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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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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부활

다니엘 럿지

우리는 두 번에 걸쳐서 지역교회에 관한 진리를 살펴 보았습니다. 우리들에게 대단히 소중하고 중요한 것이기에 이것을 굳세게 붙들어야 되는 말씀이었습니다. 사탄은 이 진리를 뒤집으려고 열심히 애를 쓰고 있습니다. 어제는 주제를 바꾸어서 십자가 죽음에 대한 주제로 보았습니다. 오늘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해서 보겠습니다. 요한복음 20, 21장도 같이 보겠습니다. 복음서에 나타난 부활에 관한 모든 것을 보고자 합니다.

28:2,7 “큰 지진이 나며 주의 천사가 하늘로서 내려와 돌을 굴려 내고 그 위에 앉았는데또 빨리 가서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고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여인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무서워 말라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리로 가라 하라

여러분이 마태복음의 부활에 관한 기록을 보게 되면 주님의 부활의 강력한 능력을 나타내는 기록임을 볼 수 있습니다. 또한 갈보리에서의 그 십자가도 주님의 강력한 힘을 나타내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에서의 외침은 그리스도께서 왕이심을 나타냅니다. 또한 부활에 있어서도 마태복음은 그분의 강력한 능력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2절에서는 큰 지진이라는 말이 나와 있습니다. 또한 주의 천사가 하늘로서 내려와 돌을 굴려 내고 그 위에 앉았는데라고 했습니다. 그것은 권위의 모습입니다. 4절에는 수직하던 자들이 저를 무서워하여라고 했습니다. 이것을 우리들에게 적용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그리스도의 그 부활의 능력에 참여한다는 것은 좋습니다.

빌립보서 3장에서 바울이 말하기를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려 하여,” 오늘날 그리스도의 부활의 능력을 아는 것이 현대 그리스도인들에게 가능합니다.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의 부활은 우리들에게 힘이 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마태는 그리스도의 부활의 능력만 말하는 것이 아니라 부활을 전하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7절과 10절에서 가서 말하라고 했습니다. 따라서 이 주제는 부활을 선포하라는 뜻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부활을 선포하고 있습니까? 이것은 그리스도인으로써 우리들의 책임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사실을 전할 책임 말이죠. 이것이 없다면 복음을 전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으면 복음전도도 없습니다.

 

16:11,14 “그들(제자들)은 예수의 살으셨다는 것과 마리아에게 보이셨다는 것을 듣고도 믿지 아니하니라그 후에 열한 제자가 음식 먹을 때에 예수께서 저희에게 나타나사 저희의 믿음 없는 것과 마음이 완악한 것을 꾸짖으시니 이는 자기의 살아난 것을 본 자들의 말을 믿지 아니함일러라

마가복음은 분명하게 주제를 말합니다. 제자들이 주님의 부활을 분명히 믿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마태복음은 주님의 부활의 능력과 부활의 전파를 말했습니다만 마가복음은 제자들의 부활을 믿지 않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제자들은 현재 이것을 기대하지 않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마가는 왜 제자들이 부활을 믿지 않은 것을 말하겠습니까? 15절입니다. “또 가라사대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고 했습니다. 복음을 온 세상에 다 전한다 할지라도 모든 사람이 다 믿는 것은 아닙니다. 심지어 제자들조차도 부활을 믿지 않았습니다.

이 대답은 17-18절에서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저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으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제자들에게 표적이 따를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표적은 복음이 실제이고 순수하다는 것을 증거하는 표적이었습니다. 물론 오늘날은 이 표적이 없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의 초기에 있었던 표적이었습니다. 그들은 교회의 기초를 놓을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 무리들에게는 사도들이 있었습니다. 오늘날은 사도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복음을 전합니다. 표적이 따릅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해도 많은 사람이 믿지 않습니다. 제가 표적을 말씀드리는 것은 기적적인 표적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삶 속에 표적이 있다는 것입니다. 복음에 대해서 믿고 전하는데 무슨 표적이냐고 여러분이 물으실지 모르겠습니다. 사랑이라는 표적이 나타날 것입니다. 여러분이 서로 사랑하게 되면 사랑으로 말미암아 너희들이 내 제자인 것을 알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믿지 않는 사람들이 우리들을 볼 것입니다. 일부는 예수 그리스도의 특성을 믿는 사람들에게서 믿지 않는 자들이 볼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전하는 복음의 특징이며 삶을 바꾸는 복음의 능력입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증거가 되는 표적입니다.

 

복음서들을 서로 비교하면 흥미롭습니다. 누가복음은 교제와 관련되는 복음을 말합니다. 주님이 부활을 약속하신 약속을 봅니다. 주님이 죽기 전에 부활하실 것이라고 이미 말씀하셨습니다.

24:6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 갈릴리에 계실 때에 너희에게 어떻게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것이 바로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7이르시기를 인자가 죄인의 손에 넘기워 십자가에 못 박히고 제 삼 일에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셨느니라또 두 사람에게 말씀하시기를

26-27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하시고 이에 모세와 및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

46또 이르시되 이같이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제 삼 일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것과

누가복음은 그리스도의 부활을 성경에 따른 부활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것을 늘 생각하도록 말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실 것을 늘 말씀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 그분 자신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누가복음은 모든 것을 하나님의 통제 아래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으며 모든 것이 하나님의 계획대로 진행된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 아침에 우리는 이 말씀을 가지고 격려를 받을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도 말이죠. 모든 것이 여전히 하나님의 계획 아래서 움직이고 있습니다.

 

요한은 부활과 관련하여 두 가지 주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첫째 요한은 부활이 사실인 것을 보는 것을 가지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20장에서 본다는 것을 13번이나 말하고 있습니다.

20:1 “안식 후 첫날 이른 아침 아직 어두울 때에 막달라 마리아가 무덤에 와서 돌이 무덤에서 옮겨 간 것을 보고

5구푸려 세마포 놓인 것을 보았으나 들어가지는 아니하였더니

6시몬 베드로도 따라와서 무덤에 들어가 보니 세마포가 놓였고

8다른 제자도 들어가 보고 믿더라

요한은 지속적으로 부활을 보는 것을 가지고 증거하고 있으며 부활이 현실인 것을 증거하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요한은 그리스도의 부활은 실제적인 역사라는 것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그 증거가 있습니다.

29절에 도마는 부활을 믿지 않던 사람이었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감사합니다. 바로 보지 못하는 자들이 우리들이기 때문에. 우리들은 제자들이 본 그러한 증거들을 보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우리들의 눈으로 부활하신 주님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분이 살아계신 것을 기록된 말씀을 통해서 보지 않고도 우리는 그분이 살아계신 것을 압니다. 우리의 삶 속에 그분이 임재해 계시기 때문에 우리는 그분을 압니다. 요한이 부활을 증거하는 것은 흥미롭습니다.

21:14 “이것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 세 번째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것이라

주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이후에 저들에게 세 번 나타나셨습니다. 요한은 주님의 나타나심이 개인적으로 나타났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개인적인 함께 하심이 제자들에게 있었습니다. 이 세 번째가 제자들에게 나타났습니다. 20장에서는 제자들이 모여 있는 가운데 나타나셨다면 그들이 유대인을 두려워해서 모인 가운데

20:19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제자들이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평안으로 상황을 바꾸셨습니다. 20절에는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고 했습니다. 두 번째 나타나심은 여기에 도마도 있었습니다.

28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라고 도마는 말했습니다. 또한 믿지 않는 도마를 믿게 만드시고 예비하는 자로 만드셨습니다.

세 번째 나타나신 것은 21장에 갈릴리 해변가에서 나타나셨습니다. 밤새도록 고기를 잡았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했습니다. 주님의 말씀에 의지해서 그물을 내렸더니 153마리나 잡았습니다. 여기는 열매 없는 삶에서 열매 있는 섬김으로 바꾸셨습니다. 주님께서 이와 같이 세 번 개인적으로 직접 나타나셨습니다.

다시 한 번 여러분을 격려드리고자 합니다. 주님께서 현재 하늘에 계신다 할지라도 오늘날 우리들에게 동일하게 하실 수가 있으시며 두려움을 평강으로 바꾸신 것처럼 도마처럼 믿지 않는 상태를 믿는 상태로 바꾸어 예배자로 만드시는 것처럼 또한 우리의 열매 없는 봉사에서 열매 있는 봉사의 삶으로 바꾸실 수 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우리들의 모든 필요를 아십니다. 그분은 우리의 대제사장이십니다. 이 분은 여러분의 모든 필요를 채우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이러한 주님 때문에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를 드립니다.

 

이제 20장의 구절 구절을 더 구체적으로 보겠습니다.

1 안식 후 첫날 이른 아침 아직 어두울 때에 막달라 마리아가 무덤에 와서 돌이 무덤에서 옮겨 간 것을 보고 2 시몬 베드로와 예수의 사랑하시던 그 다른 제자에게 달려가서 말하되 사람이 주를 무덤에서 가져다가 어디 두었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겠다 하니 3 베드로와 그 다른 제자가 나가서 무덤으로 갈새 4 둘이 같이 달음질하더니

주의할 점은 여기에 둘이 같이 달음질 하더니는 대단히 중요한 표현입니다. 베드로는 주 예수님을 부인했습니다. 요한은 십자가 옆에 서 있었습니다. 이 둘이 같이 달려갑니다. 이것은 영적인 달음질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여러분이 성경말씀에 관심을 갖고 있을 것입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9장에서 바울이 상을 위해서 달음질하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영적으로 달음질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그리고 함께 달음질하는 것은 더욱 중요합니다.

5 구푸려 세마포 놓인 것을 보았으나 들어가지는 아니하였더니

요한이 먼저 무덤에 왔습니다.

6 시몬 베드로도 따라와서 무덤에 들어가 보니 세마포가 놓였고 7 또 머리를 쌌던 수건은 세마포와 함께 놓이지 않고 딴 곳에 개켜 있더라 8 그 때에야 무덤에 먼저 왔던 그 다른 제자도 들어가 보고 믿더라 9 저희는 성경에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신 말씀을 아직 알지 못하더라 10 이에 두 제자가 자기 집으로 돌아가니라

20장 첫 번째 부분은 10개 구절로서 무덤을 조사하는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11절에서 18절까지는 예수님께서 마리아에게 처음 나타나신 것을 볼 것입니다.

11 마리아는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더니 울면서 구푸려 무덤 속을 들여다보니 12 흰 옷 입은 두 천사가 예수의 시체 뉘었던 곳에 하나는 머리 편에, 하나는 발 편에 앉았더라 13 천사들이 가로되 여자여 어찌하여 우느냐 가로되 사람이 내 주를 가져다가 어디 두었는지 내가 알지 못함이니이다 14 이 말을 하고 뒤로 돌이켜 예수의 서신 것을 보나 예수신 줄 알지 못하더라 15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 하시니 마리아는 그가 동산지기인 줄로 알고 가로되 주여 당신이 옮겨 갔거든 어디 두었는지 내게 이르소서 그리하면 내가 가져가리이다 16 예수께서 마리아야 하시거늘 마리아가 돌이켜 히브리 말로 랍오니여 하니 (이는 선생님이라) 17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만지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못하였노라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 하신대 18 막달라 마리아가 가서 제자들에게 내가 주를 보았다 하고 또 주께서 자기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르니라

첫 번째 부분인 1-10절까지를 보겠습니다. 여기에 세 가지 다른 헬라말이 사용된 것을 주목해야 되겠습니다. 요한이 본 것과 베드로가 본 것에 관한 것입니다. 5절에서 구푸려 세마포 놓인 것을 보았으나여기서 요한은 재빠르게 그냥 세마포 놓인 것을 보았습니다. 베드로는 무덤에 들어갔는데 세마포가 놓였고로 되어 있습니다. 요한은 세마포를 지나쳐서 보았다는 뜻이고 베드로는 세마포를 주목해서 보았다는 뜻입니다. 요한처럼 휙 보고 지나간 것이 아니라 베드로는 자세히 들여다 보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8절에서는 그 다른 제자도 들어가 보고 믿더라그 다른 제자는 요한입니다. 요한은 무덤 안에 들어갔습니다. 그는 보고 믿었습니다. 여기는 보고서 믿는 것이었습니다. 베드로도 보았습니다. 요한은 지나쳐 보았고 베드로는 주목하여 보았습니다. 요한은 그런 다음에 무덤에 들어가서 보고 믿었습니다. 이것은 요한을 믿게 한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무덤 안에는 세마포가 가지런히 놓여있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깊은 관계가 있습니다.

19장은 우리들에게 말하기를 요셉과 니고데모는 세마포를 가지고 주님의 시신을 쌓습니다. 요한이 무덤 안에 들어갔을 때 요셉과 니고데모가 싼 세마포를 그대로 보았습니다. 예수님의 몸을 쌌던 그대로 있었습니다. 그러나 거기는 몸이 없었습니다. 어쩌면 여러분은 어떤 사람들이 주님의 시신을 훔쳐갔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만약 누군가가 예수님의 몸을 훔친다고 하면 세마포도 가져갔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아주 비싼 것이고 많은 돈을 드려서 산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세마포를 찢고 시신을 끄집어 내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요한은 세마포를 쌌을 때 그대로인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주 예수님은 거기에 없었습니다. 머리에 두었던 수건조차도 함께 놓이지 않고 딴 곳에 개켜있었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주님이 내가 다 이루었다고 하신 말과 맞물려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날 아침에 부활하신 것입니다. 여기는 한 가지 설문만 가능합니다. 주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셨을 때 몸 그대로 빠져 나오신 것입니다. 무덤 입구에 돌을 가지고 막아 놓았을지라도 주님은 거기서 나오시는 분이신 것입니다. 천사들이 돌을 옮겨 놓았습니다. 예수님이 무덤에서 나오시며 옮기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돌을 옮기기 전에 예수님은 이미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왜 천사가 무덤에 돌을 옮겼는고 하면 우리들이 볼 수 있도록 옮긴 것입니다. 우리는 그 안에 주님이 게시지 않는 것을 천사들이 돌을 옮겨 놓았기 때문에 볼 수 있습니다. 요한은 거기에 들어가서 이 모든 것을 깨달았고 믿었습니다.

여기서 나사로와 예수님을 비교해 보기 바랍니다. 예수님이 나사로를 무덤에서 살려내신 것을 아실 것입니다. 나사로가 무덤에서 나올 때 시신을 싸는 천으로 쌓인채 무덤에서 나왔습니다. 그의 얼굴은 수건으로 쌓였습니다. 주님께서 나사로를 죽음에서 불러냈습니다만 그러나 나사로는 다시 죽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죽은 자 가운데서 예수님이 부활하셨을 때 나사로는 다시 죽을 것이기 때문에 천을 가지고 나왔지만 주님은 천을 남겨두었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영원히 죽지 않는 몸으로 부활했기 때문입니다. 요한은 이 사실을 믿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것을 정말로 믿으시는지 어떤지를 제가 여러분들에게 들어보고 싶습니다. 우리들은 살아계신 주님을 모시고 있습니다. 무덤을 정복하신 분이십니다. 이 사망을 패배시키신 분이십니다. 주님을 믿는 자들에게 생명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오늘날 하늘에 영광스러운 분이 계십니다. 그분은 우리들을 대신하여 나타내는 위치로 하나님 아버지 앞에 계십니다. 주님께서 거기 계신 그 사실이 주님을 따르는 자들이 거기 있을 것이라는 보장입니다. 히브리서 2장에서는 많은 아들을 이끌어 영광에 들어가게 하시는이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우리도 어느 날 하늘의 영광에 갈 것입니다. 그리고 주 예수 그리스도와 영원히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앞 부분에서 무덤을 조사했을 뿐 아니라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습니다. 처음으로 부활해서 나타난 주님을 만난 사람은 여성으로 막달라 마리아였습니다. 왜 막달라 마리아에게 먼저 나타나셨느냐고 여러분에게 질문을 드립니다. 이것은 놀라운 것입니다. 유대인들의 법률에 따르면 법정에서 여성들은 증인으로 설 수 없습니다. 그런데 부활하신 주님이 맨 먼저 만난 사람은 여성이었습니다. 여성의 증거는 법정에서는 용납되지 않습니다. 따라서 바울이 고린도전서 15장에서 부활의 증인들을 언급할 때 여성들은 한 명도 없습니다. 부활을 증거할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남자였습니다. 왜 그런데도 주님은 첫 번째로 여인을 만났겠습니까? 막달라 마리아가 전적으로 주님께 헌신했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주님을 참으로 사랑했습니다. 그것을 증명해 보겠습니다.

1절에 안식 후 첫날 이른 아침 아직 어두울 때에성경시간으로 아침 삼시와 육시 사이 이른 시간입니다. 아직 어두울 때에 예루살렘 바깥으로 나오는 것은 대단히 위험한 시간입니다. 예루살렘 주변에는 매우 위험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와 같이 무덤으로 주님을 만나러 갈만큼 주님을 사랑했습니다. 그리고 11절에서 마리아는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더니 울면서 구푸려 무덤 속을 들여다보니” 10절에서 베드로와 요한은 집으로 돌아갔지만 마리아는 무덤에 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성경에서 14번 언급되고 있습니다. 14번의 대부분은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과 관계가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과 관련된 여인은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2절에 사람이 주를 무덤에서 가져다가

13절에 사람이 내 주를 가져다가

15절에서 동산지기인 줄로 알고 가로되 주여(그를) 당신이 옮겨 갔거든

막달라 마리아의 마음 속에는 한 분만 있었으며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지를 그녀는 알았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자기가 사랑하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볼 수 있었습니까? 막달라 마리아가 전적으로 주님께 헌신 된 사실을! 저는 막달라 마리아에게 주님이 제일 먼저 나타나신 것은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왜 막달라 마리아가 이렇게 예수님을 사랑했습니까? 막달라 마리아는 그렇게 많은 죄가 사함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막달라 마리아가 일곱 귀신이 들렸던 것을 기억하십니까? 그 일곱 귀신이 예수님으로부터 쫓겨남을 당했습니다. 이제 그녀는 얼마나 주님이 귀한 분인지를 알았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주님만이 유일한 주님임을 알았습니다. 만약에 예수님이 가버리신다면 막달라 마리아는 아무것도 아니었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막달라 마리아처럼 헌신된 가운데 있습니까? 우리는 그렇게 되어 있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도 막달라 마리아처럼 그렇게 용서하셨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그렇게 많은 죄가 사함을 받았습니다. 우리도 그와같이 주님께 빚을 진 가운데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께 그렇게 헌신되어 있는지 어떤지가 의심스럽습니다. 우리가 주님께 기도하기 위해서 막달라 마리아처럼 이른 아침에 나가는지 모르겠습니다. 또한 일찍 주님의 말씀을 읽기 위해서 주님 앞에 나가는지 모르겠습니다. 마리아는 바로 이와 같이 했습니다. 주님은 바로 막달라 마리아의 주님이셨습니다.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께 어떻게 우리의 사랑을 보이겠습니까? 주님은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사랑한다면 주님의 말씀을 순종할 것입니다.

16예수께서 마리아야 하시거늘

주님께서는 주님 자신의 양을 이름으로 부르셨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동산지기인줄로 알지 않고 주님으로 알았습니다. 주님께서 그녀의 이름을 친히 부르심으로 알았습니다. 주님의 음성을 알아듣고 주님을 보았습니다. 이사야 43장에서 말하기를 우리 각자를 구원하시고 각자의 이름을 부른다고 말씀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 각자를 각각의 이름으로 아신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닙니까?

마리아가 돌이켜 히브리 말로 랍오니여 하니

유대인들 그 시대에 선생을 향해서 보통 랍비라고 부릅니다. 랍오니 또는 랍오나이라고 합니다. 랍오니여라는 말은 위대한 선생이라는 뜻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야 말로 유일하게 랍오니여라고 불림 받을 수 있는 유일한 위대한 선생입니다. 유대인 가운데 참으로 유일한 선생은 하나님 자신이십니다. 여기서 마리아는 부활하신 주님을 향해서 그 명칭인 랍오니여라는 말을 사용했습니다. 이것은 통하여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을 했습니다.

17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만지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못하였노라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뜻은 나를 가지 못하도록 계속 붙들고 있지 말라는 뜻입니다. 마리아는 마치 예수님을 보내지 않겠다는 뜻으로 붙들고 있었습니다. ‘더 이상 주님을 가지 않게 하겠습니다라는 의미로 주님을 붙잡았습니다. 마리아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이 땅에 그대로 붙들어 두고 싶었습니다. 그런 주님께서는 아버지께로 올라가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이 세상에 묶여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반드시 하늘로 올라 가셔야 합니다.

중요한 것을 하나 더 말씀드리면 주님께서는 지금 하늘의 영광 가운데 계십니다. 주님께서 이 땅에 계신 것이 더 좋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을 안다고 생각했고 그렇게 있기를 원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부활하신 그 몸을 가지고 이 땅에 계시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막달라 마리아에게 더 좋은 것이 무엇인지를 말씀하고 계십니다. 하늘에 계신 것이 더 좋은 것이었습니다. 하늘에서 우리의 목적의 중심이 되어 계시는 것이 더 좋다는 의미입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이 땅에 몸으로 게실 때는 어느 곳에 계시든지 한정된 곳에 계셨습니다. 하늘 영광 가운데 계실 때는 영적으로 전세계 주님의 사람들과 어디든지 함께 계실 수가 있습니다. 이것을 주님께서는 마리아에게 가르치시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내가 아버지께로 가는 것이 마리아 너에게 더 좋은 것이라고 말이죠. 물론 하늘로 가시면 성령을 보내실 것입니다. 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함께 계신 것을 압니다.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주님께서는 최초로 제자들을 내 형제들이라고 부르셨습니다. 곡식 하나가 땅에 떨어져서 죽지 아니하면 열매를 맺지 못하지만 죽으면 열매를 맺는다고 했습니다. 주님께서는 열매가 맺힌 그 열매를 내 형제들이라고 부르셨습니다. 주님께서는 많은 형제들 가운데 처음 난 분으로 가장 위에 계심이 틀림없습니다. 은혜 가운데 그 제자들을 내 형제들이라고 부르셨습니다. 우리는 주님을 향해서 내 형제라고 결코 부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와는 너무나도 다른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은혜가운데 은혜로 우리를 향하여 내 형제들이라고 부르십니다. 그리고 말씀하시기를 내가 내 아버지께로 올라간다고 하셨습니다. 아버지께로 올라간다고 사실 말씀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께로 올라간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주님께서는 우리와는 다르다는 면도 보이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그냥 아들들이고 주님은 하나님의 그 아들이십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라고 말씀을 나누어 하셨습니다. 그리고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주님 자신과 우리를 구분하셨습니다. 우리는 인자들이고 주님은 그 인자입니다. 그러므로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것이 놀라운 일이 아닙니까? 이 진리를 우리가 누리고 기뻐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님께서 말씀에 복주시기를 바랍니다.

201857일 강서모임 특별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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