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그 이미지
징검 다리
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calendar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Recent Post

theWord Bible Software

Category

2015. 2. 28. 09:47 횃불/ 2000년

겸손한 종의 자세를 가진 사역(2)

알렉산더 스타라우크

종의 자세를 가진 인도자에 대한 바울의 본

강하고 또한 은사가 뛰어난 인도자가 어떻게 사랑이 많은 겸손한 종의 자세를 가진 인도자가 될 수 있을까? 이해가 잘 되지 않거든 바울의 삶을 생각해 보라. 한때는 고집 세고 교만했던 바리새인이 사랑 많고 겸손한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 되었다(고후 10:1). 하나님은 바울에게 엄청난 열심과 지적인 능력을 주셨다. 그분은 또한 바울에게 엄청난 권위도 주셨다. 하지만 바울은 거듭난 후에 그의 은사와 권위를 사람들을 지배하거나 자신의 명성 또는 물질적인 유익을 위하여 사용하지 않고 성도들을 세우고 보호하는데 사용해야 함을 알았다(고후 10:8, 1:24).

바울의 권위 사용에 대한 절제는 그의 겸손한 종의 자세에 대한 아주 좋은 본이다. 바울은 그의 자녀들의 믿음에 혼란을 주는 것보다는 차라리 자신이 고통을 당했다(고후 1:23,24, 13:7). 그는 사람들에게 명령하기보다는 애원했고, “를 들기보다는 사랑과 겸손으로 대했다(고전 4:21, 고후 10:1,2, 13:810, 4:20). 그는 거짓 교사들의 잘못된 가르침을 막을 때는 자신에게 주어진 권위와 힘을 사용하기는 했지만, 새로운 신자들에 대한 인내는 아주 놀라운 것이었다. 어린 성도들이 당하는 어려움이나 시련, 그리고 연약함은 그의 것이 되었다(고후 11:29, 12:21, 4:12). 그는 다른 사람들을 믿음 안에서 세우고 성숙하게 하기 위해서는 기꺼이 자신을 낮추고 희생했다(고후 11:7,21, 13:9). 그는 다른 사람들을 위하여 개인적인 유익과 특권들을 희생했다(고전 10:33).그는 그 무엇보다도 구원받은 자들의 안녕을 생각했다.

바울은 겸손한 종으로서 자신을 높이거나 드러내는 일을 피했다. 그는 언제나 그 자신이 아닌 그리스도를 높였다. “우리가 우리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주되신 것과 또 예수를 위하여 우리가 너희의 종된 것을 전파함이라”(고후 4:5). 그의 겸손한 사역의 본을 따르도록 하자. 그는 고린도에서 일년 반을 살았지만 셋째 하늘에 올라가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할 말”(고후 12:5)을 들은 것에 대해 한번도 이야기하지 않았다. 그는 14년 후에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하기는 했지만 그것도 교만한 성도들이 거짓 교사들의 자랑에 속아넘어갔기 때문에 부득이 한 것이었다(고후 12:113). 그는 고린도 성도들이 자신을 우상시할 것을 알았기 때문에 하늘의 경험에 대해서는 자세히 말하지 않았다. 바울은 그들이 자신이 아닌 그리스도를 높이기를 원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첫 4장에서 고린도 성도들의 그 주위에 있는 능력 있는 교사와 일단의 무리에 대하여 우상화하려는 악한 성향에 대하여 다루었다. 그는 그곳에서 그러므로 누구든지 사람을 자랑치 말라”(고전 3:21, 참고 4:6,7)고 경고했다. 바울은 고린도 성도들에게 자신과 아볼로는 신이 아니라 종이라고 말했다. “그런즉 아볼로는 무엇이며 바울은 무엇이뇨? 저희는 주께서 각각 주신대로 너희로 하여금 믿게 한 사역자()들이니라.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은 자라게 하셨느니라. 그런즉 심는 이나 물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나게 하시는 하나님뿐이니라”(고전 3:57).

하지만 사도의 권위를 가지고 있는 바울의 겸손한 사역을 많은 사람들이 오해했는데 이는 경건한 겸손이 얼마나 이해하기 힘든 것인가를 보여준다. 그들 중에 어떤 이들은 심지어 바울을 약하고 겁이 많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다(고전 4:1821, 고후 10:111). 하지만 주님의 삶이 분명히 보여주는 것처럼 겸손은 약함이나 겁쟁이가 아니다. 예수님은 겸손하시고 온유하셨다. 하지만 많은 무리를 가르치셨고 식자들의 이지적인 논쟁을 혼내주셨으며, 큰 권위를 가지고 가르치셨고, 그 당시 외식자들의 비웃음이나 비난을 담대히 대하셨다. 그분은 의분으로 채찍을 만들어 성전에서 돈 바꾸는 자들을 내어쫓으셨다. 겸손은 약함이나 무능의 증상이 아니라 자신에 대한 진정한 이해이며 경건한 지혜이고 절제이다.

겸손한 종 바울은 그리스도를 위한 강하고 담대한 군사였으며 또한 인도자였다. 그는 자신의 모든 힘과 열심을 다하여 하나님을 섬기고 그의 사람들을 돌아보았다. 그의 삶 동안 그는 많은 어려움에 처했고, 악과 싸워야 했다. “모든 겸손과 온유로 주를 섬긴 나라고 말할 수 있는 그가 범죄한 성도를 그 육을 멸하도록 사단에게 내어주고(고전 5:5), 거짓 선지자 바예수를 소경되게 하며( 13:612), 베드로의 외식을 꾸짖고( 2:11), 담대하게 로마 법정에 섰다. 그는 많은 어려움을 만났지만 계속해서 사랑과 겸손으로 그 형제들을 대했다. 그는 교만 가운데 행하는 것은 문제를 더 어렵게 만들고 하나님의 사람들을 갈라놓게 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베드로,요한, 야고보처럼 바울의 서신들도 사랑이나 인내, 친절, 기도. 용서, 온유, 동정과 같은 명령들이 가득 들어 있는 것이다.

 

종의 자세를 가진 인도자로서의 장로

장로는 지배자나 독재자가 아닌 종의 모습을 가진 인도자여야 한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이 속이 좁은 폭군에 의해 이용당하는 것을 원하지 않으신다. 종의 자세를 가진 장로는 다른 사람들의 생명을 위한 사역에 부름을 받았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종처럼 다른 사람들의 안녕을 위하여 그들의 시간이나 능력을 희생해야 한다. 오직 사랑과 겸손이 있는 장로만이 그 성도들에게 유일하신 그리스도의 삶을 보여줄 수 있으며 성도들을 세상으로부터 지킬 수 있다

그러나 장로들이라 할지라도 독재적이고 또한 이기적이 될 수 있다. 그래서 베드로도 주님과 동일한 용어를 사용하여 아시아에 있는 장로들에게 주장하는 자세의 사역에 대해 경고했다. “맡기운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오직 양 무리의 본이 되라”(벧전 5:3).  베드로는 또한 장로들뿐만 아니라 성도들에게도 그리스도께서 겸손으로 옷입으신 것처럼 겸손으로 옷입으라고 권했다. “다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벧전 5:5). 바울도 동일한 권고를 하고 있는데 그는 에베소 교회 장로들에게 자신의 겸손을 본받으라고 했다. 그는 사도행전 20:19에서 모든 겸손과 눈물로주를 섬긴 것에 대해 말하고 그들도 동일한 자세로 주를 섬기라고 권했다. 성경은 새로 입교한 자는 교만의 위험이 있기 때문에 장로가 되어서는 안된다고 말하고 있다. “새로 입교한 자도 말지니 교만하여져서 마귀를 정죄하는 그 정죄에 빠질까 함이요”(딤전 3:6).

덧붙여서 장로들이 종의 자세로 다른 사람들을 섬기기 위해서는 마땅히 겸손과 사랑을 가지고 다른 사람들을 대해야 한다. 그들은 인내심을 가지고 사람들의 생각을 하나로 모으며, 절충하고, 설득하고, 듣고, 의견 대립을 다루고, 용서하고, 책망이나 권고도 기꺼이 받고, 죄를 고백하고, 자기와 생각을 같이하지 않는 자들이라 할지라도 그들의 지혜나 비젼에 대해 감사를 표할 수 있어야 한다. 그들은 서로 순종하고 친절히 말하며 그 동료들에 대하여 인내하고, 경의를 표하며, 사랑과 진실 가운데서 그들의 마음을 솔직하게 열어놓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때로 성품이 강하고 은사가 뛰어난 장로들은 자기들의 생각에 동의하지 않는 장로들 또는 장로에게 그들의 추종자들을 데리고 교회를 떠나라고 위협해서는 안된다. 장로들 가운데 충돌은 심각한 문제이지만 흔히 있는 일이다. 장로들 중에는 신성한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의 연합을 가볍게 생각하고 자신의 생각을 고집하기 위해 얼마나 쉽게 교회를 갈라놓는지 그저 소름이 끼칠 정도이다. 그들은 결국 자신들의 소원을 성취할지 모르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방법이 아니다

그렇다고 이것에 대한 문제의 해결책으로 교회를 한 사람이 다스리게 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저 문제를 쉽게 해결하는 방법이기는 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의 문제 해결방법은 자신을 낮추고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사랑하며, 서로의 발을 씻기고, 회개하며, 순종하고, 기도하고, 교만을 버리고, 인내하고, 또 서로를 사랑하고 존경하는 것이다. 내가 믿기로는 장로들이 서로에 대하여 불평하는 만큼만 서로 모여서 서로를 위해 기도한다면 그들의 많은 문제들과 불평들이 사라지리라 생각한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장로직, 즉 백성들의 본이 죄기를 원하시는 지도력이다. 장로들은 좌절의 고통이나 문제들, 그리고 섬김에서의 충돌이 그들로 하여금 선한 목자이신 그리스도의 모습을 닮아 가도록 하기 위한 하나님의 쓰시는 도구 중 하나라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만일 그들이 믿음과 순종으로 이러한 어려움들을 대한다면 그들은 주님을 닮아갈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인생에 있어 그리스도를 닮는 목자로 변해간다는 것보다 더 전율적인 것은 없다.

하지만 겸손한 종으로서의 장로라는 말은 권위가 없다는 말과는 다르다. 장로들의 신분과 일을 묘사하기 위해 신약성경이 사용하고 있는 용어(하나님의 청지기, 감독, 목자, 인도자)는 그 책임과 함께 권위도 내포하고 있다. 만일 그들이 권위가 없다면 베드로가 아시아 지역에 있는 장로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로 하지 말라고 권하지 않았을 것이다. 장로들은 교회의 목자로서 지역교회를 인도하고 보호할 수 있는 권위가 주어졌다( 20:2831). 가장 중요한 것은 장로들이 그 권위를 어떻게 사용하느냐 하는 것이다.

장로들은 그리스도인들이 따라야 할 본으로서 그들에게 주어진 권위를 함부로 휘둘러서는 안된다. 장로들은 그 권위를 교묘히 이용하거나, 거만하거나 매정하게 사용해서는 안된다. 그들은 내가 무엇을 하든 아무도(형제들이나 하나님이라도) 내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는 자세를 취해서는 안된다. 장로는 권위적이어서는 안된다. 이는 겸손한 송의 모습과는 맞지 않는다.

잘 알려진 집필가인 페커(J. I. Packer)는 권위주위와 그의 죄악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여러 영역에 권위를 사용한다고 해서 꼭 권위주의자가 될 필요는 없다. 권위를 사용하는 것과 권위주위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 권위주위는 부패한 권위로서 지나친 것이다. 권위주의는 요구된 순종이 진리나 도덕의 이름으로 거부될 때 나타난다.  ...어떤 형태의 인간 권위든 이와 같이 변질될 수 있다. 국가에서 정치인들이 권위 그 자체를 지키기 위해 불합리한 방법으로 권위를 사용할 때 우리는 거기에서 권위주의를 볼 수 있다. 교회에서 지도자들이 그 성도들의 양심까지도 지배하려 할 때 권위주의는 나타난다. 이는 또한 학교, 즉 고등학교나 대학교에서 당신이 배운 분명한 진리에 따라 행하기보다는 자기들의 생각을 따르도록 강요하는 교수들에게서 볼 수 있다. 이는 또한 가정에서 부모들이 그 자녀들에게 이유 없이 어떤 것을 명하거나 금할 때 나타난다. 권위에 대한 불쾌한 경험은 변질된 권위, 즉 권위주의자들로 인하여 온 것들이다. 이러한 경험은 우리에게 모든 형태의 권위는 다 나쁘다는 좋지 않은 생각을 심어준다. 권위주의는 악한 것으로서 반 사회적이며 반인륜적인 것으로 결국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다(이는 스스로를 신성시하는 것이 그 핵심이기 때문이다). 그 맛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할 것이 없다. “

우리는 주님과 사도 바울의 본을 생각할 때 성경적인 장로는 독재자가 아니며 지배하지 않는다는 것에 동의해야만 한다. 진정한 장로는 그 형제들의 양심에 명령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라고 호소한다. 진정한 장로는 고통을 감수하며 어려움을 주는 사람들의 공격과 문제를 감당하여 양들로 부상당하지 않게 한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의 오해와 죄를 감당하여 교회로 평안 가운데 거하게 한다. 그들은 다른 자들로 쉬게 하기 위하여 잠을 설친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의 안녕을 위하여많은 시간과 힘을 소비한다. 그들은 자신들도 다른 자의 권위 아래 있는 것으로 본다. 그들은 자신의 명석함이나 능력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지혜와 도움을 의미한다. 그들은 거짓 교사들의 맹공을 막으며, 그리스도 안에서 성도들의 자유를 지키고, 성도들로 그들의 은사를 개발하며, 성숙하고, 서로를 섬기도록 격려한다.

결론적으로 사도 바울의 사랑장을 인용하여 우리는 종의 자세를 가진 진정한 장로는 오래 참고, 종의 자세를 가진 진정한 장로는 온유하며, 종의 자세를 가진 진정한 장로는 투기하지 아니하며, 종의 자세를 가진 진정한 장로는 자랑하지 아니하며, 종의 자세를 가진 진정한 장로는 교만하지 아니하며, 종의 자세를 가진 진정한 장로는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종의 자세를 가진 진정한 장로는 자기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종의 자세를 가진 진정한 장로는 성내지 아니하며, 종의 자세를 가진 진정한 장로는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종의 자세를 가진 진정한 장로는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종의 자세를 가진 진정한 장로는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종의 자세를 가진 진정한 장로는 모든 것을 참으며, 종의 자세를 가진 진정한 장로는 모든 것을 믿으며, 종의 자세를 가진 진정한 장로는 모든 것을 바라며, 종의 자세를 가진 진정한 장로는 모든 것을 견딘다고 말할 수 있다(고전 13:47).

 

2000 2월호

 

'횃불 > 2000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영원한 구원(14)  (0) 2015.02.28
교제의 효과  (0) 2015.02.28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짐  (0) 2015.02.28
역사의 주인을 아는가?  (0) 2015.02.28
한국의 사랑하는 성도님들께  (0) 2015.02.28
얼굴에 땀 - 인생의 살길  (0) 2015.02.28
노아 - 그의 생애와 그 시대  (0) 2015.02.28
묵시가 없으면  (0) 2015.02.28
posted by 징검 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