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버트. E. 호오톤
오늘날 우리는 복음적인 영역에서도 다수의 오해들을 볼 수 있는데 불행하게도 이와 같은 것들은 많은 사람들에게 영적으로 큰 피해를 끼치고 있습니다. 복음적인 영역이라 함은 소위 자유주의적인 영역과 대조적인 말로써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신봉되고 전파되는 곳을 말합니다. 우리는 오늘날 복음적인 영역에서 발견할 수 있는 오해들 중의 일부를 고려해 보고자 합니다.
“믿다”라는 단어가 지니는, 다소 광범위한 성격 때문에 사람들은 구원받는 믿음을 복음 안에 제시된 진리에 그저 정신적으로 동의하는, 활기 없는 것으로 여길 때가 많은 것 같습니다. 필자가 “활기 없는”이라고 표현한 이유는 이와 같은 동의가, 바울이 사도행전 20장 21절에서 이야기한대로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항상 수반한다고 생각되지는 않기 때문입니다(바울은 이 멧세지를 유대인에게나 이방인에게 한결같이 전했습니다). 상담자는 구원받고 싶어하는 영혼을 다루다가 피상담자에게, 그리스도께서 그를 위해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신 것을 “믿느냐?”고 질문합니다. 그리고는 피상담자로부터 그렇다는 대답을 들으면 상담자는 그가 이제 구원을 받았다는 확신을 심어 주려 합니다! 그러나 구원을 받고 싶어하는 사람 편에서 죄로부터 하나님께로 돌아서는 실제적인 변화와 살아 계신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의탁이 없었다면 그 사람은 주님의 구원의 능력을 결코 체험할 수 없습니다. 구원을 받고 싶어하던 그 사람은 이 체험에서 몇 발자국 떨어져 있는데도 불구하고 구원을 받았다는, 잘못된 확신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은, 어떤 개념이 인기가 있다고 해서 그 인기 자체가 그 개념의 타당성을 증명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1] 먼저 회개에 관하여 살펴본다면, 주님 자신이 그러셨던 것처럼 바울도 역시 자신의 말을 듣는 사람들에게 “하나님께 대한 회개”의 필요성을 항상 강조했습니다. 구원받지 않은 사람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려는 생각은 전혀 없이 하나님께 등을 돌리고 오직 자기 자신의 일에만 몰두된 채 “악한 행실로 멀리 떠나 마음으로 원수가” 되어 살고 있습니다(골
[2]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은 회개한 죄인이 자기 자신을 자신의 삶의 주인이 되시는 주 예수 그리스도께 의탁하는 일을 수반하는데도 불구하고 이것에 대한 인식이 부족한 실정입니다. 구원받는 믿음이, 그리스도께서 나의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신 사실을 믿는 것과 더불어 시작되는 것은 분명히 사실이지만 거기서 끝나고 마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그 믿음이, 그 믿음을 가진 사람으로 하여금 살아 계신 주님께 자신의 모든 것을 의탁하게 할 때에만 비로소 구원받는 믿음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주님은 자기(주님)에 관하여 믿는 사람들에게가 아니라 자기(주님)를 믿고 의뢰하는 사람들에게 영생을 주십니다. 이처럼 필수적인 단계에서 약간 못미치는 곳에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멈추어 서는 것은 비극입니다. 참으로 구원받는 믿음은 그리스도에 관하여 믿는 것으로부터 더욱 나아가게 하여 자기 뜻을,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신” 분에게 복종시키게 합니다(행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원받는 믿음의 참된 성격에 관한 이 정의(正義), 곧 그것은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주님되신 그리스도께 대한 복종을 수반한다는 정의가 제시되면 수많은 반대 내지 때로는 격렬한 반대까지 받게 되는데 이것은 참으로 이상한 일입니다.
그러면 지금부터 몇 가지의 반론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어떤 사람들은 아무런 성경적 근거도 없이 “회개는 우리 시대에 해당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우리 시대에는 성령님께서 죄에 대하여 사람들을 책망하지 않으신다는(요
(2) 또 어떤 사람들은, 성경의 요구, 곧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주되신 그리스도께 대한 복종을 강조하는 것이 “믿음에다 무엇을 더하는” 행위라고 반박합니다. 하지만 그와 같이 강조하는 것은 사실상 아무 것도 더하는 것이 없고 구원받는 믿음이 무엇이라는 것을 단순히 정의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3) (2)항에 나와 있는 것과 비슷한 반론으로 또 다음과 같은 것이 있습니다. “구원받는 믿음이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주되신 그리스도께 대한 복종을 수반한다고 말함으로써 당신은 믿음에다 행위를 더하고 있어요!” 이와 같은 반론을 제기한 “신학자들”의 영적 무분별에 우리는 놀라움을 금할 수 없습니다! 바울이 갈라디아서와 로마서에서 기록한 “행위”는 “자기 의를 세우려고”(롬
활동하는 믿음을 그렇게 정의하는 것은 어떤 사람들이 잘못 단정하는 것처럼 결코 “갈라디아주의”가 아닙니다. 구원받는 믿음은 그저 비활동적인 “믿음”에 불과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옛날에도 있었던 오해이며, 야고보는 그의 서신서 2장 17, 26장에서 그것을 “죽은” 믿음, 곧 생명이 없는 가짜 믿음이라고 말했습니다. 살아 있는 믿음은 행동으로 드러나기 마련입니다. 그것은 사실들을 믿을 뿐만 아니라 옛날의 라합처럼 그 믿음을 따라 행동합니다(그런데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는 것은 행위가 아니지만 주 되신 그분에게 복종하는 것은 행위라고 말하는 것은 이상하지 않습니까? 그와 같은 생각은 하나님께로서 온 것이 아니라 영혼의 원수에게서 온 것입니다. 그는, 사람들이 자기 믿음을 따라 행하지만 않는다면 사람들이 단순히 “믿는” 것에 대해서는 아무 반대도 하지 않습니다!).
(4) 죄인이 그리스도를 주로서 받아들이도록 지도를 받는 것에 대하여 종종 제기되는 또 하나의 반론은 “그리스도를 주로 시인하는 것은 단지 그분의 신성(神性)을 시인하는 것이지 그분의 주님되심(
“로마서 10장 9절은 내가 사랑하는 말씀일세.
그리스도를 주로서 영접하여 나는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았네.”
그런데도 불구하고 어떤 그리스도인이 감히, “예수를 주로 시인하는” 것은 그분을 자신의 주님으로 시인하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고 말한다면 우리는 그 말을 도저히 이해하지 못하겠습니다!
(5) 구원받는 믿음이 주 되신 그리스도께 개인적 의탁을 수반한다고 사람들에게 말하면 또 다른 반론이 제기되는데, 그것은 “당신은 그렇게 말함으로써 어떤 신자들의 확신을 어지럽게 할 것입니다”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실상은 그 어떤 신자들의 확신은 잘못된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그와 같은 확신은 영원히, 너무 늦어지기 전에 반드시 “어지럽혀져야” 합니다!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는” 것과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는 것은 어느 누구에게나 전혀 해롭지 않습니다(벧후
(6) 그리스도에 관한 지식적인 믿음은, 그 믿음을 가진 자가 구원을 얻기 위해 자기 자신을 주 예수 그리스도께 의탁할 때만 비로소 구원의 믿음이 된다는 진리를 반대하는 사람들 중에서 어떤 사람은 다음과 같이 기록했습니다 “의탁이라고요?” 도대체 어느 정도 의탁해야 되며, 얼마 동안 의탁해야 되지요?” 진지한 사람이라면 어떻게 그런 식으로 글을 쓸 수 있는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렇게 쓴 그 사람은 과연 주 되신 그리스도께 자기 자신을 헌신한 적이 있을까요? 그 사람은 주 되신 그리스도께 자기 자신을 헌신하지 않고서도 그리스도에 관하여 “믿었을” 때 구원을 경험했단 말입니까? 그가 “그저 믿기만” 했을 때 그가 도대체 어떤 경험을 했는지 궁금합니다. 그분에게 대한 개인적 의탁도 없이, 구원을 얻기 위해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말 자체에 모순이 있습니다. ♠ - 다음 호에 계속 –
(1988년 7,8월호)
'횃불 > 1988년'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하나님은 선(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렇게 행하십니다. (0) | 2012.12.16 |
---|---|
누가 사랑을 하지요? (0) | 2012.12.16 |
경건한 아내 (0) | 2012.12.16 |
그리스도인의 성장지침(10) - 사랑과 구애(求愛) (0) | 2012.12.16 |
순전하고 신령한 젖(9) - 주님을 섬기는 법 (0) | 2012.12.16 |
회복 - 밑바닥에 떨어지기 (0) | 2012.12.16 |
사실(Facts). 믿음(Faith) 그리고 감정(Feelings) (0) | 2012.12.16 |
자살(自殺) (0) | 2012.12.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