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그 이미지
징검 다리
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calendar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Recent Post

theWord Bible Software

Category

2014. 7. 23. 09:11 횃불/1997년

이사야서에 나타난 그리스도

 

27장 가까운 하늘의 지평선들

하늘이 땅보다 높음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 55:9).

 

하나님의 생각들

우리는 우주 만물과 섭리 혹은 구속 가운데 나타난 그분의 손길을 통하여 그분의 생각들에 대한 어떤 개념을 형성할 수 있다. 시편 기자는 하나님의 생각은 영원까지 이르며 인간의 계산을 초월하는 것이며 깊이를 헤아릴 수 없는 것으로 묘사한다. 어느날 밤 케플러는 여러 시간을 천체의 움직임을 관찰한 후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나는 하나님의 최초의 생각에 대해 생각해 보고 있다.”  그러나 거기에는 자연 세계에 표현된 것 보다도 더 이른 생각이 있다. 그 사랑이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을 선택케 했고 오랜 시간 후에 영광에 이르게 하는 것으로 정점을 이룬다. 이러한 하나님의 생각들에 대해 더 자주 생각해 보자. 그리하면 마침내 우리는 이와 같이 외치게 될 것이다.

하나님이여, 주의 생각이 내게 어찌 그리 보배로운지요, 그 수가 어찌 그리많은지요!( 139:17).

 

하나님의 길들

하나님은 그것들을 모세에게 알리셨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행하심을 통해서만 알 수 있었던 일들을 하나님의 은총을 입은 종 모세를 통해 그분의 행하시는 길들에 관한 지식을 보다 밀접하게 알 수 있었다. 하나님의 길은 신비의 바다속에 있다. 그분의 길은 슬픔의 거대한 바다를 통하여 나있다. 시편 기자는 그 길들에 대한 가르침을 받았을 때 절규하였다. 이스라엘은 그 길들을 알지 못함에 대해 거룩한 불평을 하곤 했다. 이러한 그분의 생각과 길은 마치 하늘이 땅보다 높음같이 우리의 것과는 차원이 다른 것이라고 한다. 첫째, 하늘은 땅보다 훨씬 높다. 그와 같이 하나님의 생각들과 길들은 그토록 순결하다. 둘째, 그것들은 그토록 멀다. 그러므로 그토록 풍성하다. 셋째, 그것들은 그토록 높다. 그러므로 그토록 자비롭다. 이러한 면에서 그 각각은 하나님의 성품과 자비를 상징하는 것이다.

 

(1) 그토록 높기에 그토록 순결하다.

천국에는 속된 것이나 가증한 어떤 것도 들어갈 수 없다. 안좋은 환경의 독기와 검은 얼룩을 지닌 굴뚝의 내뿜어진 연기가 결코 하늘의 순결함을 더럽힐 수 없다. 하늘의 푸르름은 하나님의 순결을 나타내는 상징으로써 그분의 이름은 거룩하며 그분은 높은데 위엄의 처소에 거하신다. 이러한 면에서 하늘과 땅의 대조는 하나님의 생각과 길과 인간의 그것들과 대조를 이룬다. 그 속에는 이러한 가르침이 분명히 내포되어 있다.

악인은 그 길을 불의한 자는 그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하늘이 땅보다 높음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

당연히 인간의 생각과 길은 하나님의 무한하고 이해할 수 없는 그 크고 놀라운 생각과 길과는 결코 견줄 수 없다. 우리의 생각과 길은 타락으로 인하여 더럽혀졌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졌기에 본질적인 면에서는 어느 정도 하나님의 생각과 길을 닳은 모습들을 나타내는 것 또한 사실이다.

천문학자들의 계산은 수학에 있어서 하나님과 인간의 생각 사이에 유사성이 있음을 입증한다. 예술가나 조각가에 의한 하나님의 일의 묘사는 미의 평가에 있어서 유사성이 있음을 입증한다. 그것이 시이든 성당같은 건축물이든 영원성을 나타내는 인간의 산물에는 방조적인 속성에 있어서 하나님과의 유사성이 입증된다.

이와 마찬가지로 도덕적인 면과 영적인 면에서도 유사성이 있다. 하나님께 참된 것은 인간에게도 참되다. 사랑, 순결, 긍휼, 겸손 등의 속성은 하나님이나 인간에게 동일하다. 하나님의 마음을 알 수 없는 것처럼 인간의 마음도 일반적으로는 알 수 없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최초의 피조물인 인간과 우리의 성품을 통해 하나님이 생각하고 행하시기에 가능케 되신 성육신에서 인간은 하나님의 생각과 길을 따라야 하고 그럴 수 있음을 확증했다. 비록 그분의 가정이 지상에 있었으나 그분은 땅의 자녀가 아닌 하늘의 아들이었고, 땅의 것들이 아닌 하나님의 영원한 것들을 구하도록 부름받았다.

죄가 이 세상에 들어옴으로 이 모든 것이 바뀌어졌다. 세상의 매력이 너무 강한 것으로 입증되었다. 지나가는 보이는 것들이 그들의 감각을 일깨웠고 창조주께서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존재하도록 의도했던 고상한 말과 천상의 음악을 막아버리고 그 조화를 깨뜨렸다. 그리하여 인간의 마음의 생각과 상상하는 바가 항상 악할 뿐이며 그 길들이 부패하였음이 너무나 분명히 드러났다. 자연히 우리의 생각과 행동들의 경향은 아래로 세상적으로 관능적이며 마귀적으로 흘러갔다. 이리하여 하나님의 생각과 길과 인간의 생각과 길 사이에는 끔찍한 차이가 생겨났다. 그러므로 거듭나지 못한 자연신이 하나님을 이해하기란 불가능하다.

우리는 우리 안에 있는 그 사람의 영을 통해서만이 서로를 알 수 있을 뿐이다. 우리의 인간적인 빠른 공감은 눈깜짝할 사이에 순간적으로 드러나며 어떠한 말로 표현할 수는 없다. 그러나 우리는 바로 그같은 공감대를 통해 서로를 이해할 수 있다. 이것은 우리들과 하나님 사이에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의 특성과 길에 대해 문외한인 자연인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것은 마치 미개인이 높은 교양을 갖춘 세련된 영적인 사람의 생각과 길을 이해할 수 없는 것보다 더한 일이다. 자연인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는 것도 불가능하다.

하나님의 생각은 거룩하며 그분의 길은 순결하다. 그러나 회심하지 않은 자들의 생각과 길은 거룩치 못하며 불순하다. 하나님의 생각은 사랑이며 그분의 길은 온유하다. 그러나 거듭나지 못한 자들은 자기 중심적이며 해로운 생각을 품는다. 하나님의 생각은 진리이며 그분의 길은 신실하다. 그러나 거듭나지 못한 자들은 신실치 못하며 기만적이다. 그러니 육에 속한 자들이 하나님을 기뻐하시게 한다는 것은 얼마나 불가능한 일이겠는가! 그들은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만 아니라 굴복할 수도 없다. 또한 자연인은 사악한 그의 길을 버리고 불의한 그의 생각을 버리고 돌이켜 회개하지 않는 한 하나님과 영원히 살수 없다.

바깥 어두운 곳의 고통이 아무리 심하다 할지라도 그들 내면에 있는 그 악함과 불경함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닐 것이다. 병든 눈에는 청년들의 눈을 기쁘게 하는 눈부신 여름 햇살보다 더 고통스러운 것이 없을 것이다. 거룩치 못한 영혼에게는 영원한 반대와 대립이 되는 불꽃같은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사는 것보다 더 고통스러운 일은 없을 것이다. 그는 태양보다 밝은 빛이 빛나며 오묘한 음악과 수많은 무리들의 축제 그 거룩한 활동 등을 보고 이같이 외쳤을 것이다.

오 거룩한 하나님이시여, 당신과 내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당신의 임재는 나를 괴롭게 하는 것일 뿐이외다.”

그렇다면 이제 악한 자는 그 길을 불의한 자는 그 생각을 버려야만 한다. 그들은 이제 곁길 목초지로부터 돌이키고, 그들의 생각의 급류를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공허하게 멈추어 있었던 두 눈을 들어 승천하신 주님의 길을 주목해야만 한다. 영원한 저주의 벼랑길로 거의 내딛었던 그 발도 이제 하나님이 명하신 길로 돌이켜야 한다. 그리고 그 의지도 하나님의 의지에 순복해야만 하며, 그래서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의 영광을 위하여 하나님이 그의 목전에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게 하시도록 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승천하심은 우리에게 나아갈 방향을 주고 성령님은 이제까지 살았던 것보다 훨씬 더 새롭고 나은 삶을 살 수 있는 능력을 부여해 주신다( 3:14). 이처럼 천국의 순결한 삶은 우리가 거하는 지상에까지 내려오셨는데 바로 우리 주님의 지상생애를 통해 거침없이 나타난 것이다(3:13).

 

(2) 그토록 멀기에 그토록 풍성하다.

하늘이 땅보다 얼마나 높은지 상상해 보라. 당신 자신이 어떤 천사의 비행기에 실려져서 해왕성과 천왕성이 화려한 영광으로 불타는 곳을 통과하도록 해보자. 그곳을 가로지를 때 그들 사이에 놓여 있는 그 어둡고 조용한 만을 지날 때 그 가장 가까운 고정된 별 사이에 거리가 너무나 멀어 우리의 태양은 마치 두 발자욱에 지나지 않는 듯이 보일 것이다. 그 먼 지점에서 당신이 여러 혹성들을 거치는 그 상상불가한 거리를 지난다고 생각해 보자. 실상 그 혹성들의 빛은 수백만년 동안 우리를 향해 뻗어왔지만 아직도 지구에 닿지 못하고 있다. 바로 그같이 광대한 것이 하늘이다. 그렇다면 하늘은 땅보다 훨씬 높은 것이 사실이다. 그리고 정확히 그와같은 비율로 하나님의 용서의 풍성함은 우리의 상상을 훨씬 초월하는 것이다.

그가 널리 용서하시리라.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하늘이 땅보다 높음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 55:79).

바로 그같은 생각을 사도 바울은 계시에 관한 그의 서신에 가장 빛나는 구절로 언급하고 있다( 5:1221). 그의 요점은 죄로 인해 행해진 것이 무엇이든지간에 하나님의 은혜는 그보다 훨씬 더 크다는 것이다. 만일 한 사람의 범죄로 인해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임했다면 물론 은혜도 한 분, 영광스럽고 타락하지 않은 인자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과 그분의 하신 일을 통해 모든 이에게 미쳐야 한다는 것이다. 만일 한 사람의 이기적인 행위로 인해 사망이 그같은 발판을 얻을 수 있었다면 마찬가지로 십자가로부터 빛나는 그 비할데 없는 자기 부인의 행위로 인해 영원한 생명이 왕노릇 할 수 있음에 틀림없다. 만일 죄가 사망 안에서 왕노릇한다면, 은혜는 한층 더 의를 통하여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왕노릇할 것이다. 그분은 하나님이 주셨던 율법이 죄의 그 가득찬 적의와 폭력을 드러낼 수 있는 한도 만큼 나아갔다. 그분은 죄에게 일종의 백지 위임장을 내어 주었던 것이다. 율법 시대의 절정을 이루었던 그 십자가에서, 그 죄의 엄청남이 베일이 벗겨지듯 폭로되었다. 이전에는 오직 하나님만이 그같은 죄의 본질과 가능성이 무엇인지를 알았지만, 그순간 이후로 그 어둠의 비밀이 우주 가운데 드러나게 되었다. 노아의 홍수같은 죄의 검은 물결은 지상의 모든 높은 산들을 덮었지만, 은혜는, 고작해야 지상밖에 덮을 수 없는 그 홍수보다 휠씬 높은 하늘과 같이 풍성히 공급되어졌다.

우리의 용서와 하나님의 용서 사이에는 어떠한 비교도 할 수가 없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것으로 하나님의 어떤 것을 잴 수 없다. 우리는 만일 더 적절히 뉘우치고 더 온전히 회개하면 용서하리라고 말한다. 또한 만일 그 죄가 너무 의도적이지 않고 너무 심각한 것이 아니라면 용서할 것이라고 말한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비록 용서한다 하더라도 우리는 결코 잊지 않을 것이다. 우리의 용서는 항상 준비되어 있지 않다. 우리는 종종 우리를 모욕하는 자들을 향해 주춤거리고 회피하게 된다. 바로 그러한 기억들로 인해 우리가 하나님의 용서의 완전하심과 하나님이 우리의 죄를 더 이상 기억지 아니하시리라는 그 온전한 의미를 제대로 깨닫지 못하는 것이 결코 놀라운 일이 아니지 않겠는가? 그대의 비참한 기준을 뒤로 내어 버리라. 당신 자신의 용서나 다른 사람의 용서는 여기 있는 당신을 긍정적으로 돕지 못할 것이다.

당신의 측량줄은 전혀 쓸모없는 것이다. 당신의 추측은 부질없는 것에 불과하다. 하늘이 땅보다 얼마나 높은지 생각해 보라. 그리고 마음으로 참으로 회개하고 입술로 자백하며 그분께로 돌이키는 자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용서의 풍성함에 대해 계산해 보기 시작하라.

그 탕자는 고작해야 하인 중에 하나로 취급받는 인색한 용서만을 기대할 수 있었다. 그것은 바로 용서에 대한 그의 개념이 더 이상 높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아버지는 그에게 달려가서 그의 목을 안고 껴안고 가장 좋은 옷을 입히게 했으며 가장좋은 음식을 차린 그 식탁에 앉게 했다. 그것이 바로 용서에 대한 인간의 생각과 그리스도의 생각 사이에 있는 차이이다. 하나님이 용서하실 때 그분은 더 이상 기억하기를 멈추신다. 그분은 구름의 사라짐같이 우리의 불의를 제하시고 먹구름 같은 우리 죄를 없애 주신다. 그분은 우리를 단지 용서받은 죄수로 여기지 않으신다. 오히려 우리를 사랑하는 아들들로 그분의 가슴에 두신다. 그분은 우리에게 완전한 의를 전가하신다 그분은 우리를 마치 가장 사랑스런 자 중에 가장 완전한 사랑의 대상으로 여기신다. 그분은 우리 아들들의 슬픈 결과들을 축복으로 변화시키신다. 그래서 우리로 그 먼 나라로부터 돌이켜 산들이 찬송을 터뜨리며 나무들이 손뼉치도록 하신다. 이러한 변화들은 회개한 죄인을 위해 주어지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영원한 기념이 될 것이다. 이것은 정녕 하늘이 땅보다 높음같이 용서에 대한 인간의 개념보다 훨씬 높은 것이다.

 

(3) 그토록 멀기에 그토록 인자하다.

하늘이 땅보다 그토록 멀기에 하늘은 땅의 습기를 그 풍성한 가슴에 모을 수 있다. 유람선 같은 구름은 메마른 대지 위에 비옥한 빗줄기를 떨어뜨리기 위해 비와 눈같은 소중한 짐들을 나른다. 그리고 파헤친 밭고랑을 따스하게 덮든 외투가 되기도 한다. 이처럼 하늘이 땅보다 높기에 비가 내리고 하늘로부터 눈이 내리며 지상에 물을 공급하여 싹이 나게 하며, 심는 자에게 먹을 양식과 씨를 준다.

하나님이 그토록 위대하시기에 그분에게는 일종의 의무가 있다. 그분이 그 풍성한 하늘에 거하시기에 낮고 타락한 상태에 있는 우리를 도울 도덕적 채무 아래에 있는 것이다. 모든 바른 의식을 가진 사람들에게 주어진 권세는 슬픔과 고통에 처한 이들을 구원하기 위한 것임이 불가피한 논리이다. 하물며 인생이 그러할진대 사랑이신 무한하신 하나님은 얼마나 더 그러하시겠는가! 만일 바울이 자신을 모든 사람에게 빛진 자로 여겼다면 하나님은 얼마나 더 그러하시겠는가! 인간의 필요를 채우시는 하나님은 얼마나 은혜로우시고 자비하신가!

그분의 말씀은 부드러운 이슬처럼 내리며 눈처럼 순결하고 따스함을 준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그분의 은사의 부요함과 그 놀라운 가치를 어느 누가 다 말할 수 있겠는가?

자비의 시내는 결코 멈추지 않으리

그러니 커다란 목소리로 찬송을 올리라.

우리 모두가 대답해야 할 한가지 질문은 하나님의 심령으로부터 흘러내리는 그같은 은총에 우리가 어떻게 응답할 것인가라는 문제이다.

우리는 땅이 그 위에 자주 내리는 비를 흡수하여 밭 가는 자들의 쓰기에 합당한 채소를 내면 하나님께 복을 받고 만일 가시와 엉겅퀴를 내면 버림을 당하고 저주함에 가까워 그 마지막은 불사름이 되리라”( 6:7,8)라는 말씀을 알고 있다. 우리 영혼에 내리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 우리가 그같이 보답해서야 되겠는가? 우리 중에 만일 그러한 자들이 있다면 이는 실로 슬픈 일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지금이라도 그러한 가시와 질려가 잣나무와 화석류로 바뀔 수 있다. 이제 잘 기경되어 화초를 내는 이는 복있는 자이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분의 상속자가 된 우리 외에는 누가 그렇게 될 수 있겠는가. 주님은 그분의 이마에 피땀을 흘리시며 오랜 세월동안 우리에 대해 기다리시고 인내하셨다.

 

(1997 6월호)

 

posted by 징검 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