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나(2)
요나와 그리스도
마태복음 12장 39∼40절에 기록된 주님의 말씀은 그분께서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 들어간 사건을 그분 자신의 죽음에 대한 예표로 간주하셨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줍니다. “요나가 밤낮 사흘을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 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을 땅 속에 있으리라.” 그러나 요나의 경험과 우리 주님의 경험은 얼마나 대조되는지! 우리 주님께서는 죄에 대한-사랑하는 독자여, 당신과 나의 죄에 대한-하나님의 의로운 심판으로서 죽음을 그 모든 두려운 실재 그대로 맛보셨습니다. 그러나 요나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주님을 비방하는 자들이 마태복음 16장에서 다시 한번 표적을 구했을 때 주님은 또 다시 이 요나 이야기를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이같이 그들의 위선을 꾸짖으셨습니다. “너희가 저녁에 하늘이 붉으면 날이 좋겠다 하고 아침에 하늘이 붉고 흐리면 오늘은 날이 궂겠다하나니 너희가 천기는 분별할 줄 알면서 시대의 표적은 분별할 수 없느냐?” 그 당시는 유대 백성에게 실로 “좋은 날”이었는데, 왜냐하면 그들 가운데 참 태양이(the Sun) 밝게 비추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궂은 날”, 곧 그들의 악한 불신앙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임박했습니다····‥하시고 저희를 떠나 가시다.” 이것은 의미심장한 말씀입니다! 백성들의 운명은 확실했습니다. 요나는 그리스도의 흥미로운 모형입니다. 그는 갈릴리에 속했습니다. 가드헤벨은 나사렛에서 그리 멀지 않았습니다. 유대관원들이 “상고하여 보라 갈릴리에서는 선지자가 나지 못하느니라”(요
요나는 선원들에게 자기를 바다에 던지라고 했을 때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는 비록 실패한자이긴 했으나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다 상실하지는 않았습니다. 여호와께서는 그분의 잘못한 종을 위해 큰 일을 행하실 수 있었습니다(또 그렇게 하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요나를 우리의 복스런 주님과 비교해 보아야 합니다. 요나의 경우에는 불순종이 그를 깊은 물에 잠기게 한 반면, 주님의 경우에는 순종이 그분을 깊은 물에 잠기게 했습니다.
“요나가 밤낮 사흘을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 같이····”하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며, 아무도 그분의 말씀을 의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고린도전서 15장 4절에서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성경대로 사흘만에 부활하셨다는 말씀을 대합니다! 구약 어디에서도 이 사실을 명백히 말씀하지 않습니다. 호세아 6장 2절을 떠올릴 수 있으나 거기에는 그리스도가 암시되긴 하지만 표현 자체는 확실히 모호합니다. 그러나 처음부터 모든 것을 아시는 그분께서 주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인상적인 예표를 보여주기 위해 요나를 밤낮 사흘 동안 깊은 물속에 두셨습니다. “사흘”이란 말은 죽은 가운데서 살아난 아들과 같은 이삭(히
요나는 “깊음 속 바다 가운데 던져졌으며”, “주의 파도와 큰 물결이 다 내 위에 넘쳤나이다”라고 고백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의 신실치 못함이 그를 그 지경에 빠뜨린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당한 모든 일이 다른 사람들에게 미친 결과는 놀라웠습니다. 처음에는 각각 자기 신에게 기도하던 이방 선원들이 여호와를 알게 되었습니다. 요나는 비록 불순종의 길에 있었지만 “나는 히브리 사람이요 바다와 육지를 지으신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로라”고 밝히기를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선원들은 한 소리로 여호와께 부르짖으며 마지 못해 요나를 바다에 던졌습니다. 폭풍이 갑자기 멎고 하나님이 하신 것임이 분명해지자 “사람들이 여호와를 크게 두려워하여 여호와께 제물을 드리고 서원을 하였습니다.” 이것은 참된 회심으로 보이는데, 사람들은 대개 위험할 때는 하나님께 부르짖다가 위험이 지나가면 하나님을 잊어버리게 마련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의 마음을 그분께로 돌이키시기 위해서 얼마나 놀랍게 역사하시는지! 바다의 폭풍, 한밤의 지진, 조용한 복음 집회 등 모든 것이 그분의 목적을 이루는데 사용됩니다. 그분은 그분의 온전한 지혜를 따라 선히 역사하십니다.
요나가 깊음의 무덤에서 나와 마침내 니느웨로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자 왕으로부터 서민에 이르기까지 모든 백성이 하나님께 자복했으며 임박한 심판이 철회되었습니다. 이것은 요나의 주님께서 예루살렘에서 전파하실 때와 얼마나 대조적인지! 그 때는 아무 회개도 없었으며, 때가 되면 크고 흰 보좌에 앉으실 그분께서 말씀하시기를, “심판 때에 니느웨 사람들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들이 요나의 전도를 듣고 회개하였음이어니와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으며! “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요나의 경험과 전도가 이스라엘에게 속하지 않은 많은 사람들에게 축복과 구원을 가져다 주었듯이, 우리 주님의 실제 죽음과 부활은 온 세상의 수 많은 사람들에게 구원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그분은 세상에 계시는 동안 이스라엘의 메시아로서 제 위치를 지키셨으며, 그분을 다윗의 아들로 칭한 두로 여인의 호소를 거절하셨습니다. 그리고 열두 제자를 파송하실 때도 이방인의 길로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의 마을로도 가지 말고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
물고기 뱃속에서
순종의 길은 축복의 길입니다. 거기서 평화와 사귐이 발견됩니다. 불순종과 자의지는 얼마간은 번성하는듯 보일 수 있으나 우리를 한량없이 사랑하시는 그분께서 그분의 자녀가 계속 그 가운데 있도록 허락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분의 극히 지혜로운 징계의 손길로부터 재난이 임합니다. 폭풍의 와중에서 다른 이들은 도움을 부르짖고 있는데 요나는 잠을 자고 있었습니다. 양심이 그의 자의지에 의해 질식당하고 있었습니다. 폭풍이 갈릴리바다에 몰아치던 때 주님께서는 뱃고물을 베고 평화로이 주무셨습니다. 온전한 믿음의 사람으로서 그분은 아버지의 돌보심을 확신한 가운데 곤한 몸을 쉬게 할 수 있었습니다. 그분이 잠든 모습은 요나가 잠든 모습이 이방인 선원들을 놀라게 한 것만큼 제자들을 놀라게 했습니다. 그러나 이 도피하는 선지자와 참 인간이신 그리스도 예수는 얼마나 대조를 이루는지!
요나가 물 속에 던져지자 큰 물고기가 그를 삼켰습니다. “예비했다”는 것은 그 목적을 위해서 특별히 지어졌다는 것을 뜻하지 않습니다(비록 그렇게 하는 것이 “바다와 육지를 지으신 하나님”에게는 쉬운 일이겠지만). 그것은 단순히 그 고기가 그 일을 위해 “지정되었다”(appointed)는 의미입니다. 같은 단어가 다니엘과 그의 친구들을 위해 주어진 음식과 관련하여 쓰였습니다(단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서 그(의) 하나님 여호와께 기도하여 가로되·..” 여기서 “그의” 하나님이란 표현을 주목하십시오. 하나님과의 관계가 완전히 상실된 것이 아니었습니다(삼상
선지자가 성전을 언급한 것은 또 다른 면에서 주목할 만합니다. 여호와의 성전은 예루살렘에 서 있었고 요나는 신분상 하나님의 처소에서 떠나 벧엘과 단에 우상 신전을 세운 열 지파에 속했습니다(왕상
마찬가지로 오늘날 하나님께로부터 가르침을 받는 영혼들은 “한 몸과 한 성령이 있다”는 진리를 붙들고(엡
2장에 나오는 요나의 기도는 대부분 시편의 인용구로 이뤄져 있습니다. 요나의 마음은 분명 기록된 말씀으로 충만했을 것입니다. 우리 역시 그러한지요? 이때는 포켓용 성경도 없었고 성경이 다 기록된 형편도 아니었습니다. 더군다나 물고기 뱃속과 같이 어두운 곳에서는 글을 읽는 것이 불가능했습니다. 그러나 요나는 이미 그 마음에 새겨진 말씀을 기억해낼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이 점에 있어 요나보다 훨씬 유리한 형편입니다. 구약시대에는 알려지지 않은 놀라운 은혜와 영광의 계획들을 담은 하나님의 모든 계시가 우리 손에 있습니다. 이 성경 전체를 우리의 영혼 깊이 소유하여 혹 우리가 가진 성경을 빼앗긴다 하더라도 여전히 우리의 믿음을 유지시키고 양육시킬 말씀을 우리 속에 간직하게 하고픈 마음은 없는지요?
시편에 대한 묵상과, 시편기자들이 경험한 구원이 요나에게 확신을 주었습니다. 외관상 절망적인 상황에서 그는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진 약속에 대한 그의 확신을 표현했습니다. 그는 구원을 확신했습니다! 그는 다시 여호와의 성전에서 예배드리게 될 것을 굳게 믿었습니다! “구원은 여호와께로서 말미암나이다”가 그의 승리의 맺음말이었습니다!
선지자의 자만과 자의지가 중징계를 받았으며, 그의 자원이 바닥나고 그의 소망은 오직 하나님께 있었습니다. 모든 죄인은 처음 하나님께 나아올 때 이 교훈을 배워야 하며, 아울러 실패한 성도도 어디서 방황하고 있든지 이 교훈을 기억하고 돌아와야 합니다. ♣
(1995년 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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