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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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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21

다니엘 럿지

오후 시간에 실제적인 것을 말씀 드리면서 고기 잡는 법과 주님을 따르는 법을 말씀드리겠습니다.

1 그 후에 예수께서 디베랴 바다에서 또 제자들에게 자기를 나타내셨으니 나타내신 일이 이러하니라 2 시몬 베드로와 디두모라 하는 도마와 갈릴리 가나 사람 나다나엘과 세베대의 아들들과 또 다른 제자 둘이 함께 있더니 3 시몬 베드로가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 하매 저희가 우리도 함께 가겠다 하고 나가서 배에 올랐으나 이 밤에 아무것도 잡지 못하였더니 4 날이 새어갈 때에 예수께서 바닷가에 서셨으나 제자들이 예수신 줄 알지 못하는지라 5 예수께서 이르시되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대답하되 없나이다 6 가라사대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얻으리라 하신대 이에 던졌더니 고기가 많아 그물을 들 수 없더라 7 예수의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베드로에게 이르되 주시라 하니 시몬 베드로가 벗고 있다가 주라 하는 말을 듣고 겉옷을 두른 후에 바다로 뛰어내리더라 8 다른 제자들은 육지에서 상거가 불과 한 오십 간쯤 되므로 작은 배를 타고 고기 든 그물을 끌고 와서 9 육지에 올라 보니 숯불이 있는데 그 위에 생선이 놓였고 떡도 있더라 10 예수께서 가라사대 지금 잡은 생선을 좀 가져오라 하신대 11 시몬 베드로가 올라가서 그물을 육지에 끌어올리니 가득히 찬 큰 고기가 일백쉰세 마리라 이같이 많으나 그물이 찢어지지 아니하였더라 14 이것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 세 번째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것이라

1-14절까지는 바닷가에 서시다라는 주제의 말씀을 드립니다. 바닷가에 서셔서 고기잡는 것을 가르치셨습니다. 또한 양들을 먹이는 것을 가르치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을 따라가는 것을 가르치셨습니다. 이것이 여러분에게 도움이 되실 것이라 생각합니다.

15절 저희가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가라사대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

16절 두 번째 가라사대 … 17절 세 번째 가라사대 주여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양을 먹이라

보통 학자들은 제자들에게 세 번째 나타남이라고 말합니다. 주님께서는 마리아에게 나타나시고,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요한은 여기서 무리 가운데 나타나신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앞 시간에 잠시 말씀을 드렸습니다만 주님께서 첫 번째는 제자들이 방 안에 있는 때 나타나셨지만 그때는 도마가 거기에 없었습니다. 두 번째 나타나신 그 방에 도마가 있었습니다. 세 번째는 이와 같이 갈릴리 디베랴 바닷가에서 나타나셨는데 우리가 방금 읽은 21장입니다. 여기서 여러분이 하나님의 경륜적인 그림을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요한복음은 하나님의 전체적인 경륜을 보이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처음에 제자들이 모인 그곳에 나타나셨을 때에는 그것은 교회시대 모습을 그림자로 나타내고 있습니다. 주님이 그들 가운데 계셨습니다. 두 세 사람이 주님의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주님이 거기에 계신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여기는 도마가 그 자리에 없었습니다. 도마는 믿지 않는 이스라엘 사람들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도마는 주님의 양손과 옆구리에 손가락을 넣어보지 않고는 믿지 않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 나타나실 때에는 그 자리에 도마가 있었습니다. 이 때 도마는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라는 놀라운 고백을 했습니다. 이것은 주님이 지상 재림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는 그림자입니다. 지금 현재 이스라엘 백성들은 마음이 굳어있습니다. 주님께서 이 세상으로 바로 오시기 직전에 그들이 주님 앞에 고백을 할 것입니다. 도마처럼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할 것입니다. 이것은 스가랴가 예언하는 말씀과 같습니다. 주님이 나의 하나님입니다. 그러한 고백이 있을 것입니다.

요한복음 21장에서는 주님이 바닷가에 서신 것을 보였습니다. 이것은 교회시대의 그림자가 아닙니다. 또한 회복되는 이스라엘의 그림자도 아닙니다. 이것은 영광스러운 천년왕국의 다스림의 그림자입니다. 주님께서는 이 바닷가에 서셔서 명령을 내리십니다. 그물을 내렸을 때 153마리의 큰 물고기가 들어왔습니다. 이것은 천년왕국 통치의 크게 축복된 모습입니다. 이러한 것들은 모두 비교하면 흥미롭습니다. 이 부분에 대한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이 장에서는 주님의 부활을 나타냅니다. 그들을 위한 준비를 하시며 새벽에 바닷가에 서셨습니다. 새벽이기 때문에 머지 않아 주님이 오실 것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두 가지를 가르치셨습니다.

1-14절까지는 주님을 전적으로 의지해야 된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주님을 의뢰하고 전적으로 기대어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15절부터 마지막까지 보게 되면 주님에게 헌신할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베드로에게 물으시기를 나를 사랑하느냐?”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공중에 오실 때까지 우리는 모든 것에서 주님을 의지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만약에 우리가 이 두 가지를 갖고 있다면 주님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입니다.

첫 번째로 주님을 의지하는 법을 보겠습니다.

3시몬 베드로가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

많은 사람들이 물고기 잡으러 가는 베드로를 고기를 잡지 못한 것 때문에 비판합니다. 또한 옛날 생활로 돌아갔다고 비판합니다. 그 뒤에 모든 것을 버려두고 주님을 따랐지만 그는 아무것도 못 잡았다고 비판합니다. 그러나 여기는 크게 하나 잘못이 있는데 여러분이 동의하지 않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는 베드로가 고기 잡으러 가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만약 여기 있었다면 저도 고기를 잡으러 갔을 것입니다. 나는 생선을 좋아합니다. 왜 베드로가 고기를 잡아야 되는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첫 번째로 그는 주님의 명령을 순종했습니다. 마가복음 16장에서 주님께서 베드로와 그분의 제자들에게 나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라고 명하셨습니다. 그리고 천사를 통해서도 베드로에게 갈릴리로 가라고 전했습니다. 따라서 베드로는 갈릴리에 있습니다. 또한 주님에 대해서 개인적으로 회복된 상태였습니다. 여러분은 베드로가 주님을 부인한 것을 알고 있을 것입니다. 마리아에게 나타난 이후에 베드로와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에게 주님이 차례로 나타나셨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이미 개인적으로 베드로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주님에 대해서 이미 베드로는 개인적으로 회복된 상태였습니다. 요한은 주시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주님 앞에 뛰어들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렇게 하지 말아야 된다고 말합니다만 왜 고기를 잡지 않고 뛰어드느냐고? 그들은 양식 때문에 고기를 잡아야 했습니다. 그리고 생활비 때문에 고기를 잡아 시장에서 팔아야 했을 것입니다.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베드로가 고기를 잡지 않았다면 주님은 베드로에게 나타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저는 다른 사람들이 고기를 잡는 것을 감사합니다. 저는 실제 고기를 잡는 것을 말씀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여러분이 영적으로 고기를 잡으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에게 복음을 전파하는 것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리는 개인적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한국에서는 어떤지 모르겠습니다. 영국에 대해서 말씀드리면 많은 그리스도인들과 많은 지역교회가 복음을 전하려 하지 않고 복음을 전하지 않습니다. 오늘 제가 여러분에게 말씀을 드리면서 여러분이 할 수 있는대로 기회를 잡으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의 일상생활에서 또한 지역교회로 모일 때에 모든 기회를 복음을 전하는데 사용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지역교회로 모여 복음을 전할 때에 믿는 사람들은 여러분과 함께 할 것입니다. 또한 두 세 사람이 모이는 모임일지라도 다른 사람들이 우리가 여러분들의 모임에 동참해도 되겠느냐고 말할 것입니다. 지역교회들의 연합된 전도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도행전 2장에서 앞 시간에 그러한 모습을 보았습니다.

3배에 올랐으나 이 밤에 아무것도 잡지 못하였더니

주님께서는 중요한 가르침을 가르치고 계십니다. 요한복음 15장에서 교훈이 나옵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거기서 말씀으로 하셨습니다만 여기서는 실제적으로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복음을 전하러 나가지만 나의 도움이 없이 복음을 전하지 말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주님은 육체적인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 관한 것을 원리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오늘날도 여전히 주님의 도움이 필요하고 주님을 의지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15장에서 너희가 나에게 붙어있지 않으면 조금밖에 열매를 맺지 못한다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나에게 붙어있지 않으면 조금은 할 수 있다고도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나에게 붙어 있지 않으면 너희가 아무 것도 못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요한계시록 3장에 있는 라오디게아 교회의 문제였습니다. 그들은 주님에 대해서 미지근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스스로 부족한 것이 없다고 말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주님의 도움 없이 그들 스스로 섬길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할 수 없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없이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기도에 왜 그렇게 많은 시간을 사용하는가의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주님을 의지하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서 기도집회를 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도움 없이는 한 마리도 복음서에서 잡힌 적이 없습니다. 이들은 고기를 잡는 베테랑이자 전문가였습니다. 모든 고기는 주님으로 말미암아 잡히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5장에서 그물로 고기를 잡든, 또 입 속에 동전이 들어있는 고기를 낚시로 잡든, 또한 153마리의 고기가 잡히는 것이든 주님께서 모두 잡히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주님의 도움 없이 고기를 잡는 것은 아무런 효과가 없다는 것을 가르치셨습니다. 우리는 못하지만 주님께서는 하실 수 있습니다. 따라서 주님은 우리를 사용하셔서 복음을 전하게 하십니다. 왜냐하면 구원은 주님께 속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5예수께서 이르시되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주님께서는 모든 질문의 대답을 이미 알고 계십니다. “없나이다왜 주님께서는 아시면서 질문을 하셨습니까?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이미 알고 계십니다. 그들이 고기를 잡는 것이 무엇인지를 인식시키기 위함이었습니다. 물론 그들이 못하는 것은 틀림없습니다. 이 질문을 하신 것은 그들이 주님 앞에 고백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들의 약함을 용기를 내어서 고백하도록 격려하시기 위해서 질문하셨으며 그리고 그들의 필요를 알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만약에 모임에서 그리스도인들이 필요를 알고 연약함을 하나님 앞에 고백하는 것은 좋습니다. 여러분은 일곱 교회 가운데 회개하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을 기억할 것입니다. 거기는 죄인들이 회개하는 것이 아니라 성도들이 주님 앞에 엎드려서 회개하는 것입니다.

4예수께서 바닷가에 서셨으나 제자들이 예수신 줄 알지 못하는지라

저는 예수님이 바닷가에 서신 것을 좋아합니다.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통제하고 계십니다. 바닷가는 상황이 바뀌는 경계선입니다. 파도가 나왔다 들어갔다 하는 경계입니다. 끊임없이 변하는 경계선에 주님이 서 계십니다. 여기에 일어나는 모든 일을 통제하시는 분이 서 계십니다.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은 주님이 말씀하신대로 그물을 던졌습니다. 너무 고기가 많아서 그물을 들 수 없더라고 했습니다. 무엇이 바뀌었습니까? 밤새도록 고기를 못 잡았습니다. 하루 종일 잡아도 못 잡았습니다. 여기에 변화가 생겼습니다. 주님의 명령을 따라 고기를 잡았습니다. 주님을 의지하면서 고기를 잡았습니다. 주님의 명령에 따라 직접 고기를 잡았습니다. 제자들의 고기가 없는 그 상황이 변했습니까? 그들이 동일한 배를 사용했습니까? 동일한 그물을 사용했습니까? 고기를 잡던 그 자리에서 고기를 잡았습니까? 상황은 동일한데 무엇이 다릅니까? 여러분이 복음을 전해도 사람들을 얻지 못할 것이라는 말을 들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면서 복음을 전하는 방법을 바꾸어 보면 얻을 수도 있을지 모른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계속 메시지를 바꾸어 가며 전하면 사람들이 구원받을지 모른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좋아하는 말로 복음을 전하면 사람들이 바뀔지 모른다고 말합니다. 복음을 전하는 자를 바꾸어 보면 사람들이 구원받을지 모른다고 말합니다. 저는 전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이 방법은 여전히 동일했습니다. 그러나 이 고기 잡는 것은 주님과 함께 했습니다.

여러분들에게 격려를 드리고자 합니다. 그들은 이제 주님의 말씀에 의한 힘을 갖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복음에 관한 명령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충성스럽게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우리가 주님의 명령에 따라 복음을 전하면 주님께서는 그 복음에 복 주실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예를 하나 말씀드리겠습니다.

사도행전에서 늘 성령의 명령에 따라 복음을 전했습니다. 주님께서 정해주신 물에서 영적인 고기를 잡았습니다. 8장에서 빌립을 생각해 보면 그는 큰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가자로 내려가는 길로 가라고 성령이 명령했습니다. 여러분 말이 안되는 것처럼 보이지 않습니까?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거기에 이디오피아 내시를 준비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 받고 침례를 받았습니다. 그 사람에게 어떻게 복음이 전파될지를 하나님만 아셨습니다. 따라서 빌립은 주님이 지정한 영적인 물에서 복음을 전한 이유입니다.

그리고 사도행전 13장은 어떻습니까? 바나바와 바울은 복음을 전하러 나갔습니다. 장로들은 바나바와 바울을 전도를 위해서 따로 세웠습니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장로들이 따로 세웠다고 말하지 않으며 하나님의 성령이 그들을 구별해서 세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와같이 성령이 직접 바울과 바나바에게 복음을 전할 것을 명했습니다. 바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그런 것입니다. 성령이 복음을 전하도록 인도한다는 것을 말이죠. 여러분은 복음을 전하기를 힘써서 계속하기를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께서 십자가에서 못박히신 것을 계속 전하기를 바랍니다. 주님께서 지정한 방식대로 하는 물이라면 축복들이 나올 것입니다. 밤새도록 아무것도 잡지 못했던 것처럼 때때로 절망적인 결과가 나올 때도 있을 것입니다. 여기에 고기를 잡았는데 153마리가 잡혔습니다. 이것은 자기들이 한 것이 아니라 주님이 하신 것을 알았습니다. 요한이 주시라고 말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을 때때로 아주 밑바닥까지 끌어내리십니다. 주님을 의지한다면 그러한 가운데서도 틀림없이 복이 임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기억하기를 바랍니다.

10지금 잡은 생선을 좀 가져오라

그들은 고기를 잡았습니다. 주님께서는 이미 생선을 갖고 계셨지만 잡은 생선을 조금 가져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은혜로 말미암아 그들의 수고에 보상하셨습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할 때 이와 같이 동일하게 하실 것입니다.

이 장 후반을 마지막으로 보겠습니다. 앞 부분에서는 고기 잡는 것과 주님이 바닷가에 서신 것을 보았습니다. 우리는 주님을 의지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이제 주님께서 바닷가를 거니시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몇 가지 실패에서 교훈을 얻습니다. 우리는 베드로 같은 그런 실수를 하지 않기를 원합니다. 가능하면 베드로가 한 실수를 피하여 주님을 섬기고자 합니다. 그래서 이제는 주님께 헌신하는 것을 배울 필요가 있습니다.

15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무슨 말씀입니까? 9절에서는 숯불이 있었습니다. 숯불이 왜 중요하겠습니까? 신약성경 또 다른 곳에 숯불이 있습니다. 대제사장 집에서 불을 쬐던 숯불이 있었습니다. 바로 그 숯불에서 베드로는 세 번이나 주님을 부인했습니다. 이 바닷가에서 또 다른 숯불 옆에 베드로를 인도하셨습니다. 여기는 마지막 숯불로서 베드로의 회복의 숯불입니다. 베드로의 회복의 네 부분이 있습니다. 이전에 베드로가 주님을 세 번 부인하는 실패를 했다 할지라도 베드로를 위해서 기도하셨고 베드로에게 경고하셨습니다.

첫 번째 회복의 단계는 누가복음 22장에서 너를 위해서 이미 기도하였다고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베드로가 실패를 해도 이미 기도하셨고 또한 경고하셨습니다. 대제사장이신 주님은 지금도 우리를 위해서 그렇게 하십니다. 우리가 실패할 가능성에 대하여 경고하십니다. 또한 말씀을 통해서 경고하십니다. 이미 기도하셨고 우리를 위해서 지금도 기도하십니다.

두 번째 단계도 누가복음 22장에서 예수님을 베드로가 부인한 후에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돌아보시니라고 했습니다. 주님의 시선과 맞춘 다음에 베드로는 나가서 심히 통곡하였다고 했습니다. 베드로는 유감스럽게 생각하고 자기 잘못을 회개했습니다. 사실은 주님이 베드로를 보는 것이 아니라 베드로가 주님을 먼저 봤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실패하지 않았어야 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주님과 시선을 맞추는 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우리가 만약에 실패한다면 그리스도께 그렇게 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실패를 주님 앞에 고백해야 합니다. 베드로가 했던 것처럼 우리의 실패를 회개해야 합니다.

베드로 회복의 세 번째 단계는 베드로가 혼자 있을 때 주님이 개인적으로 베드로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것은 주님이 부활하신 이후에 세 번째 나타나심일 것입니다. 첫 번째는 막달라 마리아와 또 다른 여인에게 나타나셨고 그 다음에 베드로에게 나타나셨습니다. 베드로의 네 번째 회개의 장면은 여깁니다. 이것은 개인적인 회복이 아니라 공적인 회복이었습니다. 베드로는 공적으로 주님을 세 번 부인했습니다. 그는 세 번이나 부인했습니다. 제자들이 있는 이 공적인 자리에서 베드로는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을 지금 세 번 고백하려고 합니다. 세 번 주님을 부인했고 세 번 주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합니다.

15요한의 아들 시몬아

주님은 때때로 베드로라고 부르셨습니다. 마태복음 16장의 경우에는 복되도다 요한의 아들 시몬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늘에 있는 아버지께서 너에게 계시했다고 말씀했습니다. 거기서는 베드로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했습니다. 여기서 그 장면을 베드로에게 떠올리게 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6장과 똑같이 요한의 아들 시몬아라고 부르셨습니다. 베드로에게 새로운 고백을 하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하지 않았습니까? 이제 나를 사랑하느냐?”고 주님이 물으셨습니다.

15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보다는 무엇을 말합니까? 고기도 아닐 것입니다. 나는 제자들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사람들(제자들)보다왜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까? 마가복음 14장에는 다른 제자들보다 자기가 낫다는 식으로 말했습니다. “모두 주님을 버릴지라도 나는 버리지 않겠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베드로는 다른 제자들보다 자신이 더 영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다른 제자들보다 더 강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여기서 주님께서는 베드로가 그렇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하셨습니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라고 했습니다. 베드로는 다른 제자들보다 더 헌신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여러분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면서 교만이 얼마나 큰 문제인가를 상기시켜드려도 되겠습니까? 우리는 다른 사람보다 낫다고 결코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보다 헌신적이라고 결코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성경은 선 줄로 아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 경고합니다. 넘어지지 않도록 주의하라. 베드로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세 번 베드로의 사랑에 대해서 질문하셨습니다. 여러분이 아는 것처럼 헬라말의 차이가 어떤지 잘 모르겠습니다만 아가페라는 용어와 필레오라는 용어가 있습니다.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세 번 사랑을 말씀하시면서 두 번까지는 아가페라는 단어를 사용하셨습니다. 세 번째는 필레오라는 단어를 사용하셨습니다. 베드로는 세 번 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아시나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베드로는 세 번 다 필레오라는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아가페 사랑과 필레오 사랑은 어떻게 다르겠습니까? 어떤 사람은 아가페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말합니다. 필레오 사랑은 인간적인 사랑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너무 지나치게 단순합니다.

요한복음에서는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신다는 말들을 듣습니다. 요한은 그 동일한 사랑을 한 번은 아가페, 한 번은 필레오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요한은 예수님이 사랑하시는 제자였습니다. 때때로 그 동일한 사랑을 한 번은 아가페, 한 번은 필레오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물론 단순히 말하면 아가페는 하나님의 사랑이고 필레오는 인간적인 사랑입니다. 아가페 사랑은 훨씬 더 뛰어난 것과 대비되는데 왜 그렇습니까? 필레오 사랑은 친구들 사이에 자연적이고 감정적인 것을 보통 나타냅니다. 그리고 아가페 사랑은 사랑의 선택을 말합니다. 이것은 나의 마음에서 나오고 나의 의지에서 나오는 사랑을 나타내기도 합니다. 다른 사람을 위해서 내가 희생이라는 것을 선택하는 것도 아가페라는 단어에서 나옵니다. 그리고 나를 위해서 선택하는 것도 거기에서 나올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성경은 네 원수를 사랑하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은 필레오 사랑으로는 전혀 표현할 수 없는 것입니다. 내 대적을 향해서 나의 자연적인 감정의 사랑을 나타낼 수 없습니다. 성경은 아가페라는 사랑으로 네 원수를 사랑하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은 그들의 복을 위해서 내 자신의 희생을 택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의지의 문제입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5: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에서 그 사랑을 명하셨습니다. 거기에는 바로 아가페 사랑이 들어있습니다. 이 말씀을 이해하면 여러분은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택하신 그 아들을 희생제물로 나타내셨습니다. 선택된 그리스도가 나를 위해서 내가 전혀 사랑스럽지 않은 동안에도, 죄인일 때도 얼마나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의 언급입니까?

베드로의 사랑에 관한 도전을 주님이 주고 있습니다. 주님은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이런 희생적인 사랑을 가지고 도전을 주시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세 번 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필레오 사랑으로 대답했습니다. 베드로는 내가 자연적인 사랑을 주님을 향해서 하면 좋지 않겠습니까라는 의사를 표현한 것입니다. 다른 말로 말하면 베드로는 아가페 사랑에 도달할 수 없는 입장이었습니다. 베드로는 나는 희생적인 사랑을 선택하지 못한다고 말했습니다. 왜 베드로는 그것을 못하겠습니까? 그는 한 번의 기회에서 실패를 했기 때문입니다. 그가 주님을 부인할 때를 기억하십니까? ‘너도 그 제자라는 말을 들었을 때 베드로는 나는 알지 못하노라 그 사람을라고 말했습니다. 이때에 베드로는 아가페 사랑을 나타냈어야 했습니다. 다른 사람을 위해서 자기를 희생하는 사랑을 나타냈어야 할 기회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선택하는 대신에 주님을 부인하는 것을 택했습니다.

마지막 말씀입니다.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기초적인 하나님의 요구는 사랑이며 예수 그리스도를 위한 사랑입니다. 그 사랑이 흘러나와서 다른 사람에게 미쳐야 합니다. 우리들의 주님을 향해서 여러분은 아가페 사랑을 나타내시겠습니까? 내 시간을 그분을 위해서 드리겠습니까? 나의 물질적인 것들을 그분을 위해서 사용하시겠습니까? 나 자신 전체를 그분을 섬기는데 사용하기를 원하십니까? 이것이 바로 아가페 사랑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위해서 그 자신을 주셨습니다. 우리는 지금 현재 그분께 속해 있습니다. 우리의 책무는 우리 자신 전체를 그분께 드리는 것입니다. 오늘날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주님은 여러분의 돈보다 주님을 더 사랑하느냐고 물으실 것입니다. 너희들의 가족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네 자신보다도 나를 더 사랑하느냐? 어떤 다른 것들보다도 나를 더 사랑하느냐? 우리들 자신이 주님께 나타내어야 할 사랑이 바로 이 아가페 사랑입니다.

로마서 12:1-2에서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감사합니다.

201857일 강서모임 특별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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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징검 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