징검 다리 2024. 10. 24. 11:16

키타무라 타다시

 오늘은 룻기 2장의 말씀을 가지고 인도를 받고자 합니다. 아마 이 2장의 말씀으로 내일 저녁 집회에까지 이어서 교재를 하겠습니다.

첫째로 2장은 하루 동안에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오전에는 룻기에 있는 하루의 오전 중에 일어난 일을 말씀드리고, 오후 시간에는 룻기 2장에서 일어난 오후에 일어난 일을 말씀드리고, 내일은 룻기에서 다음 날 일어난 일을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아마 멀리서 오신 분들이 내일 참석하지 못하시는 분을 위해서 대략적으로 내일 드릴 말씀도 간략하게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룻기 2장 교제에 앞서 1장 말씀을 간단하게 요약해 보면 룻기는 사사기 초기 시대에 해당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1장은 시간적으로 따지면 약 11년 정도 기간에 일어났던 일임을 알 수 있습니다. 기근이 있었기 때문에 엘리멜렉의 가족은 4명이서 모압 땅으로 이주했습니다. 거기서 엘리멜렉은 죽었습니다. 그리고 두 아들은 결혼해서 10년 정도 시간이 흘렀고, 그 두 아들도 10년 될 때 다 죽었습니다. 두 며느리만 남아서 룻과 함께 생활을 하다가 두 며느리 중에 한 며느리는 모압으로 가고, 한 며느리 룻은 이스라엘로 갔기 때문에 그 가는 길이 서로 달라졌습니다. 룻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자기 하나님으로 삼아서 시어머니와 함께 베들레헴으로 갔습니다.

 2:1절에 보면 “나오미의 남편 엘리멜렉의 친족 중 유력한 자가 있으니 이름은 보아스더라”

여기에 보아스라고 하는 이름이 나오는데 이 보아스는 이 말씀에 있는 대로 엘리멜렉 친족 중에 유력한 자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선 첫 번째로 보아스는 엘리멜렉의 친족이었습니다. 일본어 성경은 유력한 친족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3,4장을 보면 보아스는 유력한 사람임을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아시는 것처럼 복음서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 계보가 나옵니다. 마태와 누가복음의 계보 중에 마태는 아브라함부터 다윗, 요셉으로 연결되지만, 그러나 누가는 마리아의 계보를 따라 거슬러 올라가는 계보의 양식이 나옵니다. 다윗 그리고 이새, 그리고 보아스 올라가며, 더 올라가면 살마와 나손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보아스의 할아버지인 나손은 유다 지파의 족장이었습니다. 이때 유다 지파에서 유명한 사람은 갈렙이었습니다.

 나손에 대해서 민수기를 통해서 조금 보고자 합니다. 민수기 1:7절 “유다에게서는 암미나답의 아들 나손이요” 민수기에는 나손에 관해서 몇 곳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1장 7절에 보면 나손은 계수할 때 유다 지파의 족장이었음을 즉 두령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4절에 따르면 종족의 두령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나손은 출애굽을 경험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광야를 40년가량 거닐게 됩니다. 유다 지파의 족장으로 즉 두령으로서 유다 지파를 이끄는 삶을 살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민수기 2:3절 “동방 해돋는 편에 진칠 자는 그 군대대로 유다의 진 기에 속한 자라 유다 자손의 족장은 암미나답의 아들 나손이요” 따라서 보아스의 할아버지는 유다 지파의 족장이었습니다. 족장으로서 여러 가지 일을 했습니다.

민수기 10:14절에는 “수두로 유다 자손 진기에 속한 자들이 그 군대대로 진행하였으니 유다 군대는 암미나답의 아들 나손이 영솔하였고” 유다 지파는 20세 이상 되는 사람들이 7만 명이 넘습니다. 남자뿐 아니라 여자까지 포함하면 더 큰 무리임을 알 수 있습니다.

 출애굽기 6:23절에는 “아론이 암미나답의 딸 나손의 누이 엘리세바를 아내로 취하였고, 그가 나답과 아비후와 엘르아살과 이다말을 낳았으며”

아론과 나손과의 관계는 친척 관계가 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해서 유다 지파에 나서는 제사장 지파인 아론과 혈연관계를 맺게 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아론과 나손은 이와 같이 혼인으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모세와도 연결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론은 나손의 매제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모세도 나손의 사돈임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나손은 먼저 제사장과 연결이 되어 있고, 두 번째로 모세와 사돈관계가 또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선지자와도 관계가 되어 있으며, 그리고 나중에 다윗과 관계되기 때문에 왕과도 연결되는 관계를 가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나손은 대단히 특별한 지위에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놀라운 약속이 있었지만 나손은 가나안 땅에는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에서 죽었습니다.

 나손의 아들은 살만이었습니다. 살만은 가나안 땅에 들어간 사람이었습니다. 나손이 출애굽을 경험한 사람이라면 살만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경험을 한 사람이었습니다. 물론 광야 생활도 경험했습니다마는 가나안 땅을 경험한 사람이었습니다. 아마 사사기 초기도 경험했다고 생각합니다.

살만은 아버지의 관계 때문에 아론이 고모부가 됩니다. 모세도 고모부의 동생이기 때문에 관계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아론의 아들인 엘라살과 이다말도 연결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보아스의 할머니는 라합이었으며 이방인이었습니다. 물론 어머니와 아버지는 말할 것 없이 유대인이었습니다. 라합은 믿음의 사람임을 신약 성경은 증거합니다. 여리고에 살고 있습니다마는 라합에 대한 기록은 여호수아서에 나와 있습니다.

이런 말씀들도 여러분들이 잘 아신다고 생각합니다. 라합은 신약에서 믿음의 여인으로 두 번 정도 나옵니다.

첫 번째는 히브리서 11:31절에는 믿음으로 행한 라합의 행위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믿음으로 기생 라합은 정탐꾼을 평안히 영접하였으므로 순종치 아니한 자와 함께 멸망치 아니하였도다”

여호수아에 따르면 라합은 이스라엘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믿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큰 능력을 행하신 것을 들었습니다. 이스라엘 하나님이 천지의 하나님인 것도 들었습니다. 이 하나님이 라합 자신을 구원할 수 있다는 사실도 믿었습니다. 그래서 라합은 믿음을 나타냈습니다. 그리고 구원을 요청한 사람이기도 했습니다. 이 라합의 행위는 자기의 목숨을 걸고 하나님을 신뢰한 사람이었습니다.

 다음은 야고보서 2:23-25절까지 라합에 관한 말씀이 있습니다.

“이에 경에 이른 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응하였고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나니 이로 보건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 아니니라 또 이와 같이 기생 라합이 사자를 접대하여 다른 길로 나가게 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라합이 아브라함과 동등한 반열에 기술되고 있습니다. 행위로 말미암아 인정된 믿음에 대해서 기록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과 라합은 눈에 보이지 않는 믿음을 갖고 있었고, 그 눈에 보이지 않는 믿음을 행위로 나타냈기 때문에 아브라함과 동열 반열에 올라간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처럼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아서 멸망을 면한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정말로 믿고 그 약속을 실제 생활에서 체험한 사람이었습니다.

 여호수아 6장에 보면 라합이 멸망으로부터 구원받은 이후의 기록입니다마는 이런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17절에 “이 성과 그 가운데 모든 물건은 여호와께 바치되 기생 라합과 무릇 그 집에 동거하는 자는 살리라 이는 그가 우리의 보낸 사자를 숨겼음이니라”

여호수아의 명령대로 라합은 구원을 받았고, 25절에는

“여호수아가 기생 라합과 그 아비의 가족과 그에게 속한 모든 것을 살렸으므로 그가 오늘날까지 이스라엘 중에 거하였으니 이는 여호수아가 여리고를 탐지하려고 보낸 사자를 숨겼음이었더라”

여기에 보면 라합은 오늘날까지 구원받아서 살고 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호수아서가 기록될 당시에 바로 라합의 상태를 말하고 있으며 이방인으로서 이스라엘 중에 거하는 사람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전에는 라합이 기생이었지만 이 당시에는 어떻게 살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자세히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신명기에 따르면 라합은 이삭을 주우며 살았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신명기 26:19절

“여호와께서 너의 칭찬과 명예와 영광으로 그 지으신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 그 말씀하신 대로 너로 네 하나님 여호와의 성민이 되게 하시리라”

신명기 24:19절에도

“네가 밭에서 곡식을 벨 때에 그 한 뭇을 밭에 잊어버렸거든 다시 가서 취하지 말고 객과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버려 두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손으로 하는 범사에 복을 내리시리라”

20절에는 감람나무에 관한 과실의 기록이 나와 있습니다. 21절에서는 포도원에 관한 포도에 관한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19절에 곡식, 20절에 감람나무 열매, 21절에 포도원의 포도는 전부 다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서 하나님이 남겨두게 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라합은 처음에 이스라엘 가운데 있었지만 이와 같이 거류자였기 때문에 남겨진 곡식, 감람열매 포도로 생활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거류자들은 이와 같이 넉넉한 삶을 살지 못했을 겁니다. 따라서 임시로 거하는 사람들의 입장을 잘 알았을 겁니다. 외국인으로서 이스라엘 민족 가운데 이방인으로서 사는 사람의 삶을 말이죠.

 이 사람이 살몬과 결혼을 한 것입니다. 살몬이 라합과 결혼했는지를 잘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아마 라합의 믿음을 살몬이 보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신명기의 이 말씀들도 살몬은 잘 알고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아마 라합은 살몬과 결혼했기 때문에 하나님에 대해서 더 잘 알았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라합의 아들인 보아스가 유력자이고 재산도 갖고 있고, 이런 상황을 비추어 보면, 아마 아들의 상황을 보듯이 아버지인 살몬도 유력자이고 재력가였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유력자이면서도 재산가인 살몬과 나합은 결혼을 했던 것입니다. 할머니 라합이 결혼했기 때문에 큰 밭을 소유할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이건 제 생각입니다마는 이방인으로서 이스라엘 가운데 거류자로 살면서 이삭 죽던 여인이 재산가와 결혼을 했기 때문에 이삭 줍는 사람들에 대해서 대단히 배려가 깊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과정을 거쳐서 라합은 예수님의 족보에 올라가는 사람이 됐습니다.

 마태복음 경우에 따르면 라합은 룻과 함께 남편의 이름과 같이 기록된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양친 부모 밑에 자랐던 보아스였습니다. 유력자이고 재산이 있고 그리고 훌륭한 인품을 가진 사람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아마 어머니 라합으로부터 이방인들을 잘 돌보라고 하는 가르침이 있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이런 배경을 가진 사람이 보아스였습니다.

 룻기 2:1절을 다시 읽어보면

“나오미의 남편 엘리멜렉의 친족 중 유력한 자가 있으니 이름은 보아스더라”

나오미에게는 이러한 친척이 있었습니다.

2-4절까지를 보겠습니다.

“모압 여인 룻이 나오미에게 이르되 나로 밭에 가게 하소서 내가 뉘게 은혜를 입으면 그를 따라서 이삭을 줍겠나이다 나오미가 그에게 이르되 내 딸아 갈지어다 하매 룻이 가서 베는 자를 따라 밭에서 이삭을 줍는데 우연히 엘리멜렉의 친족 보아스에게 속한 밭에 이르렀더라 마침 보아스가 베들레헴에서부터 와서 베는 자들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너희와 함께 하시기를 원하노라 그들이 대답하되 여호와께서 당신에게 복 주시기를 원하나이다”

 여기서부터 하루가 시작이 됩니다. 우선 2절을 보게 되면 “모압 여인 룻”이라고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룻은 이방인이었습니다. 여기는 룻과 나오미의 아주 아름다운 관계가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모압 여인 룻은 시어머니 나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나로 밭에 가게 하소서” 이와 같이 시어머니에게 룻은 말했습니다. “이삭을 줍겠나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모압에서 돌아왔지만 생계를 유지하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나오미는 나이가 들었기에 우선 내가 할 일이 무엇인가라고 생각을 한 듯합니다.

시어머니로부터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이삭을 고아와 가난한 자들과 이방인들에게 남기는 하나님이라고 들었던 것 같습니다. 성경이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과부 가난한 사람, 이방인들을 돌보는 하나님이라고 나오미로부터 들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이삭을 줍겠나이다. 그리고 나에게 은혜를 베푸는 사람을 따라서 이삭을 줍겠다”고 말했습니다.

“뉘게 은혜를 입으면”이라고 말했습니다. 여러 가지 어려움들이 예상이 됩니다. 편견을 가지고 보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차별을 당한다든지 또는 왕따를 당할지도 모릅니다.

22절에 보면 차별에 관한 짐작을 하게 하는 표현이 나와 있습니다.

“나오미가 자부 룻에게 이르되 내 딸아 너는 그 소녀들과 함께 나가고 다른 밭에서 사람을 만나지 아니하는 것이 좋으니라”

왜냐하면 차별이 예상되니까 이런 의미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나오미는 알았습니다. 어떤 밭에 따라서는 차별이 생기는 것을 나오미는 알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룻은 뉘게 은혜를 입으면 그래서 은혜를 안 입으면 차별을 받으니까 룻은 은혜를 베푸는 사람을 만날 수 있었을까요? 시어머니 나오미는 내 딸아 갈지어다라고 허락을 했습니다. 나오미는 며느리를 이삭 줍게 내보낸 다음에 하루 종일 기다려야 했습니다. 하루 종일 며느리 걱정하면서 기다리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닐 것입니다. 그 결과가 저녁 이야기가 되겠습니다.

 3-4절을 보면 “룻이 가서 베는 자를 따라 밭에서 이삭을 줍는데 우연히 엘리멜렉의 친족 보아스에게 속한 밭에 이르렀더라 마침 보아스가 베들레헴에서부터 와서 베는 자들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너희와 함께 하시기를 원하노라 그들이 대답하되 여호와께서 당신에게 복 주시기를 원하나이다”

여기에 몇 가지 이상스런 일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전도서 3:10절에 하나님은 때에 맞게 인도하신다는 말씀에 해당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룻기 1:22절에 보면 “보리 추수 시작할 때에 베들레헴에 이르렀더라”라는 말씀을 통해서 이것이 언제였던가를 알 수 있습니다. 이 시기는 3월 말부터 4월 초에 해당하는 시기였을 것입니다.

마침 때가 좋을 때 도착하였습니다. 끝나버리면 이삭을 주울 수가 없습니다.

3절에 “베는 자를 따라 밭에서 이삭을 줍는데”라고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은혜를 베푸는 사람을 만났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일본어 성경은 “생각하지 않았는데”, 이는 한국 성경은 “우연히”라고 말합니다. 알고 보니 보아스의 밭이었습니다. 보리 추수하는 밭들이 많았을 텐데 그 많은 밭들 중에서 보아스의 밭에 이르렀습니다.

4절에 따르면 “마침”이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이 전후를 보면 보아스는 조금만 시간이 차이가 났으면 룻을 만나지 못했을지도 모릅니다. 따라서 “마침 보아스가 베들레헴에서부터 와서”라는 말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전도서 3:10절에 있는 말씀처럼 때에 따라서 모든 것들을 아름답게 하신다는 말씀과 같이 행하신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정말로 좋은 때를 주셨습니다. 그리고 합당한 사람을 준비해 두셨습니다. 합당한 장소도 마련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때와 장소와 사람을 하나님의 때에 알맞게 인도하시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들의 믿음 생활에서도 이런 것들을 경험할 때가 있지 않습니까?

 이제 곡식을 베는 사람, 그리고 돌봐주는 사람 이것은 영적으로 생각하면 모임에서 다른 사람들을 돌보는 사람일 수 있습니다. 여러분 가운데 어떤 분들은 모임에 형제자매를 통해서 모임으로 인도됐을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최종적으로는 주 예수님을 만났을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때를 정하고 장소를 정하고 사람을 정해서 마침내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하신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전체 모습에서 보아스는 주 예수님을 가리킨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밭은 모임임을 알 수 있습니다. 밭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모임에서 일하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임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이와 같이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신다는 말씀이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런 것들을 잊어버릴지도 모르겠습니다마는 옛날을 생각하면 전도서 3:11절처럼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신다는 말씀이 생각이 날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도 때때로 ‘정말 이상한 일이다’라고 생각할 때가 많았지만 나중에 지나고 보면 하나님이 인도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룻기 2:5-7절에

“보아스가 베는 자들을 거느린 사환에게 이르되 이는 뉘 소녀냐 베는 자를 거느린 사환이 대답하여 가로되 이는 나오미와 함께 모압 지방에서 돌아온 모압 소녀인데 그의 말이 나로 베는 자를 따라 단 사이에서 이삭을 줍게 하소서 하였고 아침부터 와서는 잠시 집에서 쉰 외에 지금까지 계속하는 중이니이다”

보아스가 직접 와서 룻의 모습을 묘사하는 것을 봅니다. 6절에서는 사환들로부터 모압 소녀라는 말을 보아스는 듣습니다. 물론 이미 베들레헴 동네에서 이 소문이 퍼졌을 겁니다마는 룻의 소문을 보아스가 들었겠지만 직접 만난 것은 여기가 처음이었습니다. 어머니처럼 이방인이구나라고 보아스가 생각을 했을지 모르겠습니다. 또 하나는 친척인 엘리멜렉의 며느리였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을 겁니다.

두 번째는 헌신적으로 일하는 모습이었습니다. 7절에 룻의 헌신적인 일하는 모습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침부터 와서는 잠시 집에서 쉰 외에 지금까지 계속하는 중이니다”라는 말을 듣습니다.

11절에는 “보아스가 그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네 남편이 죽은 후로 네가 시모에게 행한 모든 것과 네 부모와 고국을 떠나 전에 알지 못하던 백성에게로 온 일이 내게 분명히 들렸느니라”

시부모에게 한 일을 이미 보아스는 듣고 알고 있었습니다.

12절에는 “여호와께서 네 행한 일을 보응하시기를 원하며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날개 아래 보호를 받으러 온 네게 온전한 상 주시기를 원하노라”

여기는 룻의 믿음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날개 아래 보호를 받으러 온” 것에 믿음을 룻이 분명히 나타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날개 아래 들어온 것입니다.

16절을 보게 되면 “또 그를 위하여 줌에서 조금씩 뽑아 버려서 그로 줍게 하고 꾸짖지 말라 하니라

여기도 룻의 믿음이 나와 있습니다.

1:16절에는 이렇게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룻이 가로되 나로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유숙하시는 곳에서 나도 유숙하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또 다른 한 며느리인 오르바는 15절에 따르면 “그 백성과 그 신에게로 돌아가니라”고 기록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16절에 따르면 룻은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라고 했기 때문에 이스라엘 하나님을 믿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룻은 모압의 백성과 모압의 신을 버리고 참된 하나님께로 돌아왔음을 알 수 있으며 모압으로 돌아가는 길을 완전히 포기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믿음을 룻 속에서 보아스가 발견한 것입니다.

 2:8-13절까지를 먼저 읽고 생각을 해보겠습니다.

“보아스가 룻에게 이르되 내 딸아 들으라 이삭을 주우러 다른 밭으로 가지 말며 여기서 떠나지 말고 나의 소녀들과 함께 있으라 그들의 베는 밭을 보고 그들을 따르라 내가 그 소년들에게 명하여 너를 건드리지 말라 하였느니라 목이 마르거든 그릇에 가서 소년들의 길어 온 것을 마실지니라 룻이 땅에 엎드려 절하며 그에게 이르되 나는 이방 여인이어늘 당신이 어찌하여 내게 은혜를 베푸시며 나를 돌아보시나이까 보아스가 그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네 남편이 죽은 후로 네가 시모에게 행한 모든 것과 네 부모와 고국을 떠나 전에 알지 못하던 백성에게로 온 일이 내게 분명히 들렸느니라 여호와께서 네 행한 일을 보응하시기를 원하며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날개 아래 보호를 받으러 온 네게 온전한 상 주시기를 원하노라”

보아스의 은혜스러운 행동을 볼 수 있습니다. 룻 입장에서 보면 룻이 받은 은혜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8절을 보게 되면 보아스가 “다른 밭으로 가지 말며”라고 말했습니다. “여기서 떠나지 말고 나의 소녀들과 함께 있으라”고 말했습니다.

여기서 보아스는 룻을 보호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다른 밭으로 가게 되면 차별을 당할지도 모릅니다. 편견의 눈으로 보게 되고, 그리고 차별을 할지도 모르는 밭이었습니다. 그런 일을 당하지 않도록 “나의 소녀들과 함께 있으라”고 보아스는 말했습니다.

 여기에 모임의 교제에 관한 말씀이 들어 있습니다. 보아스의 밭에서 보아스가 신뢰하는 사람들과 함께 교제하라는 뜻입니다. 믿음을 올바르게 가진 형제 자매들과 교제한다는 것은 그 사람이 보호를 받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들과 교제하게 되면 여러 어려운 일들을 당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 살려고 하면 많은 곤란에 직면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마 그런 경험들을 여러분들이 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같은 믿음을 가진 형제자매들과 교제하면 그런 일이 없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교재를 어디서 할 것인가는 대단히 중요합니다.

9절에서 “그들의 베는 밭을 보고 그들을 따르라” 즉 보아스의 밭이 여럿 있는 모양인데, 밭이 바뀌더라도 보아스의 밭에서 따라가라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말하면 다른 장소도 제공하고 있는 것입니다.

9절 후반에 “목이 마르거든 소년들의 길어 온 것을 마시라”고 말합니다.

물은 우리들에게 성령을 가리킵니다.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영적인 목마름을 해소할 수 있습니다. 조금 전에 홍 형제님이 목마른지 물을 마셨습니다. 그것처럼 영적인 갈증이 있으면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영적인 물을 마시는 겁니다.

14절부터는 식사에 관한 얘기가 나오는데 식사에 대한 이야기는 식사한 다음에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2024년 10월 3일 – 1  강서모임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