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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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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 2. 4. 18:14 카테고리 없음

믿는 자들의 침례

_로빈 매키온

한국에 다시 와서 대단히 기쁩니다. 또한 홀이 가득 차서 기쁩니다. 내 마음에 있는 것을 다 표현할 수 없어서 유감입니다. 제가 마지막 방문한 것을 기억하며 여러분의 얼굴을 볼 때 제 마음이 감동이 됩니다. 여러분의 많은 얼굴을 뵈어서 제가 감동이 됩니다. 사도행전 15장에 바울과 바나바는 둘째 전도 여행에서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 도시로 두 사람은 다시 여행을 했습니다. 그들이 어떻게 행하는지를 보고자 했습니다. 그와 같이 여러분이 어떻게 행하는가를 한국에 다시 와서 보게 되니 좋습니다. 나는 여러분을 보기를 좋아합니다. 또한 의왕모임에 오게 된 것을 제가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제 발음이 나쁜 것을 이해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제가 한국에 와서 이 모임 이름을 들었습니다.

오늘 저녁에 제가 말씀을 드릴 것은 믿는 자들의 침례에 관해서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이것은 보통 이야기 하는 주제일 것입니다. 어떤 분에게는 이 믿는 자의 침례가 도전을 줄 것입니다. 또한 그들은 왜 그렇게 침례가 필요하냐고 질문을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는 오늘 저녁에 다섯가지 질문으로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을 하겠습니다. 제가 드리는 질문 다섯가지는 전부 성경에 있습니다. 또 이 가르침은 성경에 근거한 다섯가지 질문이 되겠습니다. 요한복음 1장으로 출발을 하겠습니다. 성경에 밥티즈라고 하는 단어가 80번 나오는 것을 여러분에게 먼저 말씀드립니다.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요한복음 1 19~25

19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서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을 요한에게 보내어 네가 누구냐 물을 때에 요한의 증거가 이러하니라 20 요한이 드러내어 말하고 숨기지 아니하니 드러내어 하는 말이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한대 21 또 묻되 그러면 무엇, 네가 엘리야냐 가로되 나는 아니라 또 묻되 네가 그 선지자냐 대답하되 아니라 22 또 말하되 누구냐 우리를 보낸 이들에게 대답하게 하라 너는 네게 대하여 무엇이라 하느냐 23 가로되 나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과 같이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라 하니라 24 저희는 바리새인들에게서 보낸 자라 25 또 물어 가로되 네가 만일 그리스도도 아니요 엘리야도 아니요 그 선지자도 아닐진대 어찌하여 세례를 주느냐

이것은 요한의 세례입니다. 여러분은 교회시대의 침례와 요한의 침례를 오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요한의 세례는 요한이 전도한 시대의 특이한 침례입니다. 이것은 물에 잠기는 세례였습니다. 요한이 침례를 전할 때 사람들은 죄를 고백했습니다. 여러분이 알기를 원하는 것은 주님이 요한에게 세례를 받았지만 주님께서는 죄가 없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죄를 고백하는 침례를 받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죄를 고백하실 필요가 없었습니다. 요한의 세례를 받으면서 죄를 고백하는 것은 그들에게 중요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죄를 고백하는 침례를 받으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는 죄가 없으셨기 때문입니다.

19~25절까지 요한은 일곱가지 질문을 받습니다. 이들은 와서 요한에게 7가지 비판적인 질문을 했습니다. 그들은 요한의 섬김을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또한 질문을 해서 요한에게 도전을 하려고 왔습니다. 7가지 질문 중 여러분은 일곱번째 질문에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25절에 일곱번째 질문이 있습니다. 그들이 말하기를 어찌하여 세례를 주느냐? 이 질문의 원리를 봐 주시기 바랍니다. 왜 이렇게 세례를 베푸느냐? 그들은 요한이 세례를 베푸는 것에 대해서 비판적이었습니다. 오늘 저는 요한의 세례를 말씀 드리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교회시대에 믿는 자들의 침례에 관해서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저는 이 질문에서 질문을 드리고자 합니다. 어떤분들은 이번에 도전을 하는 질문을 할지 모르겠습니다. 여러분에게 질문을 하여 말하기를 왜 그런 세례를 주느냐 이렇게 비판하는 질문을 할지 모르겠습니다. 여러분은 그 질문에 대답을 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이 질문에서 어떤 이름을 가져오기를 원합니다. 이 질문의 이름을 비판적인 질문이라고 이렇게 이름을 붙입시다. 믿는 자들이 질문을 받을 때 모두 그 질문에 굴복하는 것이 아닙니다. 일본에서 그런 비판 질문이 있듯이 한국에서도 마찬가지로 비판적인 질문이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주님의 이름으로 모이는 그 모임에 대해서도 말입니다. 그런 비판에 대해서 염려하지 마십시오. 우리도 여기에 비판적인 질문을 하나 가지고 있습니다. 어찌해서 그렇게 세례를 베푸느냐? 여러분에게 또 다른 하나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비판적인 질문은 어떤 것을 요구합니다. 그들을 대답을 요구합니다. 우리는 그러한 비판적인 질문에 대답을 할 수 있겠습니까? 많은 비판적인 질문이 왜 그렇게 침례를 베푸느냐고 질문을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물론 우리는 대답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실제적이고 증거적인 분명한 성경적인 대답을 가지고 있습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이러한 비판적인 질문에 대해서 세가지 성경적인 대답을 드리겠습니다. 그들이 대답을 요구하는 것을 보십시오. 우리는 어떻게 그들에게 대답을 하겠습니까?

첫번째 대답은 주님의 명령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마태복음 28 19,20절을 아실 것입니다. 주님의 명령을 들으십시오.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저는 이것을 대단히 사랑합니다. 모든 족속으로 저는 한국 성도들이 침례받는 것을 생각할 때 마음이 감동적입니다. 몇 년 동안에 많은 사람들이 침례를 받았습니다. 최근에 저는 6명의 젊은 사람들에게 침례를 베풀었습니다. 거기에는 세분의 자매님들이 있습니다. 거기다가 두 사람이 더해졌습니다. 다섯명의 젊은 사람과 두명의 여자가 있습니다. 그 사람들은 아일랜드 사람입니다. 여기에도 침례받은 많은 분들이 계시리라 생각합니다. 이것은 모든 족속이라는 말에 포함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정치적인 분열에 대해서 순종해서는 안됩니다. 나의 참된 친구들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분들입니다. 나라가 어떻던 관계가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가까워진 것입니다. 다시한번 마태복음 28장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이것은 주님의 명령입니다.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세례를 주고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이것은 침례의 형식처럼 보이지만 나중에 다시 말씀 드리겠습니다. 형식이라는 것은 이런 것입니다. 제가 어떤 사람에게 침례를 베풀 때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침례를 베풉니다. 있다가 그 이유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리는 마가복음으로 오게 되면 온 세상에 나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전파하고 믿고 세례를 받는 자는 구원을 얻을 것이요라고 말했습니다. 믿지 않는 자는 정죄를 당하리니라고 했습니다. 여러분이 잘 조사해 보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주님께서는 믿지 않고 세례를 안 받는 사람은 정죄를 당하리라고 말씀하지 않으셨는데, 정죄를 당함에는 세례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으셨습니다.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중심입니다. 침례는 논리적인 두번째 단계입니다. 첫번째로 그 비판적인 질문에 대한 대답은 이렇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명령을 가졌습니다. 이것은 순종하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우리는 침례에 대해서 더 나아간 가르침을 가지고 있습니다. 비판하는 분들이 이 말씀을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주님의 명령만 가졌을 뿐 아니라 두번째는 사도행전에 실행적인 모본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사도행전 2장에서 우리는 믿는 자들의 침례가 예루살렘에 있었던 것을 봅니다. 또한 8장에 가면 사마리아 도시에서도 믿는 자들의 침례를 봅니다. 또한 8 12절에 보면 빌립이 천국복음을 전할 때 사람들이 믿고 침례를 받았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침례를 받았습니다. 계속해서 8장에서 에디오피아 내시의 침례를 보게 됩니다. 9장에서 다소의 사울의 침례를 보게 됩니다. 그곳은 다메섹이었습니다. 10장에서는 고넬료 집안 사람들의 침례를 봅니다. 가이사랴에 있는 고넬료였습니다. 계속해서 16장에서 루디아의 침례를 보게 됩니다. 또한 빌립보 간수와 그 집안 사람들의 침례를 보게 됩니다. 이것을 보게 되면 사도의 가르침의 모본을 보는 것입니다. 또한 18 8절에서 고린도에서의 침례를 봅니다. 많은 고린도인들이 듣고 믿어 세례를 받아라고 했습니다. 이들은 모두 침례를 받았습니다. 사실 신약성경에 침례를 거절한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는 사도행전 19장에서 에베소에서 다시 침례를 베풉니다. 다른 말로 말하면 사도행전에서 명백한 모본의 예배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비판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가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절대적인 성경적인 모본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면서 비판을 거절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비판에 대답을 할 수 있습니다. 명백한 주님의 명령뿐 아니라 사도행전의 명백한 모본뿐 아니라 또 하나 더 있습니다. 이것은 서신서의 가르침입니다. 이 서신서의 가르침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나중에 로마서 6장을 통해서 자세히 보겠습니다. 고린도전서 1장에 나와 있고, 너희들이 바울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느냐라고 말했습니다. 물론 이것은 세례를 받아야 한다는 것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3 27절에 보면 여러분 가운데 많은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아 죽었다고 바울은 말합니다. 에베소서 4 5절에서는 주도 하나요 믿음도 하나요 세례도 하나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믿는 자의 침례입니다. 골로새서 2 12절에는 세례로 장사 지낸바 되고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선언인데 장사라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선언입니다. 나중에 그쪽으로 가겠습니다. 또한 베드로도 그 주제에 관해서 말했습니다. 베드로전서 3 21절에 침례는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해서 찾아가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여러분 가운데 믿으시면서도 아직 침례를 받지 않은 분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여러분이 정말로 구원받았습니까? 여러분이 구원받았으면 여러분의 삶은 변했을 것입니다. 침례를 받으셔야 합니다. 왜요?라고 여러분은 질문할 것입니다. 저는 사도의 가르침을 말씀 드려야겠습니다. 말씀 드린대로 신약성경에서 어떠한 사람도 믿는 자로서 침례를 거절한 사람이 없습니다. 이렇게 두 가지를 말씀 드리겠습니다. 한 사람도 예외가 없었습니다. 베드로는 사도행전 2 8절에서 침례를 전파했습니다. 회개하고 세례를 모두 받으라는 의미로 말했습니다. 또한 성별의 차이도 침례에는 없습니다. 여자들이 남자처럼 침례를 받았습니다. 성경은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사도행전 8 12절에 나와있습니다. 빌립이 복음을 전했을 때,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했을 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남녀가 세례를 받더라. 또한 민족적인 차별도 없었습니다.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믿는 사람은 침례를 다 받았습니다. 좀더 보게 되면 다섯가지 질문이 있습니다. 이것은 비판적인 질문입니다. 이 질문은 대답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비판적인 질문에 대답하는데 문제가 없습니다. 성경적인 다른 질문으로 가겠습니다.

사도행전 8 36~39

36 길 가다가 물 있는 곳에 이르러 내시가 말하되 보라 물이 있으니 내가 세례를 받음에 무슨 거리낌이 있느뇨 38 이에 명하여 병거를 머물고 빌립과 내시가 둘 다 물에 내려가 빌립이 세례를 주고 39 둘이 물에서 올라갈새 주의 영이 빌립을 이끌어 간지라 내시는 혼연히 길을 가므로 그를 다시 보지 못하니라

여기의 질문은 36절에서 발견할 수 있는데 에디오피아 내시의 질문입니다. 보라 물이 있으니 내가 세례를 받음에 무슨 거리낌이 있느뇨라고 내시가 질문을 했습니다. 이것은 비판적인 질문이 아니고 요구하는 질문입니다. 여러분 이것은 새롭게 믿은 자가 하는 질문입니다. 이것은 원하는 질문인데 자기 쪽에서 원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제가 아는 어떤 분이 질문이 많이 있습니다. 알기를 원합니다. 제가 믿었을 때도 질문이 가득했습니다. 저는 복음적인 배경에 자라지 않았습니다. 여러분에게 말씀을 드려야 되겠습니다. 제가 1963년에 구원을 받았는데 제 형제 한 명이 3일 후에 구원을 받았습니다. 나보다 더 젊었습니다. 10일 후에 또 형제가 구원을 받았습니다. 지금 베네주엘라에 가있습니다. 10일 후에 저의 아버지가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때 61살이었습니다. 우리 집안에 하나님이 강력하게 역사를 했습니다. 집안이 변했습니다. 우리는 질문이 가득했습니다. 비판하는 질문은 아니었습니다. 새롭게 회개한 자의 질문이었습니다. 우리는 그 질문을 하면서 성경을 읽었습니다. 여기에는 새롭게 회개한 자의 질문이 있습니다. 원하는 질문이었습니다. 어떤 분이 구원을 받으면 자기가 원하는 질문이 있는 것을 보실 것입니다. 그것은 다소의 사울도 그러했습니다. 그가 구원받은 순간에 그는 질문이 있었습니다. 주여 내가 무엇을 하리이까? 이것은 새롭게 믿는 자가 원하는 원함입니다. 제가 믿었다는 증거 중에 하나가 무언고 하니 내가 새롭게 원하는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믿는 사람이 다 그런 것입니다. 우리는 믿고 나서도 여전히 육을 갖고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 속에 새롭게 원하는 것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성경 읽기를 원한다든지, 저는 성경을 읽고, 읽고 또 읽었습니다. 이 자리에 있는 젊은 분들에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여러분이 젊은 시절에 성경을 읽으시기를 바랍니다. 구절들을 여러분의 머리 속에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시편기자가 말하기를 주의 말씀이 내 마음에 있다고 말했습니다. 성경에 새롭게 믿는 자가 원하는 원함이 있습니다. 제가 구원 받은 지 얼마 안되어서 침례를 받았습니다. 제 두 형제도 침례를 받았습니다. 2개월 후에 아버지도 침례를 받았습니다. 제가 이런 원함이 있는 것은 또 하나의 구원받은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서로 믿은 사람들이 모입니다. 제가 구원받기 전에는 하나님의 백성이 모인 자리에 결코 가기를 원치 않았습니다. 이제 이 구절로 돌아갑시다. 여기에는 새롭게 회개한 자의 원함이 있습니다. 이 구절을 통해서 침례에 대한 질문을 합니다. 침례의 방법은 무엇입니까? 어떠한 방법으로 침례를 받아야 하겠습니까? 뱁티즘이란 침례란 말이 있습니다. 지금 침례란 말은 원래 그리이스에서 정확하게 번역된 것이 아닙니다. 헬라어를 그대로 번역한 것이 아니라 헬라어를 영어화 해서 번역한 것이 뱁티조입니다. 헬라어로는 밥티즈라는 말입니다만 이것이 뱁티즘이란 영어로 번역이 되었습니다. 왜 정확하게 번역을 안 했는지 아십니까? 그들은 번역할 수도 없었고 올바르게 번역하려고 하지도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침례를 행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어린아이들 머리에 뿌리는 세례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할 수도 없었고 하려고 하지도 않았던 것입니다. 저도 한 살 때 물 뿌리는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것은 침례가 원하는 의미가 아닙니다. 이구절에서 좀더 자세히 보게 되면 이렇습니다. 침례는 세 가지의 요소가 있습니다. 첫번째는 물 안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두번째는 물에 들어가서 물에 잠기는 것입니다. 이것을 물에 잠긴다고 표현할 수 있겠습니다. 처음에 물에 들어가고 그 다음에 물 속으로 잠기는 것입니다. 이것을 물에 잠긴다고 하겠습니다. 또한 중요한 것은 거기서 나오는 것입니다. 사람이 물에 들어가고, 물에 잠기고, 물에서 나오는 이 요소가 세가지였습니다. 여러분이 물에서 안 나온다면 여러분은 물에 빠져 돌아간 것입니다. 이 세가지가 대단히 중요하기 때문에 좀 자세히 보겠습니다. 8 38절을 다시 봐 주시기 바랍니다.

이에 명하여 병거를 머물고 빌립과 내시가 둘 다 물에 내려가 빌립이 세례를 주고

둘 다 물에 내려갑니다. 둘 다라는 말을 주목해주시기 바랍니다. 빌립과 내시 입니다. 빌립이 세례를 주고, 물론 성령께서 이들에게 주는 것을 감동을 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종교적인 행위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둘 다 물에 내려가(38), 둘이 물에서 올라갈새(39)

함께 갔습니다. 우선 물에 들어가고 물에서 올라왔습니다. 요한 세례도 물에 잠기는 것이었습니다. 마가복음 1 5절에서 요단에서 세례를 주고 그랬는데 요단 강 가에서가 아니고 요단강 안에서라고 했습니다(영어로 at the river Jordan이 아니고 in the river Jordan).

요한복음 3 23절에 요한도 살렘 가까운 애논에서 세례를 주니 거기 물들이 많음이라고 했습니다. 만약에 어린 아이들에게 세례를 주는 것을 생각한다면 종교지도자가 손가락 두 개로 찍어서 주기 때문에 많은 물이 필요 없습니다. 이마에다가 물을 뿌립니다. 그런 사람들이 나는 침례 받았다고 말을 합니다. 그것은 침례가 아닙니다. 물에 잠기지 않았습니다. 또한 물에서 나오지도 않았습니다. 그래서 어린 아이들에게 세례를 베푸는 것은 침례가 아닙니다. 말씀을 받는 사람들은 침례를 받았습니다. 침례는 모든 주님을 따르는 자들이 따르는 예입니다. 이것은 회개하기 전에 받는 것이 아닙니다.

세번째 질문으로 갑시다. 10 44~48,

44 베드로가 이 말 할 때에 성령이 말씀 듣는 모든 사람에게 내려오시니

45 베드로와 함께 온 할례받은 신자들이 이방인들에게도 성령 부어 주심을 인하여 놀라니

46 이는 방언을 말하며 하나님 높임을 들음이러라

47 이에 베드로가 가로되 이 사람들이 우리와 같이 성령을 받았으니 누가 능히 물로 세례 줌을 금하리요 하고

48 명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 하니라 저희가 베드로에게 수일 더 유하기를 청하니라

이것은 비판하는 질문도 아니고 요구하는 질문도 아닙니다. 이 질문을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47절에 이 사람들이 우리와 같이 성령을 받았으니 누가 능히 물로 세례 줌을 금하리요라고 질문을 했습니다. 여기서 대단히 흥미로운 것을 발견합니다. 이것은 전도자의 질문입니다. 새로 구원받은 자의 질문을 받았고, 여러분은 새로 침례받은 자의 질문을 원할 것입니다. 또한 모든 전도자는 그 질문에 대답을 해야 합니다. 여기서는 전도자의 질문이 있는데 놀라운 질문입니다. 사도 베드로의 질문인데 또한 이것은 전도자의 질문입니다 이것은 어떤 거부에 관한 전도자의 질문입니다. 거부라는 것을 설명하면 여기에 한 사람이 태어났습니다. 어떤 사람은 믿고 나서도 침례 받기를 거부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구원받았으면 침례는 필요없다는 것입니다. 이제 더 이상 침례가 필요없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저는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 일부를 알고 있습니다. 구원받는데 침례는 아무 관계가 없다. 저는 거기에 대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시오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여기서 여러분이 알기를 원하는 것은 48절에 명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 하니라 대단히 강력한 말씀입니다. 베드로는 이방인에게 복음이 나가는 것에 대해 인식을 갖고 있었습니다. 45절에 베드로와 함께 온 할례받은 신자들이 이방인들에게도 성령 부어 주심을 인하여 놀라니 했습니다. 이방인들에게 유대인에 대한 축복이 갔기 때문입니다. 많은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에게 이 축복이 가는 것을 반대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말하기를 누가 능히 물로 세례 줌을 금하리요 라고 했습니다. 이 사람들은 이방인들이었습니다. 이런 배경에서 48절을 보면 명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 하니라. 여러분은 베드로는 사도적인 권위가 있다고 말할 것입니다. 물론 그렇습니다. 그는 물론 권위를 사용했습니다. 명하여 할 때 중요한 것은 베드로의 이름으로가 아니었습니다. 베드로는 말하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이 권위는 사도의 권위가 아니라 주 예수님의 권위로 명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렇게 질문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는 것은 어떤 것인가?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고 했는데 이것은 모순되지가 않습니다. 10장에서 보이는 바는 베드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보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 베드로가 권위를 부여했습니다. 이것은 형식적인 침례가 아니라 권위가 주님에게 가도록 했습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말씀을 드립니다만 그 형식인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라는 것은 왜 세 이름으로 하는 형식이 주어졌는지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여러분은 이 세 위가 각각 삼위인 것을 아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어떤 사람이 회개할 때 이 삼위가 각각 역할을 하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전서 1 1,2절에

1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 베드로는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와 비두니아에 흩어진 나그네

2 곧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입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

여기에서 한 죄인이 구원받는데 대한 삼위일체의 역할이 나와 있습니다.

사도행전 22 12~16절에서 네번째 질문으로 가겠습니다.

12 율법에 의하면 경건한 사람으로 거기 사는 모든 유대인들에게 칭찬을 듣는 아나니아라 하는 이가

13 내게 와 곁에 서서 말하되 형제 사울아 다시 보라 하거늘 즉시 그를 쳐다보았노라

14 그가 또 가로되 우리 조상들의 하나님이 너를 택하여 너로 하여금 자기 뜻을 알게 하시며 저 의인을 보게 하시고 그 입에서 나오는 음성을 듣게 하셨으니

15 네가 그를 위하여 모든 사람 앞에서 너의 보고 들은 것에 증인이 되리라

16 이제는 왜 주저하느뇨 일어나 주의 이름을 불러 세례를 받고 너의 죄를 씻으라 하더라

이때 바울은 예루살렘 도성에 있었습니다. 그가 회개할 때를 지금 회상하고 있습니다. 저도 제가 회개할 때를 회상할 때마다 기쁩니다. 제가 구원받은 때를 기억하면 매우 행복한 때를 기억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계속적으로 다메섹 도상에서 이전에 일어났던 일을 회상하고 있습니다. 12절에 아나니아라는 사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는 칭찬 듣는 사람이고 영적인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사울에게 보내졌습니다. 사울은 여기서 일시적으로 소경이 되어 보지 못하는 상태였습니다. 3일 정도 보지 못했습니다. 15,16절을 다시 보겠습니다.

15 네가 그를 위하여 모든 사람 앞에서 너의 보고 들은 것에 증인이 되리라

16 이제는 왜 주저하느뇨 일어나 주의 이름을 불러 세례를 받고 너의 죄를 씻으라 하더라

여기서 문제를 더 명확하게 하면 16절 마지막에 어떤 사람에게는 상당히 주저하고 당황하는 일일 것입니다마는 주의 이름을 불러 세례를 받고 너의 죄를 씻으라 하더라. 어떻게 나의 죄를 씻겠는가 하고 질문을 할지 모르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만 죄를 씻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피로 완전히 깨끗해졌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의미는 이런 것입니다. 바울은 대단히 높은 명성을 가졌드랬습니다. 그는 핍박하는데 선두에 서 있는 높은 지위를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어떤 면에서는 대단히 참혹한 일을 하는데 선두에 섰습니다. 의미는 이런 것입니다. 바울 너는 공적으로 앞장을 서서 핍박을 했었다. 이제 이전에 했던 것의 증거로 침례를 받아야 한다.라는 의미인 것입니다. 이전에 공적으로 했던 것처럼 이제 공적으로 부인해야 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죄를 씻는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물론 그의 죄는 십자가의 피로 이미 죄사함을 얻었습니다.

16절의 질문으로 가서 이제는 왜 주저하느뇨 일어나 주의 이름을 불러 세례를 받고 이것은 대답을 요구하는 비판적인 질문도 아닙니다. 또한 새롭게 회개한 자가 요구하는 질문도 아닙니다. 또한 이것은 전도자가 부인에 대한 명령의 질문도 아닙니다. 저는 이것을 목자의 질문이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그 이유는 이렇습니다. 아나니아는 목자의 마음을 갖고 있습니다. 그는 새롭게 회개한 자에 대한 깊은 배려를 갖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바울에게 갔습니다. 그는 바울을 돕는데 사용됐습니다. 모임의 목자들은 상처 난 사람들을 돌아보는 것입니다. 디모데전서 3장에 따라서 하나님의 교회를 돌아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여기를 목자의 돌봄이라고 부르고자 하는 것입니다. 여기는 주저함을 다루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상하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사울은 구원받은 지 3일밖에 안되는데 주저하는 것을 질문을 합니다. 3일 밖에 안되었는데 이것을 늦춘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이 자리에 구원받고 일년 이살 된 분도 계실 것입니다. 일본의 고우치에서 주일날 말씀을 전했는데 복음을 제가 전했습니다. 거기에 중국 여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구원받았지만 아직 침례를 받지 않았습니다. 그는 지난 5월에 구원을 받았다고 합니다. 집회가 끝난 다음에 그 여자는 침례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제가 통역을 통해서 함께 성경을 가지고 앉았습니다. 왜 침례를 받아야 하는지를 보여 주었습니다. 바울은 구원받은 지 3일만에 침례를 받았는데 여기에서 목자의 심정은 주저함에 대한 말을 다루고 있습니다. 여기서 15절과의 관계를 생각을 해야 합니다. 15절에 네가 그를 위하여 모든 사람 앞에서 너의 보고 들은 것에 증인이 되리라 아나니아는 다소의 사울에게 15절을 가지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당신에게 큰일을 하고자 한다고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것은 강력한 일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저는 바울이 침례를 받지 않았으면 그의 일을 시작할 수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15절과 16절은 서로 연관이 되어 있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아나니아는 다소 사람 사울에게 말한 것인데 지금 현재 하나님의 일을 시작하기 위해서 15절을 바라보겠습니다. 당신은 서둘러서 침례를 받아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럼 침례를 안받으면 하나님을 위해서 일을 못합니까? 고 질문할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하나님의 일을 못한다고는 말하지 않지만 이것을 말하고자 합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아프리카로 전도하러 가면서 침례를 받지 않고 간다면 거기서 어떤 일이 일어났을 때 그 사람 자신이 말씀을 순종하지 아니했는데, 바울은 이 순간부터 하나님의 일을 위해서 나가는데 만약 침례를 받지 않고 나간다면 모본이 안되는 것입니다. 저는 이 주제의 말씀을 드립니다. 중요한 질문을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로마서 6 1~7절로 다섯번째 질문으로 가겠습니다.

1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

2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3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

4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5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

6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7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니라

이제 성경에서 대단히 중요한 구절로 왔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로마서를 매우 좋아합니다. 영국에 유명한 변호사가 있었습니다. 그는 어떤 법안에 대해서 변호할 때 동일한 법정에 서기를 원치 않는다고 늘 말했습니다. 특히 로마서를 가지고 말이죠. 다른 말로 말하면 로마서가 아주 논리적이라는 의미입니다. 대단히 이해하기 쉬운 말씀이고 대단히 설득하기 좋은 말씀이라고 그 법률가 변호사는 말했습니다. 이것은 대단히 설득력이 있는 장입니다. 비판적인 질문을 하는 질문에 대해서 이 말씀을 봅시다. 새롭게 구원받은 자의 요구에도 이 말씀이 적용이 될 것입니다. 또한 부인(否認)에 관한 전도자의 질문도 대답이 될 것입니다. 이것은 목자의 질문도 아닙니다만 이것은 무슨 질문입니까? 3절을 다시 보면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 이것은 질문입니다만 이 장의 중심 질문입니다. 이것은 교사의 질문입니다. 여기서는 죽음을 주제로 다루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장은 믿는 자들의 침례에 관한 가르침을 우리에게 주고 있습니다. 오늘 저녁 우리가 다루는 마지막 질문입니다. 죽음에 관한 주제를 다루고 마치겠습니다. 11개 절에서 8번 죽음이 다루어진다는 것을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참조 구절을 찾아보면 알게 될 것입니다. 여기서 죽으심이라고 언급되는 말을 11개 절에서 14번 보실 것입니다. 8절가지는 8번 죽음이 나오고 11절까지는 14번 죽음이 나옵니다. 이 장은 죽음이라는 말이 나오는 장입니다. 침례는 죽음과 연결이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은 이 장에서 죄가 17번 언급되는 것을 주목하실지 모르겠습니다. 1절을 보면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 1절에서 죄와 은혜를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무슨 의미입니까? 5 20절에도 죄와 은혜가 나와 있었습니다. 21절에도 죄와 은혜가 나와 있습니다.

율법이 가입한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마지막 부분에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이것을 마음 속에 두고 21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 한 것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니라

21절에 보면 죽음과 영생이 나와 있습니다. 죄와 은혜를 마음속에 두고 6 1절로 와서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 죄에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다는 말이 앞에 나왔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말하기를 죄가 더더 많아지면 은혜가 더더 많아질 것이라고 생각할 지 모르겠습니다. 죄에 거하자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바울은 어떻게 말합니까? 2절에 그럴 수 없느니라 그럴 수 없다는 말을 열번 사용합니다.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2절 마지막에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6절 마지막을 보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2절에서는 더 이상 죄 가운데 살지 않습니다. 6절에서는 더 이상 죄의 종이 되지 않습니다. 20절까지의 요약이 11절인데, 11절에 보면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지어다 여기서 죄에 대하여하나님께 대하여를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10절에 그의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의 살으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으심이니 11절에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기라는 가르침입니다. 13절에 너희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여기에서 구원이 엄청난 변화를 일으킨 것을 볼 수 있습니다. 22절에 그러나 이제는 너희가 죄에게서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죄에게서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었습니다. 이제 죄에게서 해방되어 하나님께 종이 되는 것을 사랑하는 성도님들이 생각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제 22절의 마지막을 논리적으로 봐 주시기 바랍니다.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얻었으니 이것이 질문과의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이제 3절이 교사의 질문으로 돌아갑시다. 죽음에 대해서, 생명에 대해서도 말씀드렸습니다. 3절 질문을 보시면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

이것은 어떤 자의 침례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관계 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4절에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3절에 세례가 언급되고 4절에도 세례가 언급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이것은 정확하게 무엇을 의미합니까? 이것은 믿는 자의 침례에 관한 것입니다. 이것이 말하는 바는 매우 단순하고 명백합니다. 저의 침례는, 여러분의 침례는 이것을 이렇게 이해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말씀에 관해 순종할 책임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 말씀에 관한 많은 설명을 이해하지 못한다 할지라도 오늘 이 자리에서 보이는 것은 상징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 가를 지금 설명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분명하게 선언되었습니다. 여러분의 침례를 통해서 말이죠. 그리스도께서 돌아가실 때 여러분이 죽었다는 것이 선언되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장사지낸바 되었을 때 여러분도 장사지낸바 되었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선언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한 것처럼 여러분이 새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고 침례를 통하여 상징적으로 다시 살아났습니다. 여러분은 교사의 질문을 통해서 침례가 왜 중요한지를 보십니다. 마지막으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믿는 자의 침례를 통해서 죽음과 관련이 되는 세 가지 측면이 있습니다. 이 장을 통해서 우리는 죄에 대해서 죽었다는 것을 분명히 봅니다. 갈라디아서 2 20절을 보면 바울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라고 말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살았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산 것은 내가 아니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중요한 것은 내가라는 것입니다. 내 속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위해 죽으신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산다고 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이것은 대문자 I입니다. 사형당한 I 인데 바로 내가 죽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로마서 6장에서는 우리가 죄에 대하여 죽었습니다. 갈라디아서 2 20절에서는 우리가 나 자신에 대해서 죽었습니다. 여러분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오는 가운데 하나님의 사람 가운데도 문제가 많이 있습니다. 물론 자기 자신이 죽었다고 해도 말이죠. 세번째로 갈라디아서 6 14절을 보면 바울은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즉 십자가에 못박힘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세상에 대하여 못박혔다. 바울이 말하는 의미가 무엇입니까? 나는 세상에 대해서 죽었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죄에 대해서 죽고, 나 자신에 대해서 죽고, 세상에 대해서 죽은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5장에서는 거기에 모임 안에 있는 사람들이 나와있습니다. 죄에 대해서 죽지 않은 사람들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들을 부도덕한 죄에 빠졌습니다. 그들은 죄에 대해서 죽지 않은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정말로 구원받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을 모임 가운데서 쫓아냈습니다. 그들이 그 죄를 회개하게 되면 물론 감사함으로 그들을 모임으로 다시 영접할 수 있습니다. 요한삼서 9절로 가게 되면 우리는 디오드레베라는 사람을 봅니다. 그는 으뜸되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이 사람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 죽은 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으뜸되기를 좋아했습니다. 그는 모임에서 두목이 되기를 원했습니다. 이제 그는 으뜸되는 자리를 사랑했습니다. 그는 그 자신에 대해서 죽지 않는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마지막으로 디모데후서 4 10절을 보면 바울은 이런 말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데마는 세상을 사랑했다 이 세상을 사랑하여 바울을 따나갔다고 했습니다. 데마는 세상에 대해서 죽지 않고 삶을 산 사람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여러분이 침례를 받았다면 특별히 의미하는 바를 따라서 침례를 받으셨다면 우리 마음 속으로 한번 생각해 주시기 바랍니다. 여기 계신분들 중에 참으로 구원을 받으셨다면 여러분이 그리스도인으로서 정말로 구원을 받으셨다면 그리고 아직도 침례를 안받은 분이 계시다면 여러분은 성경으로 돌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왜 주저합니까? 일어나서 침례를 받으십시오. 여기에 홀이 가득 찼습니다. 저는 이것 때문에 마음이 뜨거운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과 함께해서 제가 기쁩니다. 제 아내에게 제가 감사를 이야기 했습니다. 여러분을 다시 본 것이 정말로 기쁩니다. 한국에서 여러분을 축복해 주실 것을 저는 확신합니다. 여러분에게 이 책을 제가 가지고 왔습니다. 저는 말씀 외에는 다른 것이 없습니다. 감사합니다.

2009. 01. 27() 의왕모임

 

 

posted by 징검 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