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타무라 타다시
창 18:9-15절
“그들이 아브라함에게 이르되 네 아내 사라가 어디 있느냐 대답하되 장막에 있나이다 그가 가라사대 기한이 이를 때에 내가 정녕 네게로 돌아오리니 네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하시니 사라가 그 뒤 장막문에서 들었더라 아브라함과 사라가 나이 많아 늙었고 사라의 경수는 끊어졌는지라 사라가 속으로 웃고 이르되 내가 노쇠하였고 내 주인도 늙었으니 내게 어찌 낙이 있으리요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사라가 왜 웃으며 이르기를 내가 늙었거늘 어떻게 아들을 낳으리요 하느냐 여호와께 능치 못한 일이 있겠느냐 기한이 이를 때에 내가 네게로 돌아오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사라가 두려워서 승인치 아니하여 가로되 내가 웃지 아니하였나이다 가라사대 아니라 네가 웃었느니라."
9절부터 15절까지는 하나님의 약속의 재확인과 사라의 믿지 못함에 대해서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난의 세 측면을 따라가다 보면 그 고난이 구체화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 죽으심이 제사장들과 장로들의 모함을 받아서 죽으시고 마지막에는 부활한다는 것을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고난에 관한 예언이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구체화되고 세밀화되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고난의 구체적인 말씀을 듣고 나서 앞으로 어떻게 될까 염려한 사실을 복음서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나중에 그 말을 들었기 때문에 그 앞에 말을 기억하며 예수님이 예언된 대로 돌아가셨구나라고 제자들은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동일하게 아브라함도 약속이 구체적으로 시간이 지남에 따라서 구체화되고 세밀화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여기 읽은 곳에서는 사라에 대한 구체적이고 세밀한 내용들이 구체화되고 있습니다. 사단은 장막 안에 있었지만 10절에 따르면 장막 안에서 듣도록 구체적으로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분명하게 기간이 이를 때라고 분명히 말씀하셨어요. 장막 문에서 사라가 듣고 있었지만은 설마 그런 일이 있겠는가라고 사단은 생각을 했습니다. “마음으로 속으로 웃고 이르되”라고 기록이 돼 있습니다. 사실은 아브라함도 같은 경험을 한 적이 있습니다.
창 17:17절에 “아브라함이 엎드리어 웃으며 심중에 이르되 백 세 된 사람이 어찌 자식을 낳을까 사라는 구십 세니 어찌 생산하리요 하고”
아브라함도 이와 같이 구체화된 말씀을 듣고 아브라함이 웃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 자신과 아내를 생각할 때 100세와 90세 되는 노부부였습니다. 사라도 자신의 몸을 알고 있었습니다.
17장에 아브라함처럼 18장에서 사라도 동일한 이유로 웃었습니다. 사라는 자기 몸 상태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내가 노쇠하였고”라고 말하는 것을 보면 나이 많아 늙었다라는 것을 사라는 알았습니다.
무덤에 들어갈 이 나이에 어찌 아이를 얻겠는가라는 뜻으로 말했습니다. 이런 일은 이전에는 없었습니다. 이런 나이에 자녀가 태어난다는 것은 이전에는 없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일이 없었던 것이 이루어진다는 것은 우리도 일상에서 좀처럼 믿기가 힘들 것입니다.
이러한 두 사람에 대해서 18:14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여호와께(주께) 능치 못한 일이 있겠느냐?” 인간적인 관점으로 볼 때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여호와께 즉 주께는 능치 못한 일이 있겠느냐라고 말씀하십니다.
누가복음에 나오는 사가랴와 엘리사벳에 대해서 보고, 마리아에 대해서 볼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 1:13절입니다. “천사가 일러 가로되 사가랴여 무서워 말라 너의 간구함이 들린지라 네 아내 엘리사벳이 네게 아들을 낳아 주리니 그 이름을 요한이라 하라”
사가랴는 아들을 주시기를 간절히 원했지만 거의 불가능이라고 알고 포기한 듯합니다. 천사 가브리엘이 네 간구가 응답되었다고 말합니다. 18절을 보면 사가랴가 이렇게 대답합니다. “사가랴가 천사에게 이르되 내가 이것을 어떻게 알리요 내가 늙고 아내도 나이 많으니이다” 그 이름까지 주어졌는데도 불구하고 어떻게 이런 일이 있으리오라고 말했습니다. 나이가 들었기 때문에 많은 경험을 했을 겁니다. 주위를 둘러봐도 자기 같은 사람에게 애가 없을 거라고 예상을 했습니다. 만약 아이가 태어난다면 이전에 없었던 일일 거라고 생각을 했을 때입니다. 우리는 종종 연륜에 따라서, 경험에 의해서 말하곤 합니다. 어쩔 수 없이 선입관이 우리들에게는 들어옵니다.
마리아의 경우도 그렇습니다.
눅 1:31절을 보면 “보라 네가 수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라고 말했습니다.
마리아는 이 말을 듣고 두려워했습니다. 34절처럼 마리아는 대답했습니다. “마리아가 천사에게 말하되 나는 사내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 일이 있으리이까”
그러나 35-36절에서 천사가 이렇게 대답합니다. “천사가 대답하여 가로되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으리라 보라 네 친족 엘리사벳도 늙어서 아들을 배었느니라 본래 수태하지 못한다 하던 이가 이미 여섯 달이 되었나니”
마지막으로 37절처럼 말합니다.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치 못하심이 없느니라.” 이 말을 들은 마리아는 38절처럼 믿었습니다. “마리아가 가로되 주의 계집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하매 천사가 떠나가니라” 처음에는 마리아는 이 말씀을 듣고 두려워했지만 믿고 그리고 믿음으로 하나님께 마리아 자신의 몸을 맡겼습니다.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리다”라고 말했습니다. 마리아는 경험은 없었지만 선입견이 없는 믿음이었습니다. 능치 못할 것 같은 것도 믿었습니다. 하나님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다는 것을 믿었습니다.
창세기로 돌아가서 아브라함과 사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못했습니다. 히브리서에서 봤던 것처럼 이런 믿지 못하는 사람이 믿어서 자녀를 얻었습니다. 믿음으로 이삭을 얻게 됐습니다. 다 나중 일이 됩니다마는 이삭을 얻는 것은 하나님은 우리들이 할 수 없는 것을 이루십니다.
성경을 펼치지는 않겠습니다마는 마태복음 19장에 부자 청년이 예수님께 다가옵니다. 예수님께 묻기를 “영생 얻기 위해서는 무엇을 하여야 하오리이까”라고 질문했습니다. 예수님은 율법을 지키라고 말씀하시니, 그는 지켰다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네 가진 모든 것을 팔아서 가난한 자들에게 주고, 너는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을 때 예수님 앞을 슬픈 기색을 띠고 예수님을 떠나갔습니다. 예수님은 그 모습을 보고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도 그 모습을 보았습니다. “부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은 그런 일이 없을 거라고, 어떤 사람들은 부자는 천국에 들어갈 자격이 있다고 생각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렇지만 사람들은 부자는 천국에 못 들어간다고 말씀을 했지만 예수님은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9장 그 기사 이후에 삭개오가 구원받는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삭개오도 부자였습니다.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약대가 바늘 귀로 들어가기 어렵다고 말씀했지만, 그러나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지만 하나님은 할 수 있다고 말씀했습니다. 하나님으로서는 할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사람이 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을 하나님이 하실 수 있는 일이 있습니다.
월요일에는 이 두 사람이 믿음을 갖는 18:16절부터 좀 보고자 합니다.
창세기 18:16-19절입니다. “그 사람들이 거기서 일어나서 소돔으로 향하고 아브라함은 그들을 전송하러 함께 나가니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의 하려는 것을 아브라함에게 숨기겠느냐 아브라함은 강대한 나라가 되고 천하 만민은 그를 인하여 복을 받게 될 것이 아니냐 내가 그로 그 자식과 권속에게 명하여 여호와의 도를 지켜 의와 공도를 행하게 하려고 그를 택하였나니 이는 나 여호와가 아브라함에게 대하여 말한 일을 이루려 함이니라”
18장 초반에 나타난 세 사람 중에 하나, 여호와께서 즉 즉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몸을 가지셨으니 나의 하려는 것을 아브라함에게 숨기겠느냐 말씀하셨습니다.
야고보서 2:23절을 잠시 봐주십시오. “이에 경의 이른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응하였고,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나니”
여기에 아브라함이 어떻게 된 사실이 기록돼 있습니다. 이때부터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벗이라고 칭함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벗이기 때문에 하나님과 친한 사이로 보이기 때문에 하시고자 하는 일을 벗인 아브라함에게 알리고자 했습니다.
진짜 친구 사이에는 감추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 여러분은 믿음의 벗을 갖고 있습니까? 믿음의 진짜 벗이라면 여러 가지를 감추지 않고 말할 수 있습니다. 저에게도 믿음의 벗이 있었습니다. 한 믿음의 벗을 제가 말씀을 드리고 있습니다만 형제님은 2년 전에 주님의 부름을 받았습니다. 고등학교 3년 동안 동급생이었습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얼마 안 있다가 이 친구가 먼저 믿음을 가져 감사합니다. 가나자와라고 하는 제 고향에서 말이죠. 저는 그때 동경에 있었습니다. 동경에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따라 제가 믿음을 가졌습니다.
겨울 방학 때 제가 가나자와 고향으로 방문을 했습니다. 그때 구도자이기 때문에 제가 가나자와도 모임이 있다는 말을 듣고 복음을 들으러 가나자와 모임으로 갔습니다. 전도 집회 때 한 사람이 앞에 서서 전도를 하고 있었습니다. 끝나고 말하던 사람이 나한테로 다가왔습니다. 고등학교 3년 동안의 동급생이었습니다. 같은 반이었지만 한 번도 서로 말한 적이 없는 동급생이었습니다.
그때 그 동급생이 이래도 하나님을 안 믿겠느냐라고 말을 했습니다. 사실은 그 한 해 전에 가나자와 어떤 형제님이 일 때문에 동경에 와 있었습니다. 그때 다이쿄쵸 모임 집회에 그 사람이 마침 있었습니다. 제가 그때 다이쿄쵸 모임에 간 것이 그때가 처음이었습니다. 그 사람을 저는 이전부터 알고 있었습니다. 5년 만에 만났습니다. 5년 만에 만나서 오래간만입니다라고 서로 인사를 나누었습니다. 키가 180이 넘고 90kg 이상 나가는 아주 덩치가 큰 사람이었습니다. 지금 여기 모인 거 보니까 그 정도 형제님이 어딘가에 계신 것 같아요.
그 형제, 그 사람이 와가지고 오래간만이라고 제 손을 꽉 잡았습니다. 손이 아팠는데 하나님께 붙잡혔구나. 그런 다음에 가나자와에 가서 더 놀란 게 있습니다. 그래서 가나자와에서 또 만났기 때문에 그래도 안 믿겠느냐라는 말을 했습니다. 이때부터 이제 믿음을 갖고, 이때부터 이 형제님과 믿음의 벗이 됐습니다. 그의 가정에 제가 매년 한 번씩 찾아갔습니다. 그 가정에 어린 자녀들도 저 어릴 적부터 계속 알고 지냈습니다. 50년가량 믿음의 벗이었습니다. 믿음의 벗이기 때문에 뭐든지 서로 감추지 않고 이야기했습니다.
아브라함도 하나님에게 이와 같이 벗이었습니다. 우리들은 형제 자매들만 이렇게 벗이라고 부르지 않고 예수님의 벗이 됐습니다.
요한복음 15장을 보시면 이 말씀을 찾을 수 있는데 요한복음 15:15절입니다.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니라”
예수님은 여기서 제자들을 “종이라 하지 않고 이제부터는 친구라고 하였노니”라고 말씀했습니다.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제자들에게 다 말씀했기 때문에 친구, 즉 벗이라고 말했습니다. 아버지께 들은 것을 제자들에게 예수님이 다 말씀했지만, 제자들이 이것을 다 이해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과 하나님의 계획을 구체적으로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알려주었습니다.
창세기 18장에서는 내가 아브라함을 택했다고 말씀했습니다. 19절에서는 “택하였나니” 했는데, 17절에서는 “나의 하려는 것을 아브라함에게 숨기겠느냐”라고 말씀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벗으로서 택함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이 우리들에게도 벗이라고 친구라고 불러주십니다. 요한복음 15장에서 보신 것처럼 말이죠.
요 15:16절을 보면, “너희가 나의 것,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과실을 맺게 하고, 또 너의 과실이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니라” 제자들이 예수님을 택했다고 생각했는지 모르겠습니다마는 분명히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다”.
아브라함의 택함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브라함이 택한 것이 아니라 여호와 즉 주님이 택했습니다. 전 세계에 많은 사람이 있습니다. 많은 민족 중에 많은 백성 중에 하나님은 딱 한 사람을 택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택한 게 아니라 예수님이 우리를 택했습니다. 이 반대는 절대로 성립될 수가 없습니다. 만약 우리가 예수님을 택했다고 한다면 우리의 마음이 변하면 예수님을 떠나갈 수 있겠습니다. 모임에서 떠나갈지도 모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택했다고 한다면은 절대로 변화할 수 없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을 택한 이유가 기록이 돼 있습니다.
창세기 18:19절에 나와 있습니다. “내가 그로 그 자식과 권속에게 명하여 여호와의 도를 지켜 의와 공도를 행하게 하려고 그를 택하였나니 이는 나 여호와가 아브라함에게 대하여 말한 일을 이루려 함이니라” 아브라함의 자식과 권속이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의 자손들이 수가 많아져서 애굽에서 종이 된 적이 있습니다. 애굽의 종의 상태에서 모세를 통해서 하나님이 건져냈습니다. 그 민족을 통해서 하나님인 여호와의 도를 지키게 하고, 의와 공도를 행하게 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기 위해서 그렇게 했습니다.
신명기 4:1절입니다. “이스라엘아 이제 내가 너희에게 가르치는 규례와 법도를 듣고 준행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살 것이요. 너희의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시는 땅에 들어가서 그것을 얻게 되리라”
이 이후에 더 구체적인 법도와 규례를 모세가 말을 합니다.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그 말씀을 모세를 통해서 지금 실현하고자 하고 있습니다. 광야에서 출애굽한 2세대는 갈렙과 여호수아 외에 거의 멸망했습니다. 20세 이상으로서는 여호수와 갈렙 외에는 전부 다 광야에서 죽었습니다. 모세는 다음 세대일지라도 동일한 말씀을 하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모세는 아브라함을 택한 목적을 이와 같이 이루려고 했습니다. 이와 같이 아브라함에게 택함의 목적을 모세는 이어받았습니다. 이를 위해서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택하셨습니다. 다시 창세기 18장으로 돌아갑니다마는 최종적인 하나님의 목적이 기록돼 있는 데를 보겠습니다. 18절에 “아브라함은 강대한 나라가 되고 천하 만민은 그를 인하여 복을 받게 될 것이 아니냐” 천하 만민은 그를 인하여 복을 받게 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최종적으로는 이 아브라함의 계보를 따라 예수님이 탄생하게 됩니다.
따라서 마태복음 1:1절에서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마태복음 1장에서 아브라함부터 예수님에게로 세대가 이어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천하 만민이 복을 받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이 아브라함을 택한 목적이었습니다. 우리들에게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할 때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했습니다. 하나님은 창조된 사람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고자 했습니다. 유감스럽게도 그때는 하나님은 육체를 가지고 계시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몸을 가지시고 하나님 아버지의 영광을 나타냈습니다. 지금은 예수님은 하나님 보좌 우편으로 돌아가셨습니다. 예수님의 몸이 이 땅에 지금 계시지 않기 때문에 우리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고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낸다는 말을 들을 때 도대체 영광을 나타낸다는 말이 무슨 말인가라고 의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내가 어떻게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낼 수 있겠느냐라고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이겠습니까? 일상생활을 통해서 하나님이 이러이러한 분이라고 나타낸다면 그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것이 될 것입니다. 일상생활에서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하나님을 경배하는 가운데 생활하면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길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을 찬송하며 하나님께 감사하는 모습을 일상생활 하는 동안에 보인다면 하나님의 놀라운 점을 나타내는 하나의 행위가 되지 않겠습니까? 이런 가운데 하나님과 친밀하게 교제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고 또 하나님께로부터 기쁨을 받는 그러한 생활이 돼야 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이 기뻐하신다는 것은 도대체 무슨 말입니까? 히브리서 11장에 따르면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느니라고 기록이 돼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의 믿음을 보고 기뻐하십니다. 믿음을 구체적으로 나타내는 방식을 아브라함을 통해서 우리는 알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알기 쉽게 말하기 위해서 때때로 이런 예를 제가 듭니다. 자녀가 부모를 믿고 있는 모습을 제가 예를 듭니다. 어릴 적에 부모는 보통 그 자녀와 놀 때가 있습니다. 그 아이에게 높은 데 세워놓고 뛰어내리라고 권하는 부모들이 종종 있습니다. 아이들은 그런 것들을 좋아합니다. 높은 데서 부모 밑으로 아이가 뛰어내립니다. 아이가 겁내지 않고 뛰어내리는 것은 부모가 자기를 받아줄 것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아이가 뛰어내렸는데 그 부모가 안 받아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두 번 다시 안 믿겠다고 뛰어내리지 않을 것입니다. 믿고 뛰어내리는 믿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해서 바로 뛰어내리는 믿음이 하나님께서 요구하는 믿음이 아니겠습니까?
유감스럽게도 창세기 18장 단계에서는 아브라함과 사라는 자녀를 주심에 대해서는 그 정도까지 하나님을 향해서 뛰어내리는 믿음이 아니었던 걸로 보입니다.
하나님이신 주님은 아브라함에게 믿음을 통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주기를 바랬지만 아브라함과 사라는 거기에 미치지 못했습니다. 사실은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사라를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고 싶었습니다. 조금 전에 말씀드린 감사나 찬송보다는 이것은 어려운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러한 힘든 경우라 할지라도 이 일을 통해서 하나님은 하나님의 영광을 아브라함과 사라가 나타내기를 원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아브라함과 사라 같은 힘든 시련을 우리는 맡고 있지 않을지 모르겠습니다만 일상생활 가운데서 하나님의 영광을 많이 나타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벗이라고 우리는 영적으로 불림 받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을 갖도록 부름을 받았습니다. 신약시대 우리들에게 적용해서 생각을 잠시 해보면 우리는 믿는 순간에 몸인 교회의 지체가 바로 한국의 형제 자매, 일본의 형제자매, 그래서 당시 그 외에 전 세계에 있는 여러 나라와 민족에 있는 형제자매들입니다. 직접 그런 분들과 우리는 지금 현재로서는 교제할 수 없을지 모르지만 몸인 교회 지체이기도 하고 하나님의 권속입니다. 이러한 형제자매들과 매일 함께 교제하면서 생활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따라서 모인 교회 지체들과 매일 교제하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지역 모임 단위로 교제가 주어지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늘에 가서도 하나님의 권속으로서 교제를 가질 것입니다. 하늘에서 하나님의 권속으로서 교제를 나타낼 것을 이 땅에서 미리 보여주는 것이 지역 모임 안에서의 교제입니다. 함께 모여서 하나님을 경배하고 찬송을 드리고 감사를 드리고 하늘에서도 동일한 것을 할 것입니다. 따라서 하늘에서 할 것을 이 땅에서 미리 예행 연습을 한다고 생각해도 틀린 말이 아닙니다.
지역 모임 내에서 구체적인 교제를 우리들은 나누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몸인 모임은 완전한 모임입니다. 유감스럽게도 지역 모임은 불완전한 면이 많이 있습니다. 지상에 있는 지역 모임에 보내는 편지들을 보면 지역 모임에 약한 점들이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여러 문제들이 발생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구원받아도 우리들에게 죄의 성품이 아직도 완전히 제거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지역 모임에 속하지 않고 혼자 생활하려고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혼자 생활하는 믿음이 되어버리는 경우도 있습니다. 혼자 생활하게 되면 하늘에 가서 할 예행 연습을 이 땅에서 하지 못하게 되는 결과가 될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권속으로서 지역 모임의 모임으로 모여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낼 수가 있습니다. 길을 잃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모임에서 하나님을 찬송하고 감사하는 것을 보면서 하나님의 영광을 목격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구도자들이 종종 처음 모임에 와서 하는 말이 있습니다. 놀랍군요. 형제 자매들은 전부 좋은 사람뿐이네요. 이런 말을 들을 때 종종 무슨 말을 해야 될지 모를 때가 있습니다. 한편에서는 그렇게 보일지 모릅니다. 실제로 모여서 교제해 보면 사람이기 때문에 여러 결점이 드러납니다. 따라서 우리는 죄를 용서받은 죄인이라는 표현을 씁니다.
‘불완전한 면이 있지만 완전한 면만 봐주십시오’라고 때때로 부탁을 하는데 그런 면을 하나님은 기뻐하십니다. 그렇지 못한 부분은 우리들의 책임입니다. 그런 부분이 있다면 우리는 계속 정결함을 받아야 할 것입니다.
세 번째 목적은 예수님을 본받는다는 것입니다.
로마서 8:29절입니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 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라고 기록돼 있습니다. 미리 아신 자들이라는 이 대상은 우리들을 가리키는 믿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또한 미리 아신 자들 속에 들어가는 사람들이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했다고 기록돼 있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셨지만 구원받은 이후에 예수님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해서 미리 정하셨습니다. 지금 현재 예수님을 얼마나 닮았는지는 다른 문제입니다.
그리스도로 그리스도로 옷 입고라는 표현이 신약 성경에 나옵니다마는 다른 말로 말하면 믿은 사람들을 예수님이라는 가운을 입힌다고 생각하시면 이해가 되지 않겠습니까? 예수님이라고 하는 가운을 입고 있지만 가운 속에 있는 그 사람은 불완전할지 모르지만 하나님 아버지는 예수님이라는 가운을 입힌 가운데 그 안에 있는 내용물이 예수님과 동화되기를 말하지 않겠습니까? 어느 한 때 머지않아 예수님은 예수님의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모든 믿는 자들을 변하게 하실 것입니다.
우리들의 죄가 완전히 없어지는 때가 올 겁니다. 이때 예수님께 우리가 갈 때입니다. 우리가 택함 받은 목적의 하나는 예수님을 다 함께 하기 위해서 택함 받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하늘에 갔을 때 예수님을 닮을 것입니다. 이 땅에서는 별로 안 변해 있다가 거기 가서 완전히 변하면 너무 놀라지 않겠습니까? 이렇게 부족한 게 많은데 갑자기 없어졌구나 해서 혹시 놀라지 않겠습니까? 우리들은 예수님의 것입니다.
조금 전 형제님이 시편 22편을 교제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형제라 부르시기를 이라는 단어를 제가 들어 저는 그 말을 듣고 마음이 찔끔했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형제라는 걸 제가 말하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형제님은 요한복음과 히브리서를 열어주었습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1장에서 내 형제들에게라고 말씀했습니다. 벗에서 이번에는 형제, 한 부모를 가진 형제라는 단어가 사용됐습니다.
마지막으로 에베소서 1:3-6절입니다.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
5절에 있는 대로 우리는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아버지의 아들들이 됐습니다. 그 목적은 6절 초반에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다”라고 기록돼 있습니다.
우리들은 예수님의 친구 곧 벗입니다. 예수님의 형제가 됐습니다. 예수님을 장자로 하는 하나님 아버지의 아들들이 또한 됐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공로로 얼마나 놀라운 일이 우리에게 주어졌습니까?
이 놀라운 은혜를 주신 아버지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2026.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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