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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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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살로니가전서 3

 

1 이러므로 우리가 참다 못하여 우리만 아덴에 머물기를 좋게 여겨 2 우리 형제 곧 그리스도 복음의 하나님의 일꾼인 디모데를 보내노니 이는 너희를 굳게 하고 너희 믿음에 대하여 위로함으로 3 누구든지 이 여러 환난 중에 요동치 않게 하려 함이라 우리로 이것을 당하게 세우신 줄을 너희가 친히 알리라 4 우리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장차 받을 환난을 너희에게 미리 말하였더니 과연 그렇게 된 것을 너희가 아느니라 5 이러므로 나도 참다 못하여 너희 믿음을 알기 위하여 보내었노니 이는 혹 시험하는 자가 너희를 시험하여 우리 수고를 헛되게 할까 함일러니 6 지금은 디모데가 너희에게로부터 와서 너희 믿음과 사랑의 기쁜 소식을 우리에게 전하고 또 너희가 항상 우리를 잘 생각하여 우리가 너희를 간절히 보고자 함과 같이 너희도 우리를 간절히 보고자 한다 하니 7 이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모든 궁핍과 환난 가운데서 너희 믿음으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위로를 받았노라 8 그러므로 너희가 주 안에 굳게 선즉 우리가 이제는 살리라 9 우리가 우리 하나님 앞에서 너희를 인하여 모든 기쁨으로 기뻐하니 너희를 위하여 능히 어떠한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보답할꼬 10 주야로 심히 간구함은 너희 얼굴을 보고 너희 믿음의 부족함을 온전케 하려 함이라 11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우리 주 예수는 우리 길을 너희에게로 직행하게 하옵시며 12 또 주께서 우리가 너희를 사랑함과 같이 너희도 피차간과 모든 사람에 대한 사랑이 더욱 많아 넘치게 하사 13 너희 마음을 굳게 하시고 우리 주 예수께서 그의 모든 성도와 함께 강림하실 때에 하나님 우리 아버지 앞에서 거룩함에 흠이 없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잠시동안 앞에서 무슨 말씀이 나갔는지를 생각하겠습니다. 2장 끝에서는 데살로니가에 어떤 핍박이 있었는가를 말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다시 돌아가서 그들을 격려하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사단이 길을 막았습니다.어떤 방식인지는 모르지만 사단이 길을 막았습니다. 그러나 마음 속에 애정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리스도 앞에 나타날 소망을 갖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2장 마지막 부분입니다. 여기서는 기뻐하고 소망이 있고 자랑의 면류관이라고 말했습니다. 주님께서 오시는 것을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성도들과 함께 주님 앞에 있기를 소원했습니다.

이것을 생각해 보십시오. 이 이방인들이 그리스도의 은혜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어느 도시에 가서 복음을 전했는데 구원을 받은 사람들이 주님 안에서 하나가 되어 뭉쳐 있습니다. 그것을 보면서 감동적인 기다림을 가지게 됩니다. 그러나 그 시기는 아직 오지 않았습니다. 이제 그 동안에 고난을 받게 될 것인데 바울의 마음 속에 이런 생각이 나간 것입니다. 이제 갈 수 없는데 바울은 어떻게 위로를 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3장 초반에 보면 디모데를 보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바울 쪽에서는 큰 희생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바울은 아덴에 홀로 남았습니다. 얼마나 바울이 외로울지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주변에 동료 그리스도인들이 아무도 없습니다. 그 장소는 아덴(아테네)이었습니다. 사도행전 17장에 보면 그 기사가 나와있는데 아덴이라는 도시는 어둠 속에 있는 우상의 도시였습니다. 바울의 마음 속에 분이 생겼습니다. 아덴을 돌아다보면 모든 것이 유대인들을 압박하는 분위기였습니다. 그러한 가운데 바울이 혼자 남겨져 있습니다.

다른 성도들을 위해서 이러한 희생을 한 적이 있습니까? 우리는 그러한 성도들을 위로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또한 여러분은 그러한 성도들을 위로하지 않고 자기중심적으로 있습니까? 바울은 자기 혼자 남을지라도 디모데를 보내서 데살로니가 성도들을 위로하고자 했습니다. 2절에서 디모데를 어떻게 언급하는가를 보십시오. 첫째 그는 우리 형제라고 말했습니다. 이것은 서신서에 계속되는 표현 중에 하나입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전후서에서 21번이나 형제라고 호칭합니다. 또한 이것은 하나님의 권속이라는 놀라운 용어입니다. 형제들은 서로 싸우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알듯이 롯의 종들과 아브라함의 종들이 싸웠습니다. 아브라함은 롯에게 매우 사랑을 가지고 생각하며 그에게 말했습니다. "너와 우리 사이에 서로 다투지 말자, 왜냐하면 우리는 형제니까". 따라서 형제라는 용어 속에는 그 사이에 다툼이 없어야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모세도 그 당시에 동일한 언어를 사용했습니다. 스데반은 사도행전 7장에서 그것을 말합니다. 모세는 두 히브리인이 싸우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너희들은 형제인데"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피차간에 서로 다툼이 없다는 것을 생각해 주시기 바랍니다. 어떤 사람들은 태생적으로 공격적인 사람들이 있는데 어쩌면 저 같은 사람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함은 누구든지에 대해서 싸움을 걸었고 함은 만나는 어떤 사람들은 싸울 것이라고 성경은 말했습니다. 그러나 우리 형제들은 그러한 태도를 서로 피해야 합니다.

첫번째 언급은 "우리 형제"라고 말했습니다. 그 다음에는 "하나님의 일꾼"이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일꾼이라는 이 말의 의미는 하나님에 대해서 책임이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여러분도 만약 하나님의 일을 하는 집사라면 하나님에 대해 책임이 있습니다. 그것은 또한 명령이 있다는 것도 의미합니다. 여러분은 그것을 명령 받아 바로 그렇게 가라고 명령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받는 하나님의 종입니다. 영어성경에 복음의 동역자라는 이러한 표현이 있습니다. 이미 우리는 사랑의 수고에 대해서 보았습니다. 우리는 수고하는 사람들의 중요성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함께 일하는 동역자는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다른 사람과 함께 협력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것은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은 함께 협력할 필요가 있는 일입니다.

가버나움에서 있는 일로 두 사람을 예수님께로 데려간 사건이 있습니다. 네 사람이 한 사람을 데려간 사건을 아실 것입니다. 네 사람이 만일 다투었다면 그들은 진행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한 사람은 이쪽으로 가자는데 다른 사람은 저쪽으로 끌면 진행이 안되었을 것입니다. 아마 그 사람을 데려가지 않고 그냥 두었을 것입니다. 함께 그 사람을 데려오기 위해서 협력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여러분은 누가복음 5장도 기억할 것입니다. 베드로가 고기를 잡았는데 너무 많이 잡혔습니다. 그 그물이 찢어질 정도였습니다. 어떻게 고기를 배로 끌어올릴 수 있겠습니까? 함께 일하는 배에 있는 사람들을 불렀다고 했습니다. 함께 고기를 배로 올릴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을 섬기는데 함께 협력하기를 권합니다.

이것이 바로 디모데의 성격이며 품성 중에 하나였습니다. 그러나 데살로니가에서 어떤 일을 했습니까? 2절에서 그것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가서 할 일은 그들을 굳게 하고 믿음에 대해서 위로하는 것이었습니다. 첫 번째는 그들을 굳게 세우는 것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이 견고한 것은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특히 도덕적으로 견고한 것은 중요합니다. 야곱은 자신의 큰아들 르우벤을 움직이는 물이라고 했습니다. 르우벤의 도덕적인 상태는 마치 고정되지 못한 물 같아서 야곱은 움직이는 물이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들의 도덕적인 행위가 흔들리지 않고 굳게 되게 합시다.

특히 말씀적인 견고함도 중요합니다. 에베소서 4장은 그것을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교회에 은사를 주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성도들을 섬기기 위함이라고 했습니다. 그것을 하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더 이상 어린아이가 되지 않고 가르침에 요동치지 않게 하기 위함이라고 했습니다. 여러분이 가르침을 받은 것에 굳게 서는 것이 중요합니다. 여러분이 왜 믿는지 그리고 무엇을 믿는지는 매우 중요합니다. 따라서 도덕적으로도 이와 같이 견고한 것이 중요하고 그리고 말씀적으로도 견고한 것이 중요합니다. 디모데 일은 이것을 세우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믿음을 위로하고 격려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많은 경우에 압박을 받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격려를 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디모데가 하는 일이었습니다. 빌립보서에서 바울은 그렇게 견고하게 격려하고 세우는 말을 했습니다. 디모데의 마음 속에는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을 마음 속에 특권으로 생각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격려하는 것은 합당했습니다. 이들 속에 있는 위험을 바울은 알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압박 가운데 있기 때문에 디모데를 보내어 그들을 격려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바울은 인지했습니다. 3절에 보면 그 일의 목적이 나와있습니다. 바울은 이 흐름에 의해서 요동하지 않게 함이라고 했습니다. 그들의 고난에 대해서 두 가지를 생각해 봅시다.

첫째는 환난으로 말미암아 요동칠 수 있었으며 쓰러질 수 있었습니다. 마음에 실망해서 그만 포기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요동친다는 것은 견고하지 않은 것을 말합니다. 다른 말로 하면 작은 개가 겁을 낼 때에는 꼬리를 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바울은 그처럼 흔들리지 않기를 원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어려움으로 말미암아 요동치지 않기를 바랍니다.

둘째는 장차 받을 환난을 피할 수 없으며 바로 그러한 가운데로 나아간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이미 말했다고 했습니다. 베드로전서 4장에 앞으로 영광을 위해서 부름을 받았지만 잠깐 동안 고난을 받을 것에 대해서 말씀 드린 적이 있습니다. 따라서 베드로도 환난은 피할 수 없다는 것을 말했던 것입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다니면서 성도들을 격려할 때에도 바로 그런 것이었습니다. 많은 환난을 통과한 후에 그 나라에 들어가야 할 것에 대해 바울과 바나바는 가르쳤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에게 고난이 왔을 때 흔들리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런 것들이 다가온다고 해도 흔들리지 마시기 바랍니다. 모든 성도들 가운데 있는 일입니다. 그러나 환난 그것이 목적이 아니고 분명히 나아갈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바울은 그들이 알고 그 고난을 견뎌나가기를 원했습니다. 4절에는 "미리 말하였더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환난은 대환난과는 다르다는 것을 먼저 말씀드립니다. 지난 밤에 말씀드릴 때에 믿는 성도들은 대환난을 통과하지 않는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왜냐하면 휴거가 온 다음에 대환난이 올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대환난은 통과하지 않지만 어려움은 분명히 통과할 것입니다. 이것을 바울은 성도들에게 경고했습니다.

한 번도 복음이 전해지지 않은 곳에 복음이 전해졌습니다. 복음을 전하되 세상적인 복음 즉 복음을 받으면 병도 들지 않고 아무 문제도 없다이러한 복음(?)이 있습니다. 아마 여러분이 구원 받으면 만사가 형통할 것이라고 한다든지 여러분이 구원 받으면 사업이 잘 될 거라는 말, 여러분이 구원받으면 건강에는 문제가 없을 거라는 말, 바울처럼 안수하면 모든 병이 다 낫는다는 말들은 복음이 아닙니다. 이것들은 성경이 말하는 복음이 아닙니다. 히브리인들은 그리스도를 믿었기 때문에 늘 여기저기서 환난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기뻐한다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믿는데 그 숫자가 그렇게 많지 않고 소수라는 것을 생각해 주십시오. 여러분이 정말로 믿게 되면 환난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씨 뿌리는 비유를 알 것입니다. 이제 싹이 나고 해가 돋았습니다. 거기서 분명히 시련이 온다는 것을 말씀하기 위해서 그 비유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바울도 그것을 말하며 분명하게 그것을 경고했습니다. 반드시 시련은 오되 그것은 지나갈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따라서 바울은 그것을 분리하기를 원했습니다. 바울은 걱정하며 이 환난을 어떻게 대처할지를 말했습니다. 5절에서 더 이상 "참다 못하여"라고 말했습니다. 너희 믿음을 알기 위해서 디모데를 보냈다고 말했습니다. 따라서 "혹 시험하는 자가 너희를 시험하여 우리 수고를 헛되게 할까 함일러니"라고 했습니다. 믿는 사람들의 길에서 시험이 오는 또 하나의 관점입니다. 때때로 사단적인 시험이 있습니다. 여기서는 "시험하는 자가"라고 했습니다. 2장에서는 사단이 그렇게 했습니다. 사단은 막는 자이면서 또한 시험하는 자인 것을 말했습니다. 사단은 데살로니가에서도 바빴습니다. 이제 잠깐 시험하는 자가 너희를 시험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두 번 이상 성경에서는 사단을 시험하는 자라고 했습니다. 마태복음 4장에서는 광야에서 시험하는 자라고 나와있습니다. 마태복음에서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시험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성령이 언급된 다음에 시험하는 자가 등장했습니다. 이 시험하는 자가 그것을 결코 알지 못했을 것입니다. 첫 번째 사단이 경험한 것은 패배였습니다. 시험하는 자에게 주님이 대항한다는 것을 알지 못했을 것입니다. 여러분과 저와는 다릅니다.

야고보는 우리에게 시험 받는데 대해서 말합니다. 거기에 두 가지를 말하는데 우리 속에는 나쁜 욕구가 있다는 것과 그 욕심을 이끌어내는 자가 바깥에서 옵니다. 바깥에서 유혹하는 자가 바로 사단인데 미끼를 던지는 자입니다. 매우 교활합니다. 저는 낚시를 잘 모르지만 제 옆 집에 있는 사람이 낚시를 잘 합니다. 그 낚시 바늘에 화려한 지렁이 같은 미끼를 끼우는 것을 제가 보았습니다. 제 옆집에 있는 사람이 그렇게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마귀는 그것보다도 다른 미끼를 사용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것이 스포츠일 수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그것이 돈일 수도 있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다른 사람과의 성적인 관계일 수도 있습니다. 아주 교활하게 미끼를 던지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나 저에게 어떻게 미끼를 던져야 되는지를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들 앞에 올무를 놓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깥에서 유혹하는 자가 유혹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야고보는 우리 속에 욕심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 외부적인 유혹에 우리 욕심이 반응할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을 올바르게 믿지 않으면 말입니다. 마귀는 이와 같이 미끼를 던집니다. 예수님 앞에도 미끼를 던졌습니다. 그리고 예수님더러 돌을 가지고 떡을 만들고, 성전에서 뛰어내리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그것에 대하여 전혀 반응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범죄할 수 없다는 용어를 가지고 말을 합니다. 다른 말로 말하면 예수님은 죄를 범할 수 없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분은 하나님 아들입니다. 우리는 100% 분명하게 말합니다. 그분은 하나님 아들이고 완전한 하나님이라고 말을 합니다. 하나님이 죄를 범할 수 있습니까? 다시 한번 야고보의 말을 들어봅시다.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 않으신다"고 말했습니다. "어떤 사람도 유혹하지 않으신다"고 말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죄를 범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따라서 마태는 시험하는 자가 왔다고 말했습니다. 그 시험하는 자가 예수님 앞에서 패하고 돌아갔습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시험하는 자가 바빴습니다. 바울이 걱정했던 것은 시험하는 자가 데살로니가 성도들을 시험해서 예수님에 대한 믿음에서 떠나갈까 염려했습니다. 말하기를 "우리 수고를 헛되게 할까 함일러니"라고 했습니다. 어제 우리는 "우리가 수고한 것이 헛되지 않았다"는 바울의 표현을 보았습니다(2:1). 영혼의 수고한 것이 헛되지 않는다고 2장에서 보았습니다. 만약에 유혹하는 자가 이 사람들을 유혹해서 끌고 간다면 수고가 헛될 수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따라서 그 상황을 알기 위해서 디모데를 보냈습니다. 이제 6절에서 디모데가 돌아왔습니다. 6절을 보면 바울의 얼굴에 미소가 있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너희 믿음과 사랑의 기쁜 소식"이라고 말했으며 믿음이 강해졌습니다. 이제 사랑은 더욱 더 팽배해졌습니다. 1장에서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라는 말을 기억하고 있습니까? 이것은 믿는 사람들의 초기상태입니다. 처음과 똑같은 상태임을 디모데가 와서 보고했습니다. 바울이 후서를 쓸 때에도 이것이 더욱 더 빛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믿음이 더욱 더 자란다"고 말했습니다. 또한 "사랑이 더욱 풍성하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1장에서 소망에 관한 것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러나 디모데가 왔을 때 소망에 관한 것을 갖고 오지 않았습니다. 어저께 말씀드렸듯이 믿고 나서 죽은 자들에 관한 문제로 이 소망에 관한 소식이 없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 사랑하는 자들이 죽어버리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따라서 바울은 믿는 자들이 죽은 다음에 어떻게 되는지를 말하기 위해서 4장을 썼습니다. 처음에 믿었던 그 불이 더욱 불타게 하기 위해서 4장을 썼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울의 마음 속에 있는 매우 기쁜 것이었습니다. 바울이 보고자 했던 것처럼 그들도 바울을 보고자 한다고 했습니다. 이 기쁨의 좋은 소식을 디모데가 가지고 왔습니다. "너희가 선즉 우리가 살리라"고 말했습니다. 데살로니가의 소식을 듣고 바울이 이와 같이 말했던 것입니다. 그는 걱정했지만 이제 그 걱정이 풀렸습니다. "너희가 선즉 우리가 살리라"고 표현했습니다. 여기서 "그리스도 안에 섰다"고 말하지 않은 것에 주의하십시오. 말하기를 "주 안에 굳게 선즉"이라고 말한 것을 주목하십시오. ""라는 표현이 언급될 때에는 언제든지 주권이 언급된다는 것을 생각하십시오. 이 사람들은 그리스도가 늘 주권을 가지고 있음을 인식했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곧 주님이 주권을 갖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에게 복종하는 것을 의미하는데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과거에 주님이 주님이신 것을 이해했습니까? 물론 여러분은 구원 받았으니까 예수님이 주라는 것을 알고 있을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2장에는 "성령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무도 주시라고 말할 수 없다"고 분명히 말했습니다. 바울은 거기서 주께서 오시리라는 것을 기대하고 전했습니다. 만약에 성령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예수를 주시라고 할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복음을 전했을 때 어떤 듣는 사람이 예수님을 주로 말한다면 그것은 성령의 역사의 결과입니다. 여러분의 그리스도인의 출발은 바로 거기서부터 출발했던 것입니다. 여러분은 여전히 주님의 그 주권을 인정하고 서 있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주님을 부를 때 주 예수님이라기보다는 그냥 예수라고 부르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어떤 경우는 사람들이 예수라는 말을 좋아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성경 가운데 히브리서 같은 경우는 예수라는 표현들이 많이 나옵니다. 그 경우 문맥을 보면 대부분이 예수님의 인생에 관련된 때에 예수라는 표현이 나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기도할 때나 말씀에서 보면 주 예수 그리스도라는 주가 앞서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말을 주의 하십시다. 여러분이 그것을 부르면서도 정말로 주님의 주권을 모르면서도 부르는 것은 주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여러분은 "너희는 나를 불러 주여 주여 하면서도 어찌하여 나의 말하는 것을 행치 아니하느냐"는 말씀을 기억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참으로 주님을 인정치 않으면서 말로만 주여 하는 것을 주의해야 할 것입니다. "주여"라는 말은 지식일 뿐만 아니라 그것은 실제인 것입니다.

따라서 "주 안에 굳게 선즉"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또한 하나님께 감사를 유발하는 요인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9절에서 말하기를 "어떠한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보답할꼬"라고 했습니다. 기쁨의 근원이 나왔기 때문에 바울은 하나님 앞에 이런 감사를 표현했습니다. 여러분의 영적인 근원의 기쁨은 어떻습니까? 히브리서 13장에서는 "네 영혼을 위해서 경성하라"고 합니다. 스스로를 점검해 보라는 뜻입니다. 조심하면서 기쁨을 가지라고 말합니다. 만약에 우리가 어떻게 기쁨을 카운터 할지를, 바울은 자기의 기쁨의 근원을 알고 기뻐했습니다. 따라서 우리의 영혼의 기쁨의 근원을 조사하고 기뻐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일은 매우 힘들었습니다. 밤낮으로 일했으며 양들에 대해 큰 근심이 있었고 그들에 대해 염려하고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바울은 자신 속에 기쁨이 있었습니다.

10절에는 "주야로 심히 간구함은"이라고 했습니다. 2장에서는 그들을 위해서 밤낮으로 일을 했다고 했습니다. 함께 있을 때는 밤낮으로 일했지만 떠나 있을 때는 밤낮으로 기도했습니다. 여기서 주야로 말하는 것은 흥미롭습니다. 때때로 사람들은 낮에는 자지 않습니다만 여러분이 자는 시간은 어떻습니까? 여러분들이 만일 양들을 계수할 때 목자에게 말할 때 양을 세지 말라는 말이 있습니다. 여러분이 잘 때 목자에게 말하는지 모르겠습니다. 더 이상 일할 나이가 아니라고 말하는 나이가 많은 성도가 말하기를 나이 들어 다른 일을 할 수 없지만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 때 주야로 기도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나이든 분들에게는 할 일이 없는 것이 아니라 기도하기를 격려해줍시다. 기도하는 사람들에게는 보상이 있습니다. 주님은 "은밀한 중에 보시는 내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고 하셨습니다. 밤낮으로 계속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바울은 그들의 얼굴을 보기를 원했습니다. 그들의 믿음의 부족함이 없기를 바랬습니다. 우리는 영적으로 다양합니다. 이 사람들은 잘 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들이 더 전진되기를 바랐습니다. 4장에 보면 사랑이 더욱 더 많아지기를 바랐습니다. 여러분이 계속적으로 성장하기를 바랐습니다. 우리의 모든 간절함은 더 좋아지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계속 나아가기를 권유합니다. 우리의 믿음에다가 더하는 것입니다. 베드로후서에서 베드로는 그것을 말합니다. 믿음에 계속 더해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벧후 1:5-7).

10절을 보면 "너희 믿음의 부족한 것을 온전케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11절에서는 그가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우리 주 예수는 우리 길을 너희에게로 직행하게 하옵시며"라고 기도했습니다. 여기 하나님의 신성을 두 가지로 말하는 것이 흥미롭습니다. "하나님 우리 아버지" "우리 주 예수"라고 말했습니다. 여기서 한 말로 두 인격을 표현했습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하나되어서 일하는 것을 표현했습니다.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은 늘 이렇습니다. "하나님 우리 아버지" "우리 주 예수"라고 분명히 말하며 직행하게 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피차간과 모든 사람에 대한 사랑이 더욱 많아 넘치게 하사"라고 했습니다.

4장에 보면 형제사랑이 더 많아지기를 원했습니다. 여기는 더욱 더 많아지기를 바랍니다. 사랑은 단순한 그저 느낌이 아닙니다. 사랑은 실제적인 그 무엇입니다. 나는 젊은 사람들이 어떻게 시간을 사용하는지에 대해 약간 걱정을 하고 있습니다. 어떤 말씀을 전하는 자는 '서로 사랑하자'고 말씀을 전합니다. 내 마음 속에는 어떤 감정이 생기지 않는다고 느낄 때가 있습니다. 저는 그때 발견합니다. 사랑은 단순한 감정의 느낌이 아니라는 것을... 사랑은 실제적인 그 무엇입니다. 요한은 서신서에서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고 말하며 권면했습니다. 말하는 것은 쉽습니다. 피차간에 실제적인 돌봄과 실제적인 친절이 있는 것은 중요합니다. 바울은 "피차간과 모든 사람에 대한 사랑이 더욱 많아 넘치게 하사" 라고 합니다. 성도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에 대한 사랑을 말했습니다. 여기도 순서를 다시 한 번 중요시해야 될 것 같습니다. 첫 번째는 피차간이고, 그 다음에 모든 사람입니다. 갈라디아서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사람에게 선을 행하되 특히 하나님의 권속에게 먼저 할 것을 말했습니다. 여러분이 주변 사람들에게 사랑을 베풀지만 먼저 동료 성도들에게 사랑을 베푸는 것을 말합니다. 이와 같이 바울은 피차간에 서로 사랑할 것을 권면했습니다. 그 마음이 주님 앞에서 흠이 없게 서기를 원했습니다. 주님께서 모든 성도와 함께 오실 때까지 주님의 다시 오심은 데살로니가전서 모든 장의 끝에 나오고 있는 것은 지난 시간에 소개하며 말씀을 드렸습니다. 3장 마지막 절에서도 "모든 성도와 함께 강림하실 때에 하나님 우리 아버지 앞에서 거룩함에 흠이 없게 하시기를 원하노라"고 말했습니다. 아직 오시지 않았습니다만 4 1절부터 보면 실제적인 거룩함을 말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을 우리는 반드시 알아야 합니다.

 

(2016. 05. 01() 강서 특별말씀집회3 잭 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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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징검 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