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그 이미지
징검 다리
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calendar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Recent Post

theWord Bible Software

Category

2014. 4. 18. 21:54 횃불/1996년

잊혀진 명령- 거룩하라

월리암 맥도날드

19 : 혀를 길들임

그리스도인들의 혀가 곧 그 인격의 척도라는 것에 대해 그리스도인들은 놀라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성경이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라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이다( 12:34). 사람이 말하는 것을 보고서 그 사람이 영적인 사람인지 아닌지를 알 수 있다. 우리가 이미 경험으로 알고 있는 것을 야고보도 말하고 있는데 그는 혀가 적은 것이지만 이에서 선과 악이 나올 수 있으며, 모든 동물들은 길들일 수 있지만 혀는 길들일 수 있는 사람이 없다고 말했다. “혀는···· 쉬지 아니하는 악이요 죽이는 독이 가득한 것이라.”  자연의 다른 것들과는 달리 혀는 단 것과 쓴 것, 또는 축복과 저주같은 전혀 다른 것을 낼 수 있다( 3:112). 비록 우리가 혀를 길들일 수는 없다 할지라도 참으로 하나님께 감사한 것은 하나님은 하실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성령의 능력으로 날카로운 혀를 은혜롭게, 비판적인 혀를 덕스러운 혀로 만드실 수 있다. 우리의 언어의 특성은 다음과 같은 것들이어야 할 것이다.

 

진실이어야 한다

그런즉 거짓을 버리고 각각 그 이웃으로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라 이는 우리가 서로 지체가 됨이니라”( 4:25). 하나님은 거짓말을 하실 수 없으시며 다른 사람들에게도 이를 허락지 아니하신다. 이는 악의없는 거짓이나 가벼운 거짓말, 과장, 아첨 그리고 약속 파기 등을 포함한다. 그리스도인들의 사역 보고도 과장되어서는 안된다. 비서는 또한 사장이 사무실에 있는데 전화가 오면 없다고 해서는 안될 것이다. 또 반갑지 않은 손님에 대해 자녀들에게 거짓말을 하도록 해서는 안될 것이다. 사람이 정직하면 기억력이 좋지 않아도 괜찮다. 스텐리 죤스는 당신이 거짓말을 한다면 당신은 그 거짓을 늘 덮어야 하기 때문에 기억력이 좋아야 한다. 그러나 언제나 진실을 말한다면 그때 그때 진실을 말하면 되기 때문에 꼭 좋은 기억력을 가져야 할 필요는 없다. 그래서 진실을 말하는 것은 거짓을 말하는 것보다 훨씬 쉽다라고 말했다.

 

가치있는 것이어야 한다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 4:29). 여기에 더러운이란 말은 가치없는, 사용하기에 부적당한, 무가치한 것을 의미한다. 처음에 녹음기가 세상에 나왔을 때에는 집안 어딘가에 숨겨두고 사람들의 대화를 몰래 녹음하는 장난을 했다. 그리고 나중에 그들이 모인 곳에서 녹음한 테잎을 재생했는데 그들은 자신들이 한 말에 대해 부끄러워하기도 했다. 예수님은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으리라고 경고하셨다 ( 12:36). 그러므로 우리의 삶에서 무익한 재잘거림은 죄로 알고 고백하며 버려야 할 것이다. 

 

덕을 세우는 것이어야 한다

…오직 덕을 세우는데 소용되는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사람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 4:29) 다시 말해 우리는 우리가 하는 말을 통해 지속적으로 다른 사람들을 세워야 한다. 아이언사이드는 언제나 사람들의 대화를 덕이 되는 주제들로 인도했다. 그는 때로 당신은 이 구절의 의미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라고 묻고는 문제가 되는 구절을 인용하였다. 다른 사람이 이를 모르면 그는 자상하게 당신은 이 구절이 이러한 뜻이라고 생각지 않습니까?”라고 말했다. 그의 설명은 잊을 수 없는 감명적인 것들이었다.

내 친구 중에 한 사람은 다른 사람에 대해 부정적인 이야기를 시작하였다. 그것은 약간의 험담에 가까운 이야기였다. 그런데 그는 이야기를 하다 말고는 이것은 덕을 세우는 이야기가 아닌 것 같군이라고 말했다. 그때 나는 다 듣지 못한 이야기 때문에 그 사람에 대해 궁금한게 있었지만 혀를 어떻게 길들여야 하는가에 대한 좋은 교훈을 배우게 되었다.

 

적합한 것이어야 한다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데 소용되는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 4:29) 때에 합당한 말을 할 수 있는 것은 큰 선물이다.  죽어가는 성도 옆에서 한 경건한 장로는 아가서 8:5을 인용하였다. “그 사랑하는 자를 의지하고 거친들에서 올라오는 여자가 누구인고.” 가족의 죽음으로 슬픔 가운데 있는 자들을 시편 30:5로 위로한 목자도 있다. “그 노염은 잠깐이요 그 은총은 평생이로다.” 실망한 목자에게 한 자매는 이사야 49:4을 편지 끝에 써서 격려하였다. “그러나 나는 말하기를 내가 헛되이 수고하였으되 무익히, 공연히 내 힘을 다하였다 하였도다. 정녕히 나의 신원이 여호와께 있고 나의 보증이 나의 하나님께 있느니라.”

알렉산더 화이터 박사가 변호사 사무실에 들어섰을 때 안에서 변호사가 이 늙은 죄인에게 무슨 소식이 있습니까?” 라고 물었다. 그는 자기가 묵상했던 말씀을 인용하였다. “하나님은 인애를 기뻐하신다”(미가 7:18). 변호사는 말씀으로 그를 격려한 것에 대해 감사했다.  이러한 말들은 때에 합당한 말들이다.  그래서 경우에 합당한 말은 아로새긴 쟁반에 금사과이다( 25:11). “때에 맞은 말이 얼마나 아름다운고”( 15:23).

 

은혜로워야 한다

우리의 말은 때에 맞는 것이어야 할 뿐만 아니라 운혜로워야 한다. “너희 말을 항상 은혜 가운데서 소금으로 고르게 함같이 하라”( 4:6). 우리 주님은 참으로 은혜로우셨다. 그래서 그분의 말씀을 듣는 자들은 그분의 은혜로운 말씀으로 인하여 놀랐다( 4:22). 유대인으로서 멸시받는 사마리아 여인에게 물을 좀 달라고 구하셨다는 것이 바로 은혜가 아닌가( 4:7)? 그리고 간음 중에 잡힌 여인에게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라고 말씀하신 것이 은혜가 아니고 무엇인가( 8:11)? 은혜로움은 그 안에 날카로움과 빈정 그리고 가시돋힌 야유가 없다. 아스터 여인은 윈스턴씨 만일 내가 당신의 아내 였다면 나는 당신 커피잔에 독약을 넣었을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그는 아주머니 내가 만일 당신의 남편이었다면 나는 그 커피를 마셨을 것입니다라고 답했다. 극히 재미있는 말이지만 은혜스럽지는 못한 말이다. 우리의 발은 은혜로워야 한다. 그리고 또한 항상 소금으로 고르게함 같아야 한다. “너희 말을 항상 은혜 가운데서 소금으로 고르게 함같이 하라”( 4:6). “내게 물 좀 달라하신 주님께서 또한 가서 네 남편을 불러오라고 하셨다( 4:16). 그리고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라하신 후에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말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들은 무게를 가지고 있었다. 즉 말씀에 맛이 있었다. 소금은 또한 부패를 막는 일을 한다. 그리고 소금은 갈증을 유발시킨다. 우리의 언어도 도덕의 표준을 지키는 일을 해야하며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생수에 대한 갈증을 유발하는 것이 되어야 할 것이다. 

 

순결해야 한다

성도들의 언어는 물론 순결해야 한다.  음행과 온갖 더러운 것과 탐욕은 너희 중에서 그 이름이라도 부르지 말라 이는 성도의 마땅한 바니라 누추함과 어리석은 말이나 희롱의 말이 마땅치 아니하니 돌이켜 감사하는 말을 하라”( 5:3, 4). 죄와 부도덕에 대해 우리가 자주 이야기하면 할수록 이에 대해 우리나 듣는 자들은 이를 덜 심각하게 생각하게 된다. 이러한 이야기들은 우리들에게 아주 친숙하고 더 이상 우리의 마을에 충격으로 와 닿지 않는다. 성경도 때로 흉악한 죄들에 대해 말하고 있지만 그러한 죄를 가볍게 덜거나 묵과하지 않고 강하게 혐오하고 있다.

 

맹세하는 것이어서는 안된다

우리의 언어는 맹세로 확정하는 것이어서는 안된다. “····도무지 맹세하지 말지니 하늘로도 말라 땅으로도 말라 네 머리로도 말라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다 아니다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 좇아나느니라”( 5:3437). “내 형제들아 무엇보다도 맹세하지 말지니 하늘로나 땅으로나 다른 아무 것으로도 맹세하지 말고 오직 너희의 그렇다 하는 것은 그렇다 하고 아니라 하는 것은 아니라 하여 죄정함을 면하라” ( 5:12). 그리스도인들은 언제나 정직하여 맹세로 자기의 말을 확고히 해야 할 필요가 없어야 한다. 어떤 사람이 맹세는 전혀 소용이 없다. 좋은 사람은 맹세가 필요하지 않고, 악한 사람은 어차피 그의 맹세를 지키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하고 말한 것과 같다.

주의 이름을 헛되이 사용하는 것과 외설적인 말에 사용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는 것은 우리 모두가 잘 알고 있다. 하찮은 것, 금지된 것에 대한 완곡한 표현 같은 것은 어떤가? 예를 들어 하나님에 대한 무익한 부르짖음 즉 , 하나님 이럴수가라든지 . 하나님 맙소사라든지 또 성경말씀을 인용하여 욕하는 것들은 어떤가? 이러한 것들은 성경말씀을 어기는 것이다. 그렇다면 법정에 서서 맹세하는 것은 어떤가? 우리 주님께서 대제사장에게 심문을 받으실 때 대제사장은 내가 너를 살아계신 하나님께 맹세하게 하노니 네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인지 우리에게 말하라고 했다. 예수님은 율법 아래 있는 유대인으로서 요구한 것에 대해 맹세로 답해야 했다( 5:1). 그래서 주님은 이에 답 하셨다. 이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 문제의 해결책이 된다. 그러나 만일 아직도 법으로 맹세하는 것에 대해 걸림이 된다면 확언이나 확약할 수는 있을 것이다. 이 말은 하나님 앞에 맹세하는 일이 없이 질문에 응하거나 증거한다는 뜻이다.

 

경건한 것이어야 한다

우리는 성스러운 것을 가볍게 말하거나 무례히 사용해서는 안된다. 우리는 성경 말씀을 가지고 농담해서는 안된다.  즉 성경말씀의 내용을 떠나 의미없이 농담으로 사용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에 관해서나, 것이나 말씀에 대해서는 정말 조심해야 한다. 깨끗하고 유익한 농담을 나쁘다고 말할 사람은 없다.  하지만 너무 헤픈 농담은 그 사람으로 영적 능력을 상실하게 만들 가능성이 많다. 때로 성령님은 흥미있는 이야기들로만 가득한 집회(모임)로 인해 근심하신다. 엄숙한 복음이 때로는 영접을 위한 하나의 일화로 비쳐지고 있다. 그리스도의 종들은 빈정대는 말이나 거만한 말을 사용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남의 대화에 억지로 끼어드는 것이나 농담이나 대화를 통해 자신을 높이거나 영적 평판을 얻고자 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이 해서는 안될 일이다.

 

간단명료해야 한다

말이 많으면 허물을 면키 어려우나 그 입술을 제어하는 자는 지혜가 있느니라”( 10:19). 다시 말해 말을 많이 할수록 죄를 지을 확률이 높다는 것이다. 우리는 언제나 말하고 싶은 욕구를 줄임으로 이러한 유혹을 피할 수 있다. “너는 하나님 앞에서 함부로 입을 열지 말며 급한 마음으로 말을 내지 말라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너는 땅에 있음이니라 그런즉 마땅히 말을 적게 할 것이니라”( 5:2), 이것은 특별히 하나님께 대한 맹세와 연관된 말씀이기 때문에 일반적인 언어의 사용에도 좋은 말씀이다. 일반적으로 자기 말하기를 좋아하는 자들은 숨돌릴 틈도 없이 말하기를 좋아한다. 누구에게도 말할 수 있는 기회를 주지 아니한다. 그는 모든 대화를 혼자 독점하며 듣는 자들의 시간과 관심을 낭비하게 한다. 다음의 간결한 글을 인용함으로 결론을 내릴까 한다. 누가 썼는지는 잘 모르지만 적합한 것이 되기를 바란다.

그리스도인들의 그 혀로 무엇을 해야 할까? 그리스도인은 그 혀를 통제하여 대화를 혼자 독점하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다. 필요성을 느끼는 만큼 다 말하지 않도록 훈련해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거짓이나 절반만이 사실인 말, 악의 있는 말, 빈정대는 말, 조롱, 부정한 말 또는 무익한 말을 하지 말아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언제나 간증이나 고백 또는 격려의 말을 하는데 그 혀를 사용해야 한다.  감사합니다라고 말하기가 어려운 사람은 자유스럽게 그러한 말을 할 수 있도록 그 혀를 훈련시키며 그 안에 있는 교만의 악을 다루어야 할 것이다. 혀는 생각을 따라야지 앞장서서는 안된다. 말을 많이 하는 자가 적은 자보다 회개할 것이 많다. 말하는 자는 심지만 듣는 자는 거둔다.

 

우리의 험담을 용서하소서

몇년 전에 애틀란타 져널에 다음과 같은 기사가 실려있었다.

나는 죽음보다 무거운 곡사포이다. 나는 죽이지 않고 이기며 가족과 마음을 부서뜨리고 삶을 파선하게 만든다. 나는 바람을 타고 돌아다닌다. 나를 가까이 오지 못하게 할만한 의인도 없으며 겁을 줄만큼 깨끗한 사람도 없다. 나는 진리와는 상관 없으며 공의를 좋아하지 않는다. 그리고 연약한 자들에 대한 자비도 없다. 나에게 희생된 자들은 바다의 모래알보다 더 많으며 그 중에는 무고한 자들도 있다. 나는 절대로 잊는 일이 없으며 용서하는 일 또한 별로 없다. 내 이름은 험담이다.”

아마도 야고보가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 능히 온몸도 굴레 씌우리라고 말한 것을 보면 특별히 험담에 대해 생각했던 것같다. 다른 사람에 대해 이야기하고 험담하는 것은 아주 자연스럽게 우리 몸에 배어 있어 그러한 습관을 고치기가 쉽지 않다. 험담이란 무엇인가? 월리암 마샬은 험담을 전혀 유익이 없는 것을 말하는 예술이라고 말했다. 빌 고드는 문제에 관련된 사람 또는 해결책과 관련된 사람이 아닌 사람들과 정보를 나누는 것이라고 말했다.  좀더 넓은 의미에서 험담을 정의하자면 그곳에 없는 사람의 명예나 품격 또는 가치를 손상하게 하는 말을 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험담은 그 자리에 없는 어떤 사람을 부정적으로 보고 그에 대해 불친절하거나 손상케 하는 말을 하는 것이다. 전면에서 직접 말하는 것이 아니라 뒤에서 비난하는 것이다. 이는 하나의 암살과 그 성격이 같은 것이다.  성경은 이에 대해 아주 엄하게 말씀하고 있다. “너는 제 백성 중으로 돌아다니며 사람을 논단하지 말며 “( 19:16). “두루 다니며 한담하는 자는 남의 비밀을 누설하나 마음이 신실한 자는 그런 것을 숨기느니라”( 11:13, 20 19도 보라). “패려한 자는 다툼을 일으키고 말장이는 친한 벗을 이간하느니라”( 16:28). “남의 말하기를 좋아하는 자의 말은 별식과 같아서 배속 깊은데로 내려 가느니라”( 18:8). “나무가 다하면 불이 꺼지고 말장이가 없어지면 다툼이 쉬느니라”( 26:20). 바울은 로마서에서 험담(수군수군 하는 자)을 살인자들 그리고 부도덕한 자들과 함께 언급하였다.

 

내가 말했다고 누구에게도 말하지마

우리는 때로 험담을 기도를 위한 정보 제공으로 꾸며서 말할 때가 있다. “이거 기도해달라고 한 이야기인데. 너 이거 알고 있니?” 또 은밀히 말함으로 상대방의 마음에 충격을 주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때로 다음과 같은 결과가 일어나기도 한다. 두 여인이 길거리에서 만나서 이야기를 하고 있다. “틸리가 내게 그러는데 내가 너에게 틸리에게는 비밀로 하라고 한 것을 이야기 했다며?” “틸리는 왜 그러냐? 내가 말했다는 것을 너에게 이야기 하지 말라고 했는데.” “나도 틸리가 내게 말했다는 것을 너에 게 이야기 하지 않기로 했지만...” 삶의 계절이라는 책에서 찰스 스윈돌은 또 다른 형태의 험담인 소문을 만드는 자들에 대해 다루었다 다음은 그가 말한 것이다.

소문을 먹고 사는 사람들은 작고 호기심이 많은 심령을 가진 사람들이다.  그들은 비좁은 골목길에서 사람들을 밀치며 지나다니는 것과, 미묘한 문제를 제기해 사람들의 마음을 어지럽혀 놓는 것에 기쁨을 얻는 자들이다. 그들은 사실이 아니라 오직 불확실한 것에 근거하여 위로를 얻는 자들이다. 그들은 그들이 그러는데요’, ‘들어보셨어요?’ 또는 다른 사람들이 그러는데...라고 말함으로 소문을 만든 사람을 감추려 한다. ‘당신은 그 어느 교회가 갈라지기 직전에 있다는데 들어보았어요?’’그 어느 사람이 그 아내와 이혼하게 되었대요. 그 아내가 아마 바람을 피웠나봐요.’ ‘사람들이 그러는데 그 사람 부모가 엄청난 부자래요.’ ‘아무개 목사님이 그 교회에서 쫓겨나게 되었다는데 혹시 들으셨어요?’ ‘누구한테 들었는데 그 집 아들이 마약 중독자래요. 가게에서 물건을 훔치다 들켰대요.’ ‘어떤 사람이 그러는데 그들이 결혼할거래요.’ ‘누가 그러는데 그 사람은 알콜 중독자라던데요?’ ‘그 여자는 음탕한 여자라고 들었어요. 조심하세요.’ ‘그 사람은 권모와 술수로 그렇게 출세하게 되었다고 소문이 다 퍼져있어요.’ ‘여러 사람들이 그러는데 그는 신뢰할 수 없는 사람이래요.’  우리는 소문이나 험담이 이 사람 저 사람의 입을 통하면서 얼마나 과장되어 가는지 잘 알고 있다. 각 사람들이 이야기를 전하면서 부정적인 요소를 점점 가미시켜 나중에는 원래의 이야기와는 판이하게 다른 이야기가 된다.

바울도 사람의 이름을 들어 이야기 하지 않았는가? 어떤이들은 바울도 후메네오와 알렉산더(딤전 1:19,20), 부겔로와 허모게네 (딤후 1:15) 그리고 구리 장색 알렉산더에 대해 부정적으로 이야기 하지 않았느냐고 말할 것이다. 요한도 디오드레베에 대해 말했다. 그들에 대해 부정적으로 말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은 그들을 공격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성도들을 그 사람들로부터 지키기 위해 경고하기 위한 것이었다. 때로 지도자들이 성도들의 징계나 바로잡는 일이 필요할 때 어떤 성도 개인에 대해 이야기 하는 것이 필요할 때가 있다. 그러나 그것은 그들을 깎아내리기 위한 것이 아니라 세우기 위한 것이다.

이것은 험담과는 다르다. 험담을 다루는 데에는 몇 가지 긍정적인 단계가 있다. 첫째로, 말하는 사람에게 이야기의 근원을 분명히 밝히게 하는 것이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11에서 이에 대한 좋은 본을 보여주고 있다. “내 형제들아 글로에의 집 편으로서 너희에게 대한 말이 내게 들리니 곧 너희 가운데 분쟁이 있다는 것이라.” 둘째, 험담을 하는 자에게 당신이 말한 것을 그 사람에게 이야기해도 되겠습니까?”라고 물으라. 그러면 안돼요. 절대로 그러지 말아요. 그러면 그 사람과 나는 끝장이에요라고 말할 것이다. 또 한가지 방법은 사람들이 하는 험담을 듣지 않는 것이다. 그 말하는 것을 듣고 싶지 않다고 말하든지 아니면 좀더 건설적이고 긍정적인 주제로 대화를 유도하는 것이다. “험담을 듣는 사람이 없다면 말하는 사람도 없을 것이다. 청중을 귀머거리로 만들면 험담하는 자를 벙어리로 만들 수 있다”(월리암 마샬). 터어키의 속담에 당신에게 와서 남을 험담하는 자는 곧 당신을 험담하게 될 것이다라는 말이 있다.

 

(1996 11월호)

 

'횃불 > 1996년'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말씀의 올바른 해석  (0) 2014.04.18
이사야서에 나타난 그리스도  (0) 2014.04.18
한 명의 문둥병자  (0) 2014.04.18
자식에 대한 징계  (0) 2014.04.18
거짓 것과 참 것  (0) 2014.04.10
영적 교육의 중요성  (0) 2014.04.10
이상적인 여성상  (0) 2014.04.10
말씀의 올바른 해석  (0) 2014.04.10
posted by 징검 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