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그 이미지
징검 다리
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calendar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Recent Post

theWord Bible Software

Category

2014. 11. 19. 21:57 횃불/1999년

영원한 구원(2)

H. p. 바커

믿는 자는 지금 영생을 가지고 있다.

영생은 믿는 자가 미래의 어느 때에 가서 얻는 것이 아니라 지금 가지고 있다라고 하나님 말씀에 거듭 확증되어있습니다. 영생은 지금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것입니다. 만약 지금 영생을 소유한 자가 어떻게 하다 영생을 잃어버릴 수 있다면 그것은 영생이 아닙니다. 하나님 말씀은 우리가 영생을 얻은 것을 알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만약 어떻게 하다 영생을 잃어버릴 수 있다면 우리는 영생을 얻었다고 말할 수 없으며, 또한 영생을 가지고 있음을 안다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만약에 영생을 지금 가지고 있지 않다면 우리는 영생을 바라는 마음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으며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십자가의 구속이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고 영생을 주시는 데 있어서 부족하다고 말하는 것에 불과한 것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5:24).

 

이 말씀은 너무나 분명합니다. 혼동하거나 달리 분별할 여지가 없습니다. 믿는 자가 참고 견딤으로 앞으로 어떤 날 영생을 얻게 된다고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믿는 자는 지금 영생을 얻었다는 것입니다. 또한 믿는 자는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졌다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또한 믿는 자는 결코 심판을 받지 않는다(“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고 선언합니다. 이 말씀은 주 예수께서 친히 하셨으며,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는 이 말씀 안에서 확신하는 것입니다.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아들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 3.35)

 

이 말씀에서도 역시 믿는 자는 현재 영생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확증하였습니다. 어떤 사람은 믿는 일을 중단함으로써 이 영생을 잃어버릴 수도 있다고 말합니다. 만약 그렇다면 그것은 영생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3:14-16).

 

15절 말씀과 16절 말씀에 나타난 얻는다는 말의 시제는 현재시제입니다. 믿는 자는 영생을 현재 얻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경이 가르치고 있는 명백한 진리입니다. 즉 구원을 이루는 일은 전적으로 주님께 속한 일이며 그분에게는 실수란 조금도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 1:6)라고 했습니다.

 

진실로 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믿는 자를 영생을 가졌나니”( 6:47).

 

여기에서도 역시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아무런 목적도 없이 이런 말씀을 하신 것이 아닙니다.

 

영생이란, 어떤 기간을 의미하는 말이 아닙니다. 영생이란 하루나 일 개월 또는 일년, 나아가서 수천 년이라는 기간의 생명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영생은 전시간(全時問)과 영원에 걸친 생명을 의미합니다. 믿는 자는 이 영생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 영생을 위하여 독생자 예수를 보내셨고, 예수님으로 하여금 우리를 위해 죄를 젊어지고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게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제 그 아들을 믿는 자들에게 이 영생을 주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얼마나 단순하고 명확합니까!

 

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라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쓴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요일 5:11-13).

 

영생을 주신 것과라는 말씀은 미래에 주겠다든지 혹은 줄지도 모른다는 말이 아닙니다. 헬라어에서 이 말은 부정(不定)과거형으로 나타나 있는데 헬라어 문법상 이같은 시제는 결정적인 역사적 사실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어떤 사실이 이미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또 여기에서 영생이 있고라는 말씀은 저희가 현재 영생을 소유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

우리는 종종 죽기 전에는 하늘나라에 가는지 못 가는지 알 수 없다는 말을 듣습니다. 그러나 여기 이 말씀에서는 우리가 영생을 얻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고 확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영생을 얻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만약 믿는 자들이 구원을 놓치게 될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알게 하려 함이라는 말씀은 성립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는 자들은 영원한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부르심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 뜻과 영원한 때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딤후 1 9)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지옥의 형벌에서 구원을 받은 후에 다시 그 구원을 잃어버릴 가능성이 있다면 우리는 진정으로 지옥에서 구원을 받은 것이 아니라 일시적으로 지옥을 떠나 있는 것에 불과한 것입니다.

 

구원은 행위로 얻는 것이 아니다

만일 죄의 형벌로부터 구원받는 일이 우리의 선한 행위에 의해 이뤄지고 또 우리의 악한 행위에 의해 상실되는 것이라면 우리는 구원을 잃을 수밖에 없습니다(요일 1:8). 그러나 구원이란 우리의 선한 행동에 의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의 행동 여하에 따라 좌우되지 않습니다. 죄의 형벌로부터 구원을 받기 위하여 자신의 행위를 다소라도 의지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아직도 하나님의 구원의 도리를 분명하게 알지 못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라”( 2 : 8.9)

 

이 말씀을 보면 이미 과거에 성취된 구원을 다루고 있습니다. 이 구원은 죄악과 형벌과 정죄에서 벗어난 것을 가리킵니다. 이 구원은 이미 완전하게 성취된 것입니다. 이 구원은 훗날에 성취될 것도 아니고 또한 그런 과정에 있는 것도 아닙니다.

말씀을 자세히 검토해 보겠습니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구원을 얻었나니.”

은혜란 하나님께서 값을 받지 않고 주시는 선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가 성취하신 일에 대한 어떤 대가를 요구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므로 은혜에 있어서는 그 대상자의 공로가 전적으로 배제됩니다. 즉 은혜로 인하여 구원을 받았다는 사실은 구원을 받은 사람의 어떤 공로가 참작된 것이 아님을 말합니다. 구원을 받은 사람은 그 구원을 받기 이전이나 이후에 이루어 놓은 어떤 공로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은혜는 사실상 죄를 범한 사람에게 베풀어진 것입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5:8). 그러므로 인간의 허물이 은혜의 역사(役事)를 막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은혜가 성취해 놓은 일을 소멸할 수도 없습니다. 실상, 인간의 허물은 은혜의 역사가 성취되는데 하나의 계기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다는 것은 변경될 수 없는 것이며 영원한 것입니다. 믿는 자는 영원한 구원을 받은 것이 확실합니다.

사도는 여기서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구원을 얻을지니라고 말하든지 혹은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결국 구원을 얻게 되리라고 말하지 않은 사실을 주목하기 바랍니다. 사도는 여기에서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믿는 자들이 이미 구원을 얻었다는 사실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너희가 만약 현재의 장소에 거하고 있기만 하면 은혜로 인하여 구원을 얻을지니라는 뜻이 아니고 속죄의 역사는 이미 완성되었기 때문에 너희는 은혜를 인하여 구원을 얻었나니라는 뜻입니다.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의 편에서 볼 때 이미 성취되고 완성된 사실입니다. 만약 하늘나라를 향해 가는 도중에 구원을 놓칠 수도 있는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구원을 얻었나니라고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 대신 나는 구원을 받게 될 것이다라고 말해야만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감사한 일은 구원의 역사는 이미 완성되었을 뿐만 아니라 이미 성취된 사실로 간주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구원을 얻었나니라고 번역된 헬라어는 에스테 세소스베노이로써 피동형완료 분사입니다. 이것은 과거에 완성된 어떤 행동의 결과가 현재에 하나의 실상으로 등장되어 있다는 것을 가리킵니다. 즉 우리는 과거에 완성된 구원의 결과가 지속되어 오고 있기 때문에 현재에 구원을 얻은 상태에 있다는 것입니다. 케네츠 S. 우스트(Kenneth S. Wuest)는 이 말씀을 다음과 같이 번역했습니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한 믿음으로 말미암아 과거에 완전히 구원을 받았으니 그 결과로 너희의 구원은 현재에도 지속되고 있느니라.”

 

믿음으로 말미암아

믿음은 구원을 얻는 데 있어서 그 수단입니다. 믿음은 우리가 지불하는 어떤 값이 아닙니다. 믿음이 만약 우리가 지불하는 어떤 값이 될 수 있다면 구원은 은혜로 이루어진다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믿음이란, 인간의 자아는 스스로를 보호하는데 완전히 무력하다는 것을 알고 주 예수님의 보호하심에 인간의 자아를 내어 맡기는 것을 가리킵니다. 믿음은 인간의 공로를 배제할 뿐만 아니라 인간의 무력함과 절망을 내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은 스스로 이룰 수 없는 일을 다른 자에게 믿음으로 부탁하는 것입니다. 어린아이가 아파서 죽을 지경이 되면 부모는 의사를 찾습니다. 부모가 이렇게 한다는 것은 어린아이의 병을 고칠 수 없는 그들 자신의 무능을 고백하고, 의사를 신뢰한다는 자신들의 확신을 나타내 보여 주는 것입니다. 의사를 부르는데 공로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부모가 의사를 믿는 믿음은 오로지 의사에게 행동의 기회를 제공하여 준 것 밖에 되지 않습니다.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하나님께서는 구원은 은혜에 의한 것이며(이 사실은 모든 인간의 행위를 배제하는 것임) 믿음으로 말미암는 것(이것 역시 인간의 행위가 아님)이라고 말씀하셨을 뿐만 아니라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라고 덧붙여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우리는 구원을 우리 힘으로 얻을 수 없으며 또한 우리의 공로로 구원을 보존할 수도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만약 구원을 우리의 힘으로 얻을 수도 있고 또 보존할 수도 있다면 그것은 우리에게서 난 것이 될 것이다. 인간의 공로는 구원을 얻는 데 조금도 기여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구원을 오직 홀로 책임지시고 이루기를 원하시는 분입니다.

믿는 자의 영원한 구원을 반대하는 모든 이론은 인간의 행위를 내세우는데 근거를 둡니다. 하나님께서 구원에 대한 인간의 행위를 전적으로 배제하고 계심이 명백한 이상 믿는 자의 영원한 구원을 반대하는 모든 이론은 하나님의 말씀과 위배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물이라

구원은 선물입니다( 4:10, 5:15, 6:23). 만약 우리의 힘으로 구원을 얻는 것이 어떤 의미서든지 가능한 것이라면 구원을 선물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 말씀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라는 말씀을 되풀이한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구원이 우리의 행위에서 나오는 것이 아님을 명백히 해 두기를 원하셨습니다. 만일 구원이 은혜로 된 것이면 행위로 말미암지 않은 것입니다”( 11:6).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만약 우리가 우리 행위로 구원을 얻을 수 있다면 우리는 자랑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로마서 3 27절에 의하면 자랑하는 일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이루어 놓으신 일을 믿을진대 우리에게는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우리는 오직 그리스도께 영광을 돌릴 뿐입니다(고전 1:29).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과실을 맺게 하고 또 너희 과실이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니라”( 15:16)

 

구원은 하나님에게서 나는 것이지 우리의 행위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택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택하셨습니다

 

만일 은혜로 된 것이면 행위로 말미암지 않음이니 그렇지 않으면 은혜가 은혜되지 못하느니라”( 11:6)

 

여기 이 구절은 성경 가운데서 두 원리가 솔직하게 비교되어 있는 가장 대표적인 말씀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닙니다. 은혜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주권을 따라 행하시는 행동입니다. 그리고 행위는 인간이 하나님께 축복의 근거를 제시하려는 수고입니다. 이 두 원리는 전적으로 반대되는 원리인 것입니다.

성경은 말씀하시기를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3:5)라고 선언하셨습니다.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4:5).

 

하나님은 경건한 자를 의롭다고 하시는 분이 아니라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고 하시는 분입니다. 우리의 행위는 구원을 이루는데 아무도 기여도 못합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것이 사실이라면, 인간의 불경건이 하나님 앞에서의 인간의 구원에 어떠한 변화도 가져올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오직 불경건한 사람들을 구원하십니다. 우리가 우리자신의 불경건을 깨닫기 전에는 결코 구원을 얻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후사가 되는 이것이 은혜에 속하기 위하여 믿음으로 되나니 이는 그 약속을 그 모든 후손에게 굳게 하려 하심이라 율법에 속한 자에게뿐 아니라 아브라함의 믿음에 속한 자에게도니 아브라함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 모든 사람의 조상이라”( 4:16)

 

약속은 믿음으로 된 것이기 때문에 변함이 없습니다. 만약 약속이 행위로 된 것이라면 그것은 변할 수도 있습니다. 사람들은 항상 나는 나의 몫을 해야만 한다고 곧잘 말합니다 그러나 만약 사람의 몫이 필요하다면 약속은 변함이 없는 것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 자신의 몫을 감당하지 못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사실 우리는 우리 몫을 감당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부르심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 뜻과 영원한 때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딤후 1:9).

 

만약 하나님께서 우리의 행위를 따라 우리를 부르셨다면 우리 중에 그 누구도 부르심을 받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행위를 따라 우리를 부르지 아니하셨다는 것을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5:23)

 

선물은 행위로 얻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하나님은 선물을 도로 거두어 가지도 않으십니다. 그러므로 로마서 11 29절에서는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5:8).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회개하고 죄에서 돌이켰기 때문에 우리를 위하여 죽으신 것이 아니라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우리를 위하여 죽으셨습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그리스도께서 죽으심으로 구원을 받은 것이 사실이라면, 우리의 삶 속에 있는 죄가 그리스도로 하여금 우리를 배격하도록 하는 요인이 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3:20)

 

율법을 지키는 일(선한 행위)이 우러를 구원할 수 없습니다. 율법은 오직 우리에게 우리 죄를 보여줄 뿐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 3:28)

 

여기에서 우리는 칭의(橋義)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다는 것을 분명히 볼 수 있습니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아는 고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에서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2:16)

인간은 율법의 행위(선한 행위)로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이 사실이라면 구원을 보존하기 위해서는 율법을 지켜야 한다는 말은 모순이지 않습니까?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나니 기록된 바 누구든지 율법책에 기록된 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3:10).

 

누구든지 율법을 지키므로 구원을 얻으려고 애쓰는 자가 있다면 그 사람은 저주 아래있기 때문에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을 이 말씀에서 볼 수 있습니다. 율법은 인간의 완전무결을 요구하며 이것은 인간에게 있어서 불가능한 것입니다. 만약에 사람이 율법을 지키지 못하므로 구원을 놓치는 것이 사실이라면 구원을 얻을 사람은 안무도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율법 아래 있는 사람은 누구든지 율법책에 기록된 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아니하면 안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 믿는 자들은 율법을 향하여 죽은 자들이기 때문에 율법 아래 있는 것이 아닙니다( 2:19, 7:4).

<다음 호에 계속>

 

(1999 1월호)

 

'횃불 > 1999년' 카테고리의 다른 글

도망친 노예(종)(3)  (0) 2014.12.08
말씀의 올바른 해석(25)  (0) 2014.12.08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1)  (0) 2014.12.08
하나님의 가족  (0) 2014.11.19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마다 불의에서 떠날지어다  (0) 2014.11.19
빛되신 예수 그리스도  (0) 2014.11.19
도망친 노예(종)(2)  (0) 2014.11.19
말씀의 올바른 해석(24)  (0) 2014.11.19
posted by 징검 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