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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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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 4. 9. 11:39 빛 가운데로 걸으며

성령님과 사도행전

 

우리는 교회가 시작된 이래 처음 30년 동안의 성령님의 활동과 오늘날의 그분의 활동은 조금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초기에는 구원과 동시에 성령님께서 믿는 자들에게 임하시지 않았습니다(8:15,16). (물론 오늘날에는 우리가 이미 살펴본 대로 구원과 동시에 믿는 자들 안에 성령님께서 들어오십니다). 때로는 성령님을 받을 때 방언으로 말하는 것이 수반되기도 했습니다. 때로는 물론 침례를 받기 전에 임하시기도 했으며, 침례를 받은 후에 임하시기도 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서신서에 나와 있는 정돈된 가르침과 어떻게 조화시킬 수 있을까요?

이런 차이점에 관해 잘 이해하려면 사도행전이 유대교에서 기독교로 넘어가는 과정이라는 것을 기억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사도행전은 과도기의 큰 변천과정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초자연적인 능력으로 기독교를 세우고 계셨으며, 매우 특별한 방법으로 역사하고 계셨습니다(2:3,4). 우리는 놀라운 방언과 병고침의 역사, 뿐만 아니라 믿는 사람들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는 것(2:44,45),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즉각적인 죽음(5), 천사가 베드로를 옥에서 구출함(12), 죽은 자의 다시 살아 남(9), 베드로의 그림자에 덮임으로써 병든 자들이 나음을 얻은 것 (5:15), 에디오피아 내시에게 막 침례를 베풀고 올라온 빌립을 주의 영이 이끌어 가신 것(8:39) 등에 관하여 읽어볼 수 있습니다.

오늘날에는 아무데서도 이러한 일은 일어나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사도들의 기록에서 명백히 확증할 수 없는 한, 사도행전의 기이한 역사들이 오늘날 우리가 모방해야 할 본이 아니라는 것은 분명합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사도행전의 예가 아니라 서신서의 가르침들을 지침으로 삼아야 한다는 뜻입니다(고전 14:37). 이것은 매우 중요한 사실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사도행전이 과도기적인 성격을 띠고 있는 책이라는 점을 기억한다면 보다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성령님의 강림하심과 관련하여 서로 다른 네 부류의 사람들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1) 유대인, (2) 사마리아인, (3) 이방인, (4) 침례 요한의 제자들. 이들 모두는 똑같이 성령님으로 침례를 받음으로써 한 몸이 되었습니다. 거기에는 유대인이나 이방인의 구별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안에서 모두 하나였습니다.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은 오순절 날 성령님으로 침례를 받았으며 ( 2), 사마리아인 그리스도인이 성령님으로 침례를 받은 기록은 사도행전 8 14~17절에, 이방인 그리스도인이 성령님으로 침례를 받은 기록은 10 44~46절에, 그리고 침례요한의 제자들이 성령님으로 침례를 받는 기록은 19 6절에 나와 있습니다. 그러나 이 성령님의 침례는 두 번 다시 반복되지 않았습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그 네 부류의 사람들에게 그 모든 축복들을 가져다 준 성령님의 침례는 기독교의 시발점이었습니다. 그 후에 믿은 사람들은 성령님으로 침례를 받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성령님은, 각 사람이 구원 받을 때에 주어져, 각 사람 안에 내주하시게 되었으며, 이와 같이 하여 그들은 그 한 몸 속으로 인도되었습니다. 그 최초의 성령님의 침례는 반복되지 않았습니다.

교회는 각 사람이 부여받은, 그 최초의 성령님의 침례에 의해, 그 네 부류의 사람들로부터, 단번에 형성되었습니다. 따라서 오늘날에도 개개인이 성령님으로 침례를 받는다고 말하는 것은 그 의미에 대한 무지를 드러냅니다』(H.P. 바커).

이미 언급한 사도행전에 나오는 네 부류의 사람들과 연관하여 성령님을 받는 순서가 각기 서로 다르다는 것은 주목할 만 합니다.

사도행전 2 38절에서 베드로는 양심에 찔림을 받은 유대인들에게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라고 말합니다.

그 순서를 주목해 보십시오.

① 회개 → ② 침례 → ③ 죄사함 → ④ 성령님을 받음.

사도행전 8 14~17절에는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이 사마리아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 함을 듣고 베드로와 요한을 보내매 그들이 내려가서 저희를 위하여 성령 받기를 기도하니 이는 아직 한 사람에게도 성령 내리신 일이 없고 오직 주 예수의 이름으로 침례만 받을 뿐이러라 이에 두 사도가 저희에게 안수하매 성령을 받는지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에서는 순서가 다릅니다.

① 믿음 → ② 침례 → ③ 사도들의 안수 → ④ 성령님을 받음

사도행전 10 44~48에서는 또 다른 순서를 볼 수 있습니다. 베드로가 이 말할 때에 성령이 말씀 듣는 모든 사람에게 내려오시니 베드로와 함께 온 할례 받은 신자들이 이방인들에게도 성령 부어 주심을 인하여 놀라니 이는 방언을 말하며 하나님 높임을 들음이러라 이에 베드로가 가로되 이 사람들이 우리와 같이 성령을 받았으니 누가 능히 물로 침례 줌을 금하리요 하고 명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침례를 주라 하니라 저희가 베드로에게 수일 더 유하기를 청하니라.

여기에서는 ① 믿음(43절과 비교) → ② 성령님을 받음 → ③ 침례.

마지막으로 사도행전 19 1~6절을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아볼로가 고린도에 있을 때에 바울이 윗 지방으로 다녀 에베소에 와서 어떤 제자들을 만나 가로되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가로되 아니라 우리는 성령이 있음도 듣지 못하였노라 바울이 가로되 그러면 너희가 무슨 침례를 받았느냐 대답하되 요한의 침례로라 바울이 가로되 요한이 회개의 침례를 베풀며 백성에게 말하되 내 뒤에 오시는 이를 믿으라 하였으니 이는 곧 예수라 하거늘 저희가 듣고 주 예수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으니 바울이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므로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니.

여기에서는 앞에서 와는 또 다른 순서로 되어 있습니다.

① 믿음 → ② 재침례 → ③ 사도들의 안수 → ④ 성령님을 받음.

네 가지를 모두 합하여 도표로 만들면 다음과 같습니다.

유대인

사마리아인

이방인

침례요한의 제자들

(2:38)

(8:14~17)

(10:44~48)

(19:1~7)

회개

침례

죄사함

성령님을 받음.

믿음

침례

사도들의 안수

성령님을 받음

믿음

성령님을 받음

침례.

믿음

재침례

사도들의 안수

성령님을 받음.

때때로 우리는 어떤 지역의 사람들로부터 사도행전에 나와 있는 순서와 본을 따르라는 권고를 받습니다. 하지만 한 가지 질문이 있습니다.

우리는 어떠한 본으로 돌아가야 할까요?

지금까지 살펴본 대로 사도행전에는 적어도 서로 다른 네 가지 유형이 나와있으며, 성령님을 받는 순서에 있어서도 각기 다릅니다. 일견(一見), 이것은 좀 이상하게 보입니다.

만일 신약성경의 서신서에서의 가르침대로 오늘날에는 신자들이 구원의 복음을 믿음과 동시에 성령님께서 그 사람 안에 들어와 거하신다면(우리는 서신서에서 이와같이 가르치고 있다는 사실을 이미 살펴보았습니다) 사도행전 시대에는 왜 각 경우마다 서로 달랐을까요?

우리는 이러한 의문에 대한 해답을 그들이 속해 있던 민족이나(국가)서로 다른 종교적인 배경 속에서 찾아볼 수 있다고 믿습니다.

유대인들의 경우에 있어서는 사도행전 2 38절을 통해서 볼 때, 그들이 죄사함을 얻고 성령님을 선물로 받기 위하여 회개와 아울러 우선적으로 침례가 필요했다는 사실이 분명합니다

먼저 그들은 불과 몇 주 전에 하나님께서 보내주신 자기들의 메시아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습니다. 이제 그들 가운데 회개하는 자들은 자기민족이 거절했던 바로 그분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음으로써 패역한 세대(40)로부터 자신을 공적으로 분리시켰으며, 패역한 세대가 곧 맞이하게 될 운명으로부터 자신을 구원했습니다. 이것은 영원한 형벌로부터의 구원은 물론 육체적인 심판으로부터의 구원이었습니다. 따라서 이것은 특별히 회개한 유대인들에게 적용되는 순서입니다.

사도행전 8장에서 우리는 복음이 사마리아인들에 게도 전파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사마리아인들은 유대인과 이방인의 피가 섞인 혼혈민족이었으며, 혼합된 종교를 가지고 있었습니다(기원은 열왕기하 17 24~41절 참조). 그리고 그 후손들은 유대인들과 인종적으로나 종교적으로 항상 원수지간이었으며, 유대인들은 이들과 상종(相從)하지도 않았습니다(4:9).

『사마리아인들은 자기들만의 성경과 거룩한 산과 성전을 따로 가지고 있었습니다. 아마 그들은 틀림없이 사마리아인들의 교회와 사마리아인들의 성령님도 가지고 싶어했을 것입니다.

만일 그랬더라면 그것은 한 몸된 하나님의 교회를 분리하는 심각한 결과를 초래했을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우리는 여기에서, 그 순서를 달리 하심으로써 이러한 위험을 막으신 하나님의 놀라운 지혜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몸이 하나요 성령님도 하나이듯이 주도 하나요 믿음도 하나요 침례도 하나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사마리아의 신자들이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를 통하지 않고 성령님 받는 것을 허락지 않으셨습니다. 예루살렘에서는 이미 완전한 하나님의 교회가 형성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이 그들에게 베드로와 요한을 보낼 때까지 기다리지 않으면 안되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진리의 고리가 서로 연결되었으며, 성령의 하나되게 하심이 지켜지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상태는 항구적인 것이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더 이상 예외적인 순서가 필요치 않았기 때문입니다. 틀림없이 사마리아 신자들은 그 후, 오늘날의 경우와 같이, 구주를 믿음과 동시에 성령님을 받았을 것입니다』 (H. P. 바커)

고넬료의 경우를 잠깐 접어두고 침례 요한의 제자들의 경우를 먼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9). 혹자들은 다음과 같이 질문하곤 합니다. 우리는 믿는 상태에 있으면서도 아직 성령님을 받지 못한 사람들에 대해서 읽어볼 수 있지 않습니까?

『이 질문에 대한 우리의 답변은 그들이 믿은 것은 구원의 복음이 아니었다는 점입니다. 전혀 들어본 적이 없는 것을 그들이 어떻게 믿을 수 있었을까요? 그들이 들었던 것은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왔으므로 회개하라는 내용의, 침례 요한이 전파한 멧세지였습니다. 그 멧세지를 받아들인 다음 그들은 요한이 베푼 회개의 침례를 받았으며, 그 후에는 바울이 그들의 도시를 방문할 때까지 아무런 빛도 받지 못한 것 같습니다.

바울은 그들에게 구속 사역이 그리스도의 보혈로 말미암아 성취되었다는 것,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는 것, 이제는 그분의 이름으로 말미암는 죄사함과 구원이 모든 사람들에게 값없이 주어졌다는 것 등을 전해 주었습니다.

이것이 그들을 구원한 참된 복음이었으며, 그들은, 자기들이 성령님으로 인침을 받은 것이 바로 그들이 그것을 믿을 때였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바울의 입을 통해 복음을 들었을 때 그들은 그것을 곧 받아들였으며, 그리스도인의 침례를 받음으로써 자신들의 믿음을 시인했습니다.

이렇게 하여 참된 그리스도인이 된 침례 요한의 제자들과 맺어진 교제의 유대(維帶)는 사도가 그들의 머리 위에 안수함으로써 승인되고 비준되었습니다. 이것은 예외적인 순서라는 점에서 사마리아인의 믿는 자들의 경우와 같습니다. 동시에 이것은 오늘날 우리가 따라야 할 선례(先例)로써 간주되어서는 안되며, 특별히 사도가 분명히 아닌 사람들에 의해서 이와 같은 권위가 행사되려고 할 때 더욱 그렇습니다』 (H. P. 바커).

이제 고넬료와 그의 가족들의 구원에 대한 설명으로 넘어가 보면 우리는 오늘날의 우리와 가장 흡사한 순서, 즉 그리스도를 믿고, 성령님을 받고, 그 다음에 침례를 받는 모습을 만나게 됩니다. 우리는 이 사람들이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이 아니며, 불완전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던 침례 요한의 제자들도 아니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들은 이방인들이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그들이 침례나 혹은 안수를 받을 때까지 지체되지 아니하고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을 때 곧 하나님의 성령님으로 인침을 받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이것은 서신서에서 볼 수 있는 가르침과 일치하며 오늘날 우리에게 해당되는 정상적인 순서라고 간주할 수 있을 것입니다.

더 나아가 방언에 관해서도 한 마디 덧붙이고 싶습니다.

고넬료와 그의 친구들은 왜 방언을 말했을까요? 그것은 단순히, 하나님께서 이방인들을 받으셨다는 사실을 논쟁의 여지가 없이 입증하는 것이었습니다.

몇 가지 눈에 보이는 표적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는데 이것은 이방인들에 대하여 근원적인 편견을 가지고 있던 베드로와 그와 동행한 유대인 동료들에게 고넬료와 이방인들의 구원과 영접이 하나님께로부터 말미암은 틀림없는 역사라는 사실을 확신시켜 주기 위함이었습니다.

  만일 우리가 사도행전 10 45,46절을 다시 한 번 살펴보고 이는 방언을 말하며 하나님 높임을 들음이러라는 말씀을 주목해 본다면 이 사실을 분명히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와 아울러 사도행전 11 15~18절까지의 말씀도 다시 한 번 주의 깊게 읽어보십시오.

어네스트 타담

 

 

posted by 징검 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