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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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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교회의 7가지 특징

다니엘 럿지

2:41-42 “그 말을 받는 사람들은 세례를 받으매 이 날에 제자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 저희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니라

네 가지 동사가 나왔습니다.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썼습니다. 이 말씀을 마음에 두시고

8:5 저희가 섬기는 것은 하늘에 있는 것의 모형과 그림자라 모세가 장막을 지으려 할 때에 지시하심을 얻음과 같으니 가라사대 삼가 모든 것을 산에서 네게 보이던 본을 좇아 지으라 하셨느니라

이것은 모세가 받은 성막과 관계되는 것입니다. 성막은 구약의 하나님의 집이었습니다. 모세에게 산에서 네게 보이던 본을 좇아 지으라하셨습니다. 성막을 지을 때 산에서 네게 보이던 본을 좇아 지으라고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만드는 모든 것을 모세는 지시하심을 얻은 식양대로 지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말씀을 가지고 인도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한국은 모르겠습니다만 영국에서의 교회들은 많은 사람들이 자기 편의를 좇아 교회를 다닙니다. 어떤 경우는 그 교회에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떤 경우는 그 교회에 자기가 좋아하는 음악이 있기 때문에 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떤 경우는 그 교회에 자기가 좋아하는 목사가 있어서 거기에 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또 자기 집에서 가까이 있기 때문에 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교회이든지 하나님의 말씀과 다르면 저는 흥미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지역교회에 대해서 무엇이라고 말씀하시는지가 중요합니다. 저는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신약교회에 가담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지역교회에서 하나님이 보이신 식양이 무엇인가를 알고 싶습니다. 그래서 오후에 주제는 신약성경이 말하는 신약교회는 어떤 것인지 하는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정직하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지금부터 살펴보는 이러한 지역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저는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마음을 가졌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모두는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 말하는 대로의 지역교회에 참여하고 싶어한다고 봅니다.

히브리서 8:5절에서 첫 번째로 주목하기를 바라는 것은 물론 이것은 성막에 관한 것이지만 지역교회에 교훈으로 적용하고자 합니다. 모세는 모든 것을 산에서 보인 식양대로 지으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여기에 첫 번째 특징으로 성경적인 하나님의 지역교회는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말씀하신대로 드러낼 책임이 있습니다. 모세는 성막을 하나님의 집으로 만들었습니다. 그가 만드는 성막은 하나님이 산에서 보인 식양대로 지어야 한다고 경고를 받았습니다. 하나님은 시내산에서 그 계획을 모세에게 보이셨습니다. 모세는 그 모양을 따라서 성막을 정확하게 만들었습니다. 왜 식양을 따라 만드는 것이 중요하겠습니까? 왜냐하면 단순하게 말해서 그 성막은 모세의 집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집이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계획하신 대로 모세는 성막을 지어야 했습니다. 땅에 있는 성막이었습니다. 땅에 있지만 하늘에 있는 영적인 현실을 반영하는 구조물이었으며 하나님이 말씀하신대로 정확하게 반영을 해야 했습니다.

여러분이 출애굽기를 읽을 때에 98번이나 성막을 보였다는 기록이 나와 있습니다. 따라서 98번의 말씀처럼 모세는 백성들에게 성막을 말했습니다. 98번이나 모세는 성막을 어떻게 만들어야 되는지 백성들에게 정확하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대로 정확하게 모세는 백성들에게 말했습니다.

이제 신약에서 하나님의 교회로 오면 어떻습니까? 신약에서는 하나님의 교회를 하나님의 집이라고 불렀습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저의 견해를 말씀드리고 싶지 않습니다. 바울은 고린도 성도들을 위해서 힘썼습니다. 그는 지혜로운 건축자와 같이 기초를 두었다고 말했습니다.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기초를 놓았다고 말했습니다. 바울은 기초를 놓을 때 하나님의 뜻대로 하나님의 계획대로 가르쳤습니다. 이와 같이 지역교회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있어야 한다는 것을 이해하시겠습니까?

한 예를 들어 드리겠습니다. 신약의 성경적인 지역교회는 주일날에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고 기념합니다. 이것을 주의 만찬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떡뗌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우리는 매 주일날에 이것을 행합니다. 왜 이렇게 하는가는 사도행전 20장에 말씀이 나와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식양에 따라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주의 만찬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납니까? 우리는 테이블 위에 떡()과 잔을 놓습니다. 왜 그렇게 합니까? 주님께서 잡히시기 전날 밤에 떡()을 그렇게 드셨기 때문이며 그 떡()은 식양입니다.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이것은 식양입니다. 그러면 탁자 위에 있는 그 떡()의 색깔은 어떤 것입니까? 우리는 둥글고 큰 떡()을 놓습니다. 어떤 색깔의 떡()을 놓는지, 어떤 형태의 떡()을 놓는지는 문제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성경의 식양은 떡()입니다. 그리고 한 떡()과 한 잔입니다. 여기에 액체가 들어 있는 것이 바로 식양입니다. 이 잔이 플라스틱이든지 유리잔이든지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식양은 잔입니다. 식양은 한 떡()과 한 잔입니다.

여기 한 식양을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성경은 긍정적으로 우리가 따라야 할 식양을 제시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식양에 더하거나 빼서는 안되며 그 식양을 따라야 합니다. 그러면 악기는 어떠합니까?’라고 여러분이 말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식양이 아닙니다. 골로새서의 말씀에 의하면 이것은 집단적인 노래입니다. 우리는 서로 노래하고 주님을 향해서 노래합니다. 여기는 노래와 영적인 의미, 그리고 주님에 대한 것들이 들어있습니다. 이것은 명백한 신약의 식양입니다. 여기에 어떤 악기의 도구를 사용하는 것은 그 식양에 더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마태복음 28장에서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명령할 때 악기를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은 마음으로 영으로 노래하라고 명하셨지 악기를 가지고 하라고 명하시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지역교회는 하나님께서 디자인하시고 계획하신 대로 드러낼 책임이 있습니다.

지역교회는 하나님이 디자인하신 대로 증거를 할 의무가 있습니다. 지역교회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드러낼 책임이 있습니다.

25:8-9 “내가 그들 중에 거할 성소를 그들을 시켜 나를 위하여 짓되 무릇 내가 네게 보이는 대로 장막의 식양과 그 기구의 식양을 따라 지을지니라

지역교회도 주님께서 거하시는 곳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을 성막에 연결시키면 성막은 우선적으로 주님이 거하실 처소였습니다. 지역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말이죠. 그래서 우리는 지역교회가 하나님의 집이라고 성경에서 읽습니다. 또한 지역교회를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읽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건물()입니다. 이 모든 비유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다는 것을 우리들에게 가르쳐 줍니다.

유명한 호텔 그룹 힐튼 호텔이 있습니다. 그들이 내건 슬로건 중 하나가 이것입니다. ‘여러분이 세상에 더해지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환영합니다.’ 이 세상은 우리가 그 세상에 포함되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지역교회는 세상이 그 지역교회에 포함되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지역교회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오늘 오후에 이렇게 모인 모임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라는 것을 이해하시겠습니까? 우리는 말씀을 통해서 이익을 얻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영광이 더 우선되어야 합니다. 이 모임에서 내가 무엇을 얻는 것이 아니고 무언가를 주는 그런 곳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지역교회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그저 모임에 참석하는 것을 생각해 보기 바랍니다. 또한 우리들의 봉사를 높여서는 안됩니다.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고 하나님을 높이기 위한 것입니다.

첫 번째는 하나님의 계획과 디자인(식양), 그리고 두 번째로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습니다. 이들 중에 가장 놀라운 세 번째 특징이 되겠습니다. 지역교회는 하나님이 임재하여 계시는 곳입니다.

2:22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그래서 지역교회는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성령 안에서 되어 가야 합니다.

고전 3:16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고린도 지역교회를 말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성령이 지역교회 가운데 계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마태복음 18장에서 하신 말씀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이것은 압도적으로 놀라운 말씀입니다. 지역교회가 모일 때 그 한 가운데 하나님이 계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거기에 하나님의 성령이 거하시고 거기에 하나님의 아들이 거하십니다. 따라서 아주 특별한 모임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와 같이 늘 그분의 백성들과 함께 계시기를 원하십니다. 여러분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함께 하나님이 거하신 것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성막과 성전에서 하나님이 거하신 것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으로 이 땅에 계신 것이 하나님의 백성 가운데 하나님이 계신 것이라는 것을 이해하십니까? 이제 지역교회에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것을 이해 하시겠습니까? 따라서 이 지역교회는 주님이 계시기 때문에 특별합니다. 여러분 베드로가 베드로후서에서 변화산상에서의 기억을 말한 것을 기억하십니까? ‘거룩한 산에서라고 베드로가 말했습니다. 왜 보통 산인 그 산을 거룩한 산이라고 했겠습니까? 거기에 주님이 임재해 계셨기 때문이었습니다. 동일하게 주님이 임재하시는 지역교회도 거룩합니다. 얼마나 압도적으로 놀라운 일입니까?

중요한 것을 다시 한 번 말씀드리면 창세기 28장에서 야곱이 벧엘을 일컬어 말하기를 여기는 하나님이 계신 곳이라고 말했습니다. 벧엘에서 하나님이 야곱을 만났습니다. 왜 그곳이 거룩한 하나님의 집이 되는고 하면 하나님이 거기에 임재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야곱이 그렇게 말한 이유입니다. “주께서 분명히 이곳에 계시거늘 내가 그것을 알지 못하였도다라고 야곱이 말했습니다. 주님께서 드러내시기 전에 야곱은 주님이 그곳에 임재하심을 알지 못했습니다. 거기가 의미가 있는 곳이고 주님이 임재하신 곳이었습니다.

주님께서 여기에 계신다면 얼마나 영광스럽고 얼마나 엄위스럽습니까? 따라서 우리는 복장도 거기에 걸맞아야 합니다. 신약성경에서는 성도들이 무슨 옷을 입어야 되는지 관심을 보이고 있습니다. 어떤 옷을 입던지 여기에 주님의 권위를 나타내야 하는 것은 틀림없습니다.  또한 여러분이 말하는 언어도 거기에 걸맞아야 합니다. 또한 모임에서 우리의 태도도 주님의 임재에 걸맞아야 합니다. 저는 여러분이 집회에 늦기를 원치 않습니다. 왜냐하면 여기에 주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주님을 만나는데 합당한 태도와 시간을 지키는 것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주일 아침에 만찬을 드리러 오실 때 주님 앞에 예배 드리기에 합당한 준비를 하고 와야 된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여기에 주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내가 하는 말과 나의 행동에 그것이 영향을 주어야 합니다.

18:20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두 세 사람이라는 것은 아주 적은 무리를 가리킬 수 있습니다.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원래 원어성경에는 능동적으로 사람들이 모인 것이 아니라 외부에서 어떤 힘이 작용을 해서 그들로 모여지게 했다는 의미입니다. 외부에서 모이게 하는 그 힘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하나님의 성령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따라서 지역교회를 내가 세우는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성령이 지역교회를 이와 같이 세우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어떻게 이것을 알겠습니까? 복음을 전하면 영혼들이 성령으로 구원을 받습니다. 그 구원받은 영혼들을 성령으로 말미암아 지역교회로 모이게 합니다. 저는 신약교회를 만들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성령만이 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기억하십시오.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이 뜻은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낸다는 뜻입니다. 주님께서 육체적으로 거하시는 것이 아니며 육체적으로는 지금 하늘에 계십니다. 육체적으로는 믿는 사람들이 모여서 육체적으로 계시지 않는 주님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지역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특성을 드러냅니다. 먼저 시간에 사랑에 관한 말씀을 들었습니다만 이 사랑에 관한 특성은 지역교회가 드러내는 것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지역교회는 이와 같이 드러내어야 합니다. 내 이름으로 모인다는 것은 주님의 뜻을 순종한다는 말입니다. 다른 이름으로 모여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장로교의 이름으로 모여서는 안됩니다. 침례교의 이름으로 모여서도 안됩니다. 또한 형제들이란 이름으로 모여서도 안됩니다. 신약성경에 지역교회는 독립적으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만 모여야 합니다. 따라서 지역교회는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것을 드러내는 곳입니다.

네 번째 지역교회는 주님의 명령을 드러내어야 합니다.

고전 11:3 “그러나 나는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니 각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요 여자의 머리는 남자요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나님이시라

지역교회가 주님의 이름으로 모일 때 하나님의 질서를 나타내어야 합니다. 이 질서라는 말은 머리되심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머리입니다. 그리스도는 모든 남자의 머리입니다. 여러분들이 주권과 머리되심의 차이를 이해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주님이십니다. 그 뜻은 주님이 우리를 다스린다는 뜻입니다. 머리되심은 우리를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역할을 말하는 것입니다. 지역교회에서 형제들과 자매들은 다른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질서입니다. 3절에서 여자의 머리는 남자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여자가 남자보다 못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또한 여자가 남자와 같다는 뜻도 아닙니다. 그것은 역할 하는 기능에서 다르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남자를 그 권위 위에 두었습니다. 남자를 그 무리를 지도하게 하고 책임을 남자에게 지웠습니다. 본질적으로 남자와 여자가 같을지라도 말이죠. 예를 들면 저는 여기서 교사로 서 있습니다. 저는 학교에서는 또한 가르치는 교사의 위 일 수가 있습니다. 그분은 나를 다스리시고 나의 머리가 되시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내가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칠 때에 내 위에 있는 수장이 있다면 그 사람은 나의 머리가 됩니다. 그 위에 있는 사람은 다른 교사들에 있어서의 책임이 지워집니다. 그러나 그 사람도 단순한 인간이고 저도 단순한 인간입니다. 그 사람이 지도자이기는 해도 본질적으로는 저와 같은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지역모임 안에서 보여져야 합니다.

여러분이 왜 남자가 여자의 머리인지를 생각하실지 모르겠습니다. 디모데전서 2장에서 이것을 우리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아담을 먼저 만드시고 하와를 다음에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창조의 질서였습니다. 하나님이 아담을 인도하는 머리로 만드셨습니다. 하나님은 하와를 아담을 돕는 자로 만드셨습니다. 지역교회에서 이것이 어떻게 보여져야 되겠습니까? 두 가지 길이 있습니다. 머리되심은 문자 그대로 머리됨입니다. 남자는 모임 안에서 공적으로 활동을 합니다. 디모데전서에서 바울은 모든 남자들이 기도하기를 원한다고 말했습니다. 남자라는 말은 세계 모든 남자들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모임 내에서의 남자들을 가리킵니다. 여기에 비해서 여자들은 종용함으로 배우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성은 가리키는 일을 주님께로부터 부여받지 않았습니다. 또한 모임에서는 여자가 남자를 인도하는 입장이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이 머리됨은 문자 그대로입니다. 여러분이 저를 보시는 대로 제가 남자이기 때문에 공적으로 일을 하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1장에는 그 이상이 있습니다. 또한 머리됨은 상징적인 의미도 있습니다. 남자들은 머리에 수건을 써서 머리를 가리지 않습니다. 여자는 머리를 가립니다. 권세 아래 있는 표라고 말했기 때문에 권세와 관계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자매들이 머리에 너울을 씀으로 말미암아 권세 아래 있다는 것을 드러냅니다. 권세 아래 있는 여성임을 머리에 너울을 씀으로 나타냅니다. 남자는 머리에 쓰지 않기 때문에 그리스도가 그 권세 위에 있음을 나타냅니다. 만약 어떤 자매님이 머리에 쓰기를 거절한다면 이것은 하나님의 질서를 거역하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말하면 나는 남자답기를 원한다는 뜻이며 이것은 그리스도를 모독하는 결과가 됩니다. 오늘 오후에 이러한 하나님의 모임에서 여기에 하나님의 질서가 있는 것은 기쁜 것입니다.

지역교회는 하나님의 디자인(식양)이 있고, 하나님의 영광이 있고, 하나님의 임재가 있고, 하나님의 질서가 있고 히브리서에서는 하나님의 돌봄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13:17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 저희는 너희 영혼을 위하여 경성하기를

여기는 하나님의 돌봄이 있습니다. 여기 장로들이 인도하고 돌보기를 말하기 전에 돌봄에 관한 더 넓은 의미를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초기 1세기의 대부분의 교회들은 핍박을 받고 그들의 믿음 때문에 순교를 당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가족적으로 모이는 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사도행전 14장에서 베드로가 놓였을 때 그는 자기 집에 갔다고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리고 저녁을 먹으러 갔다고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들의 모인 무리에게 갔다고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자기 백성에게로 갔다고 기록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로 갔는데 그들은 가족과도 같기 때문이었습니다. 지역교회는 마치 이와 같습니다. 지역교회가 바로 이와 같은 말씀으로 서로라는 말로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한 예를 말씀드리면 그리스도인들은 이와 같이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회적으로 다르지만 받아들입니다. 그리고 서로간에 나누기도 합니다. 피차간에 서로 세우기도 합니다. 때때로 우리는 침체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초기의 하나님의 사람들은 서로 세웠습니다. 서로 섬겼습니다. 서로 짐을 나누어 졌습니다. 서로 누렸습니다. 때때로 힘들었지만 서로 용서했습니다. 마치 가족 같습니다. 이것이 지역교회에서 여러분이 보는 하나님의 돌봄입니다.

하나님의 지역교회에서 돌봄과 인도하심은 주로 장로들에 의해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13:17절에서 말하는 바는 그렇습니다.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이들은 장로들을 말합니다. 형제들이 저를 장로로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사도행전 20장에 따르면 하나님의 성령이 감독자를 삼았다고 말합니다.

신약성경에는 장로를 세 가지 다른 말로 표현합니다. 감독, 목자, 그리고 장로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동일한 개인을 지칭합니다. 감독은 그 무리들을 관찰하는 것입니다. 그 모임에 대해서 때로는 직접 관찰합니다. 그러나 독재자는 아닙니다. 그들은 영적으로 인도하고 충고합니다. 본을 보이면서 양들을 인도합니다. 목자는 늘 양들을 먹여야 합니다. 성경이 장로를 말할 때는 반드시 육체적인 연령이 많아야 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영적인 성숙을 말합니다. 17절을 다시 보면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왜냐하면 저희는 너희 영혼을 위하여 경성하기를 자기가 회계할 자인 것같이 하느니라다른 말로 말하면 여러분을 걱정해서 밤에 잠을 설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돌봄이 하나님의 지역교회에서 이렇게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닙니까! 저는 여러분이 장로들을 위해서 기도하기를 바랍니다. 왜냐하면 장로들은 여러분의 기도가 필요합니다.

하나님은 에스겔 34장에서 이스라엘 목자들에게 어떻게 목자들이 행해야 되는지를 말씀했습니다. 거기는 신약에서 장로들이 어떻게 행해야 되는지의 교훈이 있습니다. 이 선포를 들어 보시기를 바랍니다. 그들은 약한 자들을 강하게 했습니다. 아픈 자들을 낫게 했습니다. 그들이 상처 난 곳을 싸맸습니다. 떠나간 곳에서 데리고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찾아 나섰습니다. 그들을 이해하고 그들을 돌보았습니다. 따라서 지역교회는 하나님의 돌봄이 준비되어 있는 곳입니다.

첫째는 지역교회는 하나님의 디자인이 있고,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곳이고,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곳이고, 또한 하나님의 질서를 드러내어야 하며, 하나님의 돌봄을 나타내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제 지역교회는 하나님의 진리를 선포해야 합니다.

딤전 3:15 “하나님의 교회요 진리의 기둥과 터이니라

오늘날 기둥들은 건물들에서 그렇게 두드러진 부분이 아닙니다. 그러나 이 시기에는 기둥은 어떤 것들을 선포하고 드러내는 기능을 한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진리의 기둥과 터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진리를 가르쳐야 합니다. 단순히 기둥만이 아니고 터이기도 했습니다. 이것은 지역교회가 진리를 지켜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진리를 방어해야 합니다. 이 시대에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이 도전을 받는 때가 있었습니다. 우리는 이 진리를 방어해야 합니다. 오늘날 많은 교회들은 휴거를 말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 진리를 방어해야 합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어느 교회에 가도 관계없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역교회 진리를 이와 같이 방어해야 합니다. 우리는 진리의 기둥과 터입니다.

여러분은 정확하게 진리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16절에 진리가 무엇인지 나타나 있습니다.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 그렇지 않다 하는 이 없도다 그는 육신으로 나타난 바 되시고이 진리는 하나님이 사람이 되신 것을 말합니다.

2:41,42 여기에 네 가지 동작이 있음을 기억하십시오. 그들은 복음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 침례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지역교회에 영접이 되어 더해졌습니다. 그들은 사도의 가르침을 전혀 힘썼습니다. 사도의 가르침은 기본적으로 신약성경의 가르침을 말합니다. 그것은 특히 헌신되게 신약의 가르침을 가르치는 것을 말합니다. 중요한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이 지역교회는 네 가지 특징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첫 번째로 받아들였습니다.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서 서로 교제했습니다. 그리고 떡을 떼고 기도하기를 힘썼습니다. 영어성경에는 교제라는 말 앞에 정관사가 붙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영적인 연합체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떡을 떼는 데도, 증거하는데도 연합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들이 어떤 기초에서 연합되어 있습니다. 그 기초는 바로 사도의 가르침입니다. 그들이 믿는 것은 이 기초에 의해서 믿고 교제하는 것입니다. 왜 여러분이 가지는 이 교제에 제가 즐거이 참여하겠습니까? 왜냐하면 우리가 믿는 기초가 같기 때문입니다. 이 교제는 연합해서 드러내는 것입니다. 어떻게 이것을 드러내겠습니까? 드러내는 방법은 떡을 뗌으로써 드러냅니다. 내일 이것을 할 것입니다. 교제를 기도로 나타내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사도의 가르침의 진리입니다. 이 진리는 교제에 기초합니다. 이제 교제는 또한 모임으로 이루어집니다. 사도의 가르침을 타협하면서는 교제를 나눌 수가 없습니다. 이와 같이 지역교회에 속해 있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을 복 주시기를 바랍니다.

 

201855일 강서특별말씀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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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징검 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