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리와 사랑
로빈 매키온
사랑하는 성도님들과 함께 오늘 밤이 전주에서 마지막 집회가 되겠습니다. 전주남부에 온 것을 제가 아주 즐겁게 누리고 있습니다.오늘 저녁에는 베드로전서를 보고자 합니다.
벧전
15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자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16 기록하였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하셨느니라
17 외모로 보시지 않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판단하시는 자를 너희가 아버지라 부른즉 너희의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
18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의 유전한 망령된 행실에서 구속된 것은 은이나 금같이 없어질 것으로 한 것이 아니요
19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니라
20 그는 창세 전부터 미리 알리신 바 된 자나 이 말세에 너희를 위하여 나타내신 바 되었으니
21 너희는 저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시고 영광을 주신 하나님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믿는 자니 너희 믿음과 소망이 하나님께 있게 하셨느니라
22 너희가 진리를 순종함으로 너희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 거짓이 없이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렀으니 마음으로 뜨겁게 피차 사랑하라
23 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하나님의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24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이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25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하였으니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
2 갓난 아이들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이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
3 너희가 주의 인자하심을 맛보았으면 그리하라
어제 저녁에 드렸던 말씀이 오늘 연결이 되겠습니다. 어제에 이어서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베드로전서는 놀라운 서신입니다. 베드로 자신이 놀라운 사람이었습니다. 베드로에게 두드러진 것은 또한 이것입니다. 사도행전에서 그는 유대인들이 복음을 거절함에 따라서 점점 사라져가는 모양새를 가지고 있습니다. 베드로가 사도행전에서 마지막으로 언급된 것은 15장에서 예루살렘에서 했던 모임과 연관이 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2장, 갈라디아서 2장 이후로 우리는 더 이상 베드로에 관한 기록을 읽을 수가 없습니다. 이것은 우리들에게 충격이겠습니다. 한편으로는 이상스럽게 보일 것입니다. 성령께서는 사도행전 15장 그 이후의 활동에 대해서는 침묵을 하고 계십니다. 거기는 몇가지 이유들이 있겠습니다. 저는 진정한 대답은 할 수 없습니다. 이 언급을 보게 되면 지금 현재의 여러 세계들을 보게 되면 베드로가 필요한 특별한 시기임을 알 수 있습니다. 베드로가 말한 말씀을 통해 보면 지금도 많은 잘못된 가르침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마
“예수 그리스도의 한 사도인 베드로는(영어로)” 여기서 베드로는 여러 사도 중에 한 사도인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여러 사도 중에 자기가 우두머리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함께 장로 된 자요”
너희가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에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7절 초반에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성경은 이와 같이 약속을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믿음이 시험을 받아야 합니다. 베드로는 이 말씀을 쓰기 위해서 주님께로부터 시험을 받았습니다. 눅 22장을 다시 생각해 주시기 바랍니다. 시몬아 사단이 밀까부르듯 하려고 너를 요청했다라고 했습니다. “내가 너를 위하여 기도하였노니 너의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위해서” 이것은 베드로의 믿음이 시험을 당하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울면서 그 시험을 통과했습니다. 베드로는 개인적으로 이 믿음의 시련을 경험했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쓰기 위해서 그 믿음이 잘 정제되었습니다.
우선 베드로전서와 후서의 차이를 잠시 비교해 보겠습니다.
베드로전서는 그 명칭을 들 때 그리스도라는 명칭을 들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라는 명칭은 위대한 구속적인 명칭입니다. 바울이 로마서를 쓸 때에 “그리스도께서 불의한 자를 위하여 죽으사”(롬
고전
베드로후서로 가면 주도적인 용어가 “주”라는 용어로 바뀝니다. 주라는 명칭은 지배하는 의미를 갖는 명칭입니다. 베드로후서에서는 주의 날이라는 용어를 베드로가 골라서 쓰고 있습니다. 주께서 그 약속에 관해서 무관심하지 않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오래 참으심이 구원이 된 줄로 알라고 말합니다. 베드로후서에서는 지배하는 명칭인 주라는 용어를 베드로가 골랐습니다. 베드로전서는 구속을 의미하는 그리스도라는 말을 골랐습니다. 이 두 서신에 흥미로운 비교 중에 하나는 주된 문제는 핍박에 대한 두려움이었습니다. 베드로는 전서에서 15번 환난이라고 핍박에 관련된 용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 고난을 성도들이 통과하는 것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베드로전서에서는 핍박을 두려워하는 것이 주된 문제입니다. 베드로후서는 다른 문제를 말하고 있는데 이것은 다른 고난도 아닙니다. 베드로후서는 핍박을 두려워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거짓된 가르침이 문제였습니다. 예를 들어 벧후
베드로전서에서는 핍박을 두려워하는 것이 문제였는데 핍박의 문제에 대한 해답은 무엇입니까? 베드로전서에서 핍박에 관련된 환난을 15번 언급하고, 영광을 10번 언급했습니다.
마지막 부분에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바랄지어다” 즉 “소망할지어다”를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소망이 부활과 연관되는 것을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베드로후서로 가면, 거짓교사에 대한 대답은 완전한 지식입니다.
여기의 앎으로는 헬라어에서는 ‘충만한 앎으로’라고 표현되어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충분히 안다는 것이 거짓교사에 대한 대답이 되는 것입니다. 안다는 것은 오류에 대한 대답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으로 끝나는지를 보면
오늘의 주제로 돌아가서 전서를 세부분으로 나누는데 많은 시간을 사용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21절에서 누구입니까? 20절과 “너희는” 라는 말이 연결이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믿는 자들을 가리킵니다. 여기에서 일반적인 표현을 보기 바랍니다. 베드로는 21절에서 너희는 하나님을 믿는 자들이라고 쓴 이것은 옳습니다. 자세히 보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믿는 자이지 그냥 믿는 자가 아닌데 이 점을 주의하기 바라며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요점입니다. 이것은 구속적인 그리스도를 다루고 있다는 것을 주목하기 바랍니다. 여러분은 유대인의 지도자들을 아는데 그들은 그리스도를 믿지 않았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아들을 믿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아들을 제쳐놓고 하나님을 믿는 것은 불가능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것을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 가운데서 하나님을 믿을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믿을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베드로가 말하는 바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을 믿는 바를 말하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 되어 있습니까?
“그리스도께서도 한 번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누구를 통해서입니까? 그리스도를 통해서. 그 어떤 자도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할 수 없습니다. 우리를 위해서 고난을 받으셨는데 그 이유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시려고 돌아가셨습니다. 그래서 반드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왜 베드로가 사도행전 4장에서 이런 말을 하는 그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유대인 지도자들 앞에서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말한 다음에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을 베드로는 말했던 것입니다.
여기에 하나님이 두번 언급됩니다. 처음에 언급되어 하나님을 믿으며, 또한 믿음과 소망이 하나님께 있게 하셨습니다. 이 모두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입니다.
22절에 “너희가 진리를 순종함으로 너희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 거짓이 없이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렀으니 마음으로 뜨겁게 피차 사랑하라”
여기서 베드로가 처음으로 우리의 시선을 돌리게 한다는 것에 주목하기 바랍니다. “너희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 여기서 영혼은 그 사람 존재 전체를 말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깨끗이 하여”라는 말은 불안전시제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그것이 시작이 되었고 계속 진행되는 것을 말합니다.
예를 하나 들겠습니다. 베드로가 이 말을 할 때는 대제사장을 연상하면서 말했다고 학자들은 말합니다. 출 29장에 보면 아론이 대제사장이 되기 위해서 아론의 몸 전체가 한 번에 깨끗함을 입었습니다. 이것은 단번에 깨끗함을 입은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이 바로 한번에 일어났던 사건입니다. 다른 말로 말하면 그 이후에 성막에 들어갈 때 물두멍에서 손발을 씻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베드로가 이 말씀을 인도 받을 때 다락방에서 가르치신 주님의 가르침을 연상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주님께서 허리를 굽혀서 베드로의 발을 씻기시려고 했습니다. 베드로가 주께서 제 발을 씻기실 수 없습니다고 할 때 주님께서는 내가 네 발을 씻기지 않으면 너는 나와 상관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베드로는 발뿐 아니라 몸도 씻겨 주십시오. 주님의 대답이 중요합니다. 베드로는 발뿐 아니라고 했는데 주님께서는 “목욕한 자”는(이것은 총체적으로 한번에 씻는 목욕을 말하는 것입니다.) 발만 씻으면 된다고 하셨습니다. 다른 말로 말하면 단번에 씻었지마는 지속적으로 씻는 것이 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베드로가 바로 이것을 마음에 두고 한 말로 보여집니다. 이것은 믿는 자들에게 사용되는 말입니다. 이것은 회개한 이후의 사람들에게 말하는 것이며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를 보는 것입니다.
“너희가 진리를 순종함으로 너희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
이 진리는 명백하게 복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엡
이 편지에서 베드로는 복음이라는 말을 4번 사용합니다. 2번은 1장에서 2번은 2장에서 언급합니다. 1장의 두 언급을 보면
1: 25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하였으니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
“너희에게 전한 이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 고 했으며 너희가 들었다고 했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라고 했습니다.
25절 마지막을 다시 보면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 라는 말씀인데 이 말씀을 ‘전한 복음’입니다. 여러분 오늘날에 우리는 현대와 같은 사회에 살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복음을 영화로 전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드라마 같은 프로그램을 통해서 전하는 것이 좋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또한 음악을 통해서 전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저는 성경을 통해서 여러분에게 도전을 드리고 싶습니다. 바울은 사도행전 13,14장에서 복음을 전한 많은 경우를 볼 수 있습니다.
22절로 가서 “너희가 진리를 순종함으로 너희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 베드로는 여기서 순종이라는 말을 대단히 강조하고 있습니다. 여기 구원받은 사람들은 진리를 순종함으로 구원받은 사람들입니다.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전파된 것을 말씀드렸습니다. 바울은 “모든 민족으로 순종케 하려고”라고 말했습니다(롬
“믿지 아니하는 자” 즉 다른 말로 말하면 순종치 아니하는 자에게는.
그래서 베드로 서신을 받는 믿는 사람들은 복음을 순종함으로써 믿는 자들인 것입니다. 이것이 매우 흥미롭지 않습니까?
“순종하는 자식처럼” 다른 말로 말하면 순종의 자식이라는 의미에도 관계되는 것입니다. 제가 보는 성경 난하주에 다비라는 분이 “순종의 자식”으로 번역했습니다. 순종의 자식이라는 이면에 있는 의미는 이런 것입니다. 그것은 그 특징이 순종이라는 특징을 가진 자식이라는 의미를 가지는 것입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생명적으로 순종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해를 위해서 대비를 시켜 보겠습니다.
“너희가 진리를 순종함으로 너희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 (Spirit unto-KJV, 개역성경에는 없음) 여기서 말하는 핵심은 큰 균형이 있다는 것을 주목해야 합니다. 모든 회개는 사람 측면에서 책임이 있어야 합니다. 베드로가 순종을 말하는 의미는 바로 여기에 있는데 사람 측에서의 책임이 반드시 있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성령으로라는 말이 영어성경에 있는데 이것은 하나님 측에서의 활동입니다. 모든 회개의 경우에는 성령의 역사가 있고 또한 죄인이 복음을 순종하는 것입니다.
12절에 “이 섬긴 바가 자기를 위한 것이 아니요 너희를 위한 것임이 계시로 알게 되었으니 이것은 하늘로부터 보내신 성령을 힘입어 복음을 전하는 자들로 이제 너희에게 고한 것이요”
복음을 가져온 사람이 있었습니다. 거기에 성령을 힘입어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22절에서는 성령을 통해서 그 복음을 믿는 자가 순종하는 것입니다. 22절에 “거짓이 없이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렀으니”를 주목하면서 주의하실 것은 교훈이 아니란 것입니다. 이 구절 마지막에 사랑의 교훈이 나오는데, 앞의 사랑은 교훈이 아니며 대단히 중요한 핵심입니다. 잠시 살펴 보면 여러분이 만일 복음의 진리를 순종해서 영혼이 깨끗하게 되면 이것은 구원받을 때 자동적으로 생성되는 사랑인 것을 말씀드립니다. “형제 사랑하기에” 헬라어로 말하면 필라델피아입니다. 이것은 형제 사랑입니다. 마지막에 “피차 사랑하라”는 말은 헬라어로 또 다른 용어입니다. 이것을 여러분에게 말씀드리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구원받은 그 순간부터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서 자동적으로 반응하는 무언가가 있었습니다. 형제를 사랑하므로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다는 표현을 보았습니다. 지난 밤에 드린 말씀과 이 말씀은 서로 연결이 되는 것입니다. “거짓이 없이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렀으니”
예를 들면 제 아버지가 61세에 구원받은 것을 말씀을 드렸습니다. 일평생 저의 아버지가 가스펠 홀에 한번도 온 적이 없었으며 기회도 없었으며 멀리 떨어진 삶을 살았습니다. 구원받고 난 이후에 아버지는, (주의할 것은 가스펠 홀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 모인 사람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구원받고 얼마 후에 침례를 받았습니다. 아버지는 종교적인 배경을 갖고 있습니다. 무엇을 아버지가 원했겠습니까? 모임을 받아들이기를 원했습니다. 형제들에 대해서 자동적인 사랑이 나타난 것입니다.
22절 마지막에 베드로는 교훈을 하고 있습니다. “마음으로 뜨겁게 피차 사랑하라” ‘깨끗하게 하여’라는 말에 주의하십시오. 마음으로 뜨겁게 피차 사랑하라고 했습니다. 다른 표현으로 “마음에서 나오도록 하라” 앞에는 “깨끗하게 하여”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것은 마땅히 어떤 것이 일어나야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피차 사랑하라고 했습니다. 어제 요한일서를 보면서 “서로”라는 말을 보았습니다. 형제를 사랑하는 이 사랑은 필라델피아 사랑이고 “피차 사랑하라”는 아가페 사랑입니다. 다른 말로 말하면 마음에 있는 것을 모두 드러내어서 사랑하라는 뜻입니다. 앞쪽의 사랑은 자동적으로 형제자매들을 사랑하는 것을 말하고, 우리들 중에 있는 어려움의 문제 중에 하나는 사랑하는 것에 대한 어려움입니다. 형제 자매들의 사랑이 형제 자매들간에 보게 되면 썩 좋아 보이지 않을 때도 보입니다. 그래서 마지막에 나오는 사랑의 권면이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대답을 해야 합니다. 여기서 나오는 사랑이 무엇입니까? 여러분에게 단언하고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이것은 자연적인 사랑이 아닙니다. 즉 육적인 사랑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한국에 있는 구원받지 않은 가족들이 있다고 가정하면 많은 사람들처럼 가족들이 사랑합니다. 그것은 육적인 사랑입니다. 그것은 자연적인 사랑을 했기 때문에 자연적인 출생을 낳았습니다. 즉 육적인 사랑을 하게 했기 때문에 육적인 출생을 낳았습니다. 이것은 자연적인 사랑이 아니라 초자연적인 사랑인 것입니다. 자연적인 육적인 사랑은 육적인 것을 출생시키고, 영적인 사랑은 초자연적인 사랑을 출생시키는 것입니다.
여기서 23절이 나오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으며 왜 그렇게 되는지를 설명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너희가 거듭난 것이(거듭났으므로-영어)” 만약에 자연적인 사랑은 자연적인 생명을 출생시킨다고 한다면 두번째 거듭나는 출생은 초자연적인 사랑을 생성시키는 것입니다. 결과는 초자연적인 사랑을 나타나게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말씀이 포함되는 것에 주의하기 바랍니다. 이것을 실제적으로 행하는 것에 대해 적용시켜 봅시다.
“그러므로 모든 악독과 모든 궤휼과 외식과 시기와 모든 비방하는 말을 버리고”
여기서 첫번째 언급되는 말을 주목하면 “버리고”(우리말은 뒤에)에 주목하기 바랍니다. 우리가 오늘 저녁에 홀에 들어왔습니다. 들어와서 저는 코트를 벗어서 치웠습니다. 저는 코트를 누가 가져갔기에 어디 있는지 모릅니다만 나중에 가져갈 것입니다. 여기에 핵심이 있습니다. 여기의 버리고는 옷을 벗어서 치운다는 같은 의미로 되어 있습니다. 주님께서도 다락방에서 옷을 벗으시고 일어나셨습니다. 여기의 버리고는 이미 완료된 시제이며 단번에 완전히 벗어버렸다고 하는 시제를 가졌다는 것을 주목하기 바랍니다. 저의 옷은 나중에 다시 가져 갑니다만 여기서의 버리고는 다시 입지 않는 버리고 라는 의미입니다.
지금 현재 하늘나라에 가 있는 분입니다만 제가 젊었을 때 그분의 말씀집회에서 자주 들었습니다. 저는 그 형제님의 말씀 듣는 것을 좋아했으며 그는 참된 아일랜드 사람이었으며 아주 좋은 성품의 사람이었습니다. 어느 날 그분이 이 구절을 말씀하셨는데 저는 그것을 잊을 수 없습니다. 그분이 말씀하시기를 “여러분은 여기서 벗어야 될 옷을 보십니다. 이것은 더럽고 냄새 나는 낡은 옷이라고 말씀드리겠습니다. 벗은 다음에 걸어두지 말고 불태워버리십시오.”라고 말했습니다. 여기에 나오는 그 말의 의미는 한번에 벗어서 완전히 처리해 버린다는 의미입니다. 여기서 영적인 옷에 다는(악세사리?) 것들을 봅시다. 이것은 마치 옷을 벗는 것처럼 다섯가지 악을 말하고 있습니다. 다섯가지 더럽고 무시무시한 것들입니다. 만일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에 포함 된다면 대단히 슬프게 될 것입니다. 여기에 모든 이라고 붙은 세가지도 주목하기 바랍니다.
“모든 악독” 악독은 나쁜 의도를 말합니다. 이것은 다른 사람들에 대해 나쁜 의도를 가지고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악독스러운 사람들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는 그 악독 가운데 모든 악독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모든 악독을 말하기를 ‘아주 나쁜 토양’이라고 말했습니다. 그 토양에서 다른 나쁜 악들이 솟아나는 나쁜 토양이라고 말했습니다. 악독은 모든 악이 나올 수 있는 그러한 말입니다.
“모든 궤휼” 궤휼이라는 말은 나쁘게 간사스러운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믿는 사람들은 교묘하고 간사스러워서는 안되고 마치 책을 펼쳐 놓은 것처럼 명백해야 합니다. 악독이 있어서는 안되고 교묘하고 간사한 속임이 있어서도 안되는 것입니다.
“외식” 이것은 더 말씀드리지 않아도 되겠습니다.
“시기” 여러분이 시기를 가지고 있지 않습니까? 만약 여러분이 자신이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을 다른 사람이 가지고 있으면 그것을 갖기를 원할지 모르겠습니다. 이것은 바로 시기가 들어오는 시점입니다. 빌라도는 예수 그리스도를 유대인들이 시기로 넘겨준 줄 알았다고 했습니다. 그들의 시기는 무엇이었습니까? 군중들이 예수님께로 갔습니다. 또한 많은 병자들이 따랐습니다. 주님께서 하신 능력들을 유대 지도자들은 갖지 않았기 때문에 시기했습니다. 오늘날은 어떻습니까? 저는 차를 좋아합니다. 제가 모임에 오는데 어떤 큰 차를 가져오는데 클래식 차로 매우 비싼 차입니다. 만약에 제가 생각하는 그런 차를 다른 분이 가지고 있으면 제가 그것을 갖고 싶어할 때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만약 마음 속에서 분한 마음이 생길 수 있는 것입니다. 북아일랜드의 어떤 사람들은 아주 작은 집에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북아일랜드의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아주 큰 집에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여기에 위험은 시기가 들어올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만약 어떤 모임에서 젊은 형제가 아주 놀랍게 자라고 있다고 가정해 봅시다. 그 자신이 말씀을 계속 보고 그 모임에 능력 있게 유익을 준다고 가정을 해봅시다. 어떤 다른 젊은 형제들은 그런 능력을 갖지 않았다고 가정을 해봅시다. 여기는 시기할 가능성이 잠재하고 있는 것입니다. 상대방이 갖고 있는 것을 내가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거기에는 시기를 일으킬 가능성이 있으며 여기에 시기가 잠입해 들어올 수 있는 것입니다.
“모든 비방하는 말” 여러분께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이런 것들은 정말로 타격을 줍니다. 다른 형제자매들을 비방하는 말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야고보는 “피차 물고 먹으면 서로 망할까 조심하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셔서 이 혀를 잘 사용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시편기자는 “내 입술에 파숫군을 세우소서”. 많은 나쁜 비방하는 말이 한꺼번에 입에서 나가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것들이 앞에 나오는 것들과 어떻게 연관이 됩니까? 이것을 대답하기는 쉽습니다.
여기 주목할 것은 베드로는 이 서신을 받는 사람을 갓난 아이로 보는 것이 아닙니다. “같이” 라고 말함은 닮았다는 의미입니다. 신약성경에 세번 아이가 그리스도인과 비교되는 표현들이 있습니다. 고전 3장과 히브리서 5장에 나와있습니다. 고린도전서에서는 그리스도인들을 책망하는 목적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예를 들면 고린도 성도들은 성장하지 못했고 장성하지를 못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아이라고 바울이 말했습니다. 히브리서 5장도 원칙적으로 책망하는 것입니다. 여기서는 베드로의 따뜻함입니다. “갓난 아이들같이 순전하고” 구원받은 지 얼마 안되었거나 오랬거나 상관없이 갓난 아이들 같이. 이것은 미성숙했다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이 자리에 어머니들이 계신데 이 구절을 잘 이해하실 것입니다. 갓난 아이들은 자연 상태로 태어난 아이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자연 상태로 태어난 아이들과 같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자연 상태로 태어난 아이들은 본능적으로 추구하는 욕구를 가지고 있습니다. 어머니의 자연적인 젖을 본능적으로 요구합니다. 어린 아이들에게 이것을 훈련시키면 실패할 것이지만 본능적으로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말하면 베드로는 이와 같이 본능적으로 이 욕구를 드러내라는 뜻입니다. 본능적으로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해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처음 구원받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구원받은 사람이 구원받은 사람답게 자라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제가 주님 일을 하기 전에 세상 일을 하고 있을 때에 저는 아이들을 돌보는 일에 책임을 지고 있었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아이들을 돕기 위해서 제가 의학적인 보고서를 읽습니다. 의사들이 기록한 기록을 제가 보는데 건강을 돌보는 사람이 썼을 것입니다. 어떤 아이들은 아주 걱정스러운 아이들이 있었습니다. 이런 용어를 때때로 씁니다만 그 보고서에 쓰여 있기를 성장실패증후군이라는 증세가 아이들 가운데 발견됩니다. 무언가 잘못되었습니다. 그 아이가 성장하는데 실패를 하는 것입니다. 이 아이들이 자라지 않습니다. 아마 무언가 잘못되어 있을 것입니다. 아마 그 아이들이 어른들로부터 학대를 당했거나, 의학적인 문제를 가지고 있거나 일 것입니다.
여기에 갓난아이처럼 신령한 젖을 사모해서 구원에 이르도록(자라도록) 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모든 자연 분만하는 어머니들은 그 아이가 자라고 성장하는 것을 관찰합니다. 영적인 영역으로 들어오게 되면
1절에서의 다섯가지는 성장을 저해하는 요소입니다. 제가 어떤 사람들을 시기하게 된다면, 제가 나쁜 의도를 어떤 성도에게 나타낸다면 아마 저는 영적으로 성장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래서
2절은 우리의 성장을 촉진하는 요소입니다. 아일랜드에 있는 아이들의 성장과정을 보면 아주 단순하고 이해하기 좋습니다.
여러분이 성장하기를 원하신다면 마치 갓난아이가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듯이 성경을 매일 읽고 매일 기도하십시오. 영적인 젖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이 말씀이 바로 여러분들을 양육시키고 성장시킬 것입니다.
3절 “너희가 주의 인자하심을 맛보았으면 그리하라”
2절에서는 식욕 즉 양성시키는 음식을 다루었는데 양식을 맛보는 것은 놀랍지 않습니까? 사실 이 말씀은 시편 34:8을 인용한 것입니다만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고 했습니다. 여기에 은혜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선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선하심을 만약에 맛보면” 무슨 의미입니까? 여기에 제가 말씀드리고자 하는 의미가 있습니다. 주님의 말씀 안에는 악독이 없습니다. 거기는 궤휼이 없습니다. 시기도 없습니다. 외식이 없습니다. 모든 비방하는 말이 주님의 말씀에는 없습니다. 이것을 맛보게 되면 하나님은 선하시다는 것을 인정하게 되는 것입니다. 한번 이것을 맛보게 되면 계속 이것을 요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잘 들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 말씀은 어제의 말씀과 연결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여러분께 유익이 되기를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