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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검 다리
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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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의 발 앞에 엎드린 다섯 사람

히로사와 노리

 

이 시간에는 누가복음에 나타나 있는 주님 발 앞에 몸을 두었던 사람들을 통해서 주님의 발 앞에 몸을 둔다는 관점에서 가르침을 받고자 합니다. 누가복음에는 다섯 명의 사람이 주님 발 앞에 몸을 두었던 것이 나오고 있습니다. 순서대로 이 다섯 명을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시몬 베드로(누가복음 5:6-8)

 

"그리한즉 고기를 에운 것이 심히 많아 그물이 찢어지는지라 이에 다른 배에 있는 동무를 손짓하여 와서 도와 달라 하니 저희가 와서 두 배에 채우매 잠기게 되었더라 시몬 베드로가 이를 보고 예수의 무릎 아래 엎드려 가로되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8절에 "시몬 베드로가 이를 보고 예수의 무릎 아래 엎드려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왜 베드로가 이 말을 했는가 하면 베드로 스스로가 믿음이 없는 것이 드러났기 때문입니다. 밤이 맞도록 수고했지만 물고기를 한 마리도 잡지 못했습니다. 그 베드로에게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리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의 마음을 한 번 짐작해 보면 '깊은데 가서 그물을 내려도 어쩌면 못 잡지 않겠는가'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말씀이니까 한번 해보자'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때 베드로가 주님을 만난 것은 처음이 아니었습니다. 요한복음에 나와 있는 것처럼 동생 안드레의 소개로 예수님을 만난 것이 처음이었습니다. 그동안에 1년 가량 주님과 교제를 가졌던 것으로 보입니다. 4:38절에 보면 베드로의 장모가 열병에 걸린 것이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베드로는 몇 번이나 예수님의 능력 있는 일들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그것들을 제 삼자의 입장에서 보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5장에서는 자기가 당사자가 되었으며 믿음이 요구되었습니다. 따라서 베드로는 '내가 순수한 믿음으로 따르지 않았구나'라고 느낀 것으로 보여집니다. 그러나 말씀을 순종했을 때 많은 물고기를 잡을 수 있었습니다. 8절에 "이를 보고", 6절에는 "고기를 에운 것이 심히 많아 그물이 찢어지는지라" 7절에는 "두 배에 채우매 잠기게 되었더라"고 했습니다. 그물이 찢어지는지라, 배가 찢어지거나 잠기게 되었더라 했지만 사실 잠기지는 않았습니다. 한 마리가 더 들어갔으면 그물이 정말로 찢어졌을지도 모릅니다. 일본어 성경에 따르면 (破れそうになった)배가 찢어질 뻔 했지만 찢어지지 않았고, 배가 잠길 뻔 했지만 잠기지 않았습니다. 이것을 본 베드로가 예수님의 발 앞에 무릎을 꿇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 믿음을 권하는 것은 의외로 쉬울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일이 자기 일이 되었을 때 도전을 받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의 발 앞에서 기억했던 것은 '내가 예수님을 가볍게 보았구나'라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을 가볍게 본 것에 대한 자책을 받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우리가 주님 앞에 엎드린다는 것은 예수님의 가치를 정당하게 평가할 때 엎드리는 것입니다. 자기의 믿지 않음에 대한 그 죄를 고백하는 자리이기도 합니다.

 

귀신 들린 사람(누가복음 8:35)

 

"사람들이 그 된 것을 보러 나와서 예수께 이르러 귀신 나간 사람이 옷을 입고 정신이 온전하여 예수의 발 아래 앉은 것을 보고 두려워하거늘"

두 번째는 거라사인 땅에 귀신 들린 사람이 귀신이 나간 다음에 주님의 발 앞에 엎드린 것이 나옵니다. "정신이 온전하여" 무엇이 정신이 온전한 것이고 무엇이 광기(미친)인지를 여기서 나타내고 있습니다. 동네 사람들이 무덤가에서 자기 몸을 상하게 하는 사람을 보고 미친 사람이라고 평가했습니다. 귀신이 나가고 돼지 2천 마리 정도가 죽은 것을 동네 사람들이 보았습니다. 사람들은 정신이 온전하여 주님 발 앞에 있는 이 사람보다도 2천 마리 돼지가 없어진 것이 더욱 신경이 쓰였습니다. 정신이 온전해지며 구원받은 한 사람과 이천 마리 돼지가 없어진 것 중에 어느 것이 가치가 있는가에 대해서 우리가 질문을 받습니다. 만약 돼지 2천마리 죽은 것이 아깝다고 생각하면 그것이 어쩌면 광기가 아니겠습니까? 뿐 아니라 정신을 온전케 하신 주님을 동네에서 떠날 것을 요청했습니다.

이 사건을 통해서 정신이 온전한 것이 무엇인가를 나타내는데 있어 오히려 이 동네 사람들이 광기 있는 미친 행위를 하고 있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따라서  주님 발 앞에 엎드리는 것은 올바른 가치 판단을 하는 장소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의 가치관에 영향을 받기가 쉽습니다. 왜곡된 기준으로 판단하기가 쉽습니다. 따라서 주님 발 앞에 엎드리는 것은 올바른 가치 판단을 갖는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38절에 "귀신 나간 사람이 함께 있기를 구하였으나 예수께서 저를 보내시며 가라사대"

이 사람은 예수님과 함께 있고자 따라가기를 원했습니다. 주님 발 앞에 있다는 것은 주님께 구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때 이 사람이 구하는 것을 주님께서는 들어주지 않으셨습니다. 때때로 우리들의 원함이 주님께 용납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그 때는 주님이 허락하시는 다른 길이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좋을 것입니다. 주님의 계획은 주님이 어떻게 큰일을 하셨는가를 집으로 가서 알리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마가복음을 보게 되면 이 사람이 데가볼리에 가서 자기에게 하나님의 하신 일을 전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주님이 그 일 이후에 데가볼리에 가셨을 때 귀머거리를 사람들이 데려왔습니다. 따라서 주님과 함께 있기를 원하지 않으신 것은 주님의 다른 계획이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가 기도했을 때 주님이 바로 안 들어주시면 '주님의 다른 길이 있겠구나'라고 생각하면 좋지 않겠습니까? 여기서 주님 발 앞에 있다는 것은 올바른 가치 판단을 하는 것과 주님이 기도를 들어주시는 것이 무엇일까를 가르치는 장소일 것입니다.

 

회당장 야이로(누가복음 8:41)

 

"이에 회당장인 야이로라 하는 사람이 와서 예수의 발 아래 엎드려 자기 집에 오시기를 간구하니"

여기는 회당장 야이로가 주님 발 앞에 왔습니다. 이 때도 주님 앞에 간구했습니다. 앞에 것과 다르게 이 간구는 중보의 간구였는데 12살 난 딸을 낫게 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간구는 때때로 들어지지 않는 때가 있습니다. 도중에 방해가 생기는 일도 있습니다. 예를 들면 43절에 12년 동안 혈루병을 앓는 여인이 나옵니다. 42절에 "예수께서 가실 때"라는 말을 중도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라도 주님이 하시는 일은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이 회당장에게는 혈루증 앓는 여인이 나타난 것은 시련일 수 있습니다. 회당장은 주님이 조금이라도 집으로 빨리 가시기를 원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49절에 "아직 말씀하실 때에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이 와서 말하되 당신의 딸이 죽었나이다 선생을 더 괴롭게 마소서 하거늘" 여기에 부음이 들려왔는데 이미 끝났다는 부음이었습니다. 이 때 주님은 50절에서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 그리하면 딸이 구원을 얻으리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미 간구가 더 이상 필요 없다고 생각하는 그때에 주님은 두려워 말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믿기만 하라는 말은 계속 믿으라는 말과 같습니다. "예수님이 가실 때"라는 것은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것을 잠시 생각했습니다. 도중에 혈루증 앓는 여인이 나타났기 때문에 방해를 받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리고 부음이 들려왔습니다. 주님은 믿기만 하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52 "모든 사람이 아이를 위하여 울며 통곡하매 예수께서 이르시되 울지 말라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하시니"

사람들이 울며 통곡하는 것을 보고 야이로는 흔들렸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다시 한 번 격려의 말씀으로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매우 큰 격려의 말입니다. 이 기록은 간구했다면 중간에 포기하지 말고 계속 간구하라는 가르침을 주고 있습니다. 만약 우리들도 주님 앞에 구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을 포기하지 않고 계속 구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겠습니까? 그것이 주님의 뜻이라면 도중에 방해가 있을지라도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마리아(누가복음 10:39)

 

"그에게 마리아라 하는 동생이 있어 주의 발 아래 앉아 그의 말씀을 듣더니"

네 번째 주님의 발 앞에 몸을 두었던 사람은 마리아였습니다. 이 때는 주님의 발 앞에 앉아서 주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우리 쪽에서 주님께 간구하는 것과 주님께로부터 우리에게 나오는 말씀을 듣는 것 두 가지를 생각하게 합니다. 물론 39절에서는 기도라는 측면도 받을 수 있습니다. 때로 우리는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를 때가 있습니다. 그때 주님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라고 주님의 뜻을 묻는 때가 있을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가지고 주님의 뜻을 구하는 것도 기도가 될 것입니다. 일본어 성경에는 (聞き入っていた)받아 들인다(귀 기울여 듣는다-편집자 주)로 되어 있습니다. 요한복음 12장에 마리아가 나드 향유를 부어드린 것과도 관계가 있을 것입니다. 제자들은 주님의 죽으심에 대한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았으며 반복해서 말씀하시는데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그것을 받아들였습니다. 주님의 장례를 위해 그것을 드렸습니다. 저의 생각입니다만 마리아가 말씀을 받아 들였기 때문에 그에 따르는 행동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사마리아 문둥병자(누가복음 17:15-16)

 

"그 중에 하나가 자기의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예수의 발 아래 엎드리어 사례하니 저는 사마리아인이라"

 

이 때 주님 발 앞에 엎드린 사람은 사마리아인으로 문둥병이 나은 사람이었으며 "예수님의 발 아래 엎드리어 사례"했습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왔다는 것처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찬송했다고 봅니다.

감사한 것은 주님 발 앞에 있는 다섯 사람이 각각 행동을 한 것입니다. 열 문둥병자 가운데 아홉 명은 유대인 문둥병자였는데 그들은 나았지만 주님께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은혜 받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릅니다. 사마리아인은 이방인이었기 때문에 은혜를 받을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릅니다. 은혜를 당연하다고 생각하면 감사가 나오지 않습니다. 나에게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을 때 감사가 나옵니다. 때때로 우리가 구하더라도 감사를 잊어버릴 때가 있습니다. 만약에 주님께 구했을 때 응답이 온다면 감사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주님의 은혜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었습니다. 구원 받아서 주님의 발 앞에까지 올 수 있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고 권유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 같은 사람이 주님의 발 앞에까지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은혜입니까? 친숙하게 접근할 수 있지만 어디까지나 주님과의 관계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주님 발 앞에 나갔던 다섯 사람을 보았습니다. 예수님을 올바르게 인지하고 죄를 고백했습니다. 가치 판단을 잘못하는 사람이 예수님 발 앞에 와서 올바른 가치 판단을 하는 것을 보았으며,  간구에도 열납이 안될 때에는 다른 길이 있다는 것도 보았습니다. 간구한다면 포기하지 말고 끝까지 간구해야 된다는 것도 보았으며, 또한 주님의 뜻을 구하는 것도 보았습니다. 또한 주님 발 앞에는 감사와 찬양을 드리는 곳이기도 했습니다.

새로운 주가 시작되었습니다. 주님의 발 앞에 나간다는 것을 생각하면서 한 주간을 보낸다면 복이 되겠습니다.

 

2015 12 27일 강서모임 덕세움의 시간

 

posted by 징검 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