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계시록 강해(22)
15장
어거스트 반린
“또 하늘에 크고 이상한 다른 이적을 도매 일곱 천사가 일곱 재앙을 가졌으니 곧 마지막 재앙이라 하나님의 진노가 이것으로 마치리로다”(
계시록에 알려진 장래 일과 관련하여 우리는 세가지 상이한 “이적”을 대합니다. 먼저 그리스도의 육신의 혈통인 이스라엘을 가리키는, 해로 옷입은 여자의 이적이 있으며, 그 다음에 사단에게 사로잡힌 미래의 로마제국을 가리키는, 크고 붉은 용의 이적이 있으며(계
계시록에는 그 수가 헤아려진 천사들의 무리가 세차례 나옵니다.
이 일곱 대접은 대환란 동안 퍼부어질, 또 그 뒤를 따라서 그 영광스런 재림과 더불어 어린양의 진노가 퍼부어질 하나님의 진노를 담고 있습니다. 이 대접들은 일곱 나팔과 밀접한 관계가 있으며, 따라서 우리는 그 둘이 동시적으로 일어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나팔의 경우에는 심판이, 제가 믿기에 “삼분의 일” 혹은 “셋째 부분”(이스라엘 민족의 배도한 무리 -슥
“또 내가 보니 불이 섞인 유리 바다 같은 것이 있고 짐승과 그의 우상과 그의 이름의 수를 이기고 벗어난 자들이 유리 바다 가에 서서 하나님의 거문고를 가지고”(
우리는 14장 서두에서 14만 4천의 무리를 보았는데 그들은 이스라엘 땅 시온산에 서 있었습니다. 그들은 대환란을 안전하게 통과하여 살아남게 된 하나님의 지상 백성 이스라엘입니다. 그들은 곧 창세로부텨 그들을 위해 예비된 나라를 물려받을 것입니다. 그러나 본문의 무리는 그 14만 4천이 아닙니다(그 수가 밝혀지지 않았음). 그들은 지상이 아니라 하늘에 있는데, 이는 그들이 서 있는 “유리 바다”가 하늘에 있다고 계시록
계시록
“하나님의 종 모세의 노래 어린양의 노래를 불러 가로되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시여 하시는 일이 크고 기이하시도다 만국의 왕이시여 주의 길이 의롭고 참되시도다”(
본장 2,3절에는 두명의 매우 유명한 인물이 등장하는데 그 둘은 다른 어떤이들보다 훨씬 자주 언급됩니다. 이 둘은 상징적인 이름으로, 또 서로 뚜렷이 대조되는 가운데 나타나는데 하나는 “짐승”이고 하나는 “어린양”입니다. 전자는 사람이고 후자는 하나님입니다. 그리고 문자적으로 짐승은 “거친” 짐승을, 어린양은 “작은” 어린양(본서에 언급된 모든 경우에)을 의미한다는 것을 알면 그러한 대조는 더욱 두드러지게 됩니다.
여기 계시록에서 우리의 복스런 주님은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로서의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시면서 매우 역설적이게도 “어린양”의 칭호를 취하십니다. 거칠고 광포한 짐승과 약하고 유순한 작은 어린양만큼 더 대조되는 것이 있을까요?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께서 이 미래의 “초인간”과, 작은 어린양으로 불리우는 만유의 주재를 표현하시는 방법입니다. 전자는 인간의 모든 교만과 자의지로 인해 스스로를 높여 하나님이라 하는 인간이며, 후자는 한량없는 은혜와 겸손으로 약하고 범죄한 인간의 자리를 취하시고 갈보리 십자가에서 인간을 위해 죽으심으로써 인간의 죄를 친히 담당하신 하나님을 제시합니다. 이 모든 것은 얼마나 진실로 놀라운지! 이것은 우리의 심령으로 얼마나 경배와 기쁨과 놀람이 넘쳐흐르게 하는지!
본장의 이 구속받은 성도들이 모세의 노래와 어린양의 노래를 부르는 것은 하등 이상할 게 없습니다. 모세는 출애굽사건이 보여주듯이 그분의 백성을 이 세상 속박에서 건지신 그리스도를 말해주며, 어린양은 그분의 백성을 영광의 나라로 인도하사 거기서 영원토록 그분의 영광을 찬미케 하시는 그리스도를 말해줍니다.
“짐승”은 계시록에서 36회(6×6)언급되어 있으며 그의 수는 6-6-6입니다. “어린양”은 23회(4×7)언급되어있습니다. 일곱은 온전과 완전의 수인데 이는 온전과 영원한 평안은 그분을 통해서 얻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분께서 하나님의 어린양으로서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하신 까닭에 우리는 이제 이 순교자들과 같이 영원한 구속의 찬양을 부릅니다. 그분의 거룩한 이름을 찬양합니다!
“주여 누가 주의 이름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며 영화롭게 하지 아니하오리이까 오직 주만 거룩하시니이다 주의 의로우신 일이 나타났으매 만국이 와서 주께 경배하리이다”(
그들은 “만국”의 왕께 찬양드립니다. 이 것은 예레미야
“누가 주의 이름을 두려워하지 아니하오리이까?”라는 질문이 예레미야
둘째로 “만국이 와서 주께 경배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 첫째 이유는 경배의 근거를 말해주고 둘째 이유는 경배의 시기를 말해줍니다. 지금은 모든 “구원받은” 영혼들이 하나님을 경배하고 있으나 그 때는 지상의 “모든” 영혼이, 심지어 지옥의 악인조차도 그분께 절하고 찬양드릴 것입니다.
세째로 “주의 의로우신 일이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계시록
“또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하늘에 증거 장막의 성전이 열리며 일곱 재앙을 가진 일곱 천사가 성전으로부터 나와 맑고 빛난 세마포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띠고”(
5절에는 “하늘에 증거 장막의 성전”이라는, 성경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매우 특이한 문구가 발견됩니다. 성전과 장막은 둘 다 지상에 있었는데 이는 그 둘이 이스라엘과 관계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여기서는 그 둘이 하늘에 나타나 있습니다. 이것은, 비록 이 당시 이스라엘이 지상에서 하나님의 진노뿐 아니라 그 대적의 증오에도 완전히 내어준바 된 듯 보이지만 그래도 하나님은 그들을 돌보신다는 것을 암시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지상에서 그들의 증거의 장막을 보지 못하지만 그러나 하나님은 사실 하늘에서 그것을 보시고 이스라엘과의 언약을 기억하십니다. 조상들에 대한 약속 때문에, 또 그리스도의 가치와 사역(장막과, 지성소 안의 시은좌가 있는 언약궤 안에서 그 실체를 드러내고 있는 진리들에 암시된) 때문에, 하나님은 그들을 버리지 않으셨으며, 자신의 이전 백성의 축복을 위해서 지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주관하십니다. 퍼부어진 심판은 그분의 백성을 구원하는 일을 해낼 것입니다
장막의 성전이 하늘에 열려있는데 이는 휘장이 찢겨졌으며,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무한한 가치를 보시고 그분의 백성을 다루시고 있다는 것을 암시해 줍니다. 믿음은 열린 휘장을 통해서=1 안에 들어가 부활하여 영화롭게 되신 보좌에 계신 하나님의 아들을 뵐 수 있게 합니다.
심판이 성전으로부터 나오는데 이는 하나님의 거룩성이 심판을 요구한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한편 재앙은 천사-제사장에 의해 집행됩니다(그들은 이스라엘 대제사장처럼 흰옷을 입고 있기 때문에). 그들은 과거에 제사장들이 은혜의 봉사자들로서 나왔던 성전으로부터 이제 심판을 집행하기 위해 나옵니다. 그리고 그들에 대한 묘사는 계시록
“네 생물 중에 하나가 세세에 계신 하나님의 진노를 가득히 담은 금대접 일곱을 그 일곱 천사에게 주니 하나님의 영광과 능력을 인하여 성전에 연기가 차게 되매 일곱 천사의 일곱 재앙이 마치기까지는 성전에 능히 들어갈 자가 없더라”(
이 놀라운 책에서 후에 알게 되듯이 사실 하늘에는 성전이 없습니다. 그것은 사실 우리가 마땅히 알고 누려야 할 영적인 진리를 전해주기 위해 요한에게 주어진 환상에 불과합니다.
여기에 나오는 심판은 의도적인 것인데, 왜냐하면 천사들이 진노의 대접을 다른 이에게서 받았으며 또한 명령에 의해서만 그 잔을 쏟기 때문입니다. 그 대접들은 금으로 되어 있습니다. 대접 혹은 기명은 놋제단 봉사와 관련하여 사용되었었는데 그 경우에는 재료가 놋이었습니다. 여기에는 이제(은혜의 때가 마감됨)아무 제단도 없고 대접은 금으로 되어 있는데, 이는 이 가련한 세상에 곧 닥쳐올 두려운 심판이, 하나님의 은혜에 기초한 현재의 구원이 그러하듯, 하나님의 영광과 분명히 관계가 있다는 사실을 강조해 줍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믿는 자의 구원에 있어서 그러하듯 그리스도를 거절하는 자의 멸망에 있어서도 영광을 얻으십니다.
우리는 8절에서 진노의 대접이 땅에다 쏟아질 때까지 아무도 성전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러나 구약의 경우에는 대제사장이 향연(香煙)의 보호 아래 흘려진 피를 가지고 지성소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여기서는 아무도 들어갈 수 없는데 그것은 은혜시대가 마감되었고 아무 피나 향기가 이제 소용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을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은혜가 더 이상 베풀어지지 않으며,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기를 거절한 자들에게는 오직 하나님의 심판만이 있을 뿐입니다. 성전은 연기로 가득 찼는데, 이사야가 주님께서 보좌에 높이 앉으신 것을 보았을 때도 그러했습니다(사
(1994년 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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