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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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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7. 14. 10:35 횃불/1997년

그리스도냐, 종교냐?

M. R. 디한

 

기독교는 종교가 아닙니다. 기독교는 새 생명 운동입니다. 종교란, 일종의 형식적 규범과 의식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러한 의식적 구조를 가진 종교는 날로 그 숫자를 더해가고 있는 형편입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다릅니다.

기독교의 중요한 특징은 창조주가 살아계시다는 점입니다. 그분은 우리의 구원을 이루시는 장본인이시며, 영광을 받으신 종으로 지금도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이러한 기독교의 특성을 아무도 반박할 수 없습니다. 아무리 열심있는 종교적 광신자라 할지라도 그들의 창조자가 아직껏 살아 있다고 말하는 것은 이 세상의 어떤 다른 종교에서도 들어볼 수가 없습니다.  세상의 어떠한 종교도 그 가르침과 교리만 남아있을 뿐, 그 창시자가 살아있지는 않습니다.

사람들은 종교(religion)란 말을 사용할 때 기독교도 일반적 의미의 종교라는 범주 안에 포함시킵니다. 그러나 기독교 교리의 근거가 되는 성경에 비추어 볼 때 그러한 생각은 잘못되었음이 쉽게 지적됩니다. 오늘날 많은 학교에서 가르치는 과목 중 하나가 비교 종교론입니다. 이 학문은 기독교를 하나의 종교의 범주 안에서 연구합니다. 하나 이러한 비교는 엄밀한 의미에서 볼 때 잘못된 것입니다. 왜냐하면 기독교는 종교와는 거리가 멀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기독교는 죽은 행위와 의식에 치우치는, 단순한 의미의 종교를 넘어서 구원 역사의 새 생명 운동이기 때문입니다.

 

종교와 행위

종교는 행위를 요구하지만, 기독교는 믿음을 요구합니다. 이러한 사실은 성경 전체를 통해 잘 나타나 있습니다.  밤에 찾아온 니고데모는( 3:116) 종교적으로 열심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에게 거듭나야 한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바울 역시 개종하기 전에는 엄격한 바리새인이었지만 사도행전 26:4,5을 보면 바울이 아그립바 왕 앞에서 다음과 같이 증거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내가 처음부터 내 민족 중에와 예루살렘에서 젊었을 때 생활한 상태를 유대인이 다 아는 바라. 일찍부터 나를 알았으니 저희가 증거하려 하면 내가 우리 종교의 가장 엄한 파를 좇아 바리새인의 생활을 하였다고 할 것이라”( 26:4,5)

바울은 누구보다도 열심히 종교생활을 했지만, 다메섹 도상에서 구원의 주를 만나고 나서야 구원받았습니다.

어떤 사람도 종교로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고대 바빌로니아 사람들도 종교를 가졌고, 그리이스인(헬라인)들도 종교를 가졌으며, 예수 그리스도와 바울 당시에도 종교는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들 모두에게 복음은 전파되어야만 했습니다. 오늘날 소위 기독교 국가라고 하는 나라에서도, 종교적이지만 참된 구원이 무엇인지를 모르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러므로 혹자는, “그리스도는 죄와 종교로부터 인간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오셨다라고 까지 말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그들이 가진 종교성 때문에 주님이 필요하지 않다고 느끼는 사람들에게 참된 구원의 소식을 전파하는 일은 더욱더 어려운 일이라 하겠습니다.

 

종교란 무엇인가?

종교’(Religion)란 단어는 성경에 단지 다섯번 나오고, ‘종교적’(religious)이란 단어는 두번 나옵니다. 종교란 단어는 언제나 행위나 형식주의, 의식주의와 연관되어 사용됩니다. 믿음과는 결부되지 않습니다. 성경에서 자주 사용되는 종교란 의미를 가진 라틴어는 트레스케이아’(qrhskeiva), 의식적 예배를 뜻합니다. 이 말의 어원은 헬라어로 놀라게 하다’, ‘근심하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상에 나타난 종교란 말의 근원을 찾아보면, 그 뜻은 곧 두려움과 근심으로 말미암아 드리는 의식적(형식적) 예배가 됩니다. 따라서 성경상에서 종교란 단어가 쓰일 때에는 정확히 위와 같은 뜻으로 쓰인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종교의 개념과, 마음의 변화와 기쁨과 행복과 확신과 소망을 가져다 주는 구원의 메시지를 대조시켜 보십시오.

종교를 소유한 사람에게 당신은 구원 받았습니까?”라고 물어보면 그는 그렇게 되기를 바랍니다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그러나 구원을 소유한 사람에게 당신은 구원받았습니까?”라는 같은 질문을 던져보면 그는 ,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또한 나의 의뢰한 자를 내가 알고 또한 나의 의탁한 것을 그 날까지 저가 능히 지키실 줄을 확신합니다”(딤후 1:12)라고 답할 것입니다

 

종교의 종류

종교에는 선한 종교와 악한 종교, 두 가지가 있습니다. 광신주의적이며 독선적으로 그 종교를 따르지 않는 사람들을 저주하고 핍박한다면 그것은 사악한 종교입니다. 야고보는 선한 종교는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종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1:27).

그는 이 말을 선한 행위와 결부시켜 사용하고 있습니다. 좋은 의미로 종교란 단어가 사용된 구절은 성경 전체에서 여기 뿐입니다. 그 외 다른 의미로 종교가 사용될 때에는 항상 알맹이 없는 형식주의, 단순한 의식주의와 연관되어 사용됩니다. 스스로의 행위에 만족케 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신 사역을 받아들이지 않게 함으로써 구원 없는 종교적인사람으로 만드는 것은 사단의 술수입니다.

나는 여기서 당신에게 당신이 소유한 종교에 만족을 느끼며 또한 그 종교가 당신에게 평화와 기쁨을 줍니까?”라고 묻고 싶습니다. 만약 당신이 그리스도를 마음에 모시고 있다면 그리스도는 전적으로 당신의 공로와 행위와는 상관없이 이 모든 평화와 기쁨을 줄 것입니다.

 

믿음이냐, 행위냐?

세상에는 두 종류의 복음이 있습니다.  즉 행위의 복음과 믿음의 복음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구원은 순전히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 이루어진다라고 말하고 있는 반면, 사단은 구원이 자기 행위에 의해 이루어진다고 말합니다.  창세기에 나타난 사건을 통해서 우리는 이러한 예를 잘 볼 수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범죄한 후에 그들의 눈이 밝아 자기들의 몸이 벗은 줄을 알고····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그들이 범죄한 순간 그들은 순수성을 잃어버림과 동시에 죄성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께로 돌아오지 않고 종교를 의지하려 했습니다. 즉 그들은 스스로의 행위를 의지하려 한 것입니다. 이 비극의 이야기를 창세기 3:7에 기록되기를 그들이 무화과 나무잎을 엮어 치마를 하였더라고 하였습니다. 용서와 자비를 베풀어달라고 하나님께 부르짖는 대신에 그들은 스스로의 손으로 만든 무화과 나무잎으로써 그들의 죄와 수치를 가리워 구원을 찾으려고 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그들의 행동은 그들의 자손인 모든 인류 속에서 오늘날까지 행해지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그들이 벗었다는 사실과 무언가 가리울 것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느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죄로 말미암아 타락하여 눈먼 상태에 있는 인간은 나름대로의 노력으로 가리울 것을 찾으려 합니다. 따라서 인간이 창조주의 존재 앞에 부끄러움 없이 서기 위하여 자기에게 힘이 될 수 있는 것을 끊임없이 찾고 있다는 사실을 세상의 모든 종교가 말없이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은 구제할 수 없을 정도로 종교적입니다. 모든 인간이 절대자의 존재를 의식합니다. 단지 어리석은 사람만이 그의 마음에 하나님이 없다고 말할 뿐입니다. 인간은 자기를 감찰하고 있는 심판자가 있다는 것을 감지할 뿐만 아니라 그 자신이 죄책감을 느끼면서, 더럽혀져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양심의 소리를 멈추게 하기 위해 종교적인 열심과 희생으로 그 자신의 죄를 가리우고자 온갖 노력을 기울이는 것입니다. 세상 어디에서나 사람은 자기 자신의 수치를 가리기 위해 종교를 이용합니다. 즉 벌거벗은 몸을 가리기 위해 무화과 나무잎을 엮는 행동을 계속하는 것입니다.

마음 속의 죄책감을 진정시키기 위해서 절규하며 자기의 품에 안고 있는 아기를 악어에게 던지는 이교도의 여인도 있습니다. 또 어떤 부족의 사람들은 화신(火神)이라고 하는 몰록의 아가리 속으로 자기 아이를 던져 넣기도 합니다. 어떤 어리석은 미개인은 주술사로 하여금 자기 몸을 상하게 합니다. 뿐만 아니라 이와 비슷한 형태의 일들이 세계 각처에서 무수히 일어나고 있는데, 이러한 것들을 통해서 우리는 모든 사람들이 자기 죄를 가리울 무언가를 찾고 있으며, 알 수 없는 불안과 죄책감으로부터 평화와 안식을 가져다 줄 어떤 것을 다급히 찾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처럼 이런 무화과 나무잎을 엮는 행동들이 결코 이교도들에게만 국한되는 것은 아닙니다. 소위 문명국이라고 하는 나라에서도 이와 같은 열정적 욕구로 말미암는 종교의식이 끊임없이 증가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을 탓하거나 내버려 둘 것이 아니라 바른 길을 그들에게 제시해 줄 필요가 있습니다. 그들의 노력은 두말 할 나위없이 진실합니다. 하지만 여기서 알아야 할 사실은, 우리의 처음 조상인 아담과 하와도 역시 종교적이었고 진실하였지만 그들의 선한 행동은 그들에게 아무것도 가져다 주지 못했다는 점입니다. 무화과 나무잎으로써 그들의 몸을 부분적으로 가리울 수는 있었지만 죄로 말미암은 마음 속의 고통을 떨치고 평화를 얻지는 못했습니다.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나타나셨을 때 그들은 두려움으로 숨어 떨면서 여호와를 피하려고 했습니다. 결국 그들의 종교적 행위는 그들을 구해주지 못했고, 그들에게는 그 이상의 다른 무엇이 필요했습니다. 그것이 곧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나타내시려 한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창세기 3장에 있는 한 구절을 통해 그것을 한 눈에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이 구절은 무심히 읽고 지나가는 수가 너무나 많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3:21).

무화과 나무잎은 아무런 쓸모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다른 길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 길만이 유일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길이었습니다. 우리는 위의 구절에서 세가지를 배울 수 있습니다.

1. 구원은 하나님께 속했고, 사람에게 속하지 않았으며, 또 하나님 자신이 희생제물을 준비하셨다는 사실.

2. 구원은 죄없는 대속물에 의해서만 이루어진다는 사실.

3. 구원은 피를 흘림으로써만 이루어진다는 사실.

하나님께서는 이 세가지 조건을 하나도 가감없이 다 요구하십니다. 이 세가지 조건을 충족시키지 못한다면 어떠한 희생제물도 죄를 속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이 조건을 충족시키는 제물은 하나님께서 열납하십니다. 이 세가지 조건에 대한 진리는 가인과 아벨의 제사에서도 잘 나타납니다( 4:15). 또 유월절의 어린 양, 이스라엘 백성들의 제사의식에 바쳐지던 예물들에서도 이는 잘 나타나 있습니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이런 모든 조건들(3가지)을 만족시킬 수 있는 한 분을 보내셨는데 곧 흠없고 거룩한 하나님의 어린양,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분은 세상에 와서 세가지 조건을 충족시키셨습니다. 그분은 하나님에 의해 하나님의 선물로 이 세상에 오셨지 인간의 역사나 간구로 말미암아 오신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3:16).

또한 구원은 죄없는 대속물의 죽음으로만 이루어진다는 조건을 그리스도께서는 만족시키셨습니다 그분은 죄가 없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분에게서는 어떤 조그마한 흠도 찾아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분은 죄를 몰랐지만 우리를 위해 대속물이 되셨습니다( 4:15). 그리고 그분은 친히 자기 몸을 나무 위에 달리게 하심으로 우리의 죄를 담당하셨습니다( 21:2123, 3:13). 사도 베드로는 그분에 대하여 저는 죄를 범치 아니하시고 그 입에 궤사도 없으시며”(벧전 2:22)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구원은 죄없는 속죄물의 피흘림이 있어야만 이루어진다는 세번째 조건을 만족시키기 위해서 그리스도는 우리를 죄에서 해방시키시려고 피를 흘리셨습니다.

우리가 구속된 것은 은이나 금같이 없어질 것으로 한 것이 아니요 오직 흠없고 점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니라”(벧전 1:18,19).

아담과 하와의 벌거벗음을 가리우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사용한 최초의 제물은 창세기 3:21에 나타나 있으며, 그것을 통하여 후일에 오실 구속주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과 모형을 보여 주셨습니다. 세례 요한이 예수님을 보았을 때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 1:29) 라고 하였으며, 천사가 마리아에게 나타났을 때에도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하니라”( 1:21)라고 하였습니다.

 

에덴동산의 사건을 통해서 구원받는 유일한 길을 나타내 보이셨는데, 그것은 이때까지 변하지 않았으며 앞으로도 결코 변하지 않을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다른 데로 넘어가는 자는 절도요 강도라고 확실히 가르쳐 주셨으며, 사도 바울도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1:8)라고 말했습니다.

 

종교냐, 구원이냐?

우리가 다 알듯이 구원받는 길에는 두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방법과 사람의 방법입니다. 사람의 방법은 종교요, 하나님의 방법은 순전히 은혜를 통해서입니다. 사람의 방법은 자기 스스로 무화과 나무잎을 엮는 것이요, 하나님의 방법은 어린 양과 그의 피의 제물을 통해서입니다. 또 사람의 방법은 행위에 있는 반면, 하나님의 방법은 오직 믿음에 있습니다.

어떤 길은 사람의 보기에 바르지만 필경은 사망의 길입니다”( 14:12).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말씀하시기를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14:6)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분명하게 묻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당신은 종교인입니까? 아니면 구원받았습니 까?”

만약 당신이 단순히 종교만을 소유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의지하여 하나님 앞에 나오지 않았다면, 당신은 아직 당신의 죄 가운데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당신을 부르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 질문에 답하기를 기다리십니다. 아담이 에덴동산에 숨었을 때 하나님께서 오셔서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왜 숨어 있느냐?”라고 물으셨습니다. 그때 아담은 쓸모없는 무화과 나무잎을 엮어 입고 있었음에도 여전히 범죄한 죄인 그대로 남아 있었습니다. 당신은 하늘에 대한 소망이 무엇이냐고 자신에게 물어보십시오. 당신은 나는 선한 삶을 살며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라고 말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러한 답을 가진 자의 행위는 단순히 무화과 나무잎에 지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시기를 의인은 하나도 없으며”( 3:10)라고 하십니다.

여러분은 나는 도무지 성경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라고 반박할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 말조차 무화과 나무잎에 지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이해하기 전에 먼저 믿기를 요구하십니다. 왜 하나님께서 사악한 죄인들을 위해 사랑하는 죄없는 아들을 대속물로 내어 주셨는지 우리는 다 이해할 수 없을 것입니다. 지금 당신이 해야 할 모든 것은 당신이 죄인이라는 것과 구속주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무화과 나무잎으로 만든 치마를 벗어 던지고 피난처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귀하신 피 아래로 나오십시오. 지금!

 

(1997 5월호)

 

posted by 징검 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