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그 이미지
징검 다리
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calendar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Recent Post

theWord Bible Software

Category

2015. 8. 12. 17:39 횃불/2001년

롯의 선택

한 봉 래

(1) 창세기 11 3절과 123절을 비교해 보겠습니다.

또 말하되, 자 성과 대를 쌓아 대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11:3)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내가····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12:3).

창세기 11장에는 바벨탑을 쌓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들이 왜 탑을 쌓았는지 그 목적도 나와 있습니다. 자기 이름을 내는 것이 그 목표였습니다. 오늘날 우리 식으로 말하면 자기 인생의 목표를 스스로 만든 것입니다. “나는 뭐가 되겠다”, “나는 어떻게 살리라는 둥 자기 삶의 목적과 방향을 스스로 결정합니다. 즉 자기 눈에 좋은 대로 행하며, 자기가 옳다고 하는 바를 따라 행합니다. 사람들의 이같은 행동에 대해 하나님은 사람들의 언어를 혼란시키셔서 그 의도를 좌절시키셨습니다. 그리고 한 사람, 아브라함을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이것이 사람들이 추구했던 것입니다.

 

(2) 룻기 1 1절에서 7절까지 말씀입니다.

사사들의 치리하던 때에 그 땅에 흉년이 드니라 유다 베들레헴에 한 사람이 그 아내와 두 아들을 데리고 모압 지방에 가서 우거하였는데 그 사람의 이름은 엘리멜렉이요 그 아내의 이름은 나오미요 그 두 아들의 이름은 말론과 기룐이니 유다 베들레헴 에브랏 사람들이더라 그들이 모압 지방에 들어가서 거기 유하더니 나오미의 남편 엘리멜렉이 죽고 나오미와 그 두 아들이 남았으며 그들은 모압 여자 중에서 아내를 취하였는데 하나의 이름은 오르바요 하나의 이름은 룻이더라 거기 거한 지 십 년 즈음에 말론과 기룐 두 사람이 다 죽고 그 여인은 두 아들과 남편의 뒤에 남았더라 그가 모압 지방에 있어서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을 권고하사 그들에게 양식을 주셨다함을 들었으므로 이에 두 자부와 함께 일어나 모압 지방에서 돌아오려 하여 있던 곳을 떠나고 두 자부도 그와 함께 하여 유다 땅으로 돌아오려고 길을 행하다가.”

룻은 이방인입니다. 그리고 과부입니다. 그러나 그 이름이 마태복음에 나오는 예수님의 족보에 기록됩니다. 다윗의 할머니가 됩니다. 그런데 이 룻이 살던 시대는 사사들의 치리하던 때입니다. 사사 시대는 이스라엘 역사 가운데 가장 어두운 시대입니다. 여호수아가 죽고 사울 왕이 일어나기 전까지를 말하는데, 이 시대의 특징은 그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각 그 소견에 올은 대로 행하였더라”( 21:25)입니다. 즉 사람들이 자기 생각에 옳은 대로 행하던 시대입니다. 바벨탑 시대의 반복입니다.

이 어두운 시대에 한 충성스런 사람을 성경이 기록합니다. 룻이 바로 그 사람입니다. 롯기의 마지막은 이렇게 끝납니다. “오벳은 이새를 낳았고 이새는 다윗을 낳았더라”(4:22). 하나님이 마음에 합했던 왕 다윗을 암시하면서 룻기가 끝납니다. 룻의 충성을 통해서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인 다윗이 오며, 결국은 예수님께서 오실 것을 말합니다. 제사장도, 왕도, 선지자들도 즉 모든 사람들이 실패할 때 예수님께서 등장하십니다.

흉년이 드니라.” 흉년이 왜 들었는지 성경은 설명하고 있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의 경우에 흉년이 들면 그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그 배후에 하나님의 징계하시는 손길이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흉년을 들게 하신 하나님을 생각하기보다는 흉년에 대해서 반응을 보입니다. 흉년을 피하려 하기만 합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그러했습니다. 이삭도 그러했습니다. 야곱도 물론 그러했습니다. 아브라함은 애굽으로 내려갔으며, 이삭은 블레셋 땅으로 내려갔습니다. 그리고 여기 나오미 가정은 모압 지역을 택합니다. 그런데 흉년을 피해 약속의 땅을 떠나는 사람들에게는 나름대로 다 이유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성경에 나와 있지 않으나) 아브라함은 이렇게 합리화했을 것입니다.

설마하니 하나님께서 이 기근이 든 땅에서 굶어 죽기를 바라지는 않으실 것이다. 내가 여기서 이 많은 양과 소를 다 굶겨 죽이는 것이 하나님의 뜻은 아닐 것이다. 이 많은 식구들을 봐라! 룻도 있고 아내도 있고 딸린 노복들도 많은데 이들을 다 굶겨 죽여야 옳단 말이냐. 책임을 가진 내가 결단해야 되겠다.’

엘리멜렉 가정도 흉년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떠나고자 합니다. 그런데 떠나는 땅 이름이 유다 베들레헴입니다(1:1). 2절에 다시 한번 기록해 놓았습니다. “유다 베들레헴 에브랏 사람들이더라.” 이 지명은 단순히 흉년이 든 땅 이름만은 아닙니다. 지리적인 의미보다 하나님의 약속이 있는 장소입니다. 메시아가 태어날 곳입니다. 그 놀라운 약속의 장소를 그들은 떠나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 부분을 읽을 때 우리 마음 속에는 금방 글세 잘 될까? 베들레헴을 떠나, 유다 지역을 떠나 모압에서 잘 살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듭니다.

룻기 1장에서 주된 내용 중의 하나는 귀향(歸鄕)입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행복한 일입니다. 회사를 마치고, 학교가 끝나 이제 집으로 돌아가는 발걸음은 사람이 걷는 행복한 발걸음 중 하나일 것입니다. 그 뿐 아니라 원하는 곳에 드디어 도착하는 것도 행복감입니다.

어쨌든 이 가정은 모압으로 가기로 결정하고 들어가 도착했습니다. 도착한 그날 밤 잠자리를 마련하고 온 가족이 모여, ‘이 곳에는 기근이 없구나. 이 곳에서는 농사를 잘 지을 수 있겠구나하면서, 안전과 행복을 기대하면서 보냈을 것입니다. 도착한다는 것은 늘 행복한 경험입니다. 그 먼 길을 가는 도중에 문제가 발생할 수도 있습니다. 병에 걸릴 수도 있고, 강도를 만날 수도 있고, 길을 잃어버릴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 가정은 무사히 모압에 도착했습니다. 그러나 도착하고 나서 최고의 비극이 벌어졌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가정의 가장을 데려가셨습니다. 그들이 피하려 했던 기근은 그들이 살고 있던 땅을 떠나게 했지만, 하나님은 사람들 사이의 작별을 준비하고 계셨습니다. 가장의 입장에서 보자면 괴로웠을 것입니다. 외국 땅에 식구들을 끌고 왔습니다. 아내와 아들 둘이 있습니다. 이들을 놓아 두고 자기 혼자 가야합니다. 눈을 감을 수 있겠습니까? 성경은 특별히 두 번이나 그 안타까움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나오미와 그 두 아들이 남았으며”(1:3),

남편의 뒤에 남았더라”(1:5).

모압에 대해 잠깐 살펴보겠습니다. 모압은 아브라함의 조카 롯의 후손입니다. 모압 왕 발락은 거짓선지자 발람을 초대해서 출애굽한 이스라엘을 저주하려고 했습니다. 이 시도가 실패하자 모압 여인들이 이스라엘 백성을 성을 통해서 유혹했습니다. 그때에 비느하스가 일어나서 자기 동족이지만 창으로 죽이고 제사장의 축복을 받게 됩니다. 그리고 성경은 모압을 대대로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는 족속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거기 가서 두 여인을 취했습니다.

가장이 죽었을 때, 그들은 생각해 보았어야 했습니다. 징계는 아닌지, 잘못하고 있는 것은 없는지 돌아보아야 했습니다. “말론과 기룐 두 사람이 다 죽고”(1:5). 이젠 아들까지 죽었습니다. 이 가정에 여자만 남은 것입니다. 한 가정이 겪을 수 있는 최악의 경험입니다. 그리고 모압 땅에 들어간지 십 년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이렇게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나는 실패했다. 이 선택은 잘못되었다모압 땅에 흉년은 없었지만, 그것이 무슨 기쁨이 되겠습니까?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남편과 아들을 다 잃고, 단지 먹고 산다는 것이 무슨 즐거움이 되겠습니까?

그가 모압 지방에 있어서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을 권고하사 그들에게 양식을 주셨다 함을 들었으므로.” 그런데 실패를 자책하고 있는 한 절망적인 여인에게 들린 소식이 있습니다. 하나님에 관한 소식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돌아보셨다는 것입니다. 이 소식을 들었을 때 나오미는 그렇다면 하나님이 나도 돌아보시겠구나하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을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비록 잘못된 선택으로 최악의 비극을 당하고 있지만 그래도 들려온 소식 앞에서 믿음을 발휘한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그런 소식이 들립니다. 하나님께서 은 인류의 죄를 사하셨다는 소식이 들립니다. 그러면 우리는 믿음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의 죄를 사하셨다면 나의 죄도 용서하실 것이다. “ 이것이 믿음이 아니겠습니까?

이에 두 자부와 함께 일어나.” 잘못된 선택을 십 년간 계속한 결과 최악의 상황을 맞았지만, 하나님의 어떠하심을 듣고, 그 자리를 떨칠 수 있는 힘을 얻습니다. “일어나 모압 지방에서 돌아오려 하여귀향입니다. 떠나갔던 집으로 다시 가는 것, 이것이 룻기의 주제입니다. 그리고 이 일은 이스라엘 역사상 반복적으로 일어난 일입니다. 출애굽 때 일어났었고, 야곱이 갔다가 돌아오고, 바벨론으로 포로되어 갔다가 돌아오고, 2차대전 후 이스라엘 민족이 중동으로 돌아옵니다.

나오미가 두 자부에게 이르되, 너희는 각각 어미의 집으로 돌아가라. 너희가 죽은 자와 나를 선대한 것 같이 여호와께서 너희를 선대하시기를 원하며 여호와께서 너희로 각각 남편의 집에서 평안함을 얻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고 그들에게 입맞추매 그들이 소리를 높여 울며 나오미에게 이르되, 아니니이다. 우리는 어머니와 함께 어머니의 백성에게로 돌아가겠나이다. 나오미가 가로되, 내 딸들아 돌아가라. 너희가 어찌 나와 함께 가려느냐 나의 복중에 너희 남편 될 아들들이 오히려 있느냐? 내 딸들아 돌이켜 너희 길로 가라. 나는 늙었으니 남편을 두지 못할지라. 가령 내가 소망이 있다고 말한다든지 오늘날에 남편을 두어서 아들들을 생산한다 하자. 너희가 어찌 그것을 인하여 그들의 자라기를 기다리겠느냐 어찌 그것을 인하여 남편 두기를 멈추겠느냐? 내 딸들아 그렇지 아니하니라. 여호와의 운이 나를 치셨으므로 나는 너희로 인하여 더욱 마음이 아프도다. 그들이 소리를 높여 다시 울더니 오르바는 그 시모에게 입맞추되 룻은 그를 붙좇았더라.”

나오미는 두 며느리를 두었습니다. 하나는 오르바이고 하나는 룻입니다. 이들이 나오미를 선대했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선대는 선하게, 그리고 충성스럽게 대했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또 다른 단어가 룻의 태도를 표현하고 있습니다. “룻은 그를 붙좇았더라”(14). 즉 꽉 붙들고 좇았다는 뜻입니다. “선대했다”, “붙좇았더라는 두 단어가 룻의 어떠함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남편의 죽음으로 이 여인과 그 집안을 연결시켜주는 끈이 끊어졌습니다. 그런데도 시어머니를 섬긴 것입니다. 섬길 이유가 없을 때, 섬기지 않아도 좋을 때 자원해서 섬긴 것입니다. 그런데 시어머니 나오미가 자기 고향 이스라엘로 돌아가려고 합니다. 그런데도 이 모압 여인은 이스라엘까지 따라가서 시어머니를 섬기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선대이고 붙좇는 것입니다. 늙은 나오미는 이제 이곳에서 아무 희망이 없으므로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이 더 좋습니다. 그러나 이 두 젊은 과부는 재혼할 수 있습니다. 자기 땅에서, 자기 민족과 함께 새로운 인생을 시작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시어머니와 함께 돌아가려 하는 이 두 며느리의 마음에 대해 나오미는 이렇게 감사를 표합니다. “너희가 나를 선대했듯이 나의 하나님이 너희를 선대해 주시길 바라노라. 고향으로 돌아가라. 그리고 돌아가서 하나님의 축복을 받기를 원한다. “ 그리고 작별의 키스를 합니다(9). 이 작별이 눈물을 흘리게 합니다. 헤어진다고 하는 것은 슬픈 일입니다. 선대했기 때문에 그들은 동거할 수 있었습니다. 충성스럽기 때문에 함께 거할 수 있었습니다. 이제 작별할 때가 오자 그들이 웁니다. 두 며느리는 이렇게 말합니다. “아닙니다. 어머니와 함께 어머니의 백성에게로 돌아가겠습니다”(10). 심지어 룻은 나오미의 죽기까지 섬기겠다고 말합니다. 그러자 나오미가 거절합니다. “안된다. 너희들이 모압으로 돌아가면 너희들은 재혼할 수 있다. 그리고 너희 아버지 집에서 살 수 있다. 다시 한번 새 출발 할 수 있다. 그러나 나와 함께 이스라엘로 돌아가면 재혼할 수 없다. 이스라엘에서는 절대로 재혼할 수 없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법은 과부들이 반드시 남편의 형제하고만 결혼해야 한다. 나의 태중에 너희 남편 될 아들들이 오히려 있느냐?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그것은 십 년 이상 독수공방을 의미한다.” 나오미는 이스라엘에 갔을 때의 절망적인 상황과 모압으로 돌아갔을 때의 희망을 제시합니다.

그들이 소리를 높여 다시 울더니.”

그들이 첫 번째로 운 이유는 작별 때문이었습니다. 헤어져야 한다는 사실이 눈물 나게 했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운 이유는 그들의 삶 가운데 경험되었던 비극적인 날, 갑자기 시아버지가 돌아가시고, 큰아들이 죽고, 둘째 아들마저 죽던 날의 경험이 그들의 마음을 다시 울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나오미는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의 손이 나를 치셨으므로 나는 너희로 인하여 더욱 마음이 아프도다.”

나오미는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너희들보다 더 괴로운 사람이다. 너희들은 남편밖에 잃은 것이 없지 않느냐. 나는 남편과 아들을 다 잃었노라. 왜 나를 따르고자 하느냐. 이 정도 선에서 돌아가라.” 이것이 그들에게 눈물을 홀리게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오르바는 나오미의 말대로 선택합니다. 이는 합리적인, 올바른, 이성적인 선택입니다. 그러나 룻은 계속 나오미를 붙좇고 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왜 이런 어리석은 선택을 할까요? 왜 절망의 길을 가고자 할까요? 룻의 마음을 움직인 것은 무엇이었겠습니까? 오르바의 선택을 보고도 룻의 마음은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다른 사람이 격려해서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나오미가 또 가로되 보라 네 동서는 그 백성과 그 신에게로 돌아가나니 너도 동서를 따라 돌아가라 룻이 가로되 나로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유숙하시는 곳에서 나도 유숙하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장사될 것이라 만일 내가 죽는 일 외에 어머니와 떠나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나이다 나오미가 룻의 자기와 함께 가기로 굳게 결심함을 보고 그에게 말하기를 그치니라 이에 그 두 사람이 행하여 베들레헴까지 이르니라 베들레헴에 이를 때에 온 성읍이 그들을 인하여 떠들며 이르기를 이가 나오미냐 하는지라 나오미가 그들에게 이르되 나를 나오미라 칭하지 말고 마라라 칭하라 이는 전능자가 나를 심히 괴롭게 하셨음이니라 내가 풍족하게 나갔더니 여호와께서 나로 비어 돌아오게 하셨느니라 여호와께서 나를 징벌하셨고 전능자가 나를 괴롭게 하셨거늘 너희가 어찌 나를 나오미라 칭하느뇨 하니라 나오미가 모압 지방에서 그 자부 모압 여인 룻과 함께 돌아왔는데 그들이 보리 추수 시작할 때에 베들레헴에 이르렀더라

룻은 나오미에 대한 충성심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어머니가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유숙하시는 곳에서 나도 유숙하겠나이다. “ 이것이 헌신, 선대, 충성, 사랑이 아니겠습니까? 우리도 이렇게 말할 수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주님이 계신 곳에 내가 있고, 주님이 가신 곳에 나도 가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이 말은 이런 뜻입니다. ‘나의 민족적인 가치관, 내가 이제까지 살아오면서 익혔던 모든 것을 다 버리겠나이다. 나는 이제 모압 여인이 아닙니다. 나는 이제 이스라엘 여인입니다. 그래서 결혼문제도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고자 합니다,’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겠나이다. “ 이제까지 그는 하나님에 대해서 잘 몰랐습니다. 모압은 모압 나름대로의 신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어머니의 하나님, 어머니를 징계하신 하나님을 받아들이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회심의 증거입니다. 하나님을 믿으면 좋은 일이 생기기 때문에 믿는 것이 아닙니다. 그 하나님이 하나님이므로, 놀라운 하나님이므로 그 하나님을 헌신적으로 믿고, 영접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합니다.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장사 될 것이라.” 내가 그 땅에 내 몸을 묻겠나이다. 두 마음을 품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이 헌신과 사랑을 죽기까지 계속하겠다는 것입니다. 도중에 돌아서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성경이 발하는 일반적인 원리 중 하나가 버리는 자가 얻는 것입니다. 정말로 얻고자 하는 자는 버려야 합니다. 사람들이 자기 이름을 내고자 했을 때 그들은 실패합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이름을 창대케 하십니다. 사람이 포기할 때 하나님이 주십니다. 룻은 완전히 버렸습니다. 룻에게는 미래가 없습니다. 룻은 절망을 선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룻은 참된 자신을 얻습니다.

나오미가 모압 지방에서 그 자부 모압 여인 룻과 함께 돌아왔는데”(22). 나오미가 돌아왔습니다. 아버지 집으로, 메시아의 약속이 있는 그 집으로, 하나님의 눈이 향하고 있는 땅으로, 하나님이 배정해 주신 그 유업의 땅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룻이 돌아왔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제 룻은 새로운 자신을 찾은 것입니다. 과거의 룻이 아닙니다. 이제는 이스라엘 여인 룻, 그를 통해서 다윗이, 나아가 예수님이 오시는 여인이 된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약속을 따라 갈대아 우르를 떠나서 가나안 땅으로 갔었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에게는 하나님의 놀라운 약속이 있었습니다. ‘그 땅을 내가 너에게 주겠다. 너의 자손이 셀 수 없이 많으리라는 약속을 가지고 가나안 땅으로 들어갑니다. 그런데 룻은 아무런 보장 없이 들어갑니다. 들어가면 룻이 어떻게 될 것이라는 하나님 편에서의 약속은 전혀 없습니다. 그런데도 가고 있습니다. 이 마음을 하나님께서 어찌 축복하지 않으시겠습니까! 하나님으로부터 온 마음이 아니라면 어찌 이렇게 할 수 있겠습니까! 나오미는 혼자 떠나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룻의 선대함과 붙좇음 때문에 그 길은 함께 가는 길이 됩니다 외롭고 고독한 길을 함께 걷는 길로 바꿔 것입니다.

나오미가 내 이름을 나오미라 하지 마라. 내 이름은 마라라 하라고 말합니다. “이는 전능자가 나를 심히 괴롭게 하셨음이니라.” “여호와께서 나를 징벌하셨고 전능자가 나를 괴롭게 하셨거늘.” 나오미는 그 하나님을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부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이삭 야곱이 만난 하나님입니다. 어떤 형편에서도 나에게 충분하신 하나님, 그 하나님의 이름이 전능자이십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이 나를 징벌하셨다는 것이 나오미의 고백입니다. 저항할 수 없는 하나님, 사람이 그분 앞에서 절대로 반항할 수 없는 하나님이 나의 삶을 징계하시고 괴롭히셨다는 것입니다. 전능자가 징계하시는 인생은 어떤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천지를 주관하시는 하나님, 모든 능력을 가지고 계신 하나님께서 자기를 징계하시는데 사람이 무슨 이야기를 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하신 말씀밖에 없습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이 질문밖에 없습니다. 이 괴로움을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외치셨습니다. 나의 하나님이시면서 나를 저주하시는 이유를 주님께서 물으셨습니다. 주님이 하신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우리는 가지고 있습니다. 나의 죄 때문입니다. 내가 죄를 지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나를 대신하여 징계하셨기 때문입니다.

룻기 1장은 이렇게 끝납니다. “추수 시작할 때에”(22). 흉년 때에 떠났지만 그들이 돌아왔을 때 이제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나오미와 룻을 축복하실 것을, 특별히 룻을 통해서, 룻의 충성과 붙좇음과 선대를 통해서 축복하실 것을 암시하는 문장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축복하실 것입니다. 이 놀라운 주님을, 이 전능하신 하나님을 찬양하기를 원합니다.

 

(2001 1월호)          

'횃불 > 2001년' 카테고리의 다른 글

그리스도인들의 자유  (0) 2015.08.15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0) 2015.08.15
내 오래된 성경책  (1) 2015.08.15
아내의 손  (0) 2015.08.15
하나님의 교회 - 분리  (0) 2015.08.12
보혜사 성령님  (0) 2015.08.12
사람이 하늘로 올라가다  (0) 2015.08.12
치료하시는 하나님  (0) 2015.08.12
posted by 징검 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