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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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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6. 22. 07:44 횃불/ 2000년

십자가의 도

한 봉 래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기록된 바 내가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리라 하였으니 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뇨 선비가 어디 있느뇨 이 세대에 변사가 어디 있느뇨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케 하신 것이 아니뇨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고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사람보다 지혜 있고 하나님의 약한 것이 사람보다 강하니라”(고전 1:18-25).

 

십자가의 도의 내용은,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에 달려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죽으셨다는 것입니다.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본체 되신 분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사람들에게 멸시 받고 버림받아 마침내 죽임까지 당하셨습니다. 이것이 성경이 전하는 복음의 주된 내용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사람에게는 ‘거리끼는 것’입니다.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 온 인류를 심판하실 하나님께서 십자가에서 이런 수치스러운 일을 겪어야 한다는 것을 누가 믿을 수 있겠습니까? 심지어 위의 서신을 기록한 사도 바울조차 이 사실을 믿을 수 없었습니다.

 

바울의 간증 - 그가 십자가의 도를 믿을 때에

나도 나사렛 예수의 이름을 대적하여 범사에 행해야 될 줄 스스로 생각하고 예루살렘에서 이런 일을 행하여 대제사장들에게 권세를 얻어 가지고 많은 성도를 옥에 가두며 또 죽일 때에 내가 가편투표를 하였고 또 모든 회당에서 여러 번 형벌하여 강제로 모독하는 말을 하게 하고 저희를 대하여 심히 격분하여 외국 성까지 가서도 핍박하였고····아그립바 왕이여 그러므로 하늘에서 보이신 것을 내가 거스리지 아니하고”(26:9-19).

사도 바울 자신도 이전에는 십자가에 달린 ‘예수’가 이스라엘의 구원자이며, 유대인의 왕이며,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그 뿐 아니라 이 사실을 믿고 전하는 자들도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 ‘십자가의 도’를 전하는 자들을 죽이고, 그들로 하여금 자기의 믿음을 부인하도록 강요하였습니다. 그러나 다메섹으로 가는 도중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습니다. 십자가에 처참히 못박히신 그분께서 부활하셔서, 이제 영광의 주로서 바울을 만나신 것입니다. 영광스러운 주를 보는 순간 바울의 질문은 이것이었을 것입니다.

왜 영광스러운 당신께서 그와 같은 수치스러운 죽음을 당하셔야 했습니까?”

이것은 비단 바울의 질문일 뿐 아니라, 오늘날 우리가 던져야 할 중대한 질문입니다.

 

구원을 시작하시는 하나님의 능력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사람의 지혜는 뛰어납니다. 사람 자신도 상상하지 못할 만큼 과학은 발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지혜로운 사람은 모든 일에 자기의 생각을 출발 지점으로 삼습니다. 모든 문제를 자기의 ‘지혜로운 생각’을 사용하여 해결하려 합니다. 그는 그렇게 ‘지혜로운’ 자기의 생각에, ‘사람이라는 존재 자체에 문제가 있다는 생각은 하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을 향해 십자가의 도는 이와 같이 말합니다.

당신은 하나님께 대해 잃어버린 자입니다. 당신이 자신의 일을 나름대로 잘 처리하고 있다고 여 기지만, 당신에게 능력이 많은 듯이 생각되지만, 당신은 실은 영원한 멸망을 향하여 가고 있습니다

또한 십자가의 도는 ‘지혜’가 아닌 ‘구원’을 말하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인이며, 이 멸망 당할 죄인은 반드시 구원을 받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것을 사람들은 받아들일 수가 없습니다. 십자가의 도가 미련하게 보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지금까지 내 인생을 잘 꾸려 왔습니다. 그런데 내게 무슨 잘못이 그렇게 많기에 죄인이며, 지옥에 가야 한다는 겁니까?”

구원은 자기가 죄인임을 아는 데서 시작됩니다. 그러나 사람은 이 ‘시작’조차 할 수 없습니다. 자기가 멸망 받아 마땅한 죄인임을 스스로 깨달은 사람은 없습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도 이것을 깨닫도록 도와줄 수 없습니다. 자기의 참모습을 보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 뿐이십니다. 하나님의 일하심으로 말미암아 이것을 깨달은 사람은 자기에게 어떤 선함도 없으며, 자랑할 만한 지혜와 능력 없음을 고백하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능력만을 자랑하게 됩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이런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사람의 지혜

내가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별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리라 하였으니, 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뇨? 선비가 어디 있느뇨? 이 세대에 변사가 어디 있느뇨?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케 하신 것이 아니뇨”(고전 1:20).

사람은 동물과 달리 위대한 존재로 지음을 받았습니다. 그는 자기를 성찰하며, 자기의 존재를 향해 질문을 던집니다. 인생의 출발과, 과정과, 결국과, 그 의미에 관해 사색합니다. 동물은 그저 본능적 욕구를 충족시키며 살아갈 뿐이지만, 사람은 자기와, 자기를 둘러싼 환경에 대해 질문을 던집니다. 그리고 그 질문에 답하기 위한 노력의 산물이 소위 인간이 이룩해 낸 ‘문명’입니다. 그러나 해결되지 않는 문제가 있습니다.

하나님이라는 분, 절대적인 주권자, 그분이 과연 존재하는가? 나는 그분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사람은 이 질문 앞에서만은 어리석은 결론을 내리고 맙니다. 사람에게 있는 지성, 이 놀라운 지혜가 하나님에 대해서만은 무지합니다. 인간이 이 영역에 있어서 오히려 어리석어질 수밖에 없는 까닭은 하나님께서 사람의 지혜를 미련케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질문하십니다.

지혜있는 자가 어디 있느뇨.”

 

아굴의 잠언

이 말씀은 야게의 아들 아굴의 잠언이니 그가 이디엘과 우갈에게 이른 것이니라 나는 다른 사람에게 비하면 짐승이라 내게는 사람의 총명이 있지 아니하니라 나는 지혜를 배우지 못하였고 또 거룩하신 자를 아는 지식이 없거니와 하늘에 올라갔다가 내려온 자가 누구인지, 바람을 그 장중에 모은 자가 누구인지, 물을 옷에 싼 자가 누구인지, 땅의 모든 끝을 정한 자가 누구인지, 그 이름이 무엇인지, 그 아들의 이름이 무엇인지 너는 아느냐 하나님의 말씀은 다 순전하며 하나님은 그를 의지하는 자의 방패시니라 너는 그 말씀에 더하지 말라 그가 너를 책망하시겠고 너는 거짓말하는 자가 될까 두려우니라”( 30:1-6).

이 말씀은 아굴이 기록한 잠언입니다. 그는 이 지혜의 말씀을 기록할 만큼 지혜로운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와 같이 고백합니다.

나는 다른 사람에게 비하면 짐승이라.”

그는 많은 지식을 추구하였습니다. 수없이 많은 지혜로운 말들을 배우고 연구하였습니다. 그는 아무 생각 없이 그저 인생을 살아가는 다른 사람들과 달리, ‘생각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자기의 모든 행동과 그 방향에 대해서 생각해보았을 것입니다. 도대체 어떤 것이 의미 있으며, 어떤 것이 올은 것인지 잘 검토해 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내린 결론은 이와 같았습니다.

나는 생각 없이 사는 다른 사람들보다 못하다. 인생의 의미는 하나님께서 주신 것들을 즐기고 기뻐하고 누리는 것인데, 나는 이런 것들은 하지 않고 생각만 하고 있었으니 오히려 내가 어리석은 자로구나.”

생각하고 고민할수록 사람은 자기의 한계를 깨닫게 됩니다. 아굴은 바로 이것을 알았습니다.

내가 많은 것을 배웠고, 알고 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을 알고 있지 못하다. 내게는 사람의 총명이 있지 아니하니라.” 당신은 이 질문에 어떻게 대답하시겠습니까? 하늘에 올라갔다가 내려온 자가 누구인지, 바람을 그 장중에 모은 자가 누구인지, 땅의 모든 끝을 정한 자가 누구인지, 그 이름이 무엇인지 당신은 알고 있습니까? 그리고 그 아들의 이름이 무엇인지 알고 있습니까?

 

그 이름은 예수 그리스도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 3: 13).

그분의 이름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분을 알지 못한 채 배운 많은 지식들은 사실은 자신을 괴롭히는 것일 뿐입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한다면, 아무 것도 모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분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이와 같이 고백해야 합니다.

‘나는 지혜가 없습니다. 하나님만이 지혜로우신 분이십니다. 사람의 지혜로써는 도저히 당신을 알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다 순전하며 하나님은 그를 의지하시는 자의 방패시니라. 너는 그 말씀에 더하지 말라. 그가 너를 책망하시겠고 너는 거짓말하는 자가 될까 두려우니라.”

이 구절은 사람이 하나님을 추구하여 찾아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시가 있어야 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사랑하셔서, 친히 사람에게 다가가시고, 알려 주시는 계시의 말씀이 있습니다. 그 말씀은 순전하며, 그 말씀은 믿을만합니다. 이 말씀이 십자가의 복음입니다. 영광의 하나님이 사람이 되어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사람의 지혜를 폐하심

내가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리라.” 하나님이 사람의 지혜를 멸하시고 총명을 폐하셨습니다. 사람의 지혜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들이는데 장애가 되기 때문입니다. 아담 이후 전 인류는 지금껏 하나님의 단순하고 분명한 말씀들을 자기의 지혜 때문에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아담은 선악과를 먹지 말라고 하신 그 단순한 말씀을 지켰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지혜롭게 할만큼 탐스러운 열매’를 따먹었습니다.

구약성경에 나타난 이스라엘의 역사도 그러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린아이처럼 자기 하나님 여호와를 신뢰하였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도 말씀을 어기고, 약속의 땅인 가나안에 머물지 아니하고 애굽으로 내려가며, 이방 나라들과 연합하며, 말씀과 반대로 사람의 생각과 방식대로 하나님을 섬기려 하였고, 결국 멸망 당해, 열국 중에 흩어지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단순한 신뢰와 말씀을 의지하는 대신, 자기의 생각과 지혜를 따라 행동함으로 멸망을 가져 온 것이 성경에 나타난 사람의 역사입니다.

이제 하나님은 사람의 모든 지혜와 총명을 폐하셨습니다. 자기의 지혜와 총명으로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기를 기뻐하셨습니다. 이제 그분은 십자가의 복음을 전하시고. 그것을 받아들이는 자를 기뻐하십니다.

하나님, 저의 지혜가 아닙니다, 저의총명이 아닙니다. 하나님, 당신의 말씀이 옳으십니다. 십자가의 복음을 보이신 당신은 은혜로우신 분입니다. 내 생각에는 모순되게 보일지라도, 당신의 말씀은 진실하시며, 믿을 만한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올바른 관계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찾고, 사람의 법정에서 하나님께서 자기의 존재를 증명하셔야 하는 것이라면, 사람이 주체가 된다면-마치 사람은 아무 문제가 없는데 하나님이 자기를 믿기 어렵게 만들어 놓으셔서 믿을 수 없다고 한다면-이것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올바른 관계가 아닙니다.

사람은 멸망을 향해 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이 멸망 당할 사람을 십자가의 도로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습니다. 그래서 ‘복음’은 우리에게 ‘지혜’가 아닌, ‘구원’을 제시합니다.

당신은 무엇보다도 먼저 구원 받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당신이 멸망 당할 죄인임을 먼저 알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사람의 요구와 하나님의 사랑

유대인들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들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고전 1:22,23).

사람들은 하나님께 요구합니다. 하나님 앞에 요구하는 자로 서서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 당신이 정말 하나님이시라면 이렇게 해 보십시오.”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그 현장에 있던 사람들이 이렇게 요구했습니다.

당신이 정말 그리스도라면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십시오. 그러면 믿겠습니다.”

이 제안에 하나님께서 동의하셔야 하겠습니까? 물론 하나님께서 능히 이 일을 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셔야 되겠습니까? 그것이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나타내는, 하나님을 입증해 내는 장면이 되겠습니까? 결코 아닙니다.

신약성경의 많은 사람들이 예수께 나와 질문했습니다.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면 이 질문을 대답해 주십시오. 성경의 이 어려운 대목을 잘 설명해 주십시오.”

이것을 일일이 다 설명해 주신다면, 그들을 납득시켜 주신다면, 그 때 그들이 믿겠습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은 하나님 앞에 요구하는 자로 서서는 안됩니다. 오히려 ‘믿는 자’로 서야 합니다. 내 생각과 다르고, 이해할 수 없어도, 내 생각에는 모순되게 보여도 하나님, 당신이 옳으십니다라고 고백하는 것이 하나님 앞에 서는 올바른 자세입니다. 이것이 참된 축복을 받을 수 있는 위치입니다.

이 세상에서는 자신의 당연한 권리를 포기하는 사람은 참으로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십자가에서 약해지셨습니다. 그리고 어리석어지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이시지만 어리석게도 사람이 되어 오셨습니다. 모든 인류를 심판하실 분이, 어리석게도 십자가에서 자기의 모든 권리를 포기하셨습니다. 그분께서 단지 원하시기만 해도, 부르시기만 해도 수많은 천군천사들이 올 것입니다. 그러나 그분은 어리석어지셨습니다. 그리고 약해지셨습니다. 그분 스스로 자신의 생명을 방어하지 않으셨습니다. 피를 쏟으시며, 혀가 잇틀에 붙을 만큼 목이 마르셨는데도, 자신을 조롱하며 멸시하는 자들의 손으로 주는 신 포도주를 받으시기 전에는 스스로 갈증을 해결할 수 없을 만큼 약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왜 이렇게 하셨을까요?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것이 사랑이라고, 하나님께서 죄인을 사랑하셨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죄를 가볍게 보아 넘기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흔히 사랑이 잘못을 눈감아 주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그저 못 본 척하시고, 별것 아닌 것으로 가볍게 처리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죄의 심각성은 예수 그리스도만이 정확히 알고 계셨습니다. ‘죄’라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도대체 얼만큼의 파괴력이 있는 것인지, 사람을 영원한 멸망으로 끌고 갈 수 있는 것인지, 주님은 잘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오직 그분만이 그 ‘죄’를 담당하실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한없이 약해지시고, 그 어리석은 십자가를 지셔야 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러한 약하심과 어리석음의 뒤에는 우리를 향한 간절한 사랑이 있었음을 성경은 증거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받은 복음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앞에 서 있는 십자가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까지 고백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 이외에는 내가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전 2:2).

그는 십자가만 알기로 작정했습니다. 그리고 그 이외의 모든 것은 알지 않기로 결정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도 부활하신 몸에 십자가의 상처를 갖고 계셨습니다. 영원히 계실 영광스러운 그 몸에 십자가의 상처를 간직하고 계십니다. 교회는 이 십자가의 증거를 갖고 있어야 합니다. 교회는 약하고 어리석은 십자가를 갖고 있어야 합니다. 복음을 전할 때, 십자가를 지혜롭게 설명하여 납득시키려 하지 말아야 합니다. 십자가의 복음은 미련한 채로 전달되어야 합니다. 이해되지 않은 채로 전달되어야 합니다.

십자가의 복음은, 사람의 지혜로 이해했기 때문에 받아들여지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의 생각으로는 도저히 받아들여질 수 없지만, 믿어야 합니다. 거리낌이 없어지지 않은 채로 믿어야 합니다.

사람은 이렇게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능력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이 아니고서는 아무도 예수를 주라 시인할 자가 없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약함 속에 서 있어야 합니다. 사람의 능력, 우리의 능력으로는 한 사람도 구원시킬 수 없는 이 연약함 속에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교회가 다시 지혜로워지려 합니다. 세상의 온갖 지혜를 동원해 십자가를 설명하고, 많은 사람들을 끌어 모으려 합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성령의 능력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우리는 담대하게 약한 편에, 어리석은 편에 섭시다. 이것이 우리의 나아갈 방향이며, 십자가의 도로써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기쁘신 뜻입니다.

사도 바울의 생애에서 이같은 예를 살펴보겠습니다.

 

바울은 복음을 전할 때에

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시거늘 브루기아와 갈라디아 땅으로 다녀가 무시아 앞에 이르러 비두니아로 가고자 애쓰되 예수의 영이 허락지 아니하시는지라 무시아를 지나 드로아로 내려갔는데 밤에 환상이 바울에게 보이니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서서 그에게 청하여 가로되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 하거늘 바울이 이 환상을 본 후에 우리가 곧 마게도냐로 떠나기를 힘쓰니 이는 하나님이 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우리를 부르신 줄로 인정함이러라”( 16:6-10).

복음은 이스라엘이 위치한 중동 지역에서 로마 등 유럽으로 먼저 전해지고, 그 다음 아시아에 전해집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본래 아시아부터 복음을 전하고 싶었습니다. 이 생각도 인간적인 생각이라기보다도, 하나님의 일을 잘 아는 사도 바울의 조심스러운 하나님 앞에서의 선택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하나님께서는 그가 아시아로 가는 것을 막으셨습니다.

에베소에 와서 저희를 거기 머물러 두고 자기는 회당에 들어가서 유대인들과 변론하니 여러 사람이 더 오래 있기를 청하되 허락지 아니하고 작별하여 가로되 만일 하나님의 뜻이면 너희에게 돌아오리라 하고 배를 타고 에베소를 떠나 가이사랴에서 상륙하여 올라가 교회의 안부를 물은 후에 안디옥으로 내려가서 얼마 있다가 떠나 갈라디아와 브루기아 땅을 차례로 다니며 모든 제자를 굳게 하니라”( 18:19-23)

이제 바울은 아시아의 에베소를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그가 더 오래 머물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다시 유럽 쪽으로 돌아갑니다. 그는 여전히 하나님의 지혜를 신뢰하고 있습니다. 왜 아시아가 아니고 유럽이어야 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그는 하나님의 지혜를 자기의 지혜보다 더 신뢰하고 있었습니다.

바울이 회당에 들어가 석 달 동안을 담대히 하나님 나라에 대하여 강론하며 권면하되, 어떤 사람은 마음이 굳어 순종치 않고 무리 앞에서 이 도를 비방하거늘, 바울이 그들을 떠나 제자들을 따로 세우고 두란노 서원에서 날마다 강론하여 이같이 두 해 동안을 하매 아시아에 사는 자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주의 말씀을 듣더라···· 이와 같이 주의 말씀이 힘이 있어 흥왕하여 세력을 얻으니라”( 19:8-10,20).

이번에는 사도 바울이 석 달 동안 에베소에서 복음을 전했으며, 두란노 서원에서 두 해 동안 복음을 전했고, 그리하여 아시아에 사는 자는 다 주의 말씀을 들었다고 성경이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도 바울을 통하여 주의 말씀이 흥왕한 교회, 복음의 핵심적인 교회(성경에서 에베소는 복음의 중심지입니다)를 에베소에 세우시고자 하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원래 계획이셨습니다. 그러나 처음에는 바울이 아시아로 가고자 하는 것을 막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길을 막으실 때가있습니다. 그러나 사랑이 부족해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와는 다른, 우리의 생각을 뛰어넘는 계획을 갖고 계십니다. 우리의 생각에 넘치도록 우리를 축복하고자 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신뢰해야 합니다.

 

로마로 가고자 한 바울

어떠하든지 이제 하나님의 뜻 안에서 너희에게로 나아갈 좋은 길 얻기를 구하노라 내가 너희 보기를 심히 원하는 것은 무슨 신령한 은사를 너희에게 나눠주어 너희를 견고케 하려 함이니 이는 곧 내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와 나의 믿음을 인하여 피차 안위함을 얻으려 함이라 형제들아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가고자 한 것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이는 너희 중에서도 다른 이방인 중에서와 같이 열매를 맺게 하려 함이로되 지금까지 길이 막혔도다”( 1:10-13)

여기에도 로마로 가고자 했던 바울을 하나님께서 막으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사도 바울은 이방인을 위한 사도로 부르심을 입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하나님의 뜻을 따라 로마로 가려 했습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은 그를 막으셨을까요?

로마에 가지 못한 채 바울은 보고 싶은 성도들에게 편지를 쓰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 편지가 바로 우리가 지금 갖고 있는 로마서입니다. 로마서에는 ‘표적’과 ‘의’를 구했던 유대인들의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의’는 사람이 추구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를 통해 값없이 주어진다는 주제를 담고 있습니다. 이 놀라운 로마서가, 하나님이 바울의 길을 막으셨기 때문에 지금 우리에게 주어져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와 같은 지혜가 놀랍지 않습니까?

 

그러나 예루살렘으로

그러나 이제는 내가 성도를 섬기는 일로 예루살렘에 가노니····그러므로 내가 이 일을 마치고 이 열매를 저희에게 확증한 후에 너희에게를 지나 서바나로 가리라”( 15:25-28).

보라 이제 나는 심령에 매임을 받아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저기서 무슨 일을 만날는지 알지 못하노라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거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나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20:22-24).

하나님은 바울이 그렇게 가고자 했던 로마로 보내 주시지 않았습니다. 그 대신 예루살렘으로 가도록 그 마음에 부담을 주셨습니다. 그는 로마로 가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로마를 지나 서바나(지금의 스페인)로 가고 싶었습니다. 자기의 욕심을 따른, 인간적인 계획이 아닌, 하나님을 위한 계획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허락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그의 계획과는 다른, 결박과 환난이 기다리는, 목숨을 잃을 지도 모르는, 예루살렘으로 인도하고 계셨습니다. 또한 곳곳에서 성도들을 통해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에 결박과 환난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왜 이같이 하고 계실까요? 바울을 로마로 보내고자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슬에 매인 죄인으로 보내시고, 로마의 감옥에서 몇 년을 그저 머물게 하십니다. 그리고 옥중에서 바울은 편지를 씁니다. 그것이 우리들이 알고 있는 에베소서, 빌립보서, 골로새서, 빌레몬서입니다. 이 네 권의 성경이, 바울이 죄수가 되었기 때문에 기록할 수 있었던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바울을 그와 같이 인도하셨습니다. 에베소서에서 영광스러운 교회의 모습을 드러내시기 위해, 골로새서에서 우리 주님의 뛰어나신 모습을 보여주시기 위해, 그리고 빌립보서에서 어떠한 상황에서도 기뻐할 것을 말씀하시기 위해 바울을 그렇게 인도하셨습니다. 이 지혜로우신 하나님을 어찌 찬양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사람의 지혜로 나아가려 할 수 있겠습니까?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형제들아 나의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의 진보가 된 줄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라”( 1:12).

복음을 전해야 할 사도 바울이 감옥에 갇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성도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나의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의 진보가 된 줄을 알기를 원하노라.”

이것이 어떻게 복음의 진보가 될 수 있겠습니까? 만일 우리 중에서 복음을 가장 잘 전할 수 있는 사람이 복음을 전할 수 없게 된다면, 그것이 복음의 진보가 되겠습니까?

사람의 지혜로는 이런 고백을 할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성령을 통해, 자기가 갇힘으로써 오히려 하나님께서 행하고 계시는 영광스러운 일들을 보았기 때문에 그렇게 고백할 수 있었습니다. 또 다른 면을 하나 보겠습니다.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단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것이 내게서 떠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내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 짐이라 하신 지라,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고후 12:7-9).

바울의 몸에는 사단의 가시가 있었습니다. 가시라는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주님의 일을 하는데 방해가 되었습니다. 그 가시 때문에 너무 괴로운 나머지 이가시를 제거해주시도록 하나님께 기도하였습니다. 그 때 하나님의 대답은 이러했습니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즉 하나님은 바울이 이렇게 기도하기를 원하셨습니다. “나를 고통스럽게 하신 주님, 당신의 지혜가 옳습니다.”

다시 말하면, “주님, 주님께서 저를 사랑하시는 것을 믿습니다. 그렇지만 이것이 없다면 당신의 은혜가 더욱 넘칠 것 같습니다라고 말하는 바울에게 주님은 이렇게 묻고 계십니다.

네가 약하고 나의 강함이 드러난다면, 네가 기꺼이 약해지겠느냐?”

사도 바울은 이 질문에 답합니다.

! 주님, 뜻대로 하옵소서! 기꺼이 저는 약해지겠나이다! 그리고 당신의 강하심만을 자랑하겠나이다!”

십자가의 어리석음과 미련함을 통해 구원받은 교회는 이 연약함을 간직하고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기꺼이 세상에서 약해져야 합니다. 하나님이 아니고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자리에, 그분만이 높아질 수 있는 곳에 서 있어야 합니다. 사람의 지혜와 총명을 버리고, 지혜로우신 그분을 찬양하며, 신뢰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2000 7,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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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징검 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