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금(연보)에 대해
[질문]
예전에는 헌금이 자유로운 분위기였다면 교회 건물들이 늘어나고 해외 전도가 확장됨에 따라 헌금이 너무 부족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나온 궁여지책이 일반 헌금은 해외전도비로 쓰고 국내전도비나 그 외의 실경비는 실비의 개념을 도입하여 어떤 행사마다 다시 헌금을 강제로 하고 있습니다. 금액은 정해져 있습니다. 그래서 가난한 성도들은 신앙생활에 부담을 느끼고 있습니다. 저는 이것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답변]
오늘날의 기독교계의 헌금 방법은 전혀 성경적이지 않은 것으로 보며 헌금생활에 관한 사고방식도 대부분 잘못되어 있다고 보여집니다. 이것을 말씀드리자면 기독교 전체를 비판하게 될까 염려가 됩니다. 그러나 옳다 아니다를 밝히기 위한 것이니 양해 하시고 보시기 바랍니다. 오랜 기억입니다만 서울 강남의 모교회는 헌금의 종류가 73가지에 이른다고 하더군요. 어디에 근거를 둔 헌금종류인지 알 수 없지만 모일 때마다 헌금하는 것이 아닌가 보여지며 지금도 여전할 것입니다.
헌금이 드려지는 것은 하나님께 온전히 드려지는 집회(받는 것, 간구하는 것과 죄를 고백하는 것이 아니며 이러한 집회시간은 예배로 보지 않음), 즉 예배에서 실행되는 것으로 분별합니다. 우리는 주님을 기억하며 떡과 잔을 나누는 주의만찬을 행합니다. 이 시간에는 주님께 달라고 간구하는 것이나 우리 생활의 죄를 고백하지 않습니다. 온전히 주님을 기억하며 주의 영광을 드러내는 집회입니다. 이 시간에 한 부분으로 헌금이 드려지고 그 이외의 여러 집회들에서는 일체 헌금하는 것이 없습니다. 또한 헌금을 드릴 때 누가 얼마를 드렸는지 아무도 모릅니다. 주님께 드린 것이기에 주님만이 우리의 드림을 아십니다. 사람들이 다른 성도의 헌금한 것을 가지고 믿음의 척도를 재는 웃지 못할 일들은 결코 벌어지지 않습니다.
그리고 말씀집회, 복음집회, 기도집회…기타 다른 집회들에서는 그 집회에 충실하는 것이지 헌금은 하지 않습니다.
오늘날 주님의 사업을 벌이기(?) 위해서 많은 재정을 사람들(신,불신 막론하고)에게 요구합니다. 이러한 방법은 하나님의 방법이 아닙니다. 재정이 필요한 것은 초대교회나 지금이나 별반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비성경적인 방법으로 주님의 사업을 전개하다 보니 주님의 공급이 아니라 사람의 방법으로 유지해 나갈 수 밖에 없는 오늘날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우리교회가 이러이러한 전도사업을 하니 하늘나라 확장을 위해서 투자(헌금)하시오 하면서 헌금을 강요하면서 사업전개를 벌입니다. 그러다 모자라면 헌금을 강요하는 설교로 사람들의 믿음을 들었다 놓았다 하면서 헌금하지 않으면 믿음이 없다면서 짜냅니다.
결코 헌금은 성도의 믿음의 척도가 아닙니다. 다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복 주심을 따라 내가 즐겨 드릴 수 있는 마음을 주십니다. 이로 인해서 즐겨 드려지는 헌금은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하시는 것이지요.
다음은 몇 년 전에 모임에서 말씀을 내었던(설교) 내용입니다.
성도들의 드림에 대해
잠
드림의 원칙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께 드려지는 것은 정결하고 깨끗한 것이어야 했습니다. 드리는 자도 자신을 성결케 하고 드려지는 예물도 정결한 것이어야 했던 것을 보게 됩니다.
신
부정한 방법으로 즉 하나님의 원하지 않는 방법으로 벌어드린 돈은 드려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개 같은 자의 소득 – 구원받지 않는 자(이방인- 막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의 연보를 받지 않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오직 성도들만이 드려야 하는 것은 연보를 드리는 것도 예배의 동일선상에 있기 때문이지요. 구원받지 않은 사람들이 예배드릴 때 우리 가까이(뒷자리)에 앉아서 찬송하고 기도하며 같이 아멘하고 있다 할지라도 오직 예배드릴 수 있는 것은 엄밀하게 성경에서 말씀하는 원칙은 성전된 교회가 드리는 것만이 드려지고 하나님께서 받으십니다.
연보를 드리는 것도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모신 사람들인 교회가 주님을 증거하는 증거중의 한 부분입니다. 우리가 주님이라고 부르는 것은 놀라운 것입니다.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가 구원을 받는다고 했는데 주님을 부른다는 것은 주님께 전적으로 순종하겠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만찬집회를 주의 만찬이라고 부르는데 주님께 속한 사람들만이 주님을 기억하는 만찬에 참여하는데 동일하게 연보통이 돌려질 때도 주님께 속해 있는 성도들만이 연보 할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구약 때의 이방인들은 성전에 들어갈 수 없기 때문에 연보 할 수도 없었습니다.
성도들이 주님께 드려지는 것들은 말씀의 원칙대로 실행하고 드려져야 합니다. 우리도 이전에는 뒤에 두었던 연보궤를 통해서 했습니다만 이것은 구약적인 성전에서의 모습입니다. 복음서에 나오는 연보궤도 성전 안에서의 모습입니다. 계속 연보궤를 뒤에 두고 연보한다면 말씀의 원칙에도 맞지 않을 뿐만 아니라 우리가 모이는 집회소가 구약의 거룩한 성전을 나타내는 것과 같은 모습이 됩니다. 우리가 모이는 이 장소는 거룩한 성전이 아닙니다. 구약의 이스라엘은 성전에서 연보가 드려졌는데 하나님께 예배드리러 와서 성전에서 연보궤에 드렸습니다. 신약에서는 성도들의 몸이 성전이므로 성전인 교회가 집단으로 모여 예배드릴 때 바로 그 예배 때에 연보가 드려져야 하는 것입니다.
십일조 – 신약에서는 십일조의 개념이 없습니다. 다만 성도 자신이 정한 액수만 있을 뿐입니다. 지금까지 대부분 관습에 젖어 십일조라는 틀에 매여 월급을 타면 얼마를 연보드리고 다음 월급날까지 잊어버리고 살아갑니다. 신약에서 십입조가 없다고 하면서 아예 연보를 안해도 되는 것으로 생각하는 분들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주님 앞에 연보하지 않는 일도 특히 연보궤가 뒤에 있으니 내가 연보했는지 아무도 모르니까,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는 것이니까…. 이와 같은 잘못된 개념이 주님을 향해서 영적으로, 물질적으로 드릴 것을 준비하는 마음이 없어도 그냥저냥 넘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잘못 가르쳐져 온 실행이기에 잘못된 섬김을 만들어 내고 마땅히 해야 될 것을 아니해도 되는 것처럼 나타났던 것입니다.
다른 모임들이 하기 때문에, 또 지금까지 관습적으로 해 왔기 때문에 하고 있다는 것도 문제가 있으며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언제나 말씀에 가장 합당하게 드러내고 실행하는 것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도들의 가장 합당한 태도인 것입니다.
헌금에 대한 잘못된 가르침과 실행이 돈 없으면 예수님 못 믿는다는 인식을 주게 되어 많은 이들에게 복음이 가리워졌습니다. 그래서 어떤 분들은 개인적으로 복음전하다가 우리교회는 헌금 안해도 된다고 그러는 분까지 있었습니다.
사실 구원받기 전에는 주님과 아무런 관계없으므로 어떠한 사람도 주님께 드릴 수 없는 것이기에 구원받기 전에는 헌금하지 않는 것이며 구원받고 거룩함을 받은 성도가 되었을 때 드릴 수 있다는 것을 말해주고 가르쳐 줄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드림의 실행
대상 29:14~17 나와 나의 백성이 무엇이관대 이처럼 즐거운 마음으로 드릴 힘이 있었나이까 모든 것이 주께로 말미암았사오니 우리가 주의 손에서 받은 것으로 주께 드렸을 뿐이니이다
즐거운 마음으로 드릴 힘을 가진 자들은 주님께 받은 것을 드렸다고 할 것입니다. 드리지 못할지라도 함께 즐거워할 수 있는 힘도 필요합니다. 노예들 중에 믿는 자들은 드릴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할지라도 그들은 주님으로 기뻐했으며 그러한 노예들 중에 모임 안에 일꾼들도 있었다고 합니다.
16 우리 하나님 여호와여 우리가 주의 거룩한 이름을 위하여 전을 건축하려고 미리 저축한 이 모든 물건이 다 주의 손에서 왔사오니 다 주의 것이니이다
17 나의 하나님이여 주께서 마음을 감찰하시고 정직을 기뻐하시는 줄 내가 아나이다 내가 정직한 마음으로 이 모든 것을 즐거이 드렸사오며 이제 내가 또 여기 있는 주의 백성이 주께 즐거이 드리는 것을 보오니 심히 기뻐도소이다
다윗은 백성들에게 강요하지 않고 여호와께서 축복하심으로 자신이 모은 것을 주께 드림으로 본이 되었고 백성들도 함께 주님께 받은 것을 주님께 드릴 수 있기에 더욱 기뻤습니다.
다른 성도들의 드리는 것을 방해하지 말아야 하는데 넣는 것이 보일지라도 얼마를 넣는 것인지 관심을 갖거나 드려지는 물질의 많고 적음을 판단하려고 하지 않아야 합니다. 비록 보인다 할지라도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는 것과 같은 태도를 가져야 하며 다른 성도가 드릴 때 편안하고 기쁜 마음으로 드려질 수 있도록 도와야 하는 것입니다. 보아도 안본 것처럼 해야겠지만 또 일부러 보려고 하는 것도 마음이 바르지 못한 것입니다.
성도가 주님께 드린다는 것은 주님의 가장 기뻐하시는 것이며 드리는 자도 기쁨이 있는 것이기에 주님께 드려지는 것이 어느 누구에게도 방해 받을 수 없는 것이며 방해해서도 안되는 것입니다.
다른 분들이 어떻게 생각할까 봐 부담을 가지고 연보를 드려야 한다는 것은 생각도 말아야 합니다. 얼마를 드려야 하는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전 재산을 다 드린다면 흡족해 하시겠습니까? 가난한 과부가 두렙돈 넣는 것을 보시고 그녀의 전 재산을 드렸다고 했습니다. 즉 그녀에게 속한 모든 것을 드렸다는 것입니다. 드려지는 물질과 함께 즐거운 마음으로 드리는 성도의 신실함이 더 중요한 것입니다.
미리 저축한 것 - 갑자기 얼마를 드려야겠다고 하는 것보다 미리 드릴 것을 준비하여 드리는 것은 아름다운 것입니다.
정직한 마음으로 –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정직하지 못하므로 죽임을 당했습니다.
외형적인 것보다 마음으로 드려지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고후
드림의 때
고전
신약교회에서는 주의 첫날이라는 말씀 외에 어느 시간에 드리라고 구체적으로 명시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모임이 집단적으로 모여서 주님을 증거하고 나타내는 시간들은 만찬집회, 말씀집회, 기도집회, 복음집회등이 있는데 오직 주님께 드리는 집회시간은 주의만찬집회뿐입니다. 그래서 예배의 일부분으로 함께 드려지는 것이 합당하다고 분별됩니다.
이와 같은 실행에 있어서 성경에서 보여주시는 더 합당한 방법이 있다면 드러내어 주셔도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