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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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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4. 18. 21:57 횃불/1996년

이사야서에 나타난 그리스도

 

21장 속건제물인 그분의 영혼

여호와께서 그로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케 하셨은즉 그 영혼을 속건제물로 드리기에 이르면 그가 그 씨를 보게 되며 그 날은 길 것이요 또 그의 손으로 여호와의 뜻을 성취하리로다”( 53:10).

일찍이 이 세상을 깨뜨린 가장 슬프고 암흑한 그 날은 영원히 어둠을 사라지게 하고 슬픔을 치료하기로 예정 된 참 이상하지만 진실된 날이다. 그들의 가장 슬프고 어둡고 가장 죄의식에 가득찬 그 시간에 위로와 빛과 도움을 발견토록 한 그 사랑스런 마음은 구속자의 열정이다. 성경이 그 놀라운 십자가 위에 그같은 강조를 두는 것은 의심할바 없이 이런 이유 때문이다. 게다가 선지자들과 복음전도자들도 그 죽음의 이야기를 전했는데, 그것은 그 내면의 의미를 모든 이들이 이해하도록 하기 위한 죽음 중의 죽음이다.

이 장 안에 담겨있는 그 십자가의 의미를 이해하려면 얼마나 세심한 주의가 요하겠는가! 그 의미를 오해할 가능성을 없앨 수 있도록 우리가 거듭거듭 그 거룩하신 종의 죽음이 결코 평범한 삽화가 아님을 상기해야 한다. 그러나 다른 모든 순교자와 희생자들의 죽음들과는 달리 그것은 독특하고 유일하게 장엄하다. 그것은 한 완전하고도 충분한 희생으로 세상 모든 죄를 위한 것이었다. 

모든 형태의 표현이 그 사상을 강조하기 위해 사용된다. 그 극심한 고뇌는 그 고난당하는 자 편의 어떤 특별한 죄 때문이 아니었다. 하지만 피상적인 구경꾼들은 그렇게 생각했을 수 있다. 그러나 그분은 우리 죄 때문에 상하셨고 우리의 불의 때문에 고난당하셨고 우리가 받아야 할 그 형벌로 인해 채찍에 맞으셨다.  명백히 드러나는 그 선지자의 사상은 첫째로는 인자로서의 당한 일과, 그 다음은 예수님의 경험의 특이성을 지적하고, 마지막으로는 우리 자신의 경험에 그 본문이 감정적으로 적용된다는 점이 주목 된다.

 

1. 인자로서 당한 일

그것은 다음 세 단어 즉 고난, , 죽음으로 요약될 수 있다.

 

(1) 고난 당함

자연은 아름답다. 그러나 그 자연조차도 바다와 육지를 뒤덮는 그 고난을 인해 슬퍼했다. 봄에 처음으로 핀 들꽃이 숲속 빈터에 나 있을 때, 당신은 담비에 잡혀가는 토끼의 비명 소리를 들을 수 있다. 한 여름의 청명한 하늘로부터 독수리가 목초지에 급강하한다. 평온한 호수에 노닐던 피래미가 창꼬치의 습격을 피하려 요동쳐 물결이 인다. 자연이 신음하고 고통스럽게 구로할진대 인생이야 얼마나 더 하리요.

오늘 즐겁게 뛰노는 소년 소녀들이 내일 연약한 아기가 죽어가는 요람 위에 구부릴 것이다. 혹은 현재 엄격한 훈련이 인간의 운명에 불가피한 부분처럼 여겨진다. 여러분은 갓난 아이의 울음소리를 듣지 않고 어느 집을 방문하거나 거리를 지날 수 없다. 기기에는 아무런 그림자도 없다. 조만간 각 사람은 내가 정복하거나 정복당하거나, 내가 사라지거나 우위를 점하거나, 그 신비스럽고 모든 곳에 퍼져있고 인지하기 어려운 쓰라린 투쟁 가운데서 죽기까지 저항하나 마침내 고난과 고통과 슬픔을 겪다가 죽음에 이르게 된다. “인생은 고난을 위해 났나니 불티가 위로 날음같으니라.” 그것은 현대인의 삶의 눈물이 시작되기 수 세기 전 한 동양의 현자의 회상이었다.

 

(2)

우리 모두는 하나님으로부터 거리가 멀어지고 소외된 것과 불협화음, 죄의식 등을 의식하고 있다. 우리의 모든 고난 배후에는 어느 정도 그것을 설명할 수 있는 비밀이 있다. 우리는 옳은 것을 경멸하고 왜곡하는 경향이 있다. 우리는 하지 말아야 할 일을 하고 해야 할 일은 하지 않은 채 내버려 둔다. 사람들은 이러한 죄의식을 벗어나고자 한다. 그들은 일에 몰두하거나 세계 여행을 떠나거나 모험의 세계를 탐구하거나 끊임없이 변화를 거듭하는 등 자신을 스스로 유쾌하게 하거나 위안하려 한다. 사실 그들은 어떤 고정된 슬픈 의식을 항상 회피하려 하고 순간적으로 모면할 수 있는 약속을 속여 취하려 한다. 하지만 그같은 일은 거듭거듭 되풀이 되어 다가온다. 예언자의 목소리가 우리를 이같이 고발한다. 조금의 실수가 없는 경찰견이 우리를 끌어내린다. “그대는 인간에 불과하다!”

이러한 죄의식이 제단과 성전과 교회와 온 세상을 뒤덮고 있다. 사람들이 사는 곳마다 어떤 종교의식이 마음의 가책을 느끼도록, 양떼나 기름 등의 몸의 열매를 강같이 드리도록 하는 무거운 죄의식을 부여한다.

 

(3) 죽음

인간의 양심은 불가피하게 죄와 죽음과 관련되어 있다. 로마서를 쓰기에 앞서 인간의 경험과 관찰에 대해 옛 성경은 모든 사람이 죄를 범했고 그 결과 죽음이 드리워지게 되었음을 강조했다. 이런 이유로, 우리는 결코 사망과 화목할 수 없다. 그것을 완곡한 제목으로 불러 보자. 그 자체를 단지 지나가는 하나의 출애굽으로 가벼이 언급해 보자. 예수 그리스도가 사망을 폐하시고 생명과 불후의 빛을 보내신 그 승리를 찬양하자. 만일 그분의 하신 일이 없었다면 우리는 결코 그 혜택을 누릴 수 없이 죄의식과 사망으로 인해 멀어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러한 세가지는 인생에서 불가피한 요소들이다.

 

2. 이 장의 주목할 만한 예외

그 거룩한 종은 인자의 운명에 한 고상한 예외를 제시한다. 왜냐하면 그분은 슬픔의 인자요 고난에 친숙한 자로서자신은 완전히 무죄하시고 선하시지만 많은 사람들의 죄를 대신하여 죽으신 분이시기 때문이다. “그는 강포를 행치 아니하였고 그 입에 궤사가 없었으나.”

이에 대해 우리가 생각해 보고 그로 인한 결론을 끌어내어 보자. 이 장에는 온 세상에 있는 그 슬픔이 있다. 그 강하신 얼굴은 한 진실한 이야기를 말해준다. 왜냐하면 낯모르는 슬픔의 혼탁한 시내가 그 고난당한 자의 심장에 쏟아졌기 때문이다. 그 물결은 거의 최고 수위까지 달했다. 멸시와 거절, 상하고 채찍질 당하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간 자처럼 되어 산 자의 땅에서 끊어졌던 그 거룩한 종은 모든 고통스런 경험을 다 통과하셨고 그 진노의 포도주 잔을 찌끼기까지 다 마셨던 것이다. 실로 그분은 고통에 관한 한 사전에 기록된 모든 문자의 의미까지 깊이 겪으신 것이었다.

적어도 그분의 경우에 관해서는 인간의 성급한 결론은 거짓되다. 일반직으로 우리는 어떤 고난에 대해 그 배후에 감춰져 있는 어떤 허물이나 죄로 인한 것임을 캐낼려고 한다. “이 사람이 소경으로 난 것이 뉘 죄로 인함이오니이까 자기오니이까 그 부모오니이까”( 9:2). 말못할 고통 가운데 있는 분들이 바로 같은 판단 기준을 아무렇게나 적용하기 때문에 어려움을 겪어왔다. 욥과 같이 수많은 이들이 동정심 없는 사람들의 찌르는 칼 같은 말로 인해 고통당했다.  그들은 그같은 고통받는 이면에 무슨 잘못된 죄가 있었는가를 삶의 가장 비밀한 것을 탐색하듯이 찾곤 했다. 그러면 고통받는 이들은 혹시나 무한자이신 하나님께 혹 부주의하여 입술로 범죄하게 될까봐 말도 못하고 다만 과도한 징계의 채찍에 다만 고통의 한숨을 내쉰 뿐이다.

그렇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경우에 있어서 그분의 독특한 고난을 그러한 식으로 설명하는 것은 전적으로 잘못된 것이다. 혹 그분의 정죄당함을 정당화 할 수 있는 결점이 하나라도 있을까하여 그분 의 생애는 현미경과 같은 것으로 탐색조사 되었다. 제자들과 친구들과 나눈 가장 비밀한 대화속에서 그분의 행적의 어떠한 어두운 점이라도 찾을 수 있을까하여 그 배신자의 날카로운 눈에 의해 샅샅이 검색되었다. 그러나 그 모든 노력이 헛수고였다. 빌라도와 헤롯조차도 그 분의 전적인 무죄함을 주장하였다. 마침내 모든 인류 중에 가장 온유하고 겸손하신 그분이 너희 중에 누가 죄로 나를 책잡겠느냐?”라고 자신의 무죄한 삶을 세상 가운데 도전하셨다. 그러므로 그 죄 없으시고 흠없으신 구세주의 고난 당하심에 대해서는 반드시 다른 해석이 주어지지 않으면 안된다. 그것을 설명할 수 있는 길은 바로 레위기의 그 엄청난 희생제사의 이면에 숨겨져 있는 상형문자 같은 비밀로서,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 단번에 영원한 희생제물로 드려진다는 것을 그림자와 같이 나타내준 것이다.  해마다 무수한 점없고 흠없는 희생제물들이 더 자라기도 전에 목숨이 끊어졌는데, 이는 그들 자신의 어떠한 죄 때문이 아니라 오로지 백성들의 죄를 대신함으로 하나님의 제단에 바쳐진 것이었다.  히브리서를 통해 밝혀지듯이 그 제물들이 희생당하는 것은 전혀 자신들의 죄 때문이 아니었음을 알게 된다. 바로 그 같은 사실이 갈보리에서 일어난 그 사건을 조명해 준다( 5:8).

방탕하게 산 아들의 빛을 대신 갚기 위해 아버지가 가난케 되면서도 그 고통을 대신하지 않는가? 기본적인 건강 법칙을 깨뜨려 몹쓸 질병에 걸린 환자들을 회생시키기 위해 의사는 무척 애를 쓰지 않는가? 수많은 구조대원들이 화재나 홍수로 죽어가는 이들을 살리고자 대신 희생을 당하지 않는가? 비록 매우 미흡하고 불완전하지만 그러한 행동들이 바로 죄없으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목숨을 사망 가운데 내어주신 것을 설명해 준다. 그래서 성령님의 깨우치심 하에 사람들은 이사야 53 4,5절의 결론에 따르게 된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고 하기 보다는 오히려 그분이 자신들의 죄와 슬픔과 질고를 진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실로 그분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셨다. 그분의 죽음은 세상 사람들의 죄를 담당하기 위해 그분 스스로 자원하여 대속하신 죽음이었다. 역사의 빛 가운데서 그같은 사실들을 살펴본 후 비로소 인간의 양심에 신약성경에 내려진 그같은 결론을 일치하여 확증케 되는 것이다. “그분은 죄를 알지도 못하신 분이었지만 우리를 위해 죄가 되셨다.”  의의 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5:18). 이것은 실로 고통과 슬픔의 비밀에 관해 한 새로운 빛을 던져주는 위대한 예외이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자 그보다는 보다 낮고 작은 의미의 대속적인 고난을 다른 이를 위해 받을 수 있다. 하지만 어떠한 자들도 그리스도처럼 다른 이의 죄를 위한 그같은 희생제물이 될 수는 없다. 그리스도 외에 어떤 사람도 다른 이의 생명을 위한 대속물이 될 수는 없다.

 

3. 이러한 진리에 대한 개인적인 적용

그 영혼을 속건제물로 드리기에 이르면.” ‘속건제물이란 용어는 레위기에 나타난다. 만일 어떤 사람이 여호와의 성물에 대하여 죄를 범하면 그는 흠없는 양을 양떼 중에 선택하여 데리고 오도록 명해졌다. 그 양은 여기서 사용된 단어처럼 그의 속건제물이었다. 그는 그의 과실에 대해 돈으로 변제할 수 있었지만 속죄 제사 자체는 양으로 되어졌다. “제사장은 그 속건제의 수양으로 그를 위하여 속한 즉 그가 사함을 얻으리라”( 5:16).

이와 비슷하게 만일 어떤 사람이 타인을 압제하거나 채무를 갚지 않거나 그에게 맡겨진 의무를 이행하지 않는 등 이웃에게 죄를 범했으면 그는 그 죄를 이웃에게 갚을 뿐 아니라 그의 속건제로 양떼 중에 흠없는 수양을 취하여 여호와께 드리는 속건제물로 삼아 제사장에게 나아와 속죄를 하여야만 하였다. 그러한 연후에 그로 인한 죄는 무엇이든 용서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6:17).

우리 중에 여호와의 성물에 대한죄를 범한 자는 없는가? 그분께 서약한 신성한 의무를 제 시간에 이행하는데 실패하지는 않았는가? 거룩한 친교를 개선해 나가지 않고 영혼의 성전을 청결하게 유지하지 않은 것 등이 우리 마음에 떠올라 우리의 입이 막히게 되고 하나님 앞에 범죄한 자로서 서게 되지 않는가?

우리 중에 이웃과 친구들에게 그 의무를 제대로 이행치 못한 자는 없는가? 비록 우리가 구약의 율법의 구체적인 조항에는 걸리지 않을 수 있고, 심지어 우리 양심도 우리를 정죄하지 않을 수 있다 해도 여전히 우리가 완전한 사랑의 기준 앞에 서면 심각한 결함이 드러날 수 있다. 타인이 내 명예를 가로챌 때 우리는 어떤 경멸적인 말을 쉽게 내뱉을 수 있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로부터 잘못된 비난을 받을 때 우리는 잠잠하기 보다는 얼마나 쉽게 방어하고 변호하게 되는가. 모세는 이것이 사람에게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 죄를 범하는 것임을 가르쳐 주었다. 사람에게 변상이 되어야 할 뿐만 아니라 여호와께 속죄제가 드려져야 했다. 그러기에 우리야의 가정의 그 보석을 강탈했던 다윗이 자신의 죄에 대해 다음과 같이 부르짖었던 것이다.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

우리가 속건제륵 드려야 함이 알마나 분명한 필요인가! 율법의 희미한 빛 가운데 있었던 유대인도 그 필요성을 느꼈다면 우리야 얼마나 더 필요하겠는가? 보튼 죄는 단순한 하나의 실수라기 보다는 영원한 의의 법을 위반한 범죄요 다른이의 대속이 없이는 영인한 힝벌을 받을 수밖에 없는 것임을 누가 알랴. 그것이 바로 우리 내적 양심의 근본적인 사실이며 죄의식은 영원한 정의의 심판대에 설 것을 요구한다.  따라서 우리는 궁극적인 죄값을 지불하기 전까지는 양심의 자유를 누리거나 그 위협에서 벗어 날 수 없다. 그때 우리는 우리 자신의 죄를 변호해 줄 뿐만 아니라 그 죄를 친히 대신해 줄 중보자를 찾게 된다.

기억된 죄의 무게로 그대가 땅속까지 짓눌릴 때, 그 끔찍한 슬픔이 아득한 옛날에 범했던 거의 잊혀진 죄를 떠올릴 때, 하나님의 진리의 전조등이 그대 영혼의 어두운 동굴을 비출 때, 그래서 깊은 어둠속에 은밀히 숨겨져 있었던 감추어진 악이 드러났을 때, 어떤 끔찍한 타락이 그대를 덮쳤을 때, 계속 되풀이 된 습관적인 실패가 그대로 하여금 도저히 용서받을 수 없다고 생각하게끔 만들 때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그 구세주를 찾기를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가 나무에 달아 죽인 예수를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살리시고 이스라엘로 회개케 하사 죄사함을 얻게 하시려고 그를 오른손으로 높이사 임금과 구주를 삼으셨느니라”( 5:30,31).

기기에 어떠한 제사장적인 도움이 필요하다고 언급되어 있지 않다. 이것은 이스라엘이 요람 시절인 레위기의 엄격한 체제를 생각해 볼 때 한층 놀랄만한 일이다. 그같은 필요가 급증하는 위기에 직면하면 인간의 영혼은 초기의 의식과 성전에서나 회막에서 드려진 정성들인 체제로 돌아가고자 하는 경향이 있다.  거기서는 각 사람이 제사장의 도움으로 친히 속건제를 드렸다. 하지만 이제 예수 그리스도는 희생제물이 되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제사장도 되신다. 거기에는 어떠한 제약도 막히는 장벽도 없다. 또한 지나가야 할 휘장도 없다. 이제 지성소에 풀어갈 길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활짝 열려져 있다. 따라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힘입어 지성소에 담대히 들어갈 수 있다( 10:19).

그렇게 하는 것이 평안을 얻는 길이다. 복음진리에 대한 증거는 우리에게 제공된 그 은혜가 우리 영혼에 널리 퍼져 철저한 안식을 누리는데 있다. 우리는 그 강하고 견고한 원리에 굳게 우리 영혼을 세워야 한다.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를 믿되 그분에 대해서가 아니라 그분 안에, 그분의 죽으심이 아니라 죽으시고 부활하심 안에 굳게 서도록 하자. 그리하여 그 영혼에 지각에 뛰어나신 하나님의 지속적인 평안이 넘치도록 하며 그분의 성품의 어떠하심이 계속 솟아나와 저녁날의 고요함같이 널리 퍼지게 하자. 바로 그같은 것이 없는 세상의 평안은 그저 피상적이고 허상이다.  오직 하나님의 평강만이 온 세계에 널리 퍼지도록 하자.

그 평안 속에서 훨씬 많은 것이 포함 된다. 인생에서 슬픔 자체가 제거되지는 않지만 슬픔 자체로 빛으로 인하여 환하게 빛나게 된다. 고난이 새로운 인내를 낳게 하며 고통이 마침내 어떤 놀라운 대속적인 성격을 부여할 것임을 믿음으로 축복된 확신으로 받아들여지게 된다. 또한 죽음조차도 놀라지 않고 받아들이게 된다. 이처럼 가장 암흑한 날로부터 가장 밝은 새벽이 솟아나게 된다. 그리하여 마침내 밤도 슬픔도 울부짖음도 고통도 죽음도 없는 새로운 세상의 여명을 밝히는 소망과 즐거움의 광선이 되어 새 하늘과 새 땅을 맞이하게 하며 그곳에서 하나님이 모든 얼굴에서 눈물을 닦아 주실 것이다.

우리의 가장 암흑한 날의 경험으로부터 우리의 은혜로우신 주님은 참된 기쁨의 수확을 얻게 하실 것이다. 바로 그분 자신도 자신의 눈물과 피흘리심으로 세상과 각 영혼들을 수확하시는 다함이 없는 기쁨을 거두실 수 있었다. 그분은 자신의 영적인 씨를 보며 그분의 생명이 배가 되심을 보신다. 그분은 또한 그분의 손의 수고로 인한 그 구속의 사역이 아버지 하나님의 기쁨이 되심을 알고 계신다.

 

(1996 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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