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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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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12. 16. 10:12 횃불/1999년

하나님 아버지와의 교제

 이 춘 원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당신의 구속함을 받은 자녀들과 영광스런 교제를 나누시고 또 그런 거룩한 교제를 항상 영원토록 나누시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이를 위하여 일찌기 하나님은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사 그의 피로 죄인들의 죄를 모두 사하시고 당신과의 화평스런 교제를 항상 나눌 수 있는 길을 활짝 열어 놓으셨습니다. 율법의 휘장이 온전히 걷혔습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막혀 있던 죄의 담을 헐어버리셨습니다. 의문에 속한 율법과 모든 제도와 종교적인 울타리를 그분의 십자가로 단번에 격파해 버리셨습니다. 영원한 교제의 길이 온전히 열렸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신”(고후 5:18,19) 은혜는 놀라운 구속의 결과입니다. 구원을 받은 그리스도인들에게 화목하게 하는 말씀까지 주셨으니 감사할 뿐입니다.

그분의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주시고 그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에베소서 1장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영적인 복이 너무나 큽니다.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선택하시고, 예정하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당신의 자녀들이 되게 하시고, 그분의 사랑하시는 아들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신 은혜와 영광을 찬양하게 하신 것입니다. 할렐루야!

하나님 아버지의 구속적인 은혜를 인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난 자녀들이 거룩하고 신령한 예배를 드리고,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행하고, 진리의 말씀대로 순종하고, 기도 생활에 전념하고, 주님의 거룩하신 교회와 그분의 영광스런 복음을 위하여 피차 사랑의 봉사에 힘쓰는 것은 참으로 선하고 아름다운 교제입니다.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 4:23,24).

구속함을 받은 거듭난 성도들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아버지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예배 드림은 구원받은 성도의 마땅한 봉사입니다. 제일 큰 의무이자 책임이고 가장 큰 영광이며 복입니다.

예배는 주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고난을 당하시고 몸버려 피흘려 돌아가신 구속의 은혜를 기억하고 기념하며 감사하는 것입니다.

예배드리기 위하여 예배당에 나아가는 것이지, 예배하는 것을 구경하거나, 사람들과 만나거나, 설교를 하거나, 기도를 듣거나, 찬양 연습을 하거나, 친목을 도모하기 위하여 교회에 가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날의 문제는 거듭나지 않은 많은 사람들이 교인이라는 마크를 달고 예배를 보기 위하여 교회에 간다는 것입니다. 입으로만 믿는 형식적인 교인들에게는 중생한 경험과 그 확실한 영적인 변화가 없기 때문에 그 속에 성령님이 거하시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신령한 제사, 곧 성령님의 인도하심과 감화하심 가운데서 드리는 참된 예배가 전혀 없습니다. 생명 없는 죽은 형식적인 의식으로 행하는 종교적인 행사일 따름입니다. 우상을 섬기는 행동과 같습니다.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성령님에 의한 예배, 곧 성령님께서 인도하시는 예배를 받으십니다.

그런데 구원 여부를 떠나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예배당에 가서 예배를 드릴 때 성령님으로서 예배를 드리지 않고 자기 육신의 생각대로 행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예배 시간에 육신의 일들을 생각하고, 성도들의 기도나 자세를 판단하고, 멍하니 있거나 지루하게 여기는 것은 주님의 떡상 앞에서 잘못된 것입니다.

참으로 주님의 몸과 피를 기념하는, 경외하는 심령으로 무릎을 꿇고 있을 때 모임 안에 계신

 

 성령님께서(곧 성도들 속에 계신 동일한 한 성령님께서) 주님의 고난의 사역을 기억케 하시고 감사의 찬송과 말씀과 기도를 드리도록 인도하십니다. 인간의 생각에 맞추어 무엇을 한 다음에 무엇을 하고 누구 다음에 누구 차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님의 뜻대로 예배를 인도해 가시는 것입니다.

아버님 앞에 엎드린 자녀들이 아버지를 사모하고 경외하는 심령으로 구속의 은혜를 단순히 기억하고 기념하고 묵상하고 있으면 성령님께서 그 뜻대로 성도들을 감동시키십니다. 이렇게 성령님께서 드리는 예배 시간은 주님의 은혜와 영광으로 충만하게 되고 아버지께서 기쁨으로 받으십니다.

성령님으로 말미암지 않고 육신적으로 드리는 예배 시간은 성령님을 근심케 하고, 분위기를 차갑게 만들고, 답답한 침묵과 형식적인 의식을 치르는 것에 불과합니다. 그런 것은 맹목적인 헛된 예배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성령님의 자유스런 인도와 역사가 없이 사사로운 육신의 생각과 고정된 순서나 요식 행위에 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말씀대로 진정한 예배를 드릴 때 주님의 고난의 은혜를, 구속 사역의 위대하심을, 존귀하신 주님의 이름을, 주님의 부활과 승천과 승귀와 영광과 다시 오심까지도 기억하게 되고 감사 찬양하게 됩니다.

진정으로의 의미는 진리로”, “말씀으로드리는 예배를 뜻하는 것이므로,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예배는 진리의 성령님으로 드리는 예배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거듭난 성도들이 그 몸을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는 것을 받으시고, 말씀대로 떡과 잔을 놓고 주님을 기념하는 예배를 받으시며, 사람의 육신적인 생각이 아닌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순복하는 예배를 열납하십니다.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은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며 또 그 예배를 통하여 아버지와 진리의 성령님으로 친교를 나누고, 그리고 그 예배를 통하여 신앙 생활의 기쁨과 능력과 충만하심을 누릴 수 있습니다.

진정한 의미에서의 예배는 주일날 기념하는 만찬 예배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의 매일 매일의 삶이 항상 주님의 은혜를 기억하고 감사하는 것 자체입니다. 예배가 곧 봉사가 될 수 있는 것은(worship service) 그것이 어느 한 시간을 정해 놓고 드리고는 끝나버리는 것이 아니라, 그의 전 생명과 온 심령과 생애 전부를 통하여 주님의 구속의 은혜를 기억하고 감사하고, 그 정신 가운데서 성령님으로 사는 인격적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배는 그리스도인의 삶 그 자체입니다. 항상 예배드리는 정신과 그 자세로 살지 않는 사람은 결코 주님과의 친밀한 교제를 나눌 수 없습니다. 주님을 섬길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제대로 섬길 수조차 없습니다.

호흡이 있는 자마다 여호와를 찬양”( 150:6)할 수밖에 없고 여호와를 봉사하여 그 뜻을 행하는”( 103:21) 자마다 주님을 찬양하고 예배를 반드시 드릴 수밖에 없는 것이 거듭난 성도들입니다.

사실 인간 스스로는 거룩하신 하나님과의 어떤 교제도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구속함을 받은 자녀들은 믿음으로 아버지 앞에 담대히 나아갈 수 있습니다. 매일 매일 의 삶 속에서 주님의 은혜를 감사하며 진리의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사는 희락의 삶을 살아갑니다. 진리의 말씀안에서 성령님의 계시하심과 감화하심을 입고 승리의 삶을 살아갑니다.

모든 죄를 하나도 남김없이 다 용서해 주시고 기억도 안해 주시는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를 믿고 사는 사람이 바로 영원한 속죄를 받은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러므로 혹시 잘못하는 죄를 짓는 경우에도 그 죄까지도 다 담당해 주셨습니다. 매일 매일의 짐과 문제도 다 책임을 져주십니다. 무한한 은혜와 영원한 속죄와 결코 변치 않는 구원을 믿는 그리스도인은 언제 어디서나 어떤 상황 아래서도 하나님의 사랑을 잊을 수가 없으며, 그 누구라도 그 사랑에서 끊을 수가 없습니다( 8:31-39).

구원의 확신 속에 사는 그리스도인들은 비록 연약한 육체에 그림자가 스쳐지나가지만 그 어두움을 따라가지 않고 빛 가운데로 나와서 빛이신 하나님을 우러러 봅니다. 날마다 우리 짐을 지시는 주님 앞에서 우리는 날마다 믿음으로 고백을 드립니다( 4:14-16; 요일 1:5-2:1).

영원한 구속을 완성하신 하나님 아버지와 그 영원한 은혜를 입은 자녀들과의 교제는 결코 변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 창조함을 입은 모든 신자들은 하나님의 영원하신 생명싸개 속에 보호함을 받고 있습니다. 영생을 얻은 신자들은 이미 그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이 되어 있고 생명나무의 열매와 생명수를 마시면서 영생을 누리고 있습니다.

거듭난 성도들은 어제의 삶의 어떠함 때문에 정죄를 받지 않습니다. 그리고 오늘의 현실적인 삶 자체를 도피하지 않고 믿음으로 선한 싸움을 싸워가며 그 사실 자체를 부인하지 않고 모두 아버지 하나님께 아룁니다. 그리고 또 내일 이후의 모든 삶도 염려하거나 두려워하지 않고 전부 주님께 맡깁니다.

심지어 죄를 지었거나 안 지었거나, 살거나 죽거나 간에 주 예수 그리스도안에 온전히 이루어진 영원한 구원을 전혀 의심하지 않는 사람이 바로 구원 받은 신자입니다. 그리고 그 영원하신 사랑 가운데서 믿음으로만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가 부자지간의 친밀한 교제를 나눕니다. 잘못한 죄가 결코 옳은 것은 아니지만, 도리어 그 죄와 그 자백으로 인하여 뜨거운 눈물을 흘리게 되고 주님의 자비스런 손길로 씻음을 받으며 주님의 품에 푸욱 안길 수 있습니다.

! 이 사랑에 넘친 교제의 깊은 친밀성을 누가 알 수 있으리요!

하나님과의 교제는 심령으로 나누는 비밀스런 것이요 동시에 그리스도인의 삶 속에서 몸으로 나누는 끈적끈적한 실체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자녀로서 하나님 아버지와 나누는 것은 매일 매일의 현실적인 삶 속에서 교제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인격적인 사귐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나누는 인격적인 교제는 영적인 믿음으로 이루어집니다. 영적인 믿음의 교제란 어떤 이론적인 허상이 아니라 현실적인 삶속에서 부딪쳐 체험된 간증을 서로 나누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가 없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기도 하지만, 우리의 삶이 그리스도 안에서 주님과 함께 나누는 삶이 안 되고 주님으로 말미암는 삶이 안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주님과 함께 죽고 장사 되고 연합하여 새 생명으로 부활한 산 믿음이 없기 때문에 그의 신앙생활은 힘이 없거나 죽은 것과 같은 것입니다. 이론적인 믿음, 성경 몇 장 몇 절은 알지만 그 믿음이 주님의 고난과 부활의 승리 속에서 나타난 것이 아니기에 희열과 능력과 충만이 없는 것입니다.

! 친애하는 형제여,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의 생명의 진리 속에서 살지 않는 사람을 멀리 하십시오. 구원의 도리를 알기만 하고 구원의 능력이 없는 종교인들과 사귀지 마십시오. 종파에 헌신하고 학문에 몰두하며 사람을 숭상하는 무리들을 따라가지 마십시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사리 사욕에 따라 이리 저리 쪼개서 사악한 지식으로 변질시킨 무리들입니다. 그들 속에는 주님이 계시지 않고 육적인 욕망과 세상적인 학문과 종파적인 조직과 방법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과의 교제는 지적인 학문이나 조직적인 기술로 되는 것이 아니고 오직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음, 곧 바라는 것의 실상으로 되는 것입니다( 11:1).

우리나라 개역성경에는 실상”(實狀)으로 돼 있으나 다비(Darby) 형제는 그의 번역성경에서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체화”(實體化)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직접 사랑하고 경외하고 순종하며 섬기는 자가 주님과 교제를 나누는 것입니다. 그리고 죽어있는 의문적인 이론이나 존재하지도 않는 허망한 것들을 배우거나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살아계신 하나님 속에서 한 생명으로 화하는 것이고 그 진리의 말씀을 먹고 마심으로 한 몸을 이루는 것이며 (바라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믿음이 영혼과 몸으로 이 삶 속에서 인격적으로 실체화 되는 것을 뜻합니다.

육신적으로는 하나님을 볼 수 없지만 영적으로는 하나님을 볼 수 있으니, 곧 우리가 보고 만지고 체험하고 먹고 마시고 누리고 감사하고 전파하고 간증하는 진리의 말씀이 하나님이시며 교제의 본질이며 영원한 생명입니다.

생명의 말씀을 떠나서는 하나님과 교제할 수 없으며 성령님의 계시가 없이는 진리의 하나님을 알고 믿을 수가 없습니다.

! 사랑하는 형제여, 구원받았다 하는 이들 가운데서 하나님을 잘못 믿고 잘못 따라가는 일들이 있기에 상한 심령으로 이 글을 씁니다.

육체의 연습이 약간의 유익이 있다고는 하나, 그 일에 빠지지 마십시오. 성경에 관한 세상 책들과 지식에 몰두하지 마십시오. 그것보다 더욱 더 깊이, 열심히, 성경 자체를 정독하고 주야로 묵상하고 상고하십시오. 이 세상의 지식과 학문과 신학까지도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는 마땅히 죽은 것으로 여겨야만 합니다. 그런 것들이 교만하게 하나님의 말씀 위에서 바벨탑을 쌓고 있기 때문에 많은 종파가 생겼고 기독교를 종교화, 제도화, 형식화시켜 버렸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과의 교제는 그런 것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갓난아이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젓을 사모”(벧전 2:2)할 때 영적인 성장이 있고 아버지와 친밀한 사귐을 나눌 수 있습니다. 종교적인 하나님이 아니라 아버지와 자녀로서 생명 안에서 하나된 친밀한 교제를 나눌 수 있습니다.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의 교제는 하나님 아버지와의 사귐인 동시에 그 아드님 되신 주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나누는 사귐입니다(요일 1:3). 이것은 은혜의 복음 안에서 맏음으로 나누는 교제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미쁘신 뜻은 우리를 불러 당신의 아들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교제케 하시는 것입니다(고전 1:9).

주님과의 교제는 구체적이고 실체적인 것입니다. 그것은 항상 주야로 주님을 기억하고 기념하고 감사하는 예배로 드려지는 심령과 몸으로써의 봉사입니다. 범사에 주님을 묵상하고 찬양하고 전파하는 것은 주님과의 친밀한 사귐의 발로입니다. 기도와 헌신과 예배와 모든 봉사는 아버지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한 가운데서 성령님으로 교제하는 믿음의 행위입니다.

성령의 교제, 성령의 위로, 성령의 감동, 성령의 인도, 성령의 기쁨, 성령의 사랑, 성령의 능력, 성령의 확신, 성령의 기도, 성령의 증거… 이 모두는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 안에서 이루어지는 생명의 교제입니다.

하나님은 육신이 아니시기 때문에 사람들과 교제를 나누실 때 항상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님 안에서 그로 더불어 말씀하십니다. “성령의 무슨 교제”( 2:1,2)이든지 하나님 아버지께는 그 아들되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적인 은혜 안에서 예배와 봉사를 받으시고 성령으로 응답하시고 복을 주십니다. 성령과 물과 피로 임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은혜로서 구속을 완성하셨고 말씀으로서 영생을 보증하셨고 성령님으로서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 아버지와 나누는 믿음의 교제는 그의 아들되신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님과 살아계신 성령님으로 인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말씀과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떠나서는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를 전혀 나눌 수 없습니다.

오늘날의 말세적인 비극은 성령님의 내재하심으로 구원을 받지 않고 이론적인 말씀을 외움으로 구원받은 것처럼 착각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인간의 감정과 지방색과 물질과 욕심과 이익을 따라 자기 뜻대로 모이고 종교적인 사업체를 만든다는 것입니다. 진리의 성령님의 가르치심과 인도하심이 없이 자기가 만든 하나님을 숭배하고 거짓 신과 교제하는 것입니다. <다음 호에 계속> 

 

(1999 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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