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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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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 2. 10. 19:03 카테고리 없음

주의 만찬

-로빈 매키온

신약 성경 모임에는 두 가지의 의식만이 있습니다. 종교적인 세계에는 더 많은 의식이 있습니다만 그러나 신약에 있는 지역교회에는 믿는 자들의 침례와 주의 만찬이 있을 따름입니다. 이것은 매우 논리적이고 합당한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저녁에 두번째 의식에 대해서 보고자 합니다. 이것을 일컬어서 주의 만찬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1 17~34절입니다.

17 내가 명하는 이 일에 너희를 칭찬하지 아니하나니 이는 저희의 모임이 유익이 못되고 도리어 해로움이라

18 첫째는 너희가 교회에 모일 때에 너희 중에 분쟁이 있다 함을 듣고 대강 믿노니

19 너희 중에 편당이 있어야 너희 중에 옳다 인정함을 받은 자들이 나타나게 되리라

20 그런즉 너희가 함께 모여서 주의 만찬을 먹을 수 없으니

21 이는 먹을 때에 각각 자기의 만찬을 먼저 갖다 먹으므로 어떤 이는 시장하고 어떤 이는 취함이라

22 너희가 먹고 마실 집이 없느냐 너희가 하나님의 교회를 업신여기고 빈궁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무슨 말을 하랴 너희를 칭찬하랴 이것으로 칭찬하지 않노라

23 내가 너희에게 전한 것은 주께 받은 것이니 곧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 떡을 가지사

24 축사하시고 떼어 가라사대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25 식후에 또한 이와 같이 잔을 가지시고 가라사대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하셨으니

26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

27 그러므로 누구든지 주의 떡이나 잔을 합당치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주의 몸과 피를 범하는 죄가 있느니라

28 사람이 자기를 살피고 그 후에야 이 떡을 먹고 이 잔을 마실지니

29 주의 몸을 분변치 못하고 먹고 마시는 자는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니라

30 이러므로 너희 중에 약한 자와 병든 자가 많고 잠자는 자도 적지 아니하니

31 우리가 우리를 살폈으면 판단을 받지 아니하려니와

32 우리가 판단을 받는 것은 주께 징계를 받는 것이니 이는 우리로 세상과 함께 죄 정함을 받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33 그런즉 내 형제들아 먹으러 모일 때에 서로 기다리라

34 만일 누구든지 시장하거든 집에서 먹을지니 이는 너희의 판단받는 모임이 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그 남은 것은 내가 언제든지 갈 때에 귀정하리라

주의 만찬에 대한 신약성경의 일곱 언급

주의 만찬이라는 주제에 이르게 되면 신약에 일곱 구절이 있습니다. 공관복음에 보게 되면 마태, 마가, 누가에서 만찬을 다루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26, 마가복음 14, 누가복음 22장에서 각각 다루고 있습니다. 복음서에는 세 곳에서 만찬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도행전에 가면 두 곳에 만찬에 관한 기록이 나옵니다. 2 42, 20 7절에 나옵니다. 또한 서신서에도 두군데 만찬에 관한 기록이 나옵니다. 둘 다 고린도전서에 있습니다. 10 16절에 있고, 방금 우리가 읽었던 11장에도 나와있습니다.

이 세 다른 그룹에 대해서 지적을 하겠습니다. 세번의 언급은 복음서에 있습니다. 이것은 만찬을 정하는 제정(制定)적인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2장과 20장에 이르게 되면 이것은 주님을 실제로 기억하는 기록입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이미 하늘로 가셨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에 있는 모임이 그렇게 했습니다. 20장에서는 드로아 모임이 그렇게 했습니다. 이것은 실제로 떡을 떼는 실행을 사도행전에서 했던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이것은 실제로 기념하는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육체적으로 물리적으로 그들과 함께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만찬을 제정하는 복음서 기록에서는 주님께서는 육체적으로 물리적으로 실제로 그들과 함께 했습니다. 그리고 고린도전서 10,11장에서는 여기는 교훈적인 즉 가르침적인 특징을 만찬이 띠고 있습니다.

우리가 11장을 보겠습니다만 여기는 큰 가르침이 우리들에게 주어집니다. 오늘저녁 우리가 함께 읽었습니다만 이것을 기억해 주십시오. 첫번째 언급과 마지막 언급이 둘 다 집단적이 모임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사도행전에서 그랬습니다. 사도행전 2장에는 예루살렘 모임이었습니다. 마지막은 사도행전 20장에서 언급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첫번째와 마지막 언급이 둘 다 모임집회였습니다.

 

떡 뗌과 주의 만찬

떡을 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두 가지 용어가 사용됩니다. 흔히 떡 뗌이라고 일컬어집니다. 우리가 떼는 떡입니다. 한번은 주의 만찬이라고 언급되어 있습니다. 오늘 읽었던 구절 20절에 나와 있습니다. 이것을 한번 주의 만찬이라고 일컬었습니다. 떡 뗌과 주의 만찬은 무슨 차이가 있겠습니까? 이 용어는 다릅니다. 이 두 용어는 같은 활동, 즉 둘 다 동일한 예식에 관해서 언급을 하고 있습니다. 그 차이는 강조점이 다른 것입니다. 떡 뗌이라고 우리가 부를 때 강조되는 점은 단순함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종교적인 세계에서는 떡 뗌의 단순함을 상실했습니다. 우리가 주의 만찬이라는 용어를 생각할 때 만찬의 중요함을 강조하는 말입니다. 이것은 주의 만찬입니다.

떡 뗌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이것은 만찬의 단순함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만찬을 위해서 특별한 사람을 구별해서 세울 필요가 없습니다. 회중을 섬기기 위해서 어떤 특별한 사람을 세울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또한 수장을 세울 필요도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냥 떡을 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고린도전서 10 16절에서 우리가 떼는 떡은 그랬습니다. 이 단순함을 지킵시다. 저는 종교적인 배경에서 자랐습니다. 늘 형식적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식적이었습니다. 그것은 말이 안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떡 뗌이니까요. 왜냐하면 어떤 사람이 떡을 떼어주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떡을 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의 만찬과 주님의 날

주의 만찬에 대해서 생각을 하겠습니다. 이 주의 만찬이라는 말은 한번만 나옵니다. 무슨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까? 여러분은 주의 만찬이니까 주님께 속한 만찬이구나 라고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 원 의미는 그런 뜻이 아닙니다. 유사한 또 하나의 표현을 보면 이것도 한번만 사용된 용어인데 주의 날이라는 말입니다. 이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물론 이것은 주()의 첫날을 의미합니다. 주의 날이라고 하는 이 용어가 무엇을 의미합니까? 주의 날이 주님께 속했다는 것을 의미합니까? 엄밀하게 말하면 그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월요일, 화요일도 주님께 속해 있는 날이죠? 말하자면 사실은 모든 날이 주님께 속해 있습니다. 주의 날과 주의 만찬이라는 용어 속의 주의라는 말의 원 뜻은 이런 것입니다. 이것이 신약에서 두 곳만 사용되었습니다. 만약 그 용어가 주의 라고 한다면 품사로 말하면 형용사인데 이 형용사는 서술적인 것입니다. 다른 말로 말하면 주의 만찬을 서술하는 것입니다. 이 주의 만찬은 만찬을 서술하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주님께 속했다는 것을 강조하는 의미라기보다도 서술하는 의미가 강하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주님께서 준비했다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의미가 포함되어 있지만 원 의미가 아닙니다. 이것은 만찬이 주님의 특성이 나타나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동일하게 주의 날도 그 날이 주님께 속했다는 것을 의미하기보다도 주님의 특성을 나타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정도면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만 좀 더 구체적으로 보겠습니다.

 

주님의 머리되심과 주인되심(주권)

11장은 두 부분으로 나뉘어 집니다. 1~16절은 주님의 머리 되심을 주제로 언급하고 있습니다. 17절부터 마지막 절까지는 주님의 주권에 대해서 다루고 있습니다. 구체적인 구절을 하나하나 보겠습니다. 여러분은 머리되심과 주권은 어떻게 다르냐고 질문할 것입니다. 머리되심은 주로 역할 관계를 말할 수 있습니다. 그 의미가 바로 머리되심과 관련이 되어 있습니다. 1~16절까지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와의 관계, 그리스도는 하나님과의 관계, 즉 역할 관계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남자(사람)와 그리스도의 관계를 말하고 있습니다. 또한 여자와 남자의 관계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머리되심을 서로 역할 관계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권은 머리되심과 관계없는 것은 아닙니다만 주권은 머리되심과 달리 모든 사람의 생활과 관련이 되어야 합니다. 신약 모임에서는 머리되심이 드러나야 합니다. 성도들이 모일 때에 남자들은 머리에 가리우지 말아야 합니다. 여자들은 머리를 가리워야 합니다. 남자가 머리가 길면 부끄러움을 느끼게 됩니다. 여러분은 머리가 길지 않아 위험하지 안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머리가 긴 사람은 부끄러워한다고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여자가 머리가 길면 자기에게 영광이 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서로 관계가 되어 있습니다.

 

칭찬할 것과 칭찬하지 않을 것

17절을 보면 어떻게 시작되는가를 보십시오. 내가 명하는 이 일에 너희를 칭찬하지 아니하나니 이것은 매우 슬픈 선언입니다. 바울은 이 부분에서 칭찬하지 아니한다고 시작하고 있습니다. 22절을 보면 내가 너희에게 무슨 말을 하랴 너희를 칭찬하랴 이것으로 칭찬하지 않노라 바울은 고린도 성도들이 칭찬할만한 것을 칭찬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주의 만찬이라는 것에 있어서는 칭찬할 수가 없었습니다. 11장 시작을 보십시오. 2절에서 너희가 모든 일에 나를 기억하고 또 내가 너희에게 전하여 준 대로 그 유전을 너희가 지키므로 너희를 칭찬하노라고 했습니다. 그는 칭찬으로 시작했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그는 칭찬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칭찬할 수 없는 것도 있었습니다. 우리에 대한 교훈은 이것입니다. 여러 성도님들! 칭찬할 것은 칭찬하십시오. 하나님의 백성들은 칭찬받을만한 것은 칭찬을 받아야 합니다. 저는 어떤 성도를 아는데 칭찬할 것을 칭찬하지 않는 분이 있습니다. 칭찬하지 않고 비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또 한편으로 칭찬할 수 없는 것을 칭찬하지 마십시오. 잘못된 것을 잘되었다고 칭찬하지 마십시오. 여기에 또 다른 교훈이 하나 있습니다. 그는 칭찬을 먼저 하고 칭찬 아닌 것을 나중에 다루었습니다. 바울은 대단한 교사였습니다. 왜 바울이 칭찬에 관한 말을 먼저 하는지 보겠습니다.

17절 마지막에 이는 저희의 모임이 유익이 못되고 도리어 해로움이라 대단히 슬픈 선언입니다. 오늘 저녁 이와 같은 모임이 여러분에게 유익이 되어야 하는데, 여러분에게 해가 되지 않아야 되는데 여러분이 기도집회로 모일 때도 여러분이 유익이 되고 해롭지 말아야 됩니다. 만찬으로 모일 때에도 여러분에게 풍성해져야지 여러분에게 해로워서는 안됩니다. 그러나 고린도 모임의 상태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여기에서 문제가 무엇입니까?

18절 마지막에 너희 중에 분쟁이 있다 함을 듣고 이 문제를 다루는 것이 서신의 시작이었습니다. 글로에의 집 편으로 분쟁이 있다는 것을 들었다고 1장에서 시작하고 있습니다. 19절에 너희 중에 편당이 있어야, 18절에는 분쟁이고, 19절에서는 편당입니다. 이 각각은 유감스럽게도 서로 관련이 되어 있습니다. 모임 안에 분쟁이 있다면 여기는 편당이 생기는 것입니다. 분쟁이 있으면 그룹을 형성하게 됩니다. 분쟁은 문제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21절 마지막에 각각 자기의 만찬을 먼저 갖다 먹으므로 어떤 이는 시장하고 어떤 이는 취함이라고 했습니다. 고린도에 있는 같은 성도들이 함께 잔치처럼 모였는데 어떤 사람들은 부요하고 넉넉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취했습니다. 그런 가운데 주님을 기억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을 받아들일 수 있겠습니까? 왜 여기서 칭찬이 안되는 지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이제 주된 포인트로 가겠습니다.

17절 마지막에 이는 저희의 모임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바울이 모임이라는 용어를 쓰고 있습니다. 이 서신에서 8번 사용하고 있습니다. 매우 흥미롭게도 8번 중에 5번이 여기에 들어 있습니다. 잠시 이것을 봅시다. 17절에 이는 저희의 모임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18절에는 너희가 교회에 모일 때에라고 했습니다. 20절에 함께 모여(영어성경-한 곳에 모여)라 했습니다. 33절에 먹으러 모일 때에 여러분이 33절을 주목하기 바랍니다. 그는 말하기를 내 형제들아라고 말하기 때문에 큰 느낌을 가지고 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 성도들을 향해서 큰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내 마음이 너희를 향해서 넓어졌으니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실패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내 형제들아라고 불렀습니다. 이러한 육신적인 자들에 대한 태도는 아주 합당한 태도입니다. 결코 내 형제와 자매들이라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바울은 내 형제라고 말할 때에 남성과 여성을 다 포함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집단적으로 부를 때 형제들아 라고 부르는 용어일 따름입니다. 이것을 자매님들을 배제하지 않습니다. 34절에 모임이 되지 않게 여기에 다섯번이나 모일 때에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배우는 교훈이 있습니다. 주의 만찬의 예식이 행해지는데 모임에서 집단적으로 행해지는 것을 말합니다. 신약에서 모임이 만찬으로 모일 떼는 항상 집단적으로 모인다는 것을 말합니다.

17절에 진보에 관해서 주목하십시오. 어떻게 모임이라는 말이 진보(나아가는지)되는지를 보시기 바랍니다. 17절에는 저희의 모임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18절로 가면 좀 더 확장이 되는데 너희가 모이기는 모이는데 교회로 모일 때로 조금 더 확장이 되는데 이것은 모임입니다. 바울은 17절에서 말할 때 모임에 대해 말하는 것입니다. 18절이 17절을 설명하고 있으며 저희가 교회로 모일 때에라고 그 능력의 범위를 확장시킵니다. 20절에서 더 진전되어 나아가는데 너희가 함께(한 곳에=우리말에 없음) 모여서로 발전합니다. 그래서 이 관점에서 보면 모임의 주의 만찬은 집단적으로 지역교회가 행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세 개를 하나로 뭉쳐보면 17절에서는 모이고 18절에서는 모임으로서 모이고 20절에서는 함께 한 곳에서 모이는 것입니다. 말씀을 주의깊게 보지 않기 때문에 여기에 문제가 하나 있습니다. 우리는 말씀을 자세하게 봐야 합니다. 자세히 보는 것은 중요합니다. 떡 떼는 만찬은 모임이 행하는 집단적인 증거입니다. 이미 언급했습니다만 첫번째 사도행전 2장에서 한 만찬은 집단적으로 행한 만찬이었습니다. 예루살렘 성에 있었던 만찬이었습니다. 바울의 가르침이 계속 진행되어 나갑니다. 그리고 거기는 교제가 있습니다. 그리고 떡을 뗍니다. 그리고 기도합니다. 집단적으로 하되 드로아에 있는 모임처럼 지속적으로 하는 것입니다. 사도행전에 언급한 마지막 만찬이 20장인데 드로아에서 집단적으로 행했던 만찬이었습니다. 거기에 만찬이 언급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실제적인 적용입니다. 저는 제 마음 속으로 믿기를 신약성경 가르침이 모임에 속해 있는 사람이 만찬을 떼야 한다는 것이 저의 확신입니다.

지금 주님 나라에 가 계신 스코틀랜드의 형제님이 계셨는데 제가 잊을 수 없는 한가지를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것을 주의깊게 들어주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떡을 떼기 때문에 이 모임에 속한 것이지 당신이 이 모임에 소속되어 있기 때문에 떡을 떼는 것이 아니다.

저는 어떤 사람이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모임의 교제에 속해 있다 할지라도 휴가 때 다른 모임으로 갑니다. 휴가가 끝나고 돌아옵니다. 휴가 때 어떤 다른 성도들을 만나서 주의 만찬에 대해서 서로 이야기 합니다. 여기에는 그리스도인들이 적습니다. 주님을 기억하기 위해서 떡을 사고 포도주를 삽니다. 이렇게 실제로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농담을 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이렇게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여러분 이렇게 하는 것을 잘못된 것입니다. 원인은 떡을 떼는 이 증거는 모임이 하는 집단적인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떡을 떼는 이 증거는 모임이 하는 중요한 증거입니다. 사도행전 2 42절을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저희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라고 했습니다. 서로 교제 했으며, 떡을 뗐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기도하기를 전혀 힘썼다고 했습니다. 떡을 떼는 것은 총체적으로 모임의 활동 중에 하나였습니다. 이것은 모임의 중요한 활동 부분 중에 하나입니다. 떡을 떼는 주의 만찬은 지역모임의 집단적인 증거입니다.

 

주님의 머리되심과 주인(주권)되심의 특징

두번째로 그 특징에 관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그 중심 말씀은 20절에 있습니다. 그런즉 너희가 함께 모여서 주의 만찬을 먹을 수 없으니 이것은 주의 만찬에 함께 있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이유는 앞에 나와 있습니다. 이것은 행동이 합당치 못했습니다. 주의 만찬이라는 말에 주목하십시오. 조금 전에 주의 만찬은 만찬의 특징을 서술하는 것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이것을 다시 한번 자세히 보겠습니다. 1절에서 16절까지는 머리되심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며, 17절부터 마지막 절까지는 주권에 대한 것임을 말씀드렸습니다. 그래서 주의 만찬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여기에 주 안에라는 용어에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20절에 보면 주의 만찬이 나와 있습니다. 23절에 내가 너희에게 전한 것은 주께 받은 것이니 곧 주 예수께서 세번째 주 예수가 언급이 되었습니다. 20절에 주가 나오고 23절에 주가 나오고 23절 후반에 주가 나옵니다. 26절에 주의 죽으심이라 했습니다. 주의 죽으심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복음서에서는 주의 죽으심이라는 말을 찾아볼 수가 없으며 예수께서 죽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주의 죽으심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왜 이렇게 부릅니까? 27절에 누구든지 주의 떡이나 주의 몸과 우리는 주님의 피로 사신바 되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주의 떡과 주의 몸이라고 했습니다. 29절에 주의 몸을 했으며, 32절에 주께 징계를 받는 것이니 우리가 8주의 라는 말을 읽었습니다. 여기에는 주님의 주권이 언급되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고린도 성도들은 만찬에서 주의 주권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여기서 왜 바울이 주의 만찬이라고 드러내고 있습니까? 29절 앞에 주의 몸을라고 했습니다.

만약에 마태복음을 읽는다면 이렇게 읽을 것입니다. 예수의 몸이라고 했습니다. 마가복음에서는 예수의 몸이라고 했습니다. 누가복음에서도 예수의 몸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요한복음에서는 거기도 예수의 몸이라고 읽을 것입니다. 아리마대 요셉이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의 몸을 요구했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사실이며 틀리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복음서는 역사적으로 주님을 다루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에 달린 그분은 나사렛 사람 유대인의 왕 예수라고 언급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이 서신을 기록할 때는 십자가에 달린 그분이 단순한 예수가 아니었습니다. 바울이 서신을 쓸 때는 그는 더 이상 무덤에 있지 않습니다. 그분은 어디에 계셨습니까?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셨습니다. 2장과 4장에서 못박힌 예수를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했다고 전파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영광 받으신 주님에 대해서 말씀을 하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2 9절에 보면 예수님을 지극히 높였다고 했습니다.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셨다고 했습니다. 모든 이름을 주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모든 이가 주라고 시인할 것이라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주이십니다. 이 주님을 높이는 것이 우리의 특권입니다. 슬프게도 고린도 성도들은 이 주님을 높이지 않았습니다.

이 주제를 떠나기 전에 이 주의 라고 하는 이 말은 만찬의 특징을 나타낸다는 것을 다시 말씀드립니다. 우리가 이것을 정말로 믿는다면 만찬의 존귀함을 나타내게 될 것입니다. 아주 합당한 시간에 이것을 행할 것입니다. 다른 말로 말하면 만찬 때 늦지 않고 제 시간에 참석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주님의 주권을 합당하게 높일 것입니다. 또한 이 주님의 주권을 안다면 시간에도 늦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올 때 합당치 않는 복장을 하고 오지 않을 것입니다. 몇 년 전에 버킹검 궁전에 제 아내와 함께 초청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여왕이 그 궁궐에서 엄위한 복장을 차리고 있었습니다. 저는 왜 거기 참가했는지 지금도 모릅니다. 대단히 큰 격식을 갖춘 초청이었습니다. 초청장에는 금박이 들어있었습니다. 그 궁정에 아내와 함께 제거 초청을 받았습니다. 그 이유는 아주 간단합니다. 단순한 초청장이 아니라 거기에는 안내하는 패키지가 들어있었습니다. 어떤 복장을 입고 와야 하는 가이드가 들어 있는데, 여왕 앞에서는 합당한 복장을 해야 한다는 안내가 그 속에 들어 있었습니다. 야구 경기장에 가는 그런 복장으로 주님의 만찬에 참여하지 않을 것입니다. 제가 주님을 기억하러 모일 때에 영국의 여왕보다 더 높은 분 앞에 제가 나가는 것입니다. 제가 세번째로 만찬의 존엄을 인식하고 있다면 제가 어떻게 그분께 감사를 드려야 할지를 생각할 것입니다.

 

주님의 명령인 주의 만찬

23~26절에 여기는 만찬의 명령이라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이것을 기억하십시오. 이 기록은 신약에서 만찬이 기록된 최초의 기록입니다. 여러분은 제자들의 기록이 있지 않습니까라고 할 것입니다. 모든 학자들이 인정하기를 복음서보다도 바울의 서신이 먼저 기록했다고 인정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만찬에 관한 최초의 기록입니다. 바울은 주님의 존귀에 대해서 지금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왜 명령이라고 부르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23절에 주께 받은 것이니라고 바울은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바울이 말한 내가 라는 말은 대문자 I 였습니다. 이것은 그리이스 원전에 강조하는 I 를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바울이 주님께로부터 직접 받았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헬라어에서는 내가 하는 말로 강조되어 내가 주께 받은 것이니 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만찬을 제정하는 그 자리에는 없었습니다. 베드로와도 함께 있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것을 주님께 직접 받은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에베소서에서 몸된교회에 관한 언급도 했습니다. 또한 갈라디아에서도 베드로와도 교제를 했습니다만, 바울은 승천하신 그리스도를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습니다. 또한 예수께 받았다고 하지 않고 주께 받았다는 것을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또 한가지를 주목할 것은 주 예수 입니다.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 떡을 가지사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라는 말은 부정시제로서 이렇게 설명이 될 수 있습니다. 다른 말로 말하면 만찬을 제정하는 자리에 가룟유다가 없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시간에 가룟유다는 예수님을 팔려고 흥정하는 동일한 시간대에 주님이 만찬을 제정하셨습니다. 가룟유다는 이미 그 자리를 떠나서 주님을 잡으려고 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잡히시던 밤에 라는 말을 부정시제로 즉 시제가 정해지지 않은 시제로 표현한 이유입니다. 또 주목하고 싶은 것은 주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여러분은 이 표현을 복음서에서는 얻을 수가 없습니다. 마태 26:26에 보면 마태는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거기서는 정말로 그렇게 기록해 놓았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여기서 주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24절에서 축사하시고 떼어 가라사대 유크리스테오라는 헬라어는 감사한다는 뜻입니다. 복음서의 만찬은 제정하는 그 자리로 가면 떡을 언급할 때 다른 율로게오라고 하는 헬라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 의미는 좋게 말한다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유크리스테오는 감사한다는 의미인데 반해서 율로게오라는 말은 좋게 말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한국에서 어떻게 말하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여러분의 언어를 제가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만찬에 있어서 저는 대단히 불이익을 받고 있습니다. 저는 말할 수 없고 저는 들을 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함께 말을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성도로서 주님께 감사드린다는 것을 제가 의심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두가지를 생각해야 됩니다. 첫번째는 아들로 말미암아 아버지께 감사를 드리는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그것만 해서는 안됩니다. 또 한가지는 아버지께 아드님에 대해서 좋게 말하는 것에 대해서 잊어서는 안됩니다.

 

두 대명사 '너희' ''를 통한 하나님의 감동

여러분이 감사를 잘 할지 모릅니다. 여기 작은 부분에서 한가지 주목할 것은 이것은 우리들에게 도움을 줄 것입니다. 24절 후반에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여러분이 두 말을 마음에 두시기 바랍니다.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은 엄청나게 존귀한 말입니다. 너희를 위하는.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이 말씀을 하시는 분은 주 예수님이십니다. 내가 십자가에서 너희를 위해서 한 것 그것이 떡이 말하는 바입니다. 내가 십자가에서 한 것은 너희를 위한 것이었다. 이것은 제 마음을 감동시킵니다. 매일 제 마음을 이 말씀이 감동시킵니다. 저는 매일 주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을 감사합니다. 여러분이 마음 속에 두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을 위해서도 주님이 돌아가셨습니다. 예수님이 하신 것은 여러분을 위해서도 돌아가신 것입니다. 24절 마지막에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너를 위하고 나를 기념하라. 아주 아름답고 단순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매우 존귀하지 않습니까! 나를 기념하라 만찬을 통해서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을 행하면서 나를 위해서 하라 내가 십자가에 죽었는데 너를 위한 것이었다. 25절 마지막에 나를 기념하라

여기에 두 대명사를 마음에 두시기 바랍니다. 하나는 너희고 또 하나는 나를 입니다. 이것은 주님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마태와 마가는 이것을 쓰지 않았습니다. 누가는 이것을 쓰고 있습니다. 바울을 이것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누가와 바울이 함께 한 것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바울은 누가를 말할 때 사랑받는 의원 누가라고 말했습니다. 마지막 서신에서 바울은 모두 나를 버리고 떠났다고 말했는데 누가만 나와 함께 있다고 말했습니다. 이것이 누가에게 영향을 주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물론 이것은 하나님의 감동입니다. 여러분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을 기억하십시오. 바울의 서신을 보게 되면 바울의 특징을 볼 수 있습니다. 또한 베드로 서신을 보면 베드로의 특징을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여러 서신에 일부 특징이 나타나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얼마나 놀랍게 역사하는가 하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기본적으로 하나님의 감동이 있고 그런 가운데서도 각자의 개성적인 특징을 주님이 사용하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세가지를 다시 한번 보겠습니다.

 

주의 만찬을 통해 기억하는 세 가지

23,26절에서 이미 나를 기념하라는 말을 강조했습니다. 이것은 주님의 인격(person)입니다. 우리는 주님 자신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선별적이고 매우 특이한 것입니다. 26절에서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여기는 십자가의 고난(passion)입니다. 우리는 주님 자신을 기억하고 주님의 고난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세번째로 26절 마지막 부분에 오실 때까지 이것은 약속(promise)입니다. 저는 아일랜드에서 전 세계 어디로 갈 때마다 제가 언어를 이해하는 늘 주의 만찬을 생각합니다. 어느 곳에서나 어디서나 동일한 분을 말합니다. 만찬 때 이 세가지를 두고 기억하는 것입니다. 주님 자신과 주님의 고난과 주님의 약속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주의 만찬의 빈도와 지속성

또 하나의 다른 중요점을 보겠습니다. 이것은 지속성인데 26절에도 나와 있습니다. 25절 마지막부터 나오는데 자주 마실 때마다(우리성경에 없음) 이것은 빈도를 나타냅니다. 26절에는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 이것은 지속성에 관한 말씀입니다.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지속성을 갖는 것을 의미합니다.

26절은 성경적인 권위입니다. 이 땅 위에 있는 모임들이 행해야 될 것을 선언하는 성경적인 권위입니다. 떡 뗌을 포함해서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행하는 것입니다. 저는 전 세계에 돌아다니면서 주님의 오심이 가까웠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전 세계의 어떤 지역에서는 모임들이 힘겨워지고 있습니다. 주님 오실 때까지 주님의 증거가 계속될 것입니다. 주님 오실 때까지 주님이 모임을 통해서 기억이 되실 것입니다. 저는 우리시대에 주님께서 오실지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주의 만찬과 주님의 징계

엄중한 말씀을 또 드리겠습니다. 27,8절에 여기는 우리의 상태에 관한 말씀이 나와 있습니다. 이것이 고린도 지역모임의 드러난 부분이었었습니다. 그들은 올바른 마음 상태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주의 떡이나 잔을 합당치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주의 몸과 피를 범하는 죄가 있느니라 여기에 범하는 죄를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이것은 양심 속에서 어떻게 하는가를 감지하는 것입니다. 만약에 나쁜 행동을 하고 있다면, 주님의 이름에 욕되는 행동을 하고 있다면, 만약에 주님의 만찬 자리에서 그렇게 할 때에 하나님의 손길에 심판을 초래하게 될 것입니다. 그들은 만찬에서 올바른 상태로 준비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28절 여기에 중요점이 있습니다. 여기에 사람이 했을 때 남녀를 다 말하고 있습니다. 자기를 살핀다고 했기 때문에 자기를 조사해야 합니다. 이것은 개인적으로 조사하는 것을 말합니다. 개인적으로 자기 스스로를 살피고라는 의미입니다. 자기가 살펴보고 잘못된 것이 있으면 고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것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 후에야 이 떡을 먹고 다른 말로 말하면 만찬에 참여하기에 올바른 상태가 되어 있어야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기에 문제가 무엇입니까? 자기 자신을 살피는 것입니다. 함께 모일 때에 자기 행동을 살피는 것입니다.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여기에는 징계에 관한 말씀과 연결이 됩니다.

29~32절을 보면 징계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29절에 주의 몸을 분변치 못하고 먹고 마시는 자는 자기의 죄(심판-영어성경)를 먹고 마시는 것이니라 고 말합니다. 28절에서는 자신이 자신을 살피는 것이 나와 있고 이렇게 살피지 않았기 때문에 계속 세상적으로 만찬을 떼고 마셨기 때문에 29절에 무엇을 하고 있는 결과가 어떻습니까? 그 자신에게 심판을 먹고 마시는 결과가 되었습니다. 여러분 성경은 매우 논리적인 책이기도 합니다. 구절구절마다 진행이 될 때에 논리적으로 진행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올바른 상태로 돌려놓지 않았기 때문에 계속 만찬을 잘못 행함으로, 자기 자신의 심판을 계속 먹고 마시는 결과가 되었기 때문에 그래서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 결과는 30절에 이러므로 세상적으로 만찬을 떼고 마신 결과, 올바른 상태가 아닌 상태에서 참예한 결과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이러므로 너희 중에 약한 자와 병든 자가 많고 잠자는 자도 적지 아니하니

고린도 모임은 대단히 큰 모임이었습니다. 성경은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대단히 슬프게도 약한 자와 병든 자가 많고 잠자는 자도 적지 아니하다는 것은 많다는 뜻입니다. 여기는 영적으로 약한 것과 병든 것과 관계가 있습니다. 영적으로 육신적인 상태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된 상태는 하나님의 징계의 손길이 임한 상태인 것입니다. 이것은 병자는또 다른 징계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몸이 좋지 않을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죽었습니다. 잠자는 자도 적지 아니하다(많다)고 했습니다. 잠자는 것을 죄인들이 죽는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믿는 자들이 세상을 떠날 때에만 쓰는 용어입니다.

여기에 말씀을 드리자면 만약 믿는 자가 병이 든다면, 결론을 내리는데 성급하지 말기 바랍니다. 어떤 경우에 잘못된 삶 때문에 하나님의 징계가 있습니다만 그러나 많은 경건한 분들이 병이 들어서 돌아가시기도 합니다. 그러나 고전 11장은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것은 특별히 하나님 앞에서 잘못함으로 인해서 오는 결과였습니다. 그러면 약한 자와 병든 자가 많고 잠자는 자는 무엇을 의미합니까? 어떻게 되었기에 그렇게 되었습니까? 다음절이 논리적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31절을 먼저 보면 우리가 우리를 살폈으면 판단(심판)을 받지 아니하려니와 28절에서 자세를 살폈다면 주님께서 판단(심판)을 하지 않았을텐데 그래서 32절에서 바울은 무엇이 일어났는가를 논리적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판단을 받는 것은 주께 징계를 받는 것이니 이것은 주님께로부터 온 징계의 손길인 것을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이 동일한 것을 한번은 만찬과 관계가 되고 한번은 징계와 관련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세상과 함께 정죄함을 받지 않게 하려함이라고 기록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믿는 자들을 세상과 다르게 다루시기를 원하십니다. 34절을 말씀드리고 마치겠습니다. 만일 누구든지 시장하거든 집에서 먹을지니 이는 너희의 판단받는 모임이 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판단 받는 모임은 무엇입니까? 29절을 보면 주의 몸을 분변치 못하고 먹고 마시는 죄 즉 자기의 심판을 먹고 마시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주의 만찬은 놀라운 영예(榮譽)의 교제

이것이 결론입니다만 모임의 교제는 놀라운 영예가 있는 교제입니다. 주님의 만찬은 대단히 놀라운 영예(榮譽)가 있는 교제입니다. 제가 좋아하는 모임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자면 어떤 경우에 모임에 그냥 앉아 있습니다. 주님을 생각합니다. 십자가에서 저를 위해서 한 모든 것을 기억합니다. 주님께서 하신 일을 생각하며 떡을 떼고 잔을 나눕니다. 이것은 엄청난 영예입니다. 우리는 오늘 저녁에 그 책임을 배우면 좋겠습니다.

2009. 01. 28() 의왕모임

 

 

posted by 징검 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