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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검 다리
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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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loyd Cain

화목은 용서보다는 훨씬 더 큽니다. 바로 하나님의 마음과 품 안으로 환영입니다.

 

복음의 위대한 단어들을 묵상할 때 우리는 속죄, 용서, 구속, 칭의, 화목과 성화와 같은 단어에 사로잡혔습니다. 모든 단어들은 히브리서의 기자에 의해 “이렇게 큰 구원”이라고 불리는 것에 관련이 있으며 각 단어는 구원의 다른 측면을 제시합니다. 예를 들면, 속죄는 하나님의 모든 의로운 요구를 만족시키는 것을 말합니다. 용서(또는 사면)는 그들에게서 죄들을 멀리 보내는 것과 그에 수반되는 죄로부터의 구출을 의미합니다. 구속은 그 지불된 값과 그 값이 지불되었을 때 이루어진 속박으로부터 해방을 나타냅니다. 그리고 의롭다함은 모든 죄의 책임에서 깨끗해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화목은 우리에게 관계의 변화를 제시합니다. 화목이 일어날 때, 한 때 소외감과 증오가 존재했던 곳에 평화가 만연합니다.

 

증명

성경에서 가장 분명한 화목의 예화 중 하나는 요나단의 아들이자 다윗의 적이었던 사울의 손자 므비보셋의 이야기입니다. 블레셋의 손에 요나단과 사울이 죽은 후에, 다윗은 헤브론에서 유다 족속의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았습니다(삼상 31:6, 삼하 2:4). 우리는 “이제 사울의 집과 다윗의 집 사이에 오랫동안 전쟁이 있었으나 다윗은 점점 더 강하게 되고 사울의 집은 점점 더 약하게 되니라”(삼하 3:1)고 읽습니다. 다윗은 사울의 집이 패한 후에 “사울의 집에서 아직 남아 있는 자가 있느냐? 내가 요나단으로 인하여 그에게 친절을 베풀리라”고 말했습니다. 다윗이 은총을 나타냄을 통해서 므비보셋은 그에게 화목되었습니다. 므비보셋은 모든 적개심, 증오와 소외감은 지나갔다는 것을 확신하고 그가 왕의 상에서 음식을 먹으면서 말했습니다. “주의 종이 무엇이기에 왕께서 나같이 죽은 개를 돌아보시나이까?”(삼하 9:8). 므비보셋이 한 일을 통해서가 아니라 다윗의 은혜로운 행동으로 관계가 모두 완전히 회복되었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화목의 두 번째 예는 드고아의 지혜로운 여인의 말에서 볼 수 있습니다. 압살롬이 다말을 욕보였다고 해서 나중에 압논의 목숨을 빼앗았을 때 그는 그의 아버지의 낯을 피하여 달아났으며, 멀리 그술 땅에서 3년을 지냈습니다. 압살롬의 소외에 대한 왕의 슬퍼함 때문에 화해를 시도한 요압은, 지혜로운 여인을 다윗에게 보내어 “내쫓은 자가 자기에게서 아주 쫓겨나지 아니하게 하시나이다”(삼하 14:1-14)라는 것을 생각나게 하도록 했습니다. 이것이 화목의 예입니다.

 

정의

우리는 화목의 정의를 암시했습니다. 세 개의 헬라어 단어가 이 단어로 번역되었으며 각각 관계의 회복을 의미합니다. W.E. 바인에 따르면 마태복음 5:24에서 “화목하라”로 번역된 단어가 diallavssw(디알랏소)인 것은 흥미롭고 상호적인 양보를 가져오는 상호적인 적대감이 있는 경우를 가리킵니다. 하나님과 사람의 화목에 사용되는 단어는 katallavssw(카탈랏소)입니다. 그것은 또한 변화를 가리키지만 상호 적대감으로 사용되지 않으며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적대감이 항상 지속하는 것은 사람에게만 있음을 입증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에게 화목되지 않으십니다. 그분의 생각은 항상 은혜입니다. 하나님께 화목해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은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갈보리를 근거로 이 화목을 이루시고 그것을 죄인에게 값없이 주십니다.

 

우리는 로마서 5:11에서 “속죄”로 번역된 단어를 주목해야 합니다, “그분을 통해 지금 속죄를 받았으며”라는 katallagh(카탈라게)입니다, 그리고 “그분을 통하여 우리가 지금 화목을 받았으며”로 읽어야 합니다. 화목은 속죄의 결과입니다. 역시 히브리서 2:17에서 우리가 읽을 때, “백성의 죄들로 인해 화목을 이루려 하심이라” 단어는 iJlavskomai(히라스코마이)”입니다, 그리고 “백성의 죄를 구속하려 하심이라”고 읽어야 합니다.

 

로마서 5:10에 있는 단어를 주목하십시오. “이는 우리가 원수였을 때에 하나님의 아들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해하게 되었을진대 화해하게 된 자로서 더욱더 그분의 생명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기 때문이라.” 적개심은 존재했지만 하나님의 편에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화목은 오직 은혜 안에서 하나님의 역사에 의해서만 이루어집니다. 또 다시, 에베소서 2:16에서 우리는 “또 십자가로 그 원수 되게 하는 것을 죽이사 친히 십자가로 이 둘(유대인과 이방인)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해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읽습니다.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 또한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도 적개심이 존재했습니다. 닷붙여서 에베소서 2:16과 골로새서 1:20-21에서 화목에 사용된 단어는, katallavssw(카탈랏소)의 강조형인 ajpokatallavssw(아포카탈랏소)입니다. 골로새서 1:20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분의 십자가의 피를 통해 화평을 이루사”, “모든 것들이 …그분으로 말미암아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 자신과 화해하게 하셨느니라”는 그분에 의해 계획하셨음을 봅니다. 거기에는 땅 아래 것들에 대한 화목의 제안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늘에 있는 것들과 땅에 있는 것들과 땅 아래 있는 것들의 모든 무릎이 예수라는 이름에 굴복하게 하시고 또 모든 혀가 예수 그리스도는 주시라고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빌 2:9-11)라는 것을 압니다.

 

선언

고린도후서 5:17-21에서 화목에 관한 위대한 구절에서 바울은 우리에게 화목의 방식, 화목의 직분과 화목의 소식을 보여줍니다. 화목의 방식은 말씀 안에 명시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죄를 알지 못한 그분을 우리를 위하여 죄가 되게 하신 것은 우리가 그분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 5:21). 유일하지만 충분한 화목의 근거는 십자가입니다. 바울은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자신에게 맡기셨던 하나님을 말했습니다(18절). 그는 세상에 대한 그리스도의 대사로서 그분의 소식을 이렇게 요약했습니다.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너희에게 간구하노니 너희는 하나님과 화해하라”(20절).

그리스도의 대사로서 여전히 하나님의 원수인 자들에게 이 메시지를 선포하는 것은 개인적인 신자들과 교회들의 책임입니다.

posted by 징검 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