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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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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12. 16. 10:08 횃불/1999년

노아 - 그의 생애와 그 시대 (20)

 사무엘 W. 제밍스

20 : 두 성품

 

인간의 성품은 개선될 수 없다. 이것을 노아에게서 배운다. 실로 그는 제사장이었고, 순종하는 사람이요 열심있는 종이었지만 그러나 그는 또한 우리와 같은 성정을 가진 인간이었다. 그는 시작을 잘했고 진행도 잘했지만 그러나 끝을 잘 맺지는 못했다.

노아가 방주에서 날려보낸 새들은 매우 의미심장한데, 주께서는 그들을 단지 구색을 맞추기 위해 두신 것이 아니라 도덕적인 교훈을 위해 두신 것이다.

첫번째로, 그는, 레위기 11:13-15에 의하면 부정한 짐승인 까마귀를 내어 보냈다. 그런데 그 까마귀는 방주로 돌아오지 않았다. 우리는 이것을 우리가 아담의 타락으로부터 물려받은 옛 성품을 처음 맛볼 때 인식하게 된다. 모든 사람이 하나님을 멀리 떠나서 태어나고 잘못된 방향을 향하게 된다. 우리는 하나님의 존전을 떠나버린 가인같다. 그 까마귀는 물이 지상에서 마를 때까지 앞 뒤로 날아다녔다. 세상은 막 끔찍한 심판을 겪었지만, 까마귀는 그 벌어진 일을 만족해 하고 있었다. 심지어 옛 성품은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는 세상 자체를 기뻐한다. 세상은 불의가 만연해 있다. 그 심판이 수행되는 것은 단지 시간 문제일 따름이다. 세상 사람들은 아무 것도 모른채 그러한 세상을 만족해 하고 있다. 그 까마귀는 물 위를 날아다니며 물 위에 떠다니는 죽은 시체를 먹었음이 분명하다. 다가올 심판으로부터 구원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세상과 옛 성품의 욕망에 이끌리는 신자를 보는 것은 슬픈 일이다.

그렇지만 신자의 새 성품을 설명하는 비둘기는 완전히 다르다. 또다시 그 원리가 나타난다. 처음에는 육신적인 것이요 그 다음에는 영적이다. 비둘기를 내보내는 것을 묘사하는 말이 흥미롭다. 그는 까마귀를 내보냈다. 그러나 그는 그후 비둘기를 보냈다. 이것은 주님 자신으로부터 나오는 새로운 성품에 대한 아름다운 모습이며, 노아는 구세주이신 주님의 모형이다. 이처럼 새 성품은 주님으로부터 나오며, 그 새 성품은 우리가 위로부터 거듭날 때 성령이 내주하면서 주어지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비둘기는 그 발을 딛을 곳을 전혀 찾을 수 없었고, 그같은 곳에 만족할 수 없었다. 정결한 짐승인 비둘기는 죽은 시체만 있는 그러한 곳에서는 먹이를 찾을 수도 안식할 곳도 발견할 수 없었다. 그 까마귀는 가능할지 모르지만 비둘기는 그러하지 못했다.

여호수아 1장과 연관지어 볼 때 그 발바닥으로 밟는 곳이란 단어는 상당히 중요하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오직 그 발바닥으로 밟는 곳만을 차지할 수 있었다. 소유해야 할 많은 땅이 있었지만 오직 그 발바닥으로 밟는 곳만을 소유지로 주장할 수 있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축복들 위에 거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놀라운 교훈들을 배울 수 있다. 그리고 그 교훈 위에 거하며 누릴 수 있다. 우리는 저주 받았고 죽음의 그림자가 있는 위에 안식할 수 없다. 그 비둘기는 그 발바닥으로 밟을 곳을 발견하지 못하여 피난처인 방주 안에 노아에게로 돌아왔다. 우리의 주께로 계속 나아옴, 교제, , 우리의 피난처 이 모든 것이 다 그분 안에 있다. 노아는 그의 팔을 내밀어 그 비둘기를 취하여 방주 안으로 들여왔다. 여기에 아름다운 가르침이 있다. 때로 우리는 우리 하나님의 눈길에 다소 놀란다. 노아는 우리에게 하나의 그림자이다. 우리가 주님께로 돌이킬 때, 그분은 자신의 손을 내밀어 우리의 주목을 끄시고 그 방주의 안전함 안으로, 그분 자신에게로 이끄신다. 회복이 여기에 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자녀들이 흔히 갖는 경험이다.

그 비둘기는 방주로부터 두번째로 보내졌다. 새로운 세계가 형성되었고, 거기에 성장이 있었다. 그리고 그 비둘기는 감람 잎사귀를 입에 물고 되돌아 왔다. 로마서 11장에서 감람나무는 하나님의 은총의 상징이다. 이 세대의 성도들은 은혜 시대에 주님에 의해 놀라운 방법으로 은혜를 입은 이방인들로서 접붙임받은 돌감람나무 가지이다. 여기 성령으로 인한 새 생명의 진지함이 있다. 그 비둘기는 그 감람 잎사귀를 뜯었는데( 8:11), 거기에 성장이 있었음을 의미하며 그것은 그 숲 가운데서 발견된 것이었다.

우리는 우리가 소유한 거룩한 성품을 통하여 거룩한 것들을 누린다. 그러나 그것은 차지해야 할 그 땅의 풍성한 부요 중의 일부를 얻은 것에 불과하다. 발바닥으로 밟는 것과 그 잎사귀를 뜯은 이 두가지는 함께 나아가는 같은 개념이다. 그 풍성함에 대해 말하는 이 두가지는 양육되어져야 할 우리의 새 성품에 적용된다. 육신적인 생각은 사망인데 그 까마귀와 같다. 그러나 영적인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다. 그 비둘기는 성령의 것들을 먹이는 것을 나타낸다. 문제는 우리가 무엇을 먹일 것인가이다. 옛 성도들은 다음과 같은 표현을 아주 잘 사용했다. “우리가 무엇을 먹든 간에 가장 많이 먹은 것이 위로 나오게 마련이다.”

방주로부터 세번째로 그 비둘기가 보내졌을 때, 그 비둘기는 다시 되돌아 오지 않았다. 새 세계와 새 창조가 들어왔다. 노아 자신이 그 방주로부터 나갔다. 그러나 그 비둘기는 노아보다 앞서 나갔다. 새 창조의 경험이 그 새의 마음을 온통 사로잡았다. 이 모든 것이 노아에게는 하나의 교훈이 되었다. 왜냐하면 그는 정결한 짐승과 부정한 짐승에 대해서와, 주께 받아들여질 만한 것이 무엇인가를 이해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가 그토록 정통했던 일에서 그는 넘어지게 되었다. 사람들은 종종 자신의 가장 강한 장점에서 실패하게 된다. 그것이 바로 노아의 경우였다.

창세기 9장의 나머지 부분은 그의 몰락에 관한 것으로 슬픈 대목이 아닐 수 없다. 그는 농사를 짓기 시작했는데, 포도나무를 심었고, 취하게 만드는 포도주인 포도즙 수확을 처음으로 거둔 듯하다. 그가 고의로 그랬던, 모르고 그랬던 그는 지나치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그는 취하였다. 그는 만취하여 깊이 잠들었다. 그는 이제 예전처럼 깨어 있지 않았다. 그는 장막 안에서 벌거벗었다. 여기에 아담의 타락과 놀랄만한 유사점이 있다.

둘 다 한 나무에 대해 잘못한 것이었다. 아담은 선악과를 먹은 것이고, 노아는 포도나무였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실패를 통해 교훈을 배우지 못하는가? 노아는 그러지 못한 것같다.

그들은 둘 다 벌거벗었다. 아담이 그러했던 것처럼 노아는 장막 안에서 벌거벗었다. 그것은 주님 없는 본성의 근원으로 인한 그 타락으로 되돌아간 것이며, 그같은 타락한 본성이 온 인류 위에 임하게 되었다( 5:12). 그는 첫사람의 상태로 되돌아 갔고, 마찬가지로 주님을 불순종했다.

저주가 그 두 경우에 뒤따랐다. 아담은 그 저주를 그의 모든 후손에게 초래했고, 노아는 그 저주를 가나안의 씨인 함의 후손에게 초래했다. 라멕이 생각했던 것처럼 그 저주가 제거되기 보다는 도리어 증가되었는데, 특히 가나안의 후손들에게는 더욱 그러했다.

그가 취한 모습을 보는 것은 슬픈 일이다. 이제는 아무런 활동이 없다. 순종과 축복의 거인이 이제는 무기력하게 땅바닥에 엎드렸다. 이제는 전파도 하지 않고 과거처럼 건축도 없다. 또한 아름다운 분별력도 실패했는데, 그는 그 술취함의 끔찍한 결과도 분별할 수 없었다. 슬프게도 수세기에 걸쳐 수백만의 많은 사람들이 동일한 덫에 걸렸다. 이 모든 것이 새 세계의 풍성함과 번영의 장소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여기 주님의 은총의 약속, 즉 양식이 풍족하고 사람이 이전에 결코 알지 못했던 모든 필요에 대한 풍족함이 주어졌다. 이것이 그로 타락되게 한 것처럼 많은 사람들이 그러하였다. 바울은 부하려 하는 자들에게 경고했다(딤전 6:9). 이것은 그들 자신의 의지이며, 주님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다. 어떤 신자들은 주님이 결코 뜻하지 아니한 부를 얻고자 애쓴다. 그런데 그들이 갈망한 바로 그 부가 그들에게 하나의 올무가 된다. 하나님은 어떤이들은 부하게 하신다. 이것은 주님이 행하시는 것이며, 그러한 자들은 하나님이 주신 그러한 부를 그분의 영광을 위해 사용해야 할 위대한 청지기들이다. 그분은 이 사람에게는 지식을, 저 사람에게는 지도력을, 다른이에게는 설교할 능력을 주시는데 이것은 또다른 의미에서의 부함이다. 사람들은 그 모든 것을 그들에게 주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할 책임이 있다.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뇨”(고전 4:7).

그처럼 노아는 새 세계의 풍성함 때문에 잠들게 되었다.

개개인들이 이러한 면에서 실패할 수 있다. 그러나 또한 라오디게아 교회는 교회로서 그러한 처지에 빠졌다. 번영이 도리어 그들의 타락이 되었다. 그들은 나는 부자라 부족한 것이 없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들의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했다. 이 모든 것은 노아를 잘 묘사한다. 그는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케 하는’(고후 6:10) 사도 바울과 같은 부를 만들지 못했다. 분명히 그 모든 상황에 대해 노아는 가장 수치를 느낄 것이다.

그 위대한 사람에 대한 개요를 다음과 같이 마치고자 한다. 그는 비록 마지막에 실패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토록 정력적이며, 많은 사람보다 뛰어나며 순종적이며 주님의 기쁨과 즐거움이 되었다. 그는 또한 하나님께 지식 가운데 나아갈 수 있는 제사장이요 주님의 마음을 심히 기쁘시게 한 자였다. 그러나 그러한 그도 실패한 많은 신자들처럼 실패할 수 있는 단지 한 인간에 불과했다. 어떤 의미에서 이것은 하나의 위안이 된다.

대부분의 신자들은 분명히 주님의 일들에 있어서 더 정력적이며, 더 순종적이며, 제사장 역할을 더 잘할 수 있다. 그분의 계명은 무거운 것이 아니다. 모든 신자가 제사장이라는 위대한 진리는 무한히 보배로운 것이다. 이 모든 면에서 우리는 그를 따를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술취하여 깊이 잠든 그의 실패를 따를 필요는 없다. 바울은 이렇게 경고 한다.

자는 자들은 밤에 자고 취하는 자들은 밤에 취하되”(살전 5:7).

이것은 빛의 자녀들의 특성이 아니다. 우리는 노아보다 더 큰 지위에 속한다. 우리는 성령을 모시고 있다. 노아를 사용했던 그 성령이 지금은 우리 안에 거하신다.

<다음 호에 계속> 

 

(1999 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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