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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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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3. 12. 16:44 횃불/1996년

발람(11)

발람의 교훈(2)

많은 사람들은 베드로후서 2장과 유다서의 유사점을 지적하는데 개중 어떤 이들은 한 기자가 다른 기자의 글을 옮겨 적은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것은 옳지 않다. 성경의 다른 대목에서도 그렇듯이 기자마다 각기 하나님의 성령으로 주어진 자신의 글을 지니었다.  베드로는 특히 종교 지도자들의 악함( “교회역사 가운데 풍부하게 증명된)을 다루고 있으며 유다는 그들의 배도를 염두에 두고 있다.

발람의 교훈은 계시록 2:14의 버가모교회에 대한 주님의 서신에서 주님 자신에 의해 언급되어 있다. 다음 차이점들을 살펴보도록 하자.

발람의 길” -벧후 2:15

발람의 어그러진 길” - 11

발람의 교훈” - 2: 14

 

버가모는 계시록 2,3장에 나오는, 주 예수님에 의해 선택되어 서신을 받은 아시아의 일곱 교회들 중 하나였다. 주님께로부터 그 멧세지들이 주어진 당시에 그 도시들에는 분명 교회들이 있었으며, 각 교회는 그들에게 보내진 바로 그 멧세지를 필요로 했다. 그러나 그 장들은 예언서의 일부이며 따라서 계시록 13절의 우리 주님의 말씀의 범위 안에 들어 있다.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 2장과 3장은 뒤에 이어지는 19장과 동일하게 예언적인 성격을 지닌다. 주님의 전지하신 눈이 사도시대로부터 그분의 강림시까지 교회가 밟게 될 길을 내다보았다. 그분은 햇살과 그늘, 충성과 배신을 바라보셨으며 들을 귀가 있고 그분의 뜻을 기꺼이 행하고자 하는 자들을 위해 그 모든 것을 펼쳐놓으셨다.

좌우에 날선 검을 가진이가 버가모 교회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러나 네게 두어가지 책망할 것이 있나니 거기 네게 발람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발람이 발락을 가르쳐 이스라엘 앞에 올무를 놓아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였고 또 행음하게 하였느니라”( 2:14). 여기에 발람과 발락의 이스라엘을 향한 악마적인 음모의 새로운 국면이 나타나 있다. 그들은 세상과 지옥의 세력들로 하나님의 백성을 대적하여 포진 하도록 온갖 애를 쌨으며, 그들의 노력은 이스라엘의 신실하신 여호와에 의해 좌절되었다. 민수기 24장은 이렇게 끝을 맺는다. “발람이 일어나 자기 곳으로 돌아갔고 발락도 자기 길로 갔더라.”  그러나 그 예언자는 실망한 후원자를 떠나기 전에 아마 악의적인 암시를 주었을 것이다. 비록 여호와는 자기 백성을 떠날 수 없다 하더라도 그 백성은 여호와를 떠날 수 있었다! 발람은, 만일 이스라엘 백성이 시험을 받아 죄를 범하게 되면 여호와의 심판이 그들에게 임하리라는 것을 확신할 만큼 하나님에 대해 지식이 있었다. 그리하여 우리는 민수기 25 1,2절에서 다음과 같은 말씀을 읽게 된다.  이스라엘이 싯딤에 머물러 있더니 그 백성이 모압 여자들과 음행하기를 시작하니라 그 여자들이 그 신들에게 제사할 때에 백성을 청하매 백성이 먹고 그들의 신들에게 절하므로.” 발락은 모압 여자들을 데려와서 연약하기 짝이 없는 여호와의 백성 앞에 올무를 놓도록 발람에 의해 충동을 받았다! 모세는 후에 이 사실을 알게 되었는데, 그는 미디안과의 전쟁을 마친 후 모든 여자를 살려둔데 대해 백성들을 이렇게 꾸짖었다. “너희가 여자들을 다 살려두었느냐 보라 이들이 발람의 죄를 좇아 이스라엘 자손으로 브올의 사건에 여호와 앞에 범죄케 하여 여호와의 회중에 염병이 일어나게 하였느니라”( 31:15,16), 민수기 25 19절의 기록은 우리가 놓쳐서는 안되는 극히 엄위한 교훈을 담고 있다. 발람이 과거에 하나님의 백성을 불경건한 사람들과 혼합시키려 했듯이 오늘날 발람의 교훈을 가르치는 교사들이 교회와 세상을 혼합시키려 노력하고 있으며 슬프게도 성공을 거두고 있다. 역사는 늘 반 복되게 마련이다. 사단은 먼저 파괴를 꾀하다가 그것이 불가능함을 발견한 뒤에는 부패시키려 애쓴다. 하나님에 대한 순결한 증거가 이 세상에 있다는 것을 사단은 견디지 못하는 것이다.

계시록에 나오는 교회들 중에 버가모 교회는 서머나 교회 뒤에 나온다. 서머나에서는 핍박을 볼 수 있다. 예언적인 관점에서 보면 그것은 로마 황제들이 사단의 부추김을 받아 그리스도의 이름을 말살하려 했던 교회 초기 역사의 2,3세기를 가리킨다 콘스탄틴 황제가 4세기 초에 기독교를 국교로 공인하기로 결정함과 더불어 변화가 생겨났다. 우리는 적어도 2백년 동안 그들의 조상들과 함께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해 모진 고난을 당해왔던 그 시기의 성도들을 동정적으로 생각해야 한다. 제국의 권세자가 대적하기를 멈추고 오히려 친구가 되기로 고백했을 때 그 성도들은 얼마나 안도감을 느꼈겠는지!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 더 이상 불명예롭고 위태롭지 않았다. 오히려 그것은 매우 바람직한 것이 되었고 감독들과 성직자들은 황제의 궁귈에서 환영을 받았다. 그러나 일반 대중은 거의 알아차리지 못하는 가운데 사단의 궤계가 그 모든 과정에 침투해 들었다. 개중에는 물론 변화된 상황의 심각한 경향을 간파하고 그들의 주님께 충성하기 위해 위로부터 오는 은혜를 겸손히 구한 소수 영적인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일반 대중은 눈이 가리웠다. 교회는 더 이상 세상과 구별되지 않았다. 그것은 세상의 대리자요 협력자였다. 심지어 어떤 신학자는 교회를 가리켜 종교적인 측면에서 본 국가라고 정의 내리기까지 했다. 주님께서 버가모 교회에게 네가 어디 사는 것을 내가 아노니 거기는 사단의 위가 있는 데라고 말씀하신 것은 조금도 이상할게 없다 ( 2:13). 사단의 위()는 그가 참된 왕이 쫓겨난 이래로( 16:11) 왕으로 군림해온 이 세상에 있다. 세상에 있다는 것과 세상에 거한다는 것, 즉 세상에 정착하여 그 안에 거처를 정한다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다. 우리는 야고보서 4 4절의 폐부를 찌르는 말씀을 기억해야 한다. “간음하는 여자들이여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의 원수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되게 하는 것이니라.”

우리는 하늘에 속한 자들임을 기억하자. 교회는 이 악한 세상에서 나그네요 외인이다. 죽으시기 전날 밤 주 예수님은 제자들이 듣는 가운데 이렇게 아버지께 말씀하셨다. “····이는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저희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을 인함이니이다 내가 비옵는 것은 저희를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오직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 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저희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삽나이다”( 17:1416).

또 제자들 자신에게 그분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터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인 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15:19). 그 모든 가르침을 통해 주님은 세상의 호의와 후원이 아니라 그 적대감에 대해서 제자들을 준비시키고자 하셨다. 자신을 죽음에 내어주실 때 그분이 마음에 품으셨던 한가지 중대한 목적은 그분 자신을 위할 한 백성을 소유하시는 것이었다. 마침내 땅이 불가불 사라져버릴 그 때에가 아니라 지금 이곳에서 그렇게 하길 원하셨다. 그분은 큰 댓가를 치르고 보물과 진주를 사셨는데 그 둘은 모두 현재, 전적으로 그분의 소유이다( 3:4446).

사도 바울의 갈라디아서 1:4말씀은 얼마나 명명백백한지!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위하여 자기 몸을 드리셨으니 영광이 저에게 세세토록 있을지어다.” 그 말씀과 일치하여 그는 같은 서신 6:14에서 이같이 자신의 위치를 명확하게 진술 한다.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히브리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는 예수께서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케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다고 기록했다(13:12). 그분은 그 풍성한 은혜 안에서 밖으로나가셨으며, 또한 자신의 백성들도 그 모든 언행심사를 통해 여기는 영구한 도성이 없고 오직 장차 올 것을 찾나니라고 고백하면서 자신과 더불어 밖으로나오기를 원하신다.

여기서 어떤이들의 마음에 이런 의문이 제기될 수도 있다 성경이 말하는 세상은 어떤 의미일까? 육신의 천박함과, 많은 고상한 사람들이 증오하는 육욕과 가증스런 것들을 가리킬까?” 성경에서 말하는 세상은 그 이상을 의미한다. 그것은 창세기 4장에서 묘사된바 가인과 그 가족이 하나님과 별개로 세운 모든 질서 체계를 내포한다. 그 질서는 정치, 종교, 사회, 경제, 과학 등등의 지류로 발전, 확정되었다. “세상은 지역마다 여러 형태로 나타날 수는 있으나 그 원리 -하나님과 별개로 생각하고 행 동하는 것 -에 있어서는 어느 곳이든 동일하다. 사람들이 영원한 파멸을 자초하며 사랑하고 추구하는 이 땅의 모든 질서 체계에 대해서 성도들에게 경고하면서 요한일서 2:1517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다음과 같이 적나라하게 묘사해 준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온 것이라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이 표현은 도피의 여지를 일절 남기지 않는다. 도망간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세상은 그 모든 나타남에 있어서 아버지를 대적하며, 머지 않은 엄위한 하나님의 심판 아래 놓일 것이다.

어떤이는 기독교가 들어와서 인류의 상황이 개선되지 않았는가? 오늘날 우리는 기독교 세계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는가?”라고 물을지 모른다. 그 답은 정반대이다. 기독교가 들어옴으로 전체 상황은 전보다 더 악화되었다. 사람들은 그 어느 때보다 더 하나님 없이 일을 행하는데 단호했으며, 그들의 죄와 어리석음 위에 은혜로 말미암아 보냄받은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을 거절하는 잘못을 추가했다. 십자가의 그늘이 온 인류의 행위 위에 드리워 있으며, 그 무서운 죄는 여전히 처벌되어야 한다. 갈라디아서 1:4에서 기자는 이 시대를 가리켜 이 악한 세대”(“세상이 아니라)라고 일컬었으며, 고린도후서 4’4에서는 사단을 가리켜 사람들의 눈을 어둡게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이 비추지 못하도록 하는 이 세대의 신”(“세상이 아니라, 우리말 성경에는 이 세상 신으로 되어 있음-역주)이라고 했다. 사단 은 모든 부류의 사람들을 한데 뭉쳐 육신으로 나타나신 하나님을 세상에서 내 쫓는데 성공하기 전에는 결코 그런 식으로 표현되지 않았다( 4:27). 그 일을 미루고나서 사단은 거절당하신 분의 위치에 들어왔으며, 이 세상의 신으로 자처하고 있다. 주 예수님께 충성을 맹세하고 그분의 보배로운 피에 모든 것을 의탁하노라고 고백하는 이들은 세상과 그 길에서 엄격히 떨어져 나와 그 악함을 증거해야 한다( 7:7). 세상의 정치조직과 군대와 사회 단체들은, 그분의 몸으로서 하늘에 계신 영화롭게 된 그리스도와 지금 연합되어 있고, 잠시 후면 그분의 신부로서 그분에게 나타날 것이고, 그리고 저 하늘 위에서 그분과 더불어 만물 위에 왕노릇하게 될 이들과 무슨 관계가 있는가? “발람의 교훈을 물리치는 자들에게는 매우 달콤하고 선명한 주님의 약속이 주어져 있다.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얼마나 개인적인 호소인가!)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감추었던 만나를 주고 또 흰 돌을 줄터인데 그 돌 위에 새 이름을 기록한 것이 있나니 받는 자 밖에는 그 이름을 알 사람이 없느니라”( 2:17).

만나-광야에서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선물-는 스스로를 낮추신 그리스도를 상징한다. 한 오멜의 만나가 금항아리에 담겨 성소에서 여호와 앞에 두어져야 했다( 16:33). 이것은 하나님만이 그리스도 예수에 관한 모든 진리를 알고 계심을 시사해 준다. 4복음서에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으나 요한은 글을 마치면서 말하기를, 예수님의 행적을 모두 기록한다면 이 세상이라도 그 기록을 담을 수 없을 것이라고 했다( 21:25). 버가모의 이기는 자에게 주어진 그 약속은, 하나님께로 성별됨에 있어 온전하셨던 그분께서 우리를 본향에 이르게 하실 때 그분의 놀라운 섭리에 대해 하실 얘기가 많으실 것임을 의미한다. 그때 우리는 어떠한 기쁨으로 그분의 음성에 귀 기울이게 될는지!

그것을 받는 자에게 비밀스럽고 개인적인 새 이름을 지닌 그 흰 돌은 주님의 인정에 대한 표현이다. 하나님께로 성별된 가운데, 그분의 뜻에 순종하는 가운데 그분의 발자취를 힘써 좇은 모든 이들에게 얼마나 큰 보상이 주어지는지!

 

계시록의 일곱교회에 보내진 서신들은 하나님의 백성 가운데 파괴적인 교훈들이 얼마나 일찍부터 뿌리를 내렸는지를 보여준다. “니골라당의 교훈발람의 교훈”, 그리고 여선지자 이세벨의 사악한 가르침을 보라! 도덕적인 악과 교리적인 악 모두에 대해 기록되기를 적은 누룩이 온 덩어리에 퍼진다고 했다(고전 5:6, 5:9). 경계를 게을리하면 그러한 악에 노출되게 된다( 4). 모쪼록 하나님께서 그 무한한 자비로서, 주 예수님의 강림하심을 기다리는 동안 필자와 독자 모두를 도덕적, 교리적 순결 가운데 보존해 주시기를 기도 드린다.

 

(1996 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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