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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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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5. 29. 12:39 주옥같은 말씀들/존 시

우리에게 가까이 오신 일곱 가지

John See

마가복음 1:1, 7-10, 14-20, 23-26, 29-31, 35-39

1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시작이라

7 그가 전파하여 가로되 나보다 능력 많으신 이가 내 뒤에 오시나니 나는 굽혀 그의 신들메를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8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주었거니와 그는 성령으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시리라 9 그 때에 예수께서 갈릴리 나사렛으로부터 와서 요단 강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고 10 곧 물에서 올라 오실새 하늘이 갈라짐과 성령이 비둘기같이 자기에게 내려오심을 보시더니

14 요한이 잡힌 후 예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여 15 가라사대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 16 갈릴리 해변으로 지나가시다가 시몬과 그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니 저희는 어부라 17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18 곧 그물을 버려 두고 좇으니라 19 조금 더 가시다가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을 보시니 저희도 배에 있어 그물을 깁는데 20 곧 부르시니 그 아비 세베대를 삯꾼들과 함께 배에 버려 두고 예수를 따라가니라

23 마침 저희 회당에 더러운 귀신들린 사람이 있어 소리질러 가로되 24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 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 25 예수께서 꾸짖어 가라사대 잠잠하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시니 26 더러운 귀신이 그 사람으로 경련을 일으키게 하고 큰 소리를 지르며 나오는지라

29 회당에서 나와 곧 야고보와 요한과 함께 시몬과 안드레의 집에 들어가시니 30 시몬의 장모가 열병으로 누웠는지라 사람들이 곧 그의 일로 예수께 여짜온대 31 나아가사 그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열병이 떠나고 여자가 저희에게 수종드니라

35 새벽 오히려 미명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시더니 36 시몬과 및 그와 함께 있는 자들이 예수의 뒤를 따라가 37 만나서 가로되 모든 사람이 주를 찾나이다 38 이르시되 우리가 다른 가까운 마을들로 가자 거기서도 전도하리니 내가 이를 위하여 왔노라 하시고 39 이에 온 갈릴리에 다니시며 저희 여러 회당에서 전도하시고 또 귀신들을 내어쫓으시더라

 

우리는 주님께서 말씀을 축복해 주실 것을 믿습니다. 어저께는 창세기 1장에서 일곱 날을 통해서 어떻게 성장하는가를 보았습니다. 그 다음 시간에는 하나님의 신실하심 일곱 가지를 보았습니다. 거기서는 왕에 대한 복음인 마태복음 1,2장에서 보았습니다. 오늘은 마가복음에서 우리에게 가까이 오신 일곱 가지를 보고자 합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것임을 말씀드립니다. 7절에 보면 "나보다 능력 많으신 이가 내 뒤에 오시나니"라고 요한은 외쳤습니다. 9절에 보면 "갈릴리 나사렛으로부터 와서 요단 강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고"라고 했습니다. 14절에서는 "요한이 잡힌 후 예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여"라고 했습니다. 24절에서는 귀신이 말하기를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라고 외쳤습니다. 29절에서는 "회당에서 나와 곧 야고보와 요한과 함께 시몬과 안드레의 집에 들어가시니." 31절에서는 "나아가사 그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38절에서는 "우리가 다른 가까운 마을들로 가자 거기서도 전도하리니." 여기서는 예수님이 "나아와서"라는 표현으로 가까이 오셔서 섬기는 일곱 가지를 방금 확인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일을 하실 때 얼마나 열심히 섬기시는가를 나타낸 것들이었습니다.

이 말씀은 놀라운 선포로 시작됩니다. 1절에 보면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시작이라고 했습니다. 이 오신 분이 섬기시기 위해 오셨지만 하나님의 아들로서 오셨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예수님이 섬기시는 방식이 다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것을 통해 배우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섬길 때 낮은 자세를 취하셨기 때문에 우리도 섬길 때 참고를 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주님은 나사렛, 갈릴리, 유대 지방을 다니시면서 그렇게 하셨습니다. 이 복음을 전하실 때 사람들 앞에 과시하지 않았습니다. 주님은 때로는 많은 배를 타시고 많은 가정들에 들어가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일하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어쩌면 해가져서 더 이상 기능할 수 없어서 쉬셨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모든 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아들 되신 분은 우리들에게 섬길 때 어떻게 해야 되는지를 보이셨습니다. 따라서 아주 공손하고 경건하게 말씀을 다루셨습니다. 우리가 이와 같이 주님을 섬길 때 하나님의 아들이 섬기신 그러한 태도로 섬길 필요가 있습니다. 그 다음에는 모든 일들이 잘 될 것입니다. 이곳에서도 예수님을 반영하는 일곱 가지 제목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1절에 예수님의 명칭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라는 명칭이 있습니다. 또 하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명칭이 있습니다. 3절에서는 라는 호칭이 있습니다. 9절에서는 그분의 낮아지신 이름인 예수가 나와 있습니다. 11절에서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는 호칭이 나오며, 24절에서는 나사렛 예수라는 호칭과 그의 거룩한 자라는 용어가 나옵니다. 이 일곱 가지 명칭이 마가복음 1장에 언급이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 한 가운데 낮은 이름인 예수가 나와 있습니다. 이와 같이 주님이 오셔서 죄인들을 다루시고 인도하실 때 이런 태도를 취하시는 것이 아주 귀하다는 것을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먼저 능력 많으신 이가 내 뒤에 오시나니를 생각해 보십시다. 주님께서 종으로 오신 것은 대단히 감사한 일입니다. 이것은 우리 모두에게 대단히 교훈적입니다. 주님께서 지금은 영광 가운데 계시지만 여러분에게 다가올 때는 낮은 자세로 오셨습니다. 따라서 요한이 선포한 이 선포를 통해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습니다. 나에게 오시는 분이 나보다 능력이 많다고 요한은 말했습니다. 여기서 요한은 성경을 통해서 메시야를 높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말씀을 통해서 사람들에게 무엇을 말하고 어떻게 행동할지를 보이신 것입니다. 성경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높이면서 설명한 것은 요한이 정말로 잘한 것입니다.

요한을 통해서 또 하나 배울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내 뒤에 오시나니라는 말도 대단히 교훈적입니다. 어떤 경우에 앞서서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리고 누가 먼저 오는지 하고 사람들이 신경을 씁니다. 그러나 요한은 뒤에 오는 분을 높였습니다. 보통은 앞서는 사람이 높은 분인데 요한은 자기 뒤에 오시는 분을 높였습니다. 이것은 주님을 섬기는 현장에서 뒤에 오는 사람을 높인다는 것은 대단히 교훈적입니다. 우리가 개척을 하는 일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또한 가족에게 처음 복음을 소개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경우에 예수 그리스도가 가장 높다는 것을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또 하나는 나는 그의 신들메를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는 말씀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요한은 종의 입장에 들어가는 것도 감당치 못한다는 뜻으로 말했습니다. 요한은 자신을 그렇게 본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자신을 각자가 어떻게 봐야 하는지를 교훈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임 내에서 아주 단순하고 간단한 일도 그 일에 합당하지 않다는 입장을 취할 필요가 있습니다. 요한이 요단강에서 예수님이 오셨을 때 침례까지 베풀었습니다. 이것이 요한이 할 수 있는 굉장히 높은 일이었습니다.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를 섬기는 일에 우리 자신이 감당치 못할 일이라는 자세를 취하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요한이 예수님을 어떻게 높였는가에 대해서 배우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또 하나 요한은 자기 뒤에 오시는 분이 능력이 많다고 한 말에서도 교훈을 받을 수 있습니다. 여기서 배울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일에 있어서는 우리의 수준과 능력이 아니라는 것을 배울 수 있습니다. 우리는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라고 말합니다. 다른 사람보다 내가 높다고 혹시 말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요한은 자기를 높인 것이 아니라 자기 뒤에 오시는 분의 능력 많음을 선포했습니다. 우리는 놀라운 영광스러운 일을 하고 있는데 우리보다 높은 분을 높이는 영광스러운 일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 자신을 낮추지 않으면 할 수 없는 큰 일을 하게 하는 것에 대해서 감사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8절에서 요한이 말하는 바에 따르면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주었거니와 그는 성령으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시리라"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는 보통 사람들이 보통 하는 일을 한다고 말했습니다. 세례를 주는 것은 바깥에 나가서 보통 사람들이 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요한은 진짜 축복은 예수 그리스도께로부터 온다는 것을 말했습니다. 우리는 보통 사람들이 하는 일을 일반적으로 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일 속에서도 실제적인 축복을 가져다 주는 분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진짜 축복은 내면적이면서도 영원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종을 통해서 우리에게 온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9절에 보면 "갈릴리 나사렛으로부터 와서 요단 강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고"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은 '어떻게 주님과 함께 있느냐?'고 때때로 질문을 합니다. 어저께 예수님이 하나님과 함께 하시는 세 가지를 말씀을 드렸습니다. 마태복음 28장에서는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함께 있을 것이라", 13장에서는"내가 결코 너희를 떠나지 않겠다", 마태복음 18 20절에서는 모임에 있어서 주님이 함께 하시겠다는 것을 말씀드렸습니다. 그저 모이는 모임이 아닙니다. 그냥 모이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이름으로 그분의 권위로 모일 때 함께 한다는 것에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예루살렘에서 멀지 않지만 예수님은 요단으로 가셨습니다. 왜냐하면 거기에 성도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교훈을 받는 것은 얼마나 주님은 자신의 백성들과 가까이 계셨는가를 배웁니다. 이제 하나님의 말씀으로 오셔서 주님은 높아지셨습니다. 다른 말로 말하면 요한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주님을 증거했는데 예루살렘에서는 이 말씀이 높임을 받지 못하고 있는 곳이었습니다.

여기는 말씀을 가지고 떠는 자들이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떨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더 알기를 원하는 자들이었을 것입니다. 또 이 사람들의 특징은 자기들의 죄를 회개하고 죄를 고백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요한이 요단에서 침례를 베풀 때 사람들이 와서 자기들의 죄를 고백했습니다. 이들은 주님 앞에 자기들이 약하다는 것을 인정한 사람들의 무리였습니다. 이들이 무엇이 잘못되었고 어디로 돌아가야 되는지를 주님께서 보이셨습니다. 여러분, 지역모임이 바로 이런 곳입니다. 모임 안에서 양심적으로 자기의 죄를 생각하고 드러내는 것입니다. 계속 죄를 회개하고 뉘우치고 주님 앞에 다가가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늘 기도집회나 만찬 때 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 일을 할 때도 있습니다. 주님 앞에 자신을 돌아보고 나 자신의 죄가 있으면 그것을 버리고 그리고 감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다음으로는 주님을 만날 준비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 앞에 나올 때마다 주님을 알고자 하는 준비를 하고 오는 것은 좋은 것입니다. 모임에 나올 때 주님 앞에 준비되지 않은 마음으로 나오는 것은 두려운 것이며, 여러분 마음 속에 차가움이 자리 잡을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과 거리가 먼 느낌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께 관심을 갖지 않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요단강에 나온 사람들을 보십시오. 얼마나 민감하고 얼마나 세밀하게 자기 양심을 살펴보는지를 보십시오. 여기서 보면 주님께서 요한을 통해서 일을 하신다는 것을 우리는 교훈적으로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사도행전 13장에서 주님을 섬기는 전도자들이 어떻게 전도하는지를 보았습니다. 다른 말로 말하면 이곳에서도 어떻게 증거되는가의 교훈을 볼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 13장에서는 주님께서 필요한 것을 전도자들이 전했습니다. 주님의 사람들의 필요를 보았습니다. 우리는 또한 계시록 2,3장에서 일곱 교회들을 봅니다. 이제 주님께서 일을 하는 일꾼들을 보낸 것을 보는 것은 좋은 것입니다. 여기서 요한과 주님이 어떻게 일을 정하는가를 교차적으로 보는 것은 좋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일꾼들은 의를 드러내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사실을 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는 군중들을 기쁘게 하는 활동들을 하지 않습니다. 여기는 콘서트도 아니고 사람들을 위한 연예활동을 하는 곳도 아닙니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높이고 주님을 주님의 자리로 높이 올려 드리는 것입니다. 주님의 일이 더 나아갈 때에 어떻게 되는 지를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하늘의 소리를 듣습니다. 하늘에 계신 그분이 아들을 기뻐하는 소리를 듣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는 모임에 와서 하늘의 소리를 듣는 것은 대단히 좋습니다. 아버지의 기쁨을 아는 것은 참으로 좋습니다.

 

우리는 더 나아가면 14절은 볼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주님의 종 되심에 대해서 생각을 했습니다. 두 번 째는 주님께서 성도들에게 오신 것을 보았습니다. 이제 세 번째는 주님께서 섬기시는 자리로 오셨습니다. 요한이 잡힌 후에 예수님이 갈릴리에 오셔서 복음을 전하신 것은 중요합니다. 주님께서는 일을 계속하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일을 할 때 때때로 우리가 기대하는 환경이 되지 않음을 알아야 합니다. 어떤 경우는 아프기도 하고 비상식적인 일들이 발생하기도 하고 상황이 좋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그래도 하나님의 일은 계속 이루어져야 됩니다. 바로 그러한 상황에 주님이 오셔서 요한을 바로 이어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셨습니다. 우리가 이 신약에서 이와 같은 것들을 보는 것을 저는 생각을 합니다.

여러분은 이와 유사한 상황을 바울을 통해서 읽어낼 수 있습니다. 그는 사도행전 20장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바울을 따르는 일곱 사람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특히 두기고와 디모데가 바울이 가야 할 자리에 가서 일했습니다. 두기고는 디도와 함께 가기도 했습니다. 디모데와 디도는 다른 상황이었습니다. 디모데가 섬김 곳은 에베소였고 디도가 섬긴 곳은 그레데였습니다. 그러나 두기고는 모든 상황에 적합한 사람이었습니다. 우리가 필요한 사람들이 모임에 오는 것은 얼마나 좋은 일입니다. 이것은 내 일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요한이 잡힌 이후에 주님은 바로 오셔서 요한이 할 일을 바로 하셨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섬기는 일은 폭이 매우 넓습니다. 요한 이후에 주님께서는 요한이 일하던 곳이 아닌 다른 장소에서 일하셨습니다. 요한은 예루살렘에서 가까운 요단에서 일을 했지만 주님께서는 더 넓은 지역인 갈릴리로 가셨습니다. 요한이 전한 복음이 거절된 지역을 떠나서 다른 지역으로 가서 복음을 증거하셨습니다. 어떤 경우는 우리가 복음을 전할 때 그 지역에서 반대를 당함으로 더 이상 진전이 안될 경험을 하게 됩니다. 우리는 이것을 통해서 그렇다면 다른 지역으로 간다는 교훈을 받습니다. 갈릴리 사람들은 예루살렘과 달리 자유로워서 하나님의 일에 대해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할 때 주님을 배척하는 곳이 아닌 다른 곳으로 가서 복음을 전한다는 교훈을 받습니다. 이것은 한 개인을 다룰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경우는 이 세상에서 말하는 법칙을 위반할 때가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때도 인도를 받아 할 필요가 있습니다. 다른 말로 말하면 이 세상 법이 금해도 사람들의 마음 속에 하나님의 사랑을 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동일한 주님으로 말미암아 여러가지 형태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습니다. 주님은 요한이 했던 일을 이어받아서 일을 한 그 지역에 계속해서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요한이 전한 것과 다르지 않았습니다. 주님이 오셔서 동일한 것과 동일한 말씀을 전한다는 것은 좋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는 지역에 와서 반응을 보이는 사람들을 주목하는 것은 좋습니다. 준비된 사람들을 향해 가서 주님은 그들을 접촉하셨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 올바른 마음을 가지고 반응하는 사람들을 만나는 것은 중요합니다. 야곱과 요한과 베드로와 안드레가 하나님의 일을 위해서 올바른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라고 보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바다에 그물을 던지고 있었습니다. 다른 말로 말하면 베드로와 안드레가 힘이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와 같이 일상생활에서 바쁘게 일하는 사람이 변해서 하나님의 일터로 나가는 것은 좋습니다. ‘나는 지금 직장이 없기 때문에 전심사역을 하겠다고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내가 이 일도 저 일도 안되니까 주님이 나를 전심으로 하라고 부르시는가 보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바쁜 사람을 찾으십니다. 야고보와 요한은 그물을 고치고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고치는 것에 매우 신경을 쓰는 사람이었습니다. 다음 날을 위해서 준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날 할 일을 위해서 준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이 요한은 예수님의 품에 안겼던 그 사람이었습니다. 주님은 이와 같이 바쁜 사람을 찾으시고 품에 안길 사람을 찾으셨습니다. 이와 같이 주님께서는 계속 일을 진행해 나가셨습니다

 

네 번째는 24절에서 사탄의 힘과 주님이 대적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하시는 일에는 항상 그 위치가 드러나고 주님의 위상이 높아지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탄이라 할지라도 주님에 대해서 올바른 위치와 주님을 높인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여기에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나오셨습니다. 이 사탄이 가진 첫째의 견고한 진지는 사람의 생각 속에 있는 생각의 지식이었습니다. 따라서 사람들을 가장 자유롭게 하는데 가장 먼저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그 사람들 속에 사탄이 진지를 구축하고 있는 그 자리에 진리를 넣는 것입니다. 여기서 오해하지 말기 바랍니다. 귀신은 주님의 능력을 알았습니다. 우리는 때때로 복음에 대해서 확신을 가지지 못할 수도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자신이 없으면서도 그리스도를 제시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때때로 주님이 할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서도 확신을 못 가질지도 모르겠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만으로도 만족하지 않느냐고 말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주의하십시오! 귀신 조차도 주님 자신이 누구인가와 그분의 능력을 알았다는 것입니다. “나는 당신이 누구인 줄 아노니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자이신데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라고 귀신은 주님 자신과 그 능력을 알아보았습니다. 따라서 귀신들의 반대에서 이와 같이 주님의 주되심과 능력이 나타납니다. 다른 말로 말하면 귀신들을 어떻게 다루어야 되는가를 여기서 볼 수 있습니다. 거저 예수님의 이름을 반복해 부르는 것으로 귀신을 대처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귀신이 뭔가 하는 것을 주님의 권위로 선포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주님을 선포하게 되면 귀신의 지배를 받는 개인도 여기에 대해서 영향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귀신들린 사람을 접하게 되면 첫 번째 필요한 것은 기도입니다. 그 사람이 현재 어떤 상황에서 속임을 당했는가의 배경을 아는 것도 두 번째로 중요합니다. 세 번째는 하나님의 말씀에서 직접적이고 분명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만약 귀신의 통제를 받고 있는 사람이 이와 같은 말씀을 직접 들으면 그 사람은 영향을 받아서 믿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만약에 그리스도를 향해서 그 사람이 마음을 열면 귀신은 더 이상 그 사람 속에서 활동을 못하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성령이 그 사람 속에 들어가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와 같이 주님께서는 사단의 능력을 멸하시기 위해서도 오셨습니다. 이 귀신조차도 하나님의 경륜을 알았습니다. “오셨나이까?”라고 말한 것을 볼 때 예수님이 오셨다는 하나님의 경륜을 귀신은 인지를 했습니다. 주님께서 오신 경륜을 귀신이 알았기 때문에 귀신을 쫓아내는 시기가 왔다는 것을 귀신이 인지를 했습니다. 이제 안정된 가정으로 오신 장면으로 가겠습니다.

 

29절에서 회당에서 나오셔서 시몬과 안드레의 집에 들어가셨습니다. 이 부분을 보면 흥미롭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회당에도 관심을 가지셨고 가정에도 관심을 가지셨습니다. 주님께서 모이는 곳에서도 주님이 계시고 가정에도 주님이 계시다는 것을 아는 것은 중요합니다. 우리가 주님의 이름으로 모이는 곳에도 주님이 관심을 가지시고 우리 가정에 대해서도 주님이 관심을 가지십니다. 우리의 가정도 주님을 위해서 영접하고 환영하는 가정이 되면 좋습니다. 주님이 이곳에 온 이유 중에 하나는 그 가정에 아픈 사람이 있었습니다. 다른 말로 말하면 베드로가 주님의 일을 위해서 바깥으로 나갔는데 그 가정에 아픈 사람이 있어 주님은 이것을 배려하셨습니다. 베드로가 주님을 따라 회당에 갔었는데 집에는 아픈 사람이 있었고 주님은 이것을 아셨습니다. 다른 말로 말하면 우리가 주님의 일을 위해서 참여하고 있고 우리가 떠나온 가정이 어떤 일이 있을 때 주님은 그것을 그대로 방치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이와 같이 주님이 그 가정에 오시면 주님이 중심이 되고 그 가정의 모든 문제를 누구에게 말해야 되는지를 안다는 것입니다. 30절에 보면 시몬의 장모가 열병으로 누웠는데 사람들이 그 일로 예수님께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리스도인의 가정에 때때로 사탄이 공격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을 위해서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영접하면 주님이 계신 그곳에서는 항상 우리가 주님을 최우선적으로 알고 말씀을 드린다는 것을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와 같이 주님께서 한 가정이 안정되기를 원하신다는 사실을 알고 다른 포인트로 옮겨가겠습니다.

 

31절에 보면 아픈 그 사람의 손을 잡아 일으켰습니다. “그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이 사람은 열병을 앓았습니다. 몸 속으로 바깥에 있던 어떤 것들이 들어와서 유린합니다. 영적으로 말하면 바깥에 있는 들어와서는 안되는 것들이 들어와서 열병이 나는데 영적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이 손을 잡았을 때 열병이 떠났다는 것은 흥미롭습니다. 어떤 가정이든 어디든 간에 영적으로 주님이 중심이 되면 거기에 있던 열병이 떠나가게 됩니다. 주님은 이 열병뿐만 아니라 영적인 질병도 치유하시기에 관심을 가지십니다. 우리는 주님이 하신 일곱 가지를 보았습니다.

 

일곱 번째는 주님이 오셔서 이 여자의 손을 잡으셨습니다. 그리고 열병이 떠났습니다. 여기서 무엇이 일어났는가를 보았습니다. 주님께서는 이 여인을 아셨습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이와 같이 문제를 일으날 때 어떻게 해결되는가를 여기서 보게 됩니다. 만약에 아무 문제가 없는 곳에는 주님이 관심을 갖지 않으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만약 무슨 문제를 갖고 있으면 주님은 그 문제를 아십니다. 주님께서 이 여인의 손을 잡으셨을 때 이 여인은 주님을 감각적으로 느끼며 인지했을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일을 만나게 되면 주님이 그 일들 때문에 우리들을 손대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될 수도 있습니다. 그 손을 잡았을 때 그 여인을 붙잡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른 말로 말하면 우리의 영적인 문제를 해결 받았을 때 주님이 우리를 붙잡고 계시다는 것을 인식하게 될 것입니다. 즉 꽉 쥐고 있다는 것을 인지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이 그 여인의 손을 잡았을 때 주님의 체온을 느꼈을 것입니다. 어떤 문제에서 주님의 손대심으로 말미암아 그 문제를 해결 받았을 때 주님의 체온을 계속적으로 느끼게 될 것입니다. 또한 주님의 손에 힘이 있었다는 것이 격려가 됩니다. 우리가 회복이 될 때에 성경을 읽거나 말씀을 통해서 힘을 얻는 것을 배우게 됩니다. 주님이 여인의 손을 잡으셨는데 주님은 아무 말씀을 아니하셨어도 말씀을 하셨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여러분이 회복이 될 때 개인적으로 이와 같이 말씀을 하신다는 것입니다. 이런 일이 주님과 여러분 사이에 있다면 아주 좋은 것입니다. 이제 열병이 떠나고 이 여인이 회복이 되었습니다. 이 여인에게 나았다는 증거가 있었습니다. 주님이 낫게 했으므로 이 여인이 수종 들었기 때문에 모든 회복 받은 사람들은 이와 같이 주님을 섬기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가운데 이러한 경우가 있다면 이런 경험을 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님이 오신 것 중에 38절에서 우리가 다른 가까운 마을들로 가자 거기서도 전도하리니 내가 이를 위하여 왔노라 하시고이 말씀을 보면 주님께서는 결코 지치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은 사람들을 찾으시고 찾게 된 사람들을 구원하셨습니다. 놀라운 것은 주님께서 구원하신 제자들을 향해서 우리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그 영역을 넘어갈 때 주님께서는 그 제자들을 데리고 가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언제든지 더 나아갈 때 우리들을 데리고 가시기를 원하십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쓰임을 받았든 곳보다 더 넓은 지역으로 나아갈 때 주님은 데리고 가기를 원하시는데 하나님의 영역에서 우리가 경험하지 못했던 영역으로 나아갈 때 말입니다. 이것은 악기를 도입하는 새로운 의미로 나아간다는 말이 아닙니다. 지금까지 하지 못했던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나아가는 것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이전에 공부하지 않았던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할 때, 이전에 하지 않았던 말씀을 전할 때, 이전에 한 번도 해보지 않았던 모임의 봉사에 내가 관여할 때, “우리가 다른 가까운 마을들로 가자이것은 아주 교훈적이고 아름답습니다.

제자들이 어떻게 해야 될지를 주님은 아셨습니다. 주님이 가시고 난 다음에 제자들이 남아있었다면 어떻게 될지를 주님은 아셨기 때문에 제자들을 데리고 가시기를 원하셨습니다. 또한 믿는 자들은 내 앞에 놓인 것이 무언가에 대한 생각을 합니다. 문제는 우리 내면 속에 있는 그것을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가자고 말씀하실 때 그 앞에 우리가 생각을 못했던 주님의 준비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다른 교훈이 여기서 얻어집니다. 베드로가 말하기를 모든 사람이 주를 찾나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주님께서는 우리가 다른 가까운 마을들로 가자고 하셨습니다. 주님을 찾는다고 말했지만 믿음을 가지고 떠나게 되면 거기에 준비된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미 그 일이 행해진 그곳에서 분별할 수 있는 예가 나와 있었기 때문에 말입니다. 그래서 이전에 주님이 하신 일을 본 사람들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행할 것이기에 주님은 놓아두고 떠나가는 것입니다. 따라서 주님께서는 “우리가 다른 가까운 마을들로 가자고 말씀하셨습니다. 남아 있는 사람들이 믿음으로 행할 것을 아시고 주님은 떠나셨습니다. 따라서 남겨둔 그 사람에게 주님이 기억할 수 있도록 본을 보이시고 그 다음에 가자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38절에서 “우리가 다른 가까운 마을들로 가자고 다른 목적을 가지고 가셨습니다. 따라서 주님이 원하시는 일터로 갈 때 거기는 목적이 있고 주님이 우리를 보내는 목적을 알고 간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이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라고 부탁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무엇을 택해야 될지를 아셨습니다. 주님의 귀한 말씀을 축복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2017. 5. 6. 강서 특별말씀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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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징검 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