리라 생각합니다. 그 가운데서 복음이 전파될 때 주님이 영광을 받으실 것입니다. 그 가운데서 교회진리가 전파될 때 교회진리는 빛같이 드러나리라 생각합니다. 이점을 생각하면서 주님께서 영광을 받으실 수 있도록 인도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2013년 10월 3 노원모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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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징검 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