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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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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8. 25. 07:26 횃불/1998년

노아 그의 생애와 그 시대

사무엘 W 제밍스

5: 누가복음서의 노아

누가복음은 마태복음처럼 시대적으로 구성되어 있지 않고 도덕적으로 구성되어 있다. 누가복음에서는 주로 제사장들과 성전에 대해 다룬다. 헌신, 사랑, 기쁨 그리고 예배가 그 주된 주제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가복음에는 미래에 대한 언급이 있는데 17장이 그 중의 하나이다. 그곳에 암시되어 있는 노아와 그의 시대는 마태복음의 그것과는 전혀 다르게 감시되어 있다.

마태복음 24,25장에서 주님은 이미 이스라엘에게 거절당하는 고통을 겪으시고 원수의 치명적인 공격을 기다리고 계신다. 바로 그 지점에서 그분은 이스라엘의 미래에 대한 놀라운 예언적 윤곽을 밝히신다.

누가복음 17 20절에서 주님은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라는 바리새인들의 질문을 받게 된다.  그들은 도래할 일들에 대한 고정관념을 가진 듯했고 그들은 랍비들의 가르침을 신뢰했다. 그러기에 주님의 가르침은 그들이 보았던 관점과 반대인 것처럼 여겨졌다. 참으로 그들은 하나님의 놀라운 움직임에 대해 소경이었고, 주님은 그들의 그같은 모습에 대해 종종 정죄하셨다. 종교 지도자들은 그 백성 가운데 이미 와 계신 그 왕을 보지 못했다( 17:21). 침례 요한은 이렇게 말했다.

너희 가운데 너희가 알지 못하는 한 사람이 섰으니.” 어쩌면 그들은 그때는 주님이 자신을 아직 계시하지 않았다고 핑계할지 모른다. 그러나 기적과 증거들은 성취되었다. 은혜로운 많은 말씀들이 그 인자를 통해 발하여졌기에 백성들도 이렇게 말했다. “이 사람처럼 말한 사람은 결코 없었다. “증거는 바로 거기에 있었다. 그 왕이 현존했고, 그 왕국이 임했다. 그러기에 그들은 핑계할 수 없었다.

주님은 자신의 초림과 재림에 대해 제자들에게 짧게 말씀하셨다. 초림은 은혜 안에서, 재림은 능력과 영광 가운데 임할 것인데, 주의 재림이 감람산 담화의 주제이다. 누가복음 17 2230절의 말씀은 주님이 두 다른 사건에 대해 말씀하시는 것임을 깨닫기까지는 상당히 어렵게 여겨질 수 있다.

인자에 대한 다음 구절을 유의해 보자.

1. 인자의 날 하루(22)

2. 인자도 자기 날에(24)

3. 인자의 때(26)

4. 인자의 나타나는 날(30)

 

여기에 성경의 숫자적인 원리의 한 예가 있다. 네 가지는 종종 셋과 하나로 구분되어진다. 22절은 우리 주님의 초림을, 나머지 세 구절은 재림을 말한다.

누가의 목적은 재림을 설명하는 것도, 재림시에 큰 소리와 혼란 등이 일어남을 보이고자 하는 것도 아니다. 하나님은 그 사건을 조용히 일어나게 하신다. 물론 복음서에서 분명하게 가르친 것처럼 초림시와 재림시 앞에는 어떤 징조가 있는 것이 사실이다. 누가는 이러한 사건들에 대한 다양한 사람들의 태도 사이에 있는 차이를 말한다. 종교 지도자와 바리새인들이 우리 주님의 은혜 가운데서 임하시는 초림에 관해 걸림이 된 것은 예언적인 내용에 대한 그들의 잘못된 이해에 기인하였다. 그들은 모두 영광 가운데 임하실 주님을 기대했지, 겸손과 고난의 주님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같은 사실을 제대로 이해한 자들에게는 걸림이 되지 않았다. 시므온과 안나는 그 아기 예수를 받아들였고 그분의 겸손, 고난 그리고 구속에 대해 다른 이들에게 이야기했다( 2).

재림에 대한 언급에서 누가는 마태와 함께 말세에 걸려 넘어지게 되는 요인으로써 깨어 근신하지 못하는 것을 동일하게 지적한다. 이러한 사실을 더욱 분명히 하고자 두 기자는 노아의 시대에 대해 언급한다. 그래서 여기에 평화가 없는 때에 거짓 평안이 널리 퍼진다는 사실을 확대하는 대목이 있다. 삶에 대한 부주의한 태도가 주님의 영광스런 재림 앞에 사는 사람들의 특징일 것이다. 이것을 더 강조하기 위해 누가는 소돔에 살던 롯의 때와, 노아의 때를 덧붙인다. 두 시대에 살았던 사람들은 하나님의 심판의 손길에 대해 의식하지 않았다. 오늘날 사람들은 복음 가운데서 증거되고 있는 은혜로운 방문에 대해 주로 의식하지 못하고 있다(21,22).

요컨대 마태복음 24장은 예언적이며 노아와 그 비유들은 깨어 있으라는 권고를 더 강화하기 위해 소개한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누가는 백성들이 하나님의 때와 움직임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부주의하다고 가르치고 있다.  이 태도가 데살로니가전서 5 2절에서 바울에 의해 그리고 베드로후서 3 10절에서 베드로에 의해 간결하게 묘사되었다. 그 두 기자들은 밤에 도적같이라는 구절을 사용하였다. 주 예수님 자신이 바로 이러한 적절한 설명의 기원자이셨다. 그분은 누가복음 12 39절과 마태복음 24 43절에서 그같은 표현을 사용하셨다.

그래서 그때 마태는 깨어 있으라는 경고를 하기 위해 노아에 관한 이야기를 인용하면서 주님의 다시 오실 때의 세대에 대해 말했다. 누가복음서에서 주께서는 자신의 초림을 알아보지 못한 실패에 대해 그 자신의 세대를 책망한 노아를 사용하신다. 주로 전세계는 주님의 임하심에 대해 그것이 은혜 안에서이건 심판을 위한 것이건 인식하지 못하고 계속적으로 사람들의 마음에는 저항심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제 마태복음 24장으로 돌아가 보면, 거기에는 노아에 대한 우리 주님의 실제적인 말씀이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37). “홍수 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38).

많은 이들이 노아의 때와 인자의 재림 직전의 때가 부패와 폭력이 만연되어 있는 유사성을 갖고 있다는 의견을 가진다. 그처럼 유례없는 극도의 부패와 폭력은 진노가 임박했음을 나타내는 징조이다. 그런데 이것이 그 핵심은 아니다. 사람들은 비록 하나님에 의해 어떤 징조가 주어진다 해도 그것을 인식하지 못할 것이다. 주께서 청중들에게 구하는 것이 바로 깨어있는 것인데 그들의 부주의함이 문제인 것이다. 노아 자신에 대한 언급은 일절 없다. 주님께서는 노아에 대해서나, 그의 가르침, 그의 신앙, 그가 방주에 들어간 어떤 것에 대해 아무런 정보를 주시지 않는다. 그 교훈은 바로 그 때를 분별하지 못함으로 멸망했던 그 세대와 같이 부주의하지 말라라는 것이다.

주님은 홍수 이전의 수년 동안에 대해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대홍수 바로 직전의 날들에 대해 말씀하신다. 38절을 주목해 보자. “홍수 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있으면서····무언가 이상한 일이 일어날 많은 조짐들이 있었지만 그 세대 사람들은 그것들을 감지하지 못하였다. 의심할 바 없이 그 이유는 쾌락과 사회생활, 즉 먹고 마시고 결혼하는 것 등에 너무 깊이 빠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거기에는 일이나 노동에 대한 아무런 언급이 없다는 점을 유의하자. 롯의 때는 그들이 심고····지었다라고 칭해졌다. 노아의 세대는 그 모든 것은 제외하고 오직 쾌락만을 추구했던 것으로 보여진다. 육신의 정욕에만 탐닉한 결과 그들의 눈이 멀게 되었고, 그 시대에 대해 부주의하여 마침내 그들은 무서운 결과를 맞이했다. 어떠한 것도 그들의 무감각함을 일깨울 수 없었다.

노아가 방주의 기초를 놓았을 때 어쩌면 그들 중 일부는 농담으로 여기고 먹고 마시며 흥청거렸을 것이다. 노아는 의를 전파했다(벧후 2:5). 그러나 그들은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계속 먹고 마셔댔다. 그 방주가 거의 완성되었을 때에도 그들은 조금도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고 그들은 여전히 축제하며 결혼하며 즐겼다. 마침내 방주가 완성되었고 마지막 널판이 끼워지고 마지막 못이 박히게 되었지만, 여전히 그 사회는 쾌락적인 삶을 계속했다. 노아는 음식을 모으고 양식을 저장했으며 동물들을 자기에게로 오게 했다. 하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부주의했다. 그들은 여전히 자연인의 탐욕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들은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먹고 마셔댔다. 창세기의 기록은 여호와 하나님이 그를 방주로 불러 들였고 그 문을 닫으셨다고 한다. 이러한 먹고 마심은 고린도전서 15 1절의 내일 죽을 터이니 먹고 마시자라는 절망적인 개념과는 달랐다. 노아세대의 사람들은 아무런 위험성도 느끼지 못했고 죽음이 곧 그들을 뒤덮는다는 사실을 전혀 인식하지 못했다. 또한 그들이 즐기는 쾌락이 마지막으로 즐기는 것이었음도 전혀 알지 못했다. 그 전체 광경은 누가복음 12장에 나오는 쾌락에 빠진 한 부자가 자신을 방탕에 던진 채 오랜 동안 더 살 수 있으리라고 여겼던 것과 흡사하다. 하지만 그는 그날 밤 죽었다. 노아 시대의 백성들은 어리석은 자들이었다. 그들은 하나님을 염두에 두지 않았고 그들의 끔쩍한 운명에 대해서는 잠든 상태였다. 이미 어떤 일들이 벌어졌고, 무언가 보이지 않는 일들이 발생할 것이지만 그들은 그 시대를 분별하지 못했다( 12:56). 만일 그들이 증가되는 부패와 폭력을 고려했더라면 그들은 심판이 임박했음을 예상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들이 임은 것은 반드시 열매를 거둘 수밖에 없음을 그들은 기억해야 했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의 모습은 아닌가? 이제 우리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더 가까워졌다. 세상은 심판을 향해 곤두박질치고 있다. 오늘날 목도되는 부패와 폭력은 노아의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그 규모가 훨씬 크다. 게다가 또한 끔찍한 거짓이 세계 전역에 만연되어 있다. 오늘날 사람들은 얼마나 부주의한가. 정욕에 대한 권세가 모든 영역에 자리잡고 있다. 복음 증거는 크게 무시되고 있고, 탐욕과 쾌락이 이 세대의 평범한 남녀들의 마음을 가득 채우고 있다. 성경은 그리스도인들에게 마지막 때는 노아의 때와 같이 그러하며, 그같은 현상이 점점 더 증가될 것이며, 마침내 인자가 다시 오실 때까지 그러할 것이라고 증거한다.

한가지 중요한 점을 간과해서는 안되는데, 바로 그들이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그 날까지먹고 마셨다는 점이다. 홍수가 임할 때까지가 아니라 노아가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라고 말했다! 이것은 충격적인 암시가 되지 않는가? 노아가 그들의 시야에서 사라졌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여전히 먹고 마시며 즐겼던 것이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하늘로부터 그 아들의 강림을 기다리고 있다(살전 1:9,10). 그리스도인들은 데살로니가전서 4 1318절에 묘사된 것처럼 교회의 휴거로 인하여 모두 이 땅에서 사라질 것이다. 요한에게 하늘 문이 열렸는데( 4:1), 그것은 이 세상의 광경이 사라지고 천국의 휘장 너머로 들어가게 될 그 날에 대한 적합한 예가 되는 것이다. 그 휴거 뒤에 남겨질 사람들은 의심할 바 없이 충격적인 경험을 할 것이지만 노아 때의 사람들처럼 그들 또한 곧 그 충격으로부터 회복될 것이다. “홍수가 나서 저희를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24:39). 그리고 나서 그들은 결국 깨닫게 되었지만, 그때는 이미 너무 늦어 버렸다.

우리는 노아가 전파한 것이 임박한 홍수에 대한 경고도, 방주 안으로 들어오라는 초청도 아니었고, 오직 부패와 폭력으로부터 돌이켜 회개하라고 하는 촉구였음을 기억해야 한다. 그는 의를 전파했다. 만일 당시 사람들이, 요나의 전도를 듣고 돌이켰던 니느웨 사람들처럼 귀를 기울였다면 그 심판은 돌이켜지고 옛 세상이 보존되었을지도 모른다.

노아가 방주에 들어갔을 때, 그 부주의한 세대는 충격을 받았지만, 곧 그들은 원상태가 되어버렸다. 그 장님된 상태가 7일간 계속되었고 그때 또 다른 끔찍한 충격, 즉 홍수가 임했다.

주께서는 이 점에 대해 엄숙한 추신을 덧붙이신다. “홍수가 나서 저희를 다 멸하였으며.” 거기에는 하나의 구별이 있었다. 노아의 식구들은 방주 안에서 생명을 보존했고, 다른 이들은 홍수 심판을 받았다. 그와 같은 분리는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도 일어날 것이다. 두 사람이 밭에 있다가 하나는 데려감을 입고 다른 한 사람은 버려질 것이다. 두 여자가 맷돌을 갈다가 하나는 데려감을 입고 바른 하나는 버려질 것이다. 이것은 얼마나 갑작스럽고도 영원한 분리가 되어버릴 것인가! 사람들, 이웃들, 심지어 같은 가족들 중에서도 영원한 분리가 일어날 것이다. 주께서는 누가복음12 52절에서 이같이 엄숙한 말씀을 하셨다. “이후부터 한 집에 다섯 사람이 있어 분쟁하되 셋이 둘과, 둘이 셋과 하리니.” 이 말씀들은 의심할 바 없이 대환난기에 일어날 일들을 언급한 것인데 주님의 말씀은 언제나 참되다.

최초의 가정은 나뉘어졌다. 아벨은 주께로부터 축복을 받았지만 그의 형 가인은 사악한 자에게 속하여 저주를 받게 되었다(요일 3:12).

다시 살펴볼 사실은 그 홍수로 인하여 모두가 다 멸망하였고 한 사람도 생존치 못했다는 것이 창세기의 명백한 기록이라는 점이다.

모든 혈육있는 자의 강포가 땅에 가득하므로 그 끝날이 내 앞에 이르렀으니”( 6:13). “땅 위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이 다 죽었으니”( 7:21). “지면의 모든 생물을 쓸어 버리시니”( 7:23). ‘모두가 다 죽었다는 말씀은 하나님의 심판에 관한 로마서 2 3절의 바울의 가르침에도 메아리친다. “이런 일을 행하는 자를 판단하고도 같은 일을 행하는 사람아 네가 하나님의 판단을 피할 줄로 생각하느냐?” 똑같은 개념이 데살로니가전서 5 3절에도 나온다. “멸망이 홀연히 저희에게 이르리니 결단코 피하지 못하리라.”

 

인자’(the Son of man)라는 명칭과 그것이 어떻게 사용되었는지에 대해 주의를 기울이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마태복음에서 주님은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기 전의 때를 홍수 전의 날들이라고 부르고 이것을 위대한 예언적인 주의 날, 즉 인자의 오시기 직전의 날들과 연관지으신다. 누가복음에서는 그분이 그 명칭을 다음과 같이 달리 사용하신다.

, “노아의 때에 된 것과 같이 인자의 때도 그러하리라”( 17:26).

주께서 인자의 때라는 특이한 표현을 하셨는데 그 의미는 무엇인가?

바울의 고린도전서 4 3절에서 사용한 비슷한 용어를 생각해보면 약간의 빛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너희에게나 다른 사람에게나 판단받는 것이 내게는 매우 작은 일이라.” 여기 마지막 문구는 개정역과 다비역에서 인간의 날로 더 잘 번역되었다. 이것은 인간의 날이요 자연인들은 자기들이 좋아하는 방식대로 판단한다. 그때 하나님은 침묵하시는 듯하다. 하나님은 악이 발전하도록 허용하시는 것 같다. 오늘날 사람들은 매우 긴 끈을 가진 듯하며 사람들은 아무런 보상도 하지 않은 채 자기들이 좋아하는 방식대로 할 수 있고 심지어 하나님의 백성들을 핍박하기까지 한다. 사도 시대에 로마 제국하에 받은 핍박들을 회상해 노자.

늙은 요한을 추방했고 폴리갑은 끔찍한 방법으로 화형당했다. 그밖에 많은 순교자들도 화형당했다. 이 모든 것이 바로 그것이 인간의 날임을 분명히 알려 준다. 분명히 지극히 높으신 이가 인간 나라를 다스리시며인간은 그가 심은 대로 거두게 된다. 하지만 인간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그저 자기 고집대로만 행하는 통제불능인 것처럼 보인다. 우리는 인간의 날에 살고 있지만 이러한 상태는 계속되지 않을 것이다.  그분이 다시 오시는 그 인자의 날에 주님이 친히 통치하심을 보게 될 것이다. 인간은 하늘의 청사진을 따르게 될 것인데, 그 모든 것이 계시록 47장의 보좌로부터 흘러나올 것이다. 그때 인간은 더 이상 자기 뜻대로 행치 못하게 될 것이고, 모든 것은 하나님에 의해 미리 정해질 것이다. 인봉이 열리게 되고 나팔과 대접심판이 보응받기에 합당한 자들의 모든 행위로 인해 나타날 것이다. 인간의 날은 교회의 휴거시까지 계속될 것이며, 그때 인자가 개입할 것이다. 그 뒤에 따르는 날들은 인자의 날들로 불리워진다. 반드시 짧게 지나갈 이러한 일들을 요한은 천국의 관점으로 보았다. 이 모든 것은 계시록 4장의 영광스런 보좌로부터 흘러 나온다.

전적으로 다른 개념이 누가복음 1722절에 이렇게 나타난다. “너희가 인자의 날 하루를 보고자 하되 보지 못하리라.” 여기서 주님은 그분이 육체로 거하실 동안 행하실 그분의 사역을 언급했다. 주님은 은혜 안에서 그 곳에 계셨다.  그러한 은총과 진리가 모든 이의 손길에 나누어졌다. 환란 날에 사람들은 그같은 은총을 사모할 것이지만 그 날에는 그러지 않게 된다. 모든 이에게 환란과 심판이 임할 것이다. 주님의 두 번의 오심은 매우 명백하게 은혜와 심판으로 구별된다.

더 깊은 차이가 롯의 때에 대해 언급한 누가의 설명에서 주목된다. 노아의 때에 먹고 마시던 것이 롯의 때의 묘사에 덧붙여진다. 그들은 사고 팔고 심고 짓다가 하늘로서 불과 유황이 내려 그 평지의 도시와 그들 모두를 멸망시키기까지 이르렀다( 17:28,29). 적어도 노아의 때에는 언급되지 않았던 산업이 그 곳에 언급되어 있었다. 그러나 누가는 이 세상의 소유물에 대한 갈망과 탐욕에 대한 일종의 반감을 가지고 있다.  그는 종종 이러한 주제를 염두에 두고 접근했는데 이는 다른 복음서와는 상당히 다른 면이다. 그는 언제나 탐심의 올무와 위험성에 대해 교훈을 주고자 했다. 12장의 비유를 생각해 볼 때 그 배경은 이러하다.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데 있지 아니하니라”( 12:15). 이 경고는 이 땅의 유산을 그의 형과 분배받기를 원했던 어떤 사람에게 직접적으로 주어졌다. 그 비유의 주제는 물질적인 것들에 대한 염려에 관해 말씀하셨던 산상수훈과 비슷하다( 6:3534). 하지만 그들은 정반대의 방향을 바라본다.  마태는 생존에 충분한 소유를 갖지 못한 것에 대한 염려에 초점을 둔 반면에 누가는 내일에 대해 염려하는 어리석음을 경고한다. 마태복음에서는 주께서 필요를 공급해 주실 것을 신뢰하라는 가르침이고 누가복음에서는 지금 현재 가진 것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더 쌓고자 하는 탐심을 경계한 것이다.

아무튼 롯의 때는 소유와 이윤에 눈이 멀어 있었는데 누가만 홀로 그의 복음서에서 그 같은 점을 지적한 것이다.

그처럼 주께서는 홍수 직전의 사람들의 부주의함을 묘사하시면서 그분의 재림시에도 그같은 태도일 것임을 말씀하셨다. 이 글을 읽는 모든 독자들도 오늘날의 세계를 점검해 보자. 그러면 이같은 태도가 만연되어 있음을 모든 곳에서 관찰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에게 부주의함과 탐심의 흔적이 있지는 않은지 우리 자신을 점검해 보아야 할 것이다.  우리 모두 주의 오심을 사모하며 그분이 오시기까지 주님을 충성되이 섬기는 일에 최선을 다하자. <다음 호에 계속>

 

(1998 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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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징검 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