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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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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7. 23. 09:14 횃불/1997년

주께서 재림하시는 날에

C. H. 매킨토쉬 지음

1. 서문

신약성경을 주의 깊게 읽는 독자라면 성경 곳곳에 세 가지의 엄숙하고 중대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 중 첫번째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셨다가 승천하여 아버지께로 돌아가셨다는 것이고, 둘째는 성령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지금도 역사하고 계시다는 것이며, 세째는 하늘에 오르신 예수께서 다시 오실 것이라는 사실이다.

 

이것이 성경에 나타난 세가지 위대한 주제들이다. 이 각각의 주제는 저마다 이중적인 관계를 형성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그것은 세상과 교회에 대한 관계인데, 세상에 대해서는 특히 회개하지 않는 사람들을 포함하고, 교회에 대해서는 특별히 교회를 구성하고 있는 각각의 지체들과 관계된다. 어떤 사람이, 자기가 현재에 처한 상태와 장차 맞이하게 될 운명에 대해서 성경이 말하고 있는 이 엄숙한 진술이 자신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며 꽁무니를 뺀다고 해서 피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아는 바와 같이, 분명히 교리가 있다. 하지만 단순히 그 교리를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 뜻을 드러내려고 하나님께서 부르신 자들이 각각 다양한 모습으로 영감을 받아서 기록한 사실들을 말하려고 하는 것이다. 무모하게 사족을 단다거나 미화시키려는 의도는 없다. 기록으로 남겨진 사실 자체가 진실을 드러냄으로써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칠 것이기 때문이다.

 

. 먼저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에 오셨다는 사실을 살펴보자.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독생자를 주셨으니 “, “하나님의 아들이 오셨다.” 그분은 하나님의 마음과 뜻 그리고 성품과 인격을 드러내 보여주신, 완전한 사랑으로 오신 분이시다. 그분은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이시고 그 본체의 형상이셨으나, 도움과 동정이 필요한 모든 사람의 요구 앞에 낮고 겸손하시고 은혜로우시고 친근한 사람이셨으며, 거리에서나 일상의 삶 가운데서 만날 수 있었던 분이셨고, 친절하고 자애로우시며 가장 가난한 자라도 가까이 할 수 있던 분이셨으며, 어린 아이를 품에 안고 가장 부드럽고 친절하게 보듬으셨던 분이셨고, 과부의 눈물을 닦아 주시고 상처받아 애통해 하는 자를 위로하시던 분이셨으며, 굶주린 자를 먹이시며 병든 자를 치료하시는 분이셨고 가난한 문둥병자를 깨끗게 하시던 분이셨으며, 궁핍하고 비참한 모든 사람들의 필요를 채우던 분이셨다.

 

그분은 열심히 선을 행하셨다.” 사람들의 필요를 채우시기 위하여 지치지 않고 일하던 종이셨다. 결코 자기를 돌아보지 않으셨고, 그 어느 것 하나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으셨다. 남을 위한 삶을 사신 것이었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애통하고 곤고한 인생들의 심령을 위로하는 것이 그분의 음료요 양식이었다. 그분의 사랑 넘치는 마음이 죄로 시달리고 애통한 이 세상에서 억눌린 모든 사람에게 축복의 물줄기로 흘러 넘치었다. 여기 우리 경탄할 만한 사실들이 있음을 본다. 이 세상을 찾아오신, 이 땅에 친히 발을 디디고 오신 이 분은 누구신가. 우리가 이제까지 말해오던 이 분은 거룩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우주를 창조하시고 보존하시는 분이시며, 겸손하셔서 자기를 비우셨고, 사랑이 많고 은혜로우신 인자, 나사렛 예수시며, 영원히 복되시고 점없고 거룩하며 완전한 인간이셨고, 모든 것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이셨다. 하나님께 범죄함으로써 영원한 형벌을 받을 수밖에 없는 자들을 위해, 완전한 사랑으로서 이 세상에 오셨다. 그분은 파괴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치료하시니 위해 오셨으며, 심판이 아니라 구원하고 축복하러 오신 것이다. 이 복되신 분이 어떻게 되셨는가? 세상은 그분을 어떻게 대우하였는가? 세상은 그분을 거절했다! 세상은 이 거룩하고 은혜로우시며 완전한 이 사람을 저버리고 강도와 살인자를 더 원하였다. 세상은 세상의 것을 선택한 것이다. 세상은 예수님과 강도 하나를 사람들 앞에 세우고 질문을 던졌다. “어느 편을 택하려는 가?” 그들은 어떤 대답을 했는가? “예수가 아니라 바라바요!”( 27:20,21). 종교지도자들과 백성의 인도자들은(이들은 백성을 옳은 길로 인도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가난하고 무지한 군중들을 설득해서 하나님의 아들을 거절하고 강도와 살인자를 대신 받아들이게 했다!

 

독자들은 몸서리칠 죄악을 범한 이 세상에 살고 있음을 기억해야 하리라. 그렇게 해야 할 뿐만 아니라, 진실로 회개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다면, 그 때는 범죄한 세상의 한 부분이요 한 패가 되며, 또한 똑같은 범죄 아래 놓여 있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가장 엄숙한 문제이다. 세상은 하나님의 아들을 거절하고 모살한 범죄에 대하여 책임을 지게 될 것이다. 우리는 이에 대하여 성령의 영감을 받은 네 명이나 되는 증인들의 증거를 확보하고 있다. 온 세상 -유대인과 이방인- 의 왕과 통치자들, 제 사장들, 그리고 백성 -모든 계급, 분파,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박도록 동의했던 무리들,- 이 모두가 하나님의 완전한 현현이셨고, 모든 것을 다스리시며 영원히 복된 하나님이신, 이 땅에 유일 하시고 완전한 인간이셨던 예수를 죽음에 넘기도록 동의한 기록을 마태, 마가, 누가, 요한 등 모두가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4명의 복음전도자들이 거짓된 증인들이라고 선언하든가 아니면 세상이, 전체적으로 그리고 각기 그 부분을 구성하는 요소로서,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처형한 끔찍한 범죄로 물들어 있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이것이 이 세상과 회개치 않은 모든 사람들을 판단하는 참된 표준이다. 만일 내가 세상이 어떤 것인지 알아 보려 한다면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아들을 모살한 책임이 세상에 있다는 사실을 상기해 보기만 하면 된다. 두려운 일이다! 이는 아주 엄중한 방법으로 세상이 어떠함을 나타내 주는 하나의 사실이요, 흑암의 그 무시무시한 특성을 지닌 세상을 우리의 면전에 세워놓는 사실인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세상과 논쟁을 벌이신다. 그 분은 이것을 통해서 문제를 해결하실 질문을 가지고 계시는데, 사람들이 쉽게 듣고 양심의 가책을 받도록 단순하게 언급하는 의미심장한 질문이다. 의로우신 하나님께선 자기 아들의 죽음에 대해 보응을 해야 하신다. 세상이 사악한 강도를 용납하고 무고한 자를 죽인 일은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즉 이것은 그 자체가 전율할 처사였을 것이다 왜 그렇지 않으랴, 그 무고하신 분은 다름아닌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께서 극진히 사랑하신 아들이셨던 것이다.

 

이 얼마나 두려운 생각인가! 세상은 두 강도 사이에 그분을 십자가에 못박은 일에 대하여 회계해야 할 것이다! 이것은 얼마나 두려운 회계가 될 것인가. 그 보응의 날은 얼마나 처절할 것인가! 심판의 검을 뽑아, 자기 아들의 죽음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보응하시는 때는 그 얼마나 가공할 파멸이 있을 것인가! 세상이 개선되어 가리라는 생각은 얼마나 헛된 노릇인가! 예수 그리스도의 핏자국으로 온통 얼룩져 있는데 개선이란 말인가! 그런 죄악상으로 인해 하나님의 심판 아래 놓여 있는데도 개선이라니! 사랑하기에 축복하고 구원하려 보내신 아들, 그분의 사랑하신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천대한 일에 대하여 회계해야 할 판국인데도 개선이란 말인가!

 

그 얼마나 앞뒤가 꼭 막힌 우둔인가! 그 얼마나 어처구니 없는 우매인가! 독자여 결코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 하나님께서 사랑하신 독생자를 모살한 그 죄과에 대해서 파멸의 빗자루로 일소하고 심판의 칼로 보응하여 결말을 지을 때까지 세상이 개선되리라고는 꿈도 못 꿀 일이다. 세상이 예수 그리스도의 저주스런 죽음 아래 있는 데도 끊임없이 개선되어 나갈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더 치명적으로 거짓된 망상이다. 예수 그리스도 보다 바라바를 선호한 이 세상이 개선되어 간다는 것은 얼토당토 않는 일이다.  이런 세상 위에는 하나님의 단호한 심판이 내려질 따름이다.

 

그래서, 현재의 상황에 있어서나 미래의 운명에 있어서 세상이 예수 그리스도를 소유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은 얼마나 치명적인 일인지 모른다.

 

그러나 여기 또 다른 뜻이 있다. 이것은 대체로 하나님의 교회와 성도들 개개인에 대한 의미이다. 세상이 그분을 거절한다면 하늘은 그분을 받아들일 것이다. 만일 사람이 그분을 배척한다면, 하나님께서는 그분을 높이실 것이다. 만일 사람이 그분을 십자가에 못박는다면, 하나님께서는 그분에게 왕관을 씌울 것이다. 우리는 이 두 사실을 주의 깊게 분별해 보아야만 한다. 세상의 행위로나, 인간의 행위로 보건데, 예수 그리스도를 죽음에 넘긴 그들 앞에는 추호도 용서받지 못할 진노와 심판이 놓여있을 뿐이다. 반면에, 하나님의 행위로써 보여진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회개하고 믿는 모든이에게 온전하고 영원한 축복을 포함하고 있다. 다음의 성경 구절을 보면 그 사실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잠시 시편 69편으로 돌아가보자. 이것은 인간의 손에 고난을 받고 계시며 하나님께 보수해 주시도록 탄원하시는 우리의 복되시고 경모 받으실 주님을 생생하게 묘사해 주는 말씀이다.

 

여호와여 주의 인자하심이 선하시오니 내게 응답하시며, 주의 많은 긍휼을 따라 내게로 돌이키소서. 주의 얼굴을 주의 종에게서 숨기지 마소서. 내가 환난 중에 있사오니 속히 내게 응답하소서. 내 영혼에게 가까이 하사 구속하시며 내 원수를 인하여 나를 속량하소서. 주께서 나의 훼방과 수치와 능욕을 아시나이다. 내 대적이 다 주의 앞에 있나이다. 훼방이 내 마음을 상하여 근심이 충만하니 긍휼히 여길 자를 바라나 없고, 안위할 자를 바라나 찾지 못하였나이다.  저희가 쓸개를 나의 식물로 주며 갈할 때에 초로 마시웠사오니 저희 앞에 밥상이 올무가 되게 하시며 저희 평안이 덫이 되게 하소서. 저희 눈이 어두워 보지 못하게 하시며 그 허리가 항상 떨리게 하소서. 주의 분노를 저희 위에 부으시며 맹렬하신 노로 저희에게 미치게 하소서. 저희 거처로 황폐하게 하시며 그 장막에 거하는 자가 없게 하소서.대저 저희가 주의 치신 자를 핍박하며 주께서 상케 하신 자의 슬픔을 도말하였사오니 저희 죄악에 죄악을 더 정하사 주의 의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소서. 저희를 생명책에서 도말하사 의인과 함께 기록되게 마소서”( 69:1628)

 

이 모든 말씀은 심오하고 엄숙한 감동을 준다. 탄원하시는 말씀 말씀마다 응답이 있다. 말씀 한 마디도 땅에 그저 떨어지는 법이 없다. 하나님께서는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에 대하여 틀림없이 보수하실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을, 자기의 사랑하는 아들을 저들의 손으로 어떻게 대우하였는지에 대하여 사람들을 다루실 것이다. 이 교훈을 독자들이 마음속 깊이 새겨두는 것이 마땅하리라. 사람들을 적대하여 저주하시는 주님을 생각한다는 것은 얼마나 두려운 일인가! 주님의 대적자들에게 하나님께 복수해 주시도록 청하시는 주님의 말씀을 듣는 일이 얼마나 소름끼치는 일인가! 상처를 입으신 아들의 부르짖음을 들으신 거룩한 이의 반응이 얼마나 무시무시할 것인가!

 

그러나 이 장면의 또 다른 면을 관찰해 보자. 시편 22편을 보자. 이것은 하나님의 손에 고통 받으시는 복되신 이를 묘사해 주고 있다. 이곳에서의 결과는 전적으로 판이하다. 심판과 복수 대신에 보편적이고 영구한 축복과 영광이 그려져 있다.

 

내가 주의 이름을 형제에게 선포하고 회중에서 주를 찬송하리이다.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너희여. 그를 찬송할지어다, 야곱의 모든 자손이여, 그에게 영광을 돌릴지어다. 너희 이스라엘 모든 자손이여, 그를 경외할지어다. 그는 곤고한 자의 곤고를 멸시하거나 싫어하지 아니하시며 그 얼굴을 저에게서 숨기지 아니하시고 부르짖을 때에 들으셨도다. 대회 중에 나의 찬송은 주께로 온 것이니 주를 경외하는 자 앞에서 나의 서원을 갚으리이다. 겸손한 자는 먹고 배부를 것이며, 여호와를 찾는 자는 그를 찬송할 것이라. 너희 마음은 영원히 살지어다. 땅의 모든 끝이 여호와를 기억하고 돌아오며 열방의 모든 족속이 주의 앞에 경배하리니 나라는 여호와의 것이요 여호와는 열방의 주재심이로다 세상의 모든 풍비한 자가 먹고 경배할 것이요, 진토에 내려가는 자 곧 자기 영혼을 살리지 못할 자도 다 그 앞에 절하리로다. 후손이 그를 봉사할 것이요 대대에 주를 전할 것이며 와서 그 공의를 장차 날 백성에게 전함이여, 주께서 이를 행하셨다 할 것이로다”( 22:2231).

 

위에 인용한 두 말씀을 통해 그리스도의 죽음에 대하여 아주 큰 차이를 지닌 두 국면을 본다. 예수님께서는 의를 위하여, 사람들의 손에 순교자로서 죽음을 당하셨다. 이 일에 대해 사람은 저마다 하나님 앞에서 회계를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죄를 위하여 하나의 희생제물로서 하나님의 손 아래서 죽으셨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에게 모든 축복의 기초가 된다. 그분의 순교적 죽음은 이 하나님이 없는 세상에 진노와 심판을 가져온다. 그분의 기름부음을 통한 죽음은 교회에, 이스라엘에 그리고 모든 피조물에게 영원한 생명샘의 근원과 구원을 열어준다. 예수 그리스도를 죽임으로 해서 세상은 극에 달하는 죄를 범한 것이지만, 교회로 받아들인 자에 대해 안전을 보장하게 된다. 세상은 십자가의 피로 얼룩졌으나, 교회는 십자가의 피로 정화되었다. 이런 식으로 기록된 내용이 신약성경에 담긴 위대한 세가지 사실 중에 이중적인 관계를 이루고 있는 첫번째 사실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셨고 또한 떠나셨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사랑하신 연고로 오셨고”, 세상이 하나님을 미워한 연고로 떠나셨다.” 하나님께서 질문을 하신다면, “내 아들을 네가 어떻게 하였느냐?” 라고 하실 것이다. 대답은 무엇일까?

 

우리는 그를 증오했고 배척했으며, 십자가에 못박았습니다. 우리는 그보다도 강도를 더 원합니다.”

 

그러나, 모든 은혜의 하나님께 영원한 축복을 입은 그리스도인, 진실된 신자는 하늘을 향해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주님이 계시지 않으면, 저를 위한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주께서 이 죄 된 세상에서 떠나시고 계시지 않으면 나를 둘러싼 모든 환경은 도덕적으로 황무지가 될 것이며 절대적으로 황폐해지고 말 것입니다.”

 

주님께서 세상에 계시지 않는다. 이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신실한 자들이 생각하고 있는 바, 세상이 분명히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는 곳임을 말해 준다. 세상은 예수 그리스도를 소유하려 하지 않는다. 이것으로 넉넉하다. 그러니 이제 그 어떤 것이든 두려운 소식이 들려온다 해도 놀랄 이유가 없다. 경찰의 보고나 법정에 계류중인 소송 사건들, 또는 우리가 살고 있는 도시의 통계자료에 놀랄 필요가 없다. 모든 인간의 선이시요 성육신 하신 자인 거룩한 그리스도를 거절하고, 대신에 강도와 살인자를 선택한 것은 세상이 얼마나 사악한가를 말해 주는 것이다. 이 세상이 공허하고 무정하다는 것을 알고는 놀랄 것인가? 또 신뢰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서 놀랄 것인가? 그렇다면, 이 세상에서의 사랑하시는 구주 예수의 부재가 무얼 말해주는지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나타내 주는 바가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사랑이심을 증거해 주는 것인가? 지당한 말이다. 그리스도께서 영원한 지옥의 불꽃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고귀하신 당신의 생명을 내어 주셨음을 증거해 주는가? 복된 진리이니, 비길데 없는 주님의 성호를 찬양해 마땅하다! 그러나 세상을 대하여 십자가는 무엇을 증거하는가? 죄악이 관영했고, 심판의 날이 정하여졌음이다.  온전하게 선하셨던 분을 십자가에 못박음으로써 더 이상 변박할 수 없이 세상이 철저히 악한 것임이 증명되었다.

 

내가 와서 저희에게 말하지 아니하였더면 죄가 없었으려니와 지금은 그 죄를 핑계할 수 없느니라. 나를 미워하는 자는 또 내 아버지를 미워하느니라, 내가 아무도 못한 일을 저희 중에서 하지 아니 하였더면 저희가 되가 없었으려니와 지금은 저희가 나와 및 내 아버지를 보았고 또 미워하였도다. 그러나 이는 저희 율법에 기록된 바 저희가 연고없이 나를 미워하였다 한 말을 응하게 하려 함이니라. 내가 아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거하실 것이요, 너희도 처음부터 나와 함께 있었으므로 증거하느니라”( 16:2226).

 

. 그러나, 이제 잠시 두번째의 중요한 사실을 살펴보아야 한다. 성령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셨다는 것이다. 복 되신 성령께서 하늘로부터 오신지 18세기가 넘었고, 이제도 우리와 함께 계신다. 이것은 실로 엄청난 사실이 아닐 수 없다. 이 땅에 성삼위 중 한 위격이 함께 계시는데, 그분의 현존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재가 그러하듯이, 세상과 교회에 대하여 이중적인 관계를 가진다. 다시 말하면 그것은 세상과의 관계요, 모든 남녀노소에 대한 관계이며, 또한 전반적으로 교회와의 관계요, 교회 안에 있는 각각의 지체들과의 관계인 것이다.

 

세상에 대하여, 이 위엄있는 증인은 하나님의 아들을 거절하고 십자가에 못 박은 일을 무서운 범죄로 판결하시려고 하늘로부터 오셨다. 교회에 대하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재하신 동안 주님을 대신하여 그분의 임재하심과 사역을 통해 하나님의 자녀들을 위로하시고자 축복된 위로자로 오셨다. 그리하여 성령은 세상에 대하여는 엄한 심판자요, 교회에 대하여는 존귀하신 위로자가 되시는 것이다.

 

성경의 몇몇 구절을 읽어보면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 앞에 겸손히 경외하는 경건한 독자들은 심령 속에 이러한 사실을 인식하게 될 것이다.

 

요한복음 16장으로 돌아가 보자.

지금 내가 나를 보내신 이에게로 가는데 너희 중에서 나더러 어디로 가느냐 묻는 자가 없고 도리어 내가 이 말을 하므로 너희 마음에 근심이 가득하였도다.  그러하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하실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죄에 대하여라 함은 저희가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 의에 대하여라 함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니 너희가 다시 나를 보지 못함이요 심판에 대하여라 함은 이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음이니라”( 16:511).

 

또한 요한복음 14장에는 이와 같이 기록되어 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조금 있으면 세상은 다시 나를 보지 못할 터이로되 너희는 나를 보리니 이는 내가 살았고 너희도 살겠음이라”( 14:1519).

 

위에 인용된 말씀은 성령의 임재하심에 대해서 이중적인 구조가 있음을 보여 주는 예이다. 개략적인 서문에서는 이 주제를 더 자세히 다를 수가 없으나, 독자들이 성경의 조명을 힘입어 연구해 나갈 수 있으리라 믿는다. 또한 그것을 연구하면 할수록 더욱 깊히 성령의 임재하심에 대해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그 중요성을 느끼고 체험하게 될 줄로 믿는 바이다.

 

애석한 일이다! 이런 사실을 거의 이해하지 못하고 있으니 말이다. 또한 그리스도인들이 영원하신 영이시요 하나님이신 성령의 임재가 지상사역을 통해 어떻게 관여하고 계시는지, 세상에 임하게 될 결말이 얼마나 엄중할는지, 거룩한 모임 특히 개개의 성도들에게 다가올 결과가 얼마나 축복된 것인지 도무지 알지 못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러나 또한 복된 일이다! 어느 곳에 있든지 성도들이 이 사실을 더 깊이 깨달을 수 있으니 말이다. 내주하시고 동행하시는 그분, 그 거룩하신 위격으로 말미암은 것을 묵상 할 수 있으니 말이다. 개인의 신앙생활에서 그분을 근심케 않으려고 하며, 공적인 모임에서 그분을 소멸케 않으려고 하는 간절한 소원을 가질 것이기에 말이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다면 다음 편에는 우리가 기술하려고 하는 일련의 내용들 가운데 직접 관련이 있는 세번째 주제, 즉 우리의 주님이시요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해서 다룰 것이다. 하늘로부터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진실한 삶 가운데 기다리기 위하여, 그 무엇보다도 영광된 이 주제를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 심령 속에 강하고 선명하게 열어 주시기를 !(다음 호에 계속)

 

(1997 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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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징검 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