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의 사랑하시는 제자
- 로빈 매키온
김포 모임에 와서 대단히 기쁩니다. 이 모임이 생긴지 얼마 안되는 모임으로 알고 있는데 여러분들을 주님께서 풍성하게 축복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영적인 진보가 여러분들 가운데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과 내일 우리가 함께 모이면서 하나님의 말씀에 우리가 주목을 하겠습니다. 그 외 다른 것은 어떤 것도 가져오지 않았습니다. 오직 성경만을 여러분께 가져왔습니다.
오늘은 요한복음을 함께 상고하고자 합니다. 특별한 관점을 제시하겠습니다.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라는 5번의 언급에 대해서 오늘 주목하고자 합니다. 이 5번 모두 요한복음에만 발견되는데 주님께서 공적으로 나타내신 어떤 일들 이후에 이러한 표현이 나왔습니다. 오늘밤 바라는 것은 5개의 핵심 가르침을 받고자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증거에 참으로 도움이 되는 핵심 가르침이 되겠습니다.
먼저 요한복음
21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심령에 민망하여 증거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 하나가 나를 팔리라 하시니 22 제자들이 서로 보며 뉘게 대하여 말씀하시는지 의심하더라 23 예수의 제자 중 하나 곧 그의 사랑하시는 자가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누웠는지라 24 시몬 베드로가 머릿짓을 하여 말하되 말씀하신 자가 누구인지 말하라 한대 25 그가 예수의 가슴에 그대로 의지하여 말하되 주여 누구오니이까
매우 흥미로운 표현입니다.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자’라 했습니다. 요한은 자기가 쓴 복음서에서 자신의 이름을 한번도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 대신에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자’라는 말을 기록하였습니다. 사도 요한이 ‘예수를 사랑하는 제자’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았다는데 주목하기 바랍니다. 그렇게 표현해도 맞는 말일 것이지만 그렇게 표현하지 않았습니다. 자기 자신을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면 요한은 주님을 사랑하지 않았습니까? 물론 주님을 사랑했습니다. 요한일서
다음 문제는 이것입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다른 제자들보다 요한을 더 사랑했다는 말이겠습니까? 물론 요한을 더 사랑했을 수도 있겠습니다. 그런데 왜 그의 사랑하시는 제자라는 표현이 나왔을까요? 주님께서 다른 제자들보다 요한을 더 사랑했다는 말이 아닙니다. 요한과 동일하게 베드로에게도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요
그러면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제가 생각하는 바를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요한을 사랑하신 그 사랑을 요한은 충분히 누린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형제자매 여러분!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을 사랑하는 그 사랑을 누리고 즐거워하는지 확인해보십시오. 우리가 읽었던 구절로 돌아가면 여기서 중심되는 말씀은 23절에 있습니다. “예수의 제자 중 하나 곧 그의 사랑하시는 자가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누웠는지라” 이 제자는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였습니다. 어떤 상황입니까? 저녁 식사 때였고, 만찬을 제정하는 자리였으며, 유월절 만찬 이후입니다. 이것은 식사의 자리입니다. 여기서 요한은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주의 품에 기대어 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에게 주는 중요한 교훈이 있는데 기대는 교훈입니다. 다시 보면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누웠는지라”라 하였습니다. 25절에는 “그가 예수의 가슴에 그대로 의지하여” 즉 기대어 누운채 그대로 있다는 말입니다. 이 기댄다는 의미는 두가지가 있습니다. 23절에 요한이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요한이 누워있습니다. 예수의 가슴에 요한은 그대로 의지하여 누워 기대고 있습니다. 요한이 그리스도께 온전히 기대고 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기
댄다는 두가지의 의미는 구약에 좋은 예가 있습니다. 대제사장 아론의 경우입니다. 출 28:29에 흉판(흉패)에 이스라엘 12지파의 이름을 새겨서 가슴 위에 놓았습니다. 흉판은 가까움을 말하는 것입니다. 흉판을 그의 마음 위에 두는 것입니다. 이것은 기댄다는 것에 가까움에 대한 두번째 의미입니다. 먼저 첫째로 그 이름이 흉판에 있었습니다. 그 흉판은 어디에 둡니까? 그의 마음 위에 즉 가슴 위에 두는 것입니다. 대제사장 아론이 그 흉판을 메고 성소 안으로 들어갑니다. 여기에 가까움에 대한 아주 놀라운 두가지 의미가 동시에 담겨 있습니다. 이것을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가까이 있지 않으면 어느 누구도 그 사물에 기댈 수 없습니다. 형제가 가까이 있으면 이렇게 손을 얹고 기댈 수 있습니다. 내가 멀리 떨어져 있다면 형제에게 기댈 수가 없습니다. 주님께 기대기 원하십니까? 주님께 가까이 가셔야 되는 것입니다. 주님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다면 기대기 위해서 가까이 오셔야 합니다. 성경에 좋은 예가 또 하나 있습니다.
아가서의 마지막 8:5절에 여인이 나옵니다. 저는 항상 자매님들께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자매들이 없으면 모임이 존재하지 못할 것입니다. 광야에서 돌아오는데 그 사랑하는 자를 의지하고 거친 들에서 올라오는 여자입니다. 거친 들을 통과해서 왔습니다. 사랑하는 자를 의지하고 올라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이 세상은 거친 들입니다. 우리는 이 들을 지나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에게 기댈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시편 119:117에 “나를 붙드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구원을 얻고” 하였습니다.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기대고 의지하고 있습니다.
잠언
하나님의 자녀들을 생각해보시면 주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시면 절대로 실족하여 넘어지지 않습니다. 위험은 여기 있는데 고전
요한복음 13장으로 돌아가서 또 다른 것을 보겠습니다. 요한이 23절에서 주님의 품에 기대어 있습니다. 25절에 예수의 가슴에 그대로 의지하여 기대어 누운채로 그대로 있는 것은 매우 특이한데, 보통 사람들이 기댄다는 것은 앞으로 기댄다는 것을 말합니다. 또는 옆으로 기대는 경우도 많습니다. 앞으로 도는 옆으로 기대든지 합니다. 보통 뒤로 기대는 일은 잘 없습니다. 누군가가 내 뒤에 있고 내가 뒤로 기댄다면 뒤로 기대야 됩니다. 정말 뒤에 있는 사람을 믿어야만 뒤로 기댈 수 있습니다. 뒤로 기대게 되면 혼자 서 있을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하게 됩니다. 뒤에 누구를 기댄다면 뒤에 있는 사람을 전적으로 의지해야만 기댈 수 있습니다. 요한은 뒤로 누운채 주님께 전적으로 기대고 있었습니다. 요한은 그리스도를 신뢰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자녀인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립니다. 여러분들은 주님을 신뢰할 수 있으므로 주님께 기대십시오. 여러분이 주님께 기대는 한 주님은 여러분을 넘어지지 않게 받쳐주실 것입니다. 여러분이 동료 믿는 자들을 기대신다면 혹시 넘어지게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물론 일부러 넘어지게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만 어쩌다가 넘어지게 할 수도 있습니다. 주님께 기대는 한 주님은 절대 여러분을 넘어지지 않게 하실 것입니다. 여러분 중에 동의하지 않는 분이 계실지라도 우리는 이 말씀에 주목을 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자신을 의지하고 기댄 성도들을 아직 까지 그 누구도 한 번도 넘어지게 하신 적이 없으십니다. 이것이 첫번째 교훈인데 만찬의 자리에서 기댔다는 것을 기억해 주십시오.
19장 25~27에 주께서 사랑하시는 제자가 두번째로 언급이 됩니다.
25 예수의 십자가 곁에는 그 모친과 이모와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가 섰는지라
26 예수께서 그 모친과 사랑하시는 제자가 곁에 섰는 것을 보시고 그 모친께 말씀하시되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하시고
27 또 그 제자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어머니라 하신대 그 때부터 그 제자가 자기 집에 모시니라
여기서 핵심이 되는 구절은 26절입니다. “예수께서 그 모친과 사랑하시는 제자가 곁에 섰는 것을 보시고” 이 자리는 만찬 자리가 아니며, 요한이 기대고 있는 자리가 아닙니다. 이 자리는 그리스도께서 고난을 받으시는 자리이며 요한은 십자가 곁에 서 있습니다. 이 놀라운 장면을 생각해 주십시오. 여기 십자가 곁에 서 있는 사람들의 기록이 있는데 요한을 제외하고는 다 여자들입니다. 이것은 자매님들에게 용기를 북돋워줍니다. 십자가 옆에 선다는 것은 매우 가치있는 것입니다. 모두 다 예수 그리스도를 미워해서 십자가에 못박았습니다. 얼마나 주님께 조롱하고 비난을 퍼붓고 놀렸습니까? 그러나 자매님들은 그 십자가 옆에 서는 용기를 가졌습니다. 여러분들의 서는 자리 중 가장 좋은 자리가 이 자리입니다. 우리는 십자가 옆에 서 있어야 합니다. 세상의 미움을 감당해야 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선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사도 바울이 빌립보 성도들에게 빌
여기 십자가 곁에 서 있는 여인들과 사도요한은 주님의 곁에 섰습니다. 요한은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그 기쁨을 누렸습니다. 그는 십자가 곁에 섰습니다. 우리는 어디에 서 있는지를 조심해야 합니다. 시
여기서 요한복음 19장을 다시 생각해 보겠습니다. “그 모친과 사랑하시는 제자가 곁에 섰는 것을 보시고”(standing by 옆에 서 있는) 십자가를 향해서 단순히 서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standing by라는 표현은 준비된다라는 말로도 표현이 되는데 이것을 생각해보겠습니다. 제가 세상직업을 가지고 있을 때에 저는 종종 대기(standby)하는 일이 많았습니다. 응급상황을 대비해서 항상 대기(준비)를 하고 있어야 했습니다. 요한이 십자가 곁에 서 있다는 것은 이러한 준비나 대기의 의미로 서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그분의 뜻을 수행하기 위해서 십자가 곁에 서서 준비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26절에서 전개시키겠습니다. “그 모친과 사랑하시는 제자가 곁에 섰는 것을 보시고 그 모친께 말씀하시되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그 다음에 제자에게 말씀하십니다. 그 제자는 누구입니까?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바로 그 제자입니다. 그 이상입니다. 게다가 십자가 옆에 서서 준비된 제자입니다. 명령을 대기하는 상태로 대기하는 상태입니다. 27절에 “보라 네 어머니라 하신대 그 때부터 그 제자가 자기 집에 모시니라” 여기에 ‘옆에 섰다’ ‘준비됐다’ 말씀 그대로입니다. 주님의 뜻을 그대로 수행하고자 합니다. 십자가로부터의 명령을 요한은 바로 수행했습니다. 십자가 곁에 선다는 것은 이래서 좋은 일입니다. 먼저 우리는 요한이 만찬 자리에서 주님께 기대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십자가에서 고난 받으시는 주님 곁에 서 있는 요한을 또한 보았습니다.
디모데가 준비 되어 있는 것을 또한 기억하십니까? 바울이 디모데에게 서신을 보냈는데 딤후
제가 캐나다에서 말씀을 전할 때 몇 명의 형제들이 함께 점심을 하는 자리였습니다. 뒤에 지붕이 열리는 트럭이 있었습니다. 큰 순록이 뒤에 실려 있었는데 죽어 있었습니다. 머리 위에는 큰 뿔이 있고 그것은 사냥철이었다는 의미입니다. 사냥시즌이 캐나다에는 있으며 3일동안만 짐승을 쏠 수 있으며 나머지 기간은 폐쇄되어 있습니다. 사냥 때는 딱 3일이 주어집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이 철(때)을 스스로 닫지 마십시오. 우리는 항상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위해 우리는 항상 준비되어 있어야 합니다.
어떤 실화를 들었는데 정말 제 마음이 감동이 되었습니다. 제가 있는 북 아일랜드에 있는 어떤 젊은 청년이었는데 그 부모님은 매우 신실한 형제자매님이었습니다. 그 청년은 복음에 순종치 아니하고 있었습니다. 구원받지 않고 복음을 들으러 오려고 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리고 런던으로 가버렸습니다. 큰 건물에서 일하며 런던의 친구들도 사귀게 되었습니다. 자기와 같은 경건치 않은 친구들을 사귀었습니다. 서로 속이고 나쁜 짓을 하는 그런 친구들과 놀았습니다. 어느 날 친구가 그 청년을 데리고 지하철이 있는 지하로 내려갔는데, 그리고 엉뚱한 방향으로 가는 지하철을 태웠습니다. 거의
요
1 안식 후 첫날 이른 아침 아직 어두울 때에 막달라 마리아가 무덤에 와서 돌이 무덤에서 옮겨 간 것을 보고
2 시몬 베드로와 예수의 사랑하시던 그 다른 제자에게 달려가서 말하되 사람이 주를 무덤에서 가져다가 어디 두었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겠다 하니
3 베드로와 그 다른 제자가 나가서 무덤으로 갈새
4 둘이 같이 달음질하더니 그 다른 제자가 베드로보다 더 빨리 달아나서 먼저 무덤에 이르러
5 구푸려 세마포 놓인 것을 보았으나 들어가지는 아니하였더니
6 시몬 베드로도 따라와서 무덤에 들어가 보니 세마포가 놓였고
7 또 머리를 쌌던 수건은 세마포와 함께 놓이지 않고 딴 곳에 개켜 있더라
8 그 때에야 무덤에 먼저 왔던 그 다른 제자도 들어가 보고 믿더라
9 (저희는 성경에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신 말씀을 아직 알지 못하더라)
여기서 핵심되는 말씀은 2절입니다. “시몬 베드로와 예수의 사랑하시던 그 다른 제자에게 달려가서 말하되” 여기에 세번째로 주 예수의 사랑하시는 제자라는 표현이 나오는 곳입니다. 이것은 요한이 기대고 있는 만찬의 자리가 아닙니다. 십자가에서 고난 받으시는 곳에 서 있는 자리도 아닙니다. 여기는 요한이 달려간 무덤입니다. 요한이 달린 것을 보겠습니다. 2절의 시작을 보면 우리말에는 1절의 막달라 마리아가 2절에 달려갔습니다. 4절에는 베드로와 다른 제자가 같이 달렸는데 다른 제자가 베드로보다 더 빨리 달려 먼저 무덤에 이르렀습니다. 요한도 달리고 막달라 마리아도 달리고 베드로도 달렸습니다. 우리 성도들은 항상 달려야만 됩니다. 영적인 경주입니다. 성경은 경주에서 많은 말을 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보다 빨리 달리는 능력이 있는데, 그래서 요한은 베드로보다 빨리 달렸습니다. 어떤 분은 영적인 경주에서 매우 잘 달릴 수 있습니다. 물론 다른 분들이 느릴 수도 있겠습니다만 어떤 사람은 경주의 시작을 잘하였습니다. 그러나 마무리를 잘 하지 못할 때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영적인 경주에서 출발이 안좋은 경우가 있는데 그러나 결승점을 잘 통과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저는 제가 그리스도인의 삶을 끝까지 잘 달릴 수 있도록 주님께서 도와 주시기를 바랍니다. 어떤 성도들은 처음에 믿음의 출발은 잘하였는데 그 경주의 마지막은 잘 안되는 경우가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갈라디아 성도들을 보면
저는 토끼와 거북이의 이야기가 머리 속에 떠오릅니다. 그 경주에서 토끼는 크게 차이를 벌리며 앞으로 멀리 달려 나갔습니다. 한참 앞에서 뒤를 돌아보니 거북이가 저 멀리 뒤에서 엉금엉금 기어오고 있습니다. 토끼는 이 남은 시간에 한숨 자도 되겠다 하며 잠이 들었습니다. 경주 도중에 말이죠. 여러분들 경주 도중에 잠들지 말고 깨어 있으십시오. 토끼가 잠을 깨어 거북이가 얼마를 왔는지 뒤를 돌아보았는데 보이지 않아 앞을 보니 결승점을 통과하고 있었습니다. 이 두 짐승이 경주를 하는 것은 어떤 의미입니까? 토끼는 빠르지만 거북이는 꾸준합니다. 경주에서는 꾸준해야 합니다. 영적인 경주는 100m 달리기가 아닙니다. 기록을 깨는 그러한 것도 아닙니다. 큰 스피드를 동시에 필요로 하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의 영적인 경주는 마라톤 보다 더 길 것입니다. 인내와 견디는 것이 요구되는 경주입니다.
아가서의 여인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아
고전
요
3 시몬 베드로가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 하매 저희가 우리도 함께 가겠다 하고 나가서 배에 올랐으나 이 밤에 아무것도 잡지 못하였더니
4 날이 새어갈 때에 예수께서 바닷가에 서셨으나 제자들이 예수신 줄 알지 못하는지라
5 예수께서 이르시되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대답하되 없나이다
6 가라사대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얻으리라 하신대 이에 던졌더니 고기가 많아 그물을 들 수 없더라
7 예수의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베드로에게 이르되 주시라 하니 시몬 베드로가 벗고 있다가 주라 하는 말을 듣고 겉옷을 두른 후에 바다로 뛰어내리더라
여기서 중심되는 말씀은 7절에 있습니다. 앞에 나오는데 매우 중요합니다. 예수의 사랑하시는 그 제자라는 그 표현이 나옵니다. 예수가 맨 먼저 언급이 되었습니다. 이 구절에 베드로의 이름도 나옵니다. 이 자리는 만찬 때 요한이 기댄 자리도 아니며, 십자가 곁에 서 있던 그 자리도 아닙니다. 무덤에 달려간 그 자리도 아닙니다. 여기는 바닷가입니다. 바닷가에 서 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요한은 보았습니다. 다른 제자들도 보기는 했지만 예수신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분이 누구신 줄 알아본 사람은 요한이었습니다. 저는 요한복음에서 이것을 봅니다. 요한은 거기서 바닷가에 서 계신 그분을 봅니다.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이 제자 요한은 주님을 알아보는 눈을 가졌습니다. 요한이 말하기를 주시라. 성도님들! 우리는 바라보아야 합니다. 여러분들은 성경에서 볼 때 달리는 것과 바라보는 것이 밀접하게 연결된 것을 보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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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 요한은 계
사도행전 7장의 스데반의 이야기는 놀랍습니다. 눈을 우러러 하늘이 열린 것을 보았습니다.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았습니다. 여기에 스데반의 달리기가 거의 끝나가는 것을 봅니다. 여기 순교자로서의 순교 당하기 직전입니다. 이 사랑하는 성도는 하늘을 보았습니다.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위를 바라보며 자기의 경주를 마쳤습니다. 형제 자매님들! 제 경주가 언제 끝날지 저는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저는 위를 쳐다보기를 좋아합니다. 놀라운 영광 가운데 계신 하늘을 쳐다보시기 바랍니다. 다시한번 말씀드리지만 하늘을 쳐다보십시오. 하늘가에 서 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십시오. 매우 흥미롭지 않습니까! 스데반의 경우는 매우 놀랍습니다. 주님께서 하늘로 돌아가신 다음에 무엇을 하고 계십니까? 여러분 성도님들은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계신다고 말할 것입니다. 그런데 스데반은 무엇을 보았습니까? 주님께서 서 계신 것을 보았습니다. “보라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본다.” 거의 장면처럼 보입니다. 주님께서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아계십니다. 힘겨워 받는 성도를 받으시기 위해서 일어서십니다.
마지막으로 요
20 베드로가 돌이켜 예수의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따르는 것을 보니 그는 만찬석에서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주여 주를 파는 자가 누구오니이까 묻던 자러라
21 이에 베드로가 그를 보고 예수께 여짜오되 주여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삽나이까
22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더라
이곳이 다섯번째 마지막으로 예수의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나오는 곳입니다. 핵심 구절은 20절입니다. 주목해 볼 것은 이 마지막 언급이 첫번째 나오는 것과 연관이 되어 있는데 20절 중반을 보면 요한에 대하여 말하기를 그는 만찬석에서 예수의 품에 의지하던 자라 13장에서 주님의 품에 기대어 의지하던 자였습니다. 21장에서 따라왔습니다. 요한은 13장에서 주님께 기대었고, 십자가 곁에서 고난을 함께 감내 하였고, 달려갔던 그 자리도 아니고, 요한이 바라보았던 그 바닷가도 아닙니다. 우리는 구원자의 발자취를 보고 있습니다. 요한이 따라가는 그 자취입니다. 주님과 함께 가고 있다는 것을 주목해 주십시오. 베드로는 주님에 의해서 회복이 되었습니다. 베드로는 자신이 쓴 서신에서 이와 같이 말했습니다. 벧전
제가 작년에 사이프러스라는 섬에 갔었는데요. 거기서 제 막내딸이 불어교사로 있습니다. 딸이 차를 몰고 바닷가에 있는 어떤 목자가 있는 곳으로 갔습니다. 어떤 목자가 걸어가고 있는데 그 뒤를 양들이 따라가고 있었습니다. 저는 거기서 그리스도를 생각했습니다. 그 사이프러스 섬에 있는 목자는 양들에게 말하는 것이 전부였습니다. 양을 부르고 돌아서서 먼저 앞서 가면 양들이 따라갑니다. 그리스도께서 앞서 나가시고 우리는 주님을 따라갑니다.
오늘 우리가 상고한 이 교훈은 매우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여러분들 마음 모두를 주님께서 축복해 주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