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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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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2. 3. 10:30 횃불/1996년

믿는다란 무슨 말인가

O.J 스미스

요한복음 3 14절에서 18절까지, 그리고 36절을 주의하여 읽어보겠습니다. 특히 이 구절들에서 여러번 나오는 '믿으라'는 단어를 조심하여 보시기를 바랍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함으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요한복음 3:14~18).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아들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요한복음 3:36).

저는 과거에 내가 구원을 받았는지 아직도 잃어버린 자인지를 분명히 알지 못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저는 어떤 회사에 취직하여 말하던 때를 기억합니다. 그 회사의 복도를 걸어갈 때 저는 제가 들고 가던 결재 서류에 관심을 두고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저는 제 자신을 향하여 한 질문만을 되풀이하고 있었습니다. “나는 구원 받았는가? 그렇지 않으면 나는 잃어버린 자인가?” 얼마 후에 저는 그 회사를 그만 뒀고, 한 관광지에서 일할 매에도 주위의 아름다운 경치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었습니다. 오직 한가지, 예전과 같은 질문만 되풀이하고 있었습니다. “주여! 나는 구원을 받았습니까? 그렇지 않으면 잃어버린 자입니까? 만일 제가 잃어버린 자라면 그것을 알게 하소서. 그래야 내가 구원받겠나이다. 만일 내가 구원을 받았으면 당 신의 구원을 찬양하도록 그것을 알게 하소서!” 그러나 여름이 다 지나고 그곳에서의 일도 끝나고 집으로 돌아올 때 아직도 저는 제가 하늘로 가고 있는지, 지옥을 향하여 가고 있는지를 모르고 있었습니다.

제가 집에 돌아온 후 첫주일에 저는 가까운 교회에 참석했습니다. 구원받는 신앙에 관해 설교하였기에 저는 문제가 해결되기를 기도하고 온 정신을 집중하여 설교를 들었으나 설교가 끝난 후 저는 다른 많은 사람들처럼 제가 구원받았는지 아닌지를 아직도 모른채 어두운 밤 거리로 나섰습니다.

왜 그랬겠습니까? 목사님이 복음에 대한 설교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그는 복음적인 설교를 했습니다. 그는 여러번 주 예수를 믿으라, 네가 구원을 얻으리라라고 외쳤습니다. 그러면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그는 설교하는 도중에 믿는다라는 말의 뜻이 무엇인지를 설명하는 일이 한번도 없었는데 그것이 저의 문제거리였습니다. 저는 믿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어떻게 믿어야 할지를 모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지금 생각하면 저는 언제나 믿고 있는 것만큼 믿고 있었던 것이 사실이었습니다. 저는 어린 아이 때부터 지금까지 믿고 있었지만 제가 구원받은 신자인지 아닌지를 모르고 있었습니다. 

제가 살고 있던 고장에는 무신론자나 불가지론자나 회의론자들이 없었습니다. 이단자에 관하여는 들어본 적도 없습니다. 모두 믿었습니다. 의심하는 사람이 없습니다마는 제 주위에 살고 있었던 사람 중에는 주정뱅이도 있었고 함부로 욕을 하는 사람들도 있었는데 그들은 자신들이 기독교인이라고 하지는 않았지만 그들도 믿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에 대하여 반대하는 사람이란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이와 같은 사람이 수백만명이나 있지 않습니까? 저는 이러한 종류의 사람들을 저는 어느 곳에서나 볼 수 있었습니다. 믿기는 하지만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의 수가 실로 수백만에 달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만일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그들이 그리스도인이 아니라면 믿는다란 말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마침내 저는 어느날 '구원의 안전 확신 기쁨'이란 소책자를 읽게 되었는데 나의 의심은 사라져버렸습니다. 저는 구원에 대한 확신을 얻었고 그날부터 지금까지 저는 그 어떤 의심이라도 하여본 적이 없습니다. 그날 바로 그 자리에서 저는 결심하였고, 그 이후로 저는 전도 집회의 하루는 '믿는다'라는 의미를 설명합니다. 지금으로부터 제가 그 부분에 관해 자세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세가지 단계

구원하는 신앙에는 세가지 단계가 있습니다. 처음 두 단계는 구원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셋째 단계가 구원할 것입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당신이 처음 두 계단을 통과하지 않고는 셋째 계단을 디딜 수 없습니다.

 

'들으라

첫 단계는 단순한 단어인 들으라는 표현으로 설명하고자 합니다. “그들이 듣지 않으면 어찌 믿으리오?” 하나님의 구원에 대하여 믿어지기 전에 그것에 관한 지식이 필요합니다. 그것이 우리가 중국, 아프리카, 인도 등지에 선교사들을 파송하는 이유입니다. 이방인들이 믿게 되기 전에 먼저 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첫 단계에 오래 서 있을 필요가 없으리라고 봅니다. 여러분들은 하나님의 구원의 소식에 대하여 여러번 들으셨을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따라서 여러분은 첫 계단을 지났습니다.

 

믿으라

저는 둘째 단계를 단순한 단어인 믿으라는 표현으로 설명하고자 합니다.  그러나 저는 이 단어를 우리가 오늘날 쓰는 것과 같은 의미로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그리스도가 세상에 계실 때에 쓰여지던 것과 같은 의미로 말하고자 합니다. 왜냐하면 믿는다라는 낱말의 뜻이 많이 변질되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믿는다라는 단어는 어떤 진리에 대한 지적인 긍정만을 의미할 뿐입니다. 여러분이 어떤 진리에 대하여 지적인 동의를 표시하였다고 하면 여러분은 믿는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둘째 단계에 이른 것입니다. 

여러분이 알아야 할 것은 오늘날 믿는다라는 단어가 지적 내지 지식에 관련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여러분이 예수에 관하여 믿고 싶은 바를 다 알아서 그것을 모두 믿어도 구원받지 못할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이 제가 성경에 관하여 믿는 모든 것을 동일하게 믿어도 영원히 멸망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런 믿음은 마귀들의 믿음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명백히 지적하기를 마귀들도 믿고 떤다고 하였습니다. 그들은 아마도 여러분이 예수에 관하여 믿는 것보다 더 믿을 지도 모릅니다. 마귀들은 치수의 신성을 추호도 의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신앙은 순전히 지적인 것입니다. 그 믿음이 그들의 생활을 변화시키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멸망은 확실하며 따라서 그들은 떠는 것입니다.

저는 언제가 어떤 교회를 알게 되었는데 그들이 교인들을 어떻게 영접하는지 알고 싶었습니다. 저는 그들이 하나의 질문만을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는데, 그 질문이란 이러하였습니다. “당신은 하나님이 당신을 위하여 죽었다는 것을 믿습니까?” 누구든지 이 질문에 긍정적인 대답을 한다면 그들은 그 교회에 속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을 믿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성경을 믿는 사람이면 누구든지 그 사실을 믿는 것입니다. 더구나 그리스도가 인류를 위하여 죽었다는 것을 누가 믿지 않겠습니까? 성경에 이 사실이 기록되어 있으며 여러분이 성경을 믿으신다면 그분이 여러분을 위하여 죽었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여러분을 신자되게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이 여러분의 생활을 변화시키지 않습니다. 이러한 종류의 신앙은 순전히 지적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아닌 사람들 중에도 수천 수만의 사람들이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죽음에 관하여 믿고 있습니다. 이런 상태에 있는 사람은 구원받은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지적인 믿음에는 이르렀지만 세번째 단계에 이르지 못한 것입니다. 

 

의지하라

구원을 얻게 하는 세번째 단계를 저는 의지하라는 단어로 표현하고자 합니다. 그러면 이 의지하라는 말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첫째, 그것은 노력을 제외합니다. 여러분들 중에 물에 뜨는 법을 다른 사람에게서 배운 분이 계십니까? 여러분은 지금 수영장에서 선생님으로부터 수영하는 업을 배우고 있다고 합시다. 그는 말하기를 물은 당신을 올려 바칠 수 있습니다. 당신이 할 일이란 물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자 이제 물에 뛰어들어서 떠 보십시오!” 이 말을 듣고 여러분은 물에 뛰어들었습니다. 그런데 뜨기는 떴는데 몸이 바닥에 내려갔습니다. 선생님은 다시 설명할 것입니다. “왜 근육을 긴장시킵니까? 왜 호흡을 멈춥니까? 물을 의지 못하겠습니까? 해군 함정도 그 위에 떠 있는데 당신쯤은 문제가 안됩니다!” 이 말을 듣고 마음을 가다듬은 여러분은 다시 물속에 뛰어듭니다. 또 긴장해서 숨을 막고 근육이 수축되더니 바닥으로 내려갔습니다. 선생님은 같은 말로 주의를 반복합니다. 이번에는 여러분의 그 어떤 노력도 없이 그저 물에다 몸을 내맡기면서 뛰어들었습니다. 그랬더니 여러분은 물 위에 등등 뜬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이 구원의 바다에 뜨는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의 노력을 내어 던지십시오! 몸부림치는 것을 그만 두십시오! 자기 힘으로 자신을 도우려고 하지 마십시오! 그저 의지하십시오! 의지한다는 말은 노력을 제외한다는 것임을 저는 강조합니다. 여러분 자신의 노력으로 하는 한, 여러분은 의지하지 않는 것입니다. 

둘째, 의지한다는 말은 부탁한다는 뜻입니다. 저는 이것의 가장 적절한 예는 결혼식이라고 생각합니다. 여기 한 젊은 남녀가 있다고 생각합시다 왜 오랜동안 그들은 서로 사귀고 있습니다. 이 청년 이 그 여자에게 여러가지 약속을 하였으며 그녀는 그의 말을 모두 믿었습니다.  그러던 중 그의 친구가 와서 물었습니다.

우리가 듣자하니 그 사람이 집을 사 주겠다고 했다면서?”

! 그래

뭐 먹을 것, 입을 것을 다 약속하였다지? 그래 너 지금 그 집에서 사니?”

물론 아니지 나는 아직 부모님과 같이 있어.”

이 말을 듣고 친구들은 물었습니다.  그래도 너는 그 사람을 믿는단 말이지?”

물론, 나는 그의 모든 약속을 믿어! “

드디어 이 청년은 결혼식장에서 주례 앞에 서게 됩니다. 아마도 평생 처음으로 그렇게 오랜 동안 서 있었을 것입니다. 마치 한 세기가 지나가는 것 같습니다. 그러는 동안에 결혼행진곡에 맞추어 그의 아버지의 팔에 손을 얹은 신부가 천천히 걸어오게 됩니다. 모든 사람의 시선이 신부에게로 집중됩니다. 그의 결혼 예복이 화제거리가 됩니다.

그런데 제가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일이 한가지 있습니다. 즉 젊은 여인이 하늘의 신랑을 맞게 될 때 그는 그것을 가능한 한 비밀로 하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 결심의 손을 들기를 원치 않고 제단에 무릎 꿇기를 원치도 않습니다. 그는 아무도 보지 않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바로 이 여인이 지상의 신랑과 결합을 하게 될 때 그는 이 기회를 가능한한 널리 알리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는 앞을 향해서 모든 사람이 그를 볼 수 있도록 천천히 걸어갑니다. 왜 그런지 이유는 제가 알 수 없습니다만 이것이 사실입니다.

마침내 그녀는 그의 배우자의 옆에 서게 됩니다. 주례가 서너가지 중요한 질문을 합니다. “당신은···· 하느냐?”에 대하여 그녀는 모두 라고 대답합니다. 그 여자는 일생에 처음으로 자신을 그 청년에게 내어 맡기며 모든 것을 부탁하고 그만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그의 믿음직한 팔을 끼고 이제는 그 청년의 책임 밑에 그녀는 예식장을 나서는 것입니다. 다시는 일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 청년이 그녀를 책임지고 있으며 그녀를 보살펴 주는 것이 그 청년의 책임인 것입니다.

그러면 그 여자가 그 청년이 약속한 모든 것을 실지로 받게 된 때는 언제이었습니까? 그가 둘째 단계인 그의 약속을 믿었을 때입니까? 그렇지 않으면 그를 완전히 의지한 셋째 단계를 지났을 때입니까? 그가 의지하기 전까지는 아무것도 소유하지 못했습니다. 그가 믿기는 하였지만 받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의지하였을 때 그는 모든 것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구원도 이와 같은 것입니다. 여러분이 믿었으나 아무것도 소유하지 못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그리스도를 의지하는 바로 그 순간에, 여수 그리스도께 여러분 자신을 바치는 그 순간에, 그분께 여러분 자신을 부탁하는 그 순간에 여러분은 구원받는 것입니다. 이 때가 오지 않고서는 안됩니다.

여러분은 이 단계를 지났습니까? 의지한다는 것은 부탁한다는 뜻입니다. 그것은 여러분이 반드시 해야 할 일입니다. 저 젊은 여자가 단상을 향하여 걸어 나가서 자기의 배우자에게 자기 자신을 맡긴 것 같이 여러분이 구원받고자 하면 이생과 내세를 위하여 여러분 자신을 그리스도께 맡겨야 할 것입니다. 둘째 단계가 구원하지 못합니다. 셋째 단계가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셋째, 의지한다는 것은 행동을 의미합니다. 어느 화창한 아침이었습니다. 많은 군중이 모여 들었습니다. 나이아가라 폭포의 물결은 장엄함을 자랑하며 낭떠러지에 흘러내리고 있었습니다. 두 언덕 사이에 긴 밧줄이 매어져 있었는데 잠시 후에 세계적인 줄타기 선수가 걸어갈 예정이었습니다. 

이 위대한 줄타기 선수는 그의 손에 든 긴 장대로 균형을 잡으며 줄에 발을 올려놓고 자신만만하게 밧줄을 타고 건너편 언덕에 다달았습니다. 죽은듯이 조용하던 군중들은 폭포소리가 들리지 않으리만큼 환성을 질렀습니다.

흥분한 군중을 향하여 그는 놀라운 청을 합니다. 그는 군중 중의 한 사람을 업고 줄을 다시 타고 건너가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누가 업히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한 사람을 쳐다보며 물었습니다.

당신을 내가 업고 저쪽으로 걸어갈 수 있다고 믿습니까?” “.”

그러면 해 보시겠습니까?”

나보고 업히란 말이요? 원 천만에 말씀입니다. 내가 그런 위험한 일에 목숨을 걸 줄 아십니까?”

그러면 선생님은 어떻습니까?”

나는 당신을 믿습니다.”

그러면 저를 의지할 수 있습니까?”

물론이지요!”

그러자 군중은 숨소리를 죽이고 줄 위를 쳐다보는 것이었습니다. 손에 든 장대로 균형을 잡았습니다. 그는 그 사람을 등에 업고 줄 위에 올라섰습니다. 그들 밑에는 밧줄 하나 밖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한걸음 한걸음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아무 주저함도 없이 줄 위를 걸어가기 시작했습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한복판을 지납니다.  그들 밑에는 사납게 흘러내리는 폭포수와 험한 바위들이 있습니다. 저쪽 언덕에 거의 다다르게 되었습니다. 흥분한 군중을 뒤덮은 무거운 침묵이 흘렀습니다. 구경꾼들은 손에 땀을 쥐었습니다.  드디어 그들은 땅을 밟았습니다. 마지막 한 발자국을 디딤으로써 군중들의 환호성이 터지는 가운데 그 두 사람은 다시 땅에 올라섰던 것입니다. 긴장은 풀리고 마음 졸이는 경험은 끝나게 되었습니다.

현세와 영원의 공간을 연결하는 다리는 구원의 위대한 밧줄입니다. 지금까지 그것이 끊어진 적이 없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그 줄 위를 걸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 일에 관하여 여러가지를 들었고 지금 말씀드린 사람과 같이 예수만이 건너갈 수 있다는 것을 믿으실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저 마지막 발걸음을 내어 디딤으로써 당신을 그분께 맡기지 않으면 결코 건너가지 못할 것입니다. 그가 믿는 것은 사실입니다만은 그는 의지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구원을 받게 하는 신앙은 의지할 것을 요구합니다. 

여러분은 예수를 의지하셨습니까? 그렇지 않으면 머리로 믿기만 하고 이 마지막 중요한 단계에 올라서는 데는 실패 하지 않았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의 확정적인 행동으로 예수님을 의지하시지 않겠습니까?

 

왜 의지하여야 하는가?

그러나 도대체 왜 의지하여야만 하는 것인가요? 구원의 섭리에서 이 단어가 왜 그다지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것인가요? 이유는 간단합니다. 그 방법만이 하나님이 인간의 다음에 들어와서 재 창조의 역사와 영생을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이 세상의 일에도 사실인 경우가 있습니다. 여러분이 하는 모든 사업의 거래는 신의에 기초를 두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것이 없이는 하루도 살 수 없는 것입니다. 결혼하는 여인은 의지하는 마음으로 하는 것입니다. 그는 자기의 삶을 맡기는 사람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은행에 예금을 하는 분도 이러한 마음으로 하는 것입니다. 그 은행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기차를 타는 여행자도 그 기차가 자기의 목적지까지 안전히 데려다 줄 것을 믿고 의지하며 타는 것입니다. 의지함이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의지하면 문을 열어줄 것입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요한계시록 3:20).

예수님께서는 지금 당신의 마음의 문 밖에 서서 들어오시려고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러나 자물쇠는 안으로부터 잠겨 있고 문은 굳게 닫혀 있습니다. 당신이 그분을 진심으로 의지하는 그 순간에 문은 활짝 열릴 것이며 그분은 들어올 것입니다. 그분의 말씀에 내가 들어가리라라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문을 여시지 않겠습니까? 그 분을 지금 의지하지 않겠습니까? 지금 까지 머리로 아는 지적인 신앙만 가지고 살아오지 않았습니까? 거짓 토대 위에서 헛된 경험을 하여 오지 않았습니까? 그것이 사실이라면 지금 이 순간에 예수를 의지하시기를 바랍니다.

 

(1996 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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