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혀진 명령-거룩하라
제10장: 사실을 바로 이해함
우리 안에 거하고 있는 죄로부터 자신을 구원하는데에 특별히 도움이 되는 진리들이 몇가지 있는데 함께 살펴보도록 하자.
새 성품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두 가지 성품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롬
옛성품은 전적으로 악하다. 바울의 경험이 곧 우리의 경험이다.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롬
새성품은 그리스도의 생명이기 때문에 전적으로 선하다. 그리고 오직 선을 행하기에만 능하다. 이 새성품은 청결하고 고귀하며 의롭고, 사랑스러우며 또한 진실하다. 새성품의 모든 생각과 소욕, 동기 그리고 행동은 다 그리스도를 닳았다. 이 서로 다른 두 성품이 지속적으로 서로 투쟁한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이 둘은 절대로 서로 화평 가운데 살 수가 없다). 이 투쟁은 거듭날 때부터 시작된다. 새신자는 전에 경험해보지 못한 내적 투쟁을 경험하게 된다. 옛성품은 중력의 법칙처럼 그를 끌어내리기를 원하고 새성품은 그를 높은 거룩의 경지에 올려놓기를 원한다. 이 두 성품의 싸움은 아주 치열해서 때로 신자는 그의 구원을 의심할 때도 있다. 그러나 의심해서는 안될 것이다. 사실은 그가 그러한 투쟁이 있다는 것은 그가 구원받은 사실을 증거하는 하나의 증거이다. 만일 그가 두 성품을 가지지 않았다면 그러한 투쟁을 하지 않을 것이다. 두 성품의 싸움을 리브가의 태속에서 싸우는 두 아이로 비교하기도 하는데 그녀는 “이같으면 내가 어찌할꼬”라고 외쳤다. 리브가의 태속에서 일어났던 일이 하나님과 함께 나가기를 원하는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 마음 속에서 일어나고 있다.” 우리는 성령님의 임재를 느끼는 동시에 배교자의 임재를 느낀다. 젊은 그리스도인들은 ‘내가 왜 이런가?’라고 탄식하는 경향이 있다. 늙은 형제 육이 그의 길을 가기 원하는 것이다. 젊은 형제 영은 조용하고 차분하게 거친 늙은 형제를 이길 수 없을 것같아 보인다. 그러나 리브가의 아이들처럼 장자가 차자를 섬기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육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영에서 나온 모든 것을 축복하셨기 때문이다”(번 하우스)
중생할 때 시작된 싸움은 이 세상에서 삶을 살아갈 동안 계속된다. 이 싸움은 휴거되거나 죽기 전에는 피할 우 없는 싸움이다. 그러나 한 가지 기쁜 소식은 우리가 주님을 볼 때 우리는 이 옛성품을 떠나 주와 같은 영광의 몸으로 변하게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모두가 다 이와 같은 투쟁이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는게 중요하다. 바울은 우리들에게 사람이 감당할 시험밖에는 우리들에게 당한 것이 없다고 말하고 있다(고전
한 사람이 항상 서로 으르렁거리고 싸우는 그의 개에 대해 불평했다. 그의 친구가 그에게 어떤 개가 이기느냐고 물어보았다 그는 “내가 ‘물어’라고 말한 개가 이긴다”라고 말했다. 우리의 두 성품도 이와 같다. 우리가 물라고 말한 성품이 이기는 것이다. 이것은 뻐꾸기의 경우를 통해서도 그 예를 들 수 있다. 뻐꾸기는 다른 새의 집에다 알을 낳아 그 새로 하여금 자기의 알을 부화하게 만든다. 그 새가 알을 품어 부화시키면 먹이를 줄 때 뻐꾸기 새끼도 함께 먹이를 먹는데 모든 것은 어느 새끼가 먹이를 더 많이 먹느냐에 생존이 달려있다. 뻐꾸기 새끼가 먹이를 독차지하면 다른 새끼는 죽게 된다. 우리의 삶도 이와 같다.
그것을 한 것은 내 옛성품이었다
우리는 우리의 옛성품 핑계를 대고 죄를 지어서는 안될 것이다. 그것은 핑계를 다른 사람에게 돌리는 것인데 되지도 않을 일이다. 하나님은 성품에다 책임을 물으시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에게 물으신다. 당신은 아마 과속으로 적발된 어떤 사람에 대한 소설같은 이야기를 알고 있을 것이다. 그는 경찰관에게 “선생님 속도를 위반한 것은 제가 아니라 제 옛성품입니다”라고 말했다. 경찰관은 그에게 “그래요? 그러면 당신의 옛성품이 속도위반을 했으니 그에게 3만원 그리고 공범인 새성품에게 3만원, 그래서 6만원의 벌금을 물리겠습니다”라고 말했다. 옛성품에게 핑계를 돌려서는 안될 것이다.
죄를 짓는 것과 습관적으로 짓는 것
우리가 알아야 할 또 다른 중요한 진리는 죄를 범하는 것과 좌의 지배를 받는 것은 서로 다르다는 것이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죄의 지배를 받지 않지만 죄를 범한다. 무죄하지는 않지만 죄 아래 있지 않은 것이다. 요한은 그의 첫 서신서에서 믿는 자도 죄를 범한다는 것을 분명히 하고 있다. 그는 만일 우리가 부인하면 스스로 속이고 하나님을 또한 거짓말장이로 만드는 것이라고 말하였다(
전혀 죄를 안 지을 수도 있는가?
사람들 중에는 그리스도인이 전혀 죄를 짓지 않는 경지 즉 완전히 성별된 상태에 이를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일반적으로 구원받은 직후 즉 극적인 성령의 역사를 체험한 후 죄의 성품이 제거되며 그후로부터는 죄를 범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죄가 무엇인지 잘 모르는 사람들이다. 하나님의 온전하신 기준에 이르지 못한 모든 생각이나 말 그리고 행동이 다 죄이다(롬
어떤 이는 아마 “만일 그리스도인이 죄를 피할 수 없다면 왜 요일
다음의 말씀들에 주목하라. “만일 우리가 죄없다 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그러나 11절에서 바울은 우리들에게 죄에 대하여 죽은 자로 여기라고 말하고 있는데 이는 우리의 매일의 삶을 말한다. 만일 2절의 의미가 죄가 전혀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면 11절의 권고는 불필요한 것이다. 다른 세 구절도 신자들이 죄에서 해방되었다고 말하고 있다(롬
그는 죄 가운데 살지 않으며 죄짓는 것이 그의 삶의 특성이 아니다. 그렇다면 온전한 거룩에 대한 가르침이 매우 중대한가? 하나님 말씀과 대치되는 교리라면 무엇이든지 중대한, 다시 말해 심각한 것이다. 온전히 무죄한 상태에 이르기를 위태 투쟁했던 많은 진지하고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이 환멸 가운데 빠졌으며 많은 경우에 압박과 정신쇠약으로 인해 고통을 당했다. H. A 아이언사이드는 그의 책 “거룩 그 허와 실”이라는 책에서 그 자신이 거룩에 이르기 위해서 피나는 투쟁을 했던 것, 그로 인해 정신적인 쇠약에 빠졌던 일, 그리고 그리스도인의 거룩에 대한 다른 진리에 이르게 되었을 때의 평강에 대해서 그 자신의 경험을 적고 있다.
내 스스로는 어쩔 수 없이 나는 죄를 지을 수 밖에 없어
우리는 죄를 지을 수 밖에 없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성경은 절대로 그렇게 말하고 있지 않으며 이 또한 진리가 아니다. 만일 우리가 죄를 지을 수 밖에 없다고 말한다면 이는 사실 성령님이 우리로 시험을 이기게 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하지만 성령님은 그 능력을 가지고 계신다. 문제는 그분이 아니라 우리 자신들이다. 우리가 그 능력을 활용하지 못하여 죄를 짓는다. 그리고 우리가 원할 때 우리는 죄를 짓는다. 죄를 지을 수 밖에 없다고 말하는 것은 죄가 신자들을 주관치 못한다는 기독교의 기초를 부인하는 것이다(롬
그리고 나는 죄를 지을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은 자신을 속이는 것이다(요일
관계와 교제
그리스도인이 죄를 지을 때 그의 구원은 잃어버리지 않지만 구원의 즐거움은 잃어버린다. 가족으로서 하나님과의 교제는 단절되지만 관계는 단절되지 않는다. 그는 중생을 통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되며 아무것도 그 관계를 변화시킬 수 없다.
그러나 그가 죄를 지을 때 “하나님은 빛이시고 그 안에는 어두움이 조금도 없으시기 때문에 “(요일
극복할 수 없는 죄가 있는가?
우리들은 그가 지을 수 있는 어떤 죄로부터라도 건짐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고전
한번에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발전과정이 필요함
우리가 또 알아야 할 중요한 사실은 단 한번의 경험으로 우리가 영원히 우리 안에 거하고 있는 죄로부터 해방되는게 아니라는 것이다. 불행하게도 이러한 사실은 오늘날 교회들에서 때로 부인되기도 한다 목회자들은 때로 교인들에게 거룩에 이르는 지름길을 소개하기도 한다. 그들은 분위기를 조성한 후에 사람들로 앞 “제단”에 나와 성령의 충만 또는 승리의 삶을 살 수 있는 능력을 받으라고 권한다. 만일 그러한 극적인 체험들이 그들을 자동적으로 그리고 영구적으로 한단계 더 높은 거룩의 경지에 올려놓을 수 있다고 믿는다면 그들은 속은 것이다.
죄의 유혹으로부터의 구원이란 그때 그때 되어지는 일이지 한번에 순간적으로 되어지는 일이 아니다. 약속은 “네 사는 날을 따라서 능력이 있으리로다” (신 33:25)이다. 우리에게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엡
고범죄
그리스도인들 중에는 자신이 히브리서
승리에 도움이 되지 않는 것들
이제 이 장을 마치기 전에 한가지 더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을 말한다면 그것은 거룩한 삶을 사는데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 행동이나 자세가 있다는 것이다. 금욕주의는 거룩에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 골로새서
마지막으로 승리는 낙심하여 포기한 자에게도 임하지 않는다. 그것은 패배한 것이며 하나님은 패배한 자를 사용하시지 않는다.
이와 같은 것들이 바로 우리가 알아야 할 것들이다. 이제 우리가 취해야 할 행동들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자. ♣
(1996년 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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