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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검 다리
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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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살로니가 모임은 혼란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들은 박해와 환난, 강한 압박감과 고통의 때를 겪으며 견뎌야 했습니다(살후 1:4). 그러나 이러한 상황이 고생스러웠을지라도 그것들 자체로 데살로니가 신자들의 평안을 방해하는 가장 큰 요인은 아니었습니다. 더 치명적인 위협은 데살로니가인의 고통을 해석하고 설명하려고 추구하는 사람들로부터 왔습니다. 자신들의 가르침에 대한 사도적 권위를 주장하고, 이러한 거짓 교리의 선동자들은 “그 주의 날은 지금이다”(살후 2:2, 다비)며 확실하다는 증거로 널리 퍼진 상황이라고 지적했습니다. 그들은 신자들이 겪고 있는 시련은 그 환난이 시작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물론 데살로니가 신자들은 이 가르침에 신뢰를 주는 것보다 더 잘 알고 있어야 했습니다. 결국 첫 번째 서신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의 돌아오심의 기대와 그들의 증거의 뛰어난 특징 중의 하나로서 환난으로부터 그들의 구원을 지목했습니다: “또 너희가 어떻게 우상들을 버리고 하나님께 돌아와 살아 계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며 그분께서 죽은 자들로부터 일으키신 그분의 아들께서 하늘로부터 오실 것을 기다리는지 보여주는데 이분은 다가올 진노로부터 우리를 구출하신 바로 그 예수님이시니라”(살전 1:9-10). 이후 첫 번째 서신의 후반부에서 바울은 신자들을 격려합니다. “…구원의 소망을 투구로 쓰자.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진노에 이르도록 정하지 아니하시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구원을 얻도록 정하셨느니라”(살전 5:8-9). 이 지식은 하나님이 그들에게 환란의 참화를 통과하도록 택하신 것이 아니라, 구원을 얻도록 택하셨다는 이 지식은 그들의 생각을 굳건히 하고 거짓 가르침의 공격에 맞서 그들의 마음을 무장시켜야 했습니다.

 

그렇지만 이론적으로 진리를 알고 있는 것과 시련과 혼란 속에서 진리를 붙드는 것은 완전히 다른 일이며 그리고 사도들의 말에 그럴듯한 주장과 해석으로 귀를 두드리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었습니다. 바울은 이것을 이해했고 이들 신자들이 “마음에 동요하거나 근심하게”(살후 2:2) 될 것을 염려했습니다. 그래서 그 사건들에 관하여는 환난 이전과 사이에 일어날 사건들에 대해 그들과 함께 있는 동안 그들에게 말했던 것들을 상기시킴으로써 그들을 안심시키기 위해 썼습니다(2:5).

 

그는 첫 번째 서신의 핵심이었던 진리로 그들을 다시 데려가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데살로니가인들은 그들을 둘러싸고 벌어지고 있는 사건들을 당혹스럽게 바라보며 뭔가 잘못되었고 결국은 주의 날이 왔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하자, 바울은 다른 어떤 것보다 더 그들의 마음의 평안을 회복시키고 강화할 수 있는 진리를 서둘러 상기시켜 줍니다. 그래서, 그는 그들에게 간청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과 우리가 그분께로 함께 모이는 것에 의거하여”(살후 2:1). 즉 그리스도가 오시는 사실만으로 위로가 되지만 그분께서 오실 때 그들이 땅을 떠나 “공중에서”(4:17) 그분께로 모이러 간다는 사실은 데살로니가인들의 불안의 핵심을 파고 들었습니다.

 

바울은 다음 구절에서 주의 날이 시작되기 이전에 반드시 일어나야 하는 두 사건을 설명하며 위로를 더합니다. 이러한 사건들은 먼저 “배교”(살후 2:3), 그리고 둘째, 죄의 사람의 드러나는(3-4절) 것입니다. “배교”는, “이탈” 혹은 심지어 “반역”이라는 의미 있는 단어로 배신입니다. 일부 주석가들은 이것을 공간적인 장면으로 이해했으며 이 구절에 휴거에 대한 또 다른 관계로 보았습니다. 그렇지만 성경의 다른 곳과 다른 고대 문헌에서 이 단어가 사용된 것은 본문이 중요한 영적, 종교적 출발을 의미하는 더 전통적인 견해를 뒷받침합니다. 기독교의 역사는 하나님의 진리로부터 이탈하고 거부하는 많은 배교가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배신이며 그 중요성에서 유일한 거부 행위입니다. 이 주목할 만한 패역은 죄의 사람(불법, ESV)이 나타나기 위한 활동무대를 세울 것입니다. “저 죄의 사람 곧 멸망의 아들이 드러나지 아니하면 그날이 오지 아니하리라. 그는 대적하는 자요, 또 하나님이라 불리거나 혹은 경배받는 모든 것 위로 자기를 높이는 자로서 하나님처럼 하나님의 성전 안에 앉아 자기가 하나님인 것을 스스로 보이느니라”(살후 2:3-4). 그래서 기독교계는 하나님으로부터 철저히 돌아서게 되며 이 찬탈자의 자랑스러운 주장이 받아들여질 것이고, 그리고 그의 스스로 즉위가 받아들여질 것이며 진리에서 완전히 그리고 마침내 배교한 사람들에 의해 갈채를 받을 것입니다.

 

이 구절은 이 사람의 특성과 행동에 대해 약간 알려줍니다. 그는 불법이 특징입니다. 독특하게 그는 유다처럼 “멸망의 아들”이라고 불리어집니다. 그의 목표는 하나님 또는 하나님이라고 불리는 모든 것에 대한 완전한 반대입니다. 성경의 다른 구절에서 이 악한 인물에 대한 자세한 내용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13:1과 17:15을 비교하면 우리는 그가 이방인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부활한 로마 제국의 지도자입니다(단 9:26). 그는 외교적 기반으로(단 8:24-25; 계 17:12), 정복하며(단 7:8,24) 거대한 정치적인 연합군을 이끕니다(계 13:1; 17:12-14). 그는 가장 교활하고(겔 28:2-5) 두드러진 능력의 사람이 될 것입니다(단 7:8,20; 8:23-25). 궁극적으로, 그의 세력의 원천과 그가 전 세계적으로 명성을 얻고 지배력을 갖게 된 힘의 원천은 사탄입니다(계 13:4; 살후 2:9). 그는 “그들이 진리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아니하여 구원받지 못한”(살후 2:10) 사람들에 의해 환영받고 인정을 받을 것입니다. 복음의 진리를 거부한 이들은, 법적으로 눈이 멀게 될 것이며, 하나님께서는 “강한 미혹을 보내사 그들이 거짓말을 믿게”(11절) 하실 것입니다.

 

이러한 사건들이 일어나기 전에 주의 날이 시작될 수 없다는 사실은 데살로니가인들을 안심시켰을 것이며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또 다른 질문이 그들의 마음에 일어났을 것입니다. 물론 배교는 바울이 썼을 당시 일어나지 않았지만, 그들이 곧 본격적인 배교를 목격하고 환난에 처할 수 있을까요?

 

바울은 이미 다루었던 사건들을 되돌아보면서 이 질문에 답합니다. 그러나 그는 단순히 되돌려 반복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는 다른 관점으로 옮겨갑니다. 바울은 휴거가 일어나기 전에 배교나 적그리스도가 등장할 수 없는 이유를 더 분명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하는 하나님의 목적의 배후로 우리를 데려갑니다. “그가 그의 때에 드러나게 하려고 무엇이 저지하고 있는지 지금 너희가 알고 있나니 불법의 신비가 이미 일하고 있으나 다만 지금 막고(억제하는, 다비) 있는 이가 막되 길에서 옮겨질 때까지 막으리라(억제하는, 다비). 그 뒤에 저 사악한 자가 드러날터인데 주께서 자신의 입의 영으로 그를 소멸시키시고 친히 오실 때의 광채로 그를 멸하시리라”(살후 2:6-8).

 

배교와 죄의 사람의 나타남은 억제되고 있습니다. 이 구절은 두 가지 억제자를 제시합니다 - 6절에서 “무엇”과 7절에 “누구”. 억제하는 사람은 “길에서 옮겨질” 것이며 그 다음에야 “그 악인”이 드러날 것입니다. 이 구절의 해석에 약간의 차이가 있을지라도, 교회는 6절에 보이고 있는 그 관점과 7절에서 성령님이 보인다는 견해가 문맥에 가장 적합한 것 같습니다. 사탄은 자기 뜻대로 행동할 자유가 없습니다. 성령님은 세상에서 존재는 교회에 내주하시고 땅에 대한 그 악마적인 계획의 실현과 이행을 억제하십니다. 다만 교회가 휴거로 옮겨지는 때 성령님이 떠나가야만 배교가 일어날 것이며 죄의 사람이 드러날 것입니다.

 

그러므로 데살로니가 신자들은 주의 날이 다가왔고 환난에 들어갔다는 것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들이 지상에 남아 있다는 바로 그 사실 자체가 하나님의 능력이 아직도​​ 억제하고 있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그들이 아직 땅에 있는 동안에는 환란이 시작될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필요한 사전 준비 과정조차 진행될 수 없었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사태의 급습과 잘못된 공격 모두에 당황함이 없이 직면할 수 있었습니다. 바울은 이 장을 시작하며 그들의 마음과 감정이 혼란스러워지고 근심으로 흔들리고 괴로워할 것을 염려했습니다. 그는 장을 마치며 그들의 마음과 생각이 모두 평안해지기를 기도합니다: “이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그분과 또 우리를 사랑하시고 은혜를 통해 영존하는 안위와 좋은 소망을 주신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께서 너희 마음을 위로하시고 모든 선한 말과 일에 너희를 굳게 세우시기를 원하노라”(16-17절). 하나님의 말씀의 진리, 그리고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 안에서 우리의 위치에 대해 이해함으로 우리 시대에 잘못들과 도전에 맞설 수 있도록 우리를 준비시켜 주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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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징검 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