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중심 성경공부(4)
요 나
W. W. 페러데이
이상한 비둘기
하나님의 이름만이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적어도 성경 역사에 관한한 사람의 이름도 의미가 있습니다. 때로 그것은 그 이름을 소유한 자의 믿음을 표현해 주었는데 하와, 노아, 요셉의 경우가 그러합니다. 때로는
요나는 “비둘기”란 뜻입니다. 그의 부모가 어떤 의도로 그런 이름을 지어주었는지는 밝혀져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이름은 성령께서 그리스도 예수께로 비둘기의 형채로 내려온 일을 생각나게 합니다(눅
요나는 사도행전
니느웨는 회개를 하여 왕과 방백과 모든 백성이 그들의 공분한 창조주 앞에 부복했습니다. 주님께서 누가복음 15장에서 가르쳐주듯이 하늘은 기쁨으로 가득했습니다. 그러나 하늘은 기뻐했으나 요나는 “심히 싫어하고 노했습니다”(욘
이 낙심한 선지자-자비를 베풀기를 기뻐하시는(눅
물론 그가 불평스런 기도를 아뢸 때는 영적인 상태가 매우 좋지 않았음이 분명하지만 그럼에도 요나는 하나님과의 진정한 관계에 대한 모든 감각을 잃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그분을 “여호와”로 부르면서 이렇게 아뢰었습니다. “여호와여 내가 고국에 있을 때에 이러하겠다고 말씀하지 아니 하였나이까 그러므로 내가 빨리 다시스로 도망하였사오니 주께서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신 줄을 내가 알았음이니이다.” 만일 그가 하나님에 관한 그 모든 선한 요소들을 진정 알았다면 그것을 온 세상 죄인들에게 선포하는 것을 마땅히 기쁘게 여겼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에 대해 요나 보다 더 친밀히 알고 있습니다. 갈보리 십자가가 요나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은혜와 자비를 나타내었습니다. 남녀노소 모두에게 그 십자가를 전하는 것이 우리의 기쁨이 아닙니까? 만일 우리가 그러한 증거에 성공을 거둘 수 있다면 우리의 마음은 하나님의 그 자비한 마음과 필경 일치될 것입니다. 우리는 멸망하는 자들에 대한 관심을 넓혀야 하며 “아무쪼록 몇몇 사람들을 구원하고자” 우리의 기도와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고전
이제 요나와 마태복음 25장 24절의 종 사이의 대조를 살펴봅시다. 후자의 종은 그의 주인의 얼굴을 바라보며 “주여,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심지 않은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데서 모으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요나는 “주께서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신 하나님이신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인간의 마음만큼 왜곡되고 모순된 것이 또 있을까요? 마태복음 25장의 종은 그의 주인을 완고하고 불합리하다고 고소했습니다. 그리고 요나는 그의 주인이 너무 선하다고 불평해했습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누가복음
불행한 요나여! 그는 분명히 하나님께로서 났으나 하나님의 자비의 마음과 전혀 조화를 이루지 못했습니다. 따라서 니느웨 사람들에게 베푼 그분의 자비가 그에게는 기쁨이 되는 대신 분개함이 되었습니다. 우리 모두 이 중요한 교훈을 지나치지 말도록 합시다. 주님의 제자들은 그분과 늘 함께 있으면서도 그것을 더디 깨달았습니다(마
“그 성 동편에”
여호와께서는 다루기 힘든 그 종을 엄히 징책하시는 대신 은혜롭게 하감하사 그와 더불어 얘기를 나누고자 하셨습니다. “너의 성냄이 어찌 합당하냐?” 천지의 주재되신 우리 하나님과 이 세상 군주들은 얼마나 대조되는지! 만일 요나가 이 세상 군주 앞에서 그와 같이 거역하는 태도를 보였다면 그 목숨이 보존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밖에 있는” 죄인들을 다루실 때나 “안에 있는” 성도들을 다루실 때나 항상 사람들의 마음을 얻고자 하십니다.
요나서 4장 4절의 은혜로운 질문이 9절에서 반복되었습니다. 첫번째 질문에 대해서 선지자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은 것으로 보이나 다음과 같은 의아한 기록이 나옵니다. “요나가 성에서 나가서 그 성 동편에 앉되 거기서 자기를 위하여 초막을 짓고 그 그늘 아래 앉아서 성읍이 어떻게 되는 것을 보려 하니라.” 이것은 어떤 모습인지! 하나님에 의해 극히 관대한 대우를 받은 사람이 하나님이 그 마음을 돌이켜 성을 멸망시키시기를 바라며 앉아 있다니(편히 쉬고 있다니)! 이 얼마나 이기적이고 자기 중심적인 모습인가!
여기서 “요나보다도 크고”, “모세보다도 큰”(신
그분께서 감람산을 내려오자 오랫동안 사랑을 받았으나 극심한 죄를 범한 예루살렘이 시야에 들어왔고 이에 그분의 눈에는 눈물이 가득 고였습니다.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 가라사대 너도 오늘날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면 좋을뻔 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기웠도다 날이 이를지라 네 원수들이 토성을 쌓고 너를 둘러 사면으로 가두고 또 너와 및 그 가운데 있는 네 자식들을 땅에 메어치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니 이는 권고 받는 날을 네가 알지 못함을 인함이니라 하시니라”(눅
이 얼마나 부드러운 심령의 표현인지!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분께서 그러한 모습을 보이셨다니! 예루살렘을 향하여 우신 그분이 바로 호세아 시대에 “에브라임이여 내가 어찌 너를 놓겠느냐 내가 어찌 너를 아드마 같이 놓겠느냐 내 마음이 내 속에서 돌아서 나의 긍휼히 온전히 불붙듯 하도다”라고 말씀하신 그 엄위하신 분이십니다(호
여호와께서는 아직 요나를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 여호와께서 박넝쿨을 준비하사 요나 위에 가리우게 하셨으니 이는 그 머리를 위하여 그늘이지게 하며 그 괴로움을 면케 하려 하심이었더라 요나가 박넝쿨을 인하여 심히 기뻐하였더니.” 다시 말하지만 우리 하나님은 얼마나 인자한 분이신지: 여기에 엄한 징계를 받아 마땅한, 그리고 하나님의 사역 일선에서 영원히 추방당해 마땅한 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그릇된 기질로 인해 당한 고난에서 하나님의 특별한 보호를 입었습니다. 그러나 그 보호는 일시적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다음날 아침 벌레를 예비하사 “그 박넝쿨을 씹게 하신” 것입니다.
욥은 말할 수 없는 손실-재산, 종, 자녀 등-을 겪은 뒤에 “일어나 겉옷을 찢고 머리털을 밀고 땅에 엎드려 경배하며 가로되 내가 모태에서 적신이 나왔사온즉 또한 적신이 그리로 돌아 가올지라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했습니다(욥
그리고 요나나 욥보다 훨씬 더 한 고난을 당하신 그분께서 환란으로 에워싸인 가운데 말씀하시기를,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라고 하셨습니다(마
그러나 요나는 반발적이었습니다. 그는 본서에서 자신이 두번(물고기 뱃속과 니느웨 부근에서) 여호와께 기도 드렸다고 말합니다. 첫번째는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 마음을 진정으로 토로한 것이었고 두번째는 니느웨 여행이 그의 기대대로 끝나지 않은 까닭에 원망조로 하소연한 것이었습니다. 이 분노한 선지자는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음이니이다”라고 두번 아뢰었습니다. 만일 우리 중에 “우리를 어두운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할” 마음이 없는 이가 있다면 그는 실로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나을 것입니다(벧전
그를 보내신 분의 성품을 잘못 제시하는 증인은 이 도움이 필요한 세상에서 더없이 쓸모가 없는 것입니다.
벌레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이른 아침에 그 파괴적인 일을 했습니다. 이어서 해가 뜨거워지고 무더운 동풍이 불어왔습니다. 가련한 요나는 몹시 괴로워하며 “내가 성내어 죽기까지 할지라도 합당하니이다”라고 하나님께 원망했습니다. 이에 여호와의 마지막 경책의 말씀이 들려왔습니다 “네가 수고도 아니하였고 배양도 아니하였고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망한 이 박넝쿨을 네가 아꼈거든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치 못하는 자가 십이만 여명이요 육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아끼는 것이 어찌 합당치 아니하냐?”
이 책은 이러한 질문으로 끝납니다. 요나는 그 질문에 최선의 답을 해야 했으며 오늘날 독자도 스스로 그 질문에 답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아는,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복스럽게 계시된 그 하나님은 회개한 성을 살려두실 수밖에 달리 방도가 없으셨습니다. 그러나 이 고집스런 전도자는 달랐습니다. 그의 개인적인 위 엄이 실추될 위 기였고(그는 적어도 그렇게 판단했습니다) 이에 그는 그의 말이 땅에 떨어지느니 차라리 니느웨 온 백성이 멸절되기를 바랬습니다 그는 자신에게 혜택을 준다는 이유로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망한 박넝쿨은 아끼면서도 수천 수만의 고귀한 영혼은 불쌍히 여기지 않았습니다. 만일 요나가 생애 후반에 이 책을 됐다면 아마 그는 성령의 인도 아래 이 마지막 장을 기록하면서 부끄러움으로 낮을 붉혔을 것입니다.
이 교훈을 놓치지 말도록 합시다. 교만과 자존심을 멀리 하십시오. 바울처럼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말하는 법을 배웁시다(고후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이기 때문이라.”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고전
(1995년 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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