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언의 은사란 무엇인가?
“방언을 하는 것”은 약 60년간 여러 종류의 “오순절파” 사람들 사이에서 유행해 왔으며 이것은 지난 15년 여 동안 천주교나 개신교를 막론하고 많은 교파들의 여러 무리에 의해 채택되어 왔습니다. 방언을 옹호하는 사람들은 환상과 육체의 전율감을 종종 수반하는 방언을, 믿는 자의 몸 안에서 나타나는 성령님의 초자연적 역사로 여깁니다. 어떤 사람들은 방언의 경험이 구원의 증거라고까지 주장하며 또 어떤 사람들은 방언을 그리스도인의 효과적인 삶과 증거를 위해 능력을 특별히 부여받은 것으로 간주합니다.
반면에 방언을 반대하는 그리스도인들은 방언을 순전히 자연적인 근거를 지닌 심리적 현상의 하나로 믿거나 또는, 어떤 경우에는 귀신의 영향에 기인한 것으로 믿어 왔습니다. 그들은 방언을 하는 사람들의 진실성과 그리스도인적 성품을 의심하지는 않으면서도 방언 현상이 어떤 사람의 삶 가운데서 성령님이 활동하시는 충분한 증거가 되지 않을뿐더러 성령님의 활동에 필요한 증거도 되지 않는다고 주장합니다. 다시 말해서 그 “재잘재잘 지껄임”을 체험한 사람들 중에서 많은 사람들이 나중에 심각한 죄에 빠졌으며 심지어 지독히 나쁜 불신으로까지 빠졌습니다(따라서 방언 자체로는 충분치 못합니다). 이에 반해 방언을 한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사람들 중에는 경건한 삶을 살면서 복음 전도의 면에 있어서 풍성한 열매를 맺는 그리스도인들이 대단히 많이 있습니다.
방언을 경험한 사람들 안에는 그렇지 못한 사람들을 2류 그리스도인들로 취급하는 경향과 더불어 일종의 영적 교만이 종종 있는 것 같습니다(방언을 경험한 사람들은 그렇지 않은 사람들보고 그 경험을 열심히 추구하라고 설득합니다).
그런데 중요한 점은 황홀경의 방언을 하는 현상이 꼭 기독교에만 있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방언 현상은 이교도 부족들과 강신술사들 이슬람교의 어떤 교파들, 기타 다른 여러 무리들 사이에서도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이 사람들은 방언을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시는 성령님의 은사 중 하나로 전혀 간주하지 않습니다. 게다가 어떤 사람들은 자기 의지 여하에 따라 심리학적인 기교를 사용하여 일정 기간 동안 방언을 말하는 상태로 만들어갈 수 있기 때문에 방언 현상은 때때로 순전히 지연적이고 심리적인 것으로 설명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해답은 항상 성서적인 것이 되어야지 변화무쌍하고 불확실한 개인의 체험이 기준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방언으로 말하는 것은 신약성경에서 단지 세 책 안에만 언급되어 있는데 이것은 방언이 교회의 주요 가르침이나 실행 사항 중의 하나가 아님을 시사하는 것 같습니다.
방언이 처음 언급되는 곳은 마가복음
방언이란 주제를 잘 설명하는 분명한 단락은 사도행전
이 기적적인 언어 능력의 동일한 표적은(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의 혼혈족이었던) 사마리아 사람들이 처음으로 그리스도께로 돌아왔을 때(행
전술한 사항에서 중요한 점은 이 은사가 복음을 확증하는 하나의 “표적”이었다는 것, 그리고 그것은 말하는 자에게 그 매까지 알려지지 않은 실제의 인간의 언어로 그 복음을 말하는 기적적인 능력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신약에 나오는 방언이란 단어가 모두 이상과 같은 용도로 사용되었음을 깨닫는 것도 역시 중요한 점입니다. 따라서 “방언”이 황홀경에서 뜻을 알아들을 수 없이 아무렇게나 지껄여대는 말이라고 생각할 필요는 전혀 없습니다. 그 단어는 언제나 “언어” 또는 실제의 신체 발성 기관을 의미합니다.
방언이 언급된 서신서는 오직 고린도전서 밖에 없으며 이 서신서의 12, 13, 14장에 언급되어 있습니다. 신약의 다른 교회에서는 방언이 사용되지 않았든지 또는 적어도 문제가 되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방언은 고린도 교회에 주어진 “성령의 은사” 중의 하나로 나와 있으며 그 교회 안에서 어떤 사람들만이 그 특정 은사를 가졌던 것이 분명합니다 (고전
방언은 어느 정도 구경거리적인 성격을 갖고 있기 때문에 이 은사를 소유한 사람들은 그것을 불필요하게 과시하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회중들은 일반적으로 그들이 말하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고전
고린도전서의 방언에 관한 바울의 묘사와 가르침은 현시대에 흔히 볼 수 있는 현상과 매우 현저한 대조를 이룹니다. 따라서 우리는 성서적 방언의 은사가 이름은 같으나 실속은 현대의 방언과 전혀 다르다는 결론을 내릴 수 밖에 없습니다.
이 사실은 “방언도 그치고”라는 바울의 말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합니다(고전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고전
우리가 현재 소유한 완성된 하나님의 말씀과 더불어 특별한 “표적들”이 있어야 할 필요 내지 가치가 더 이상 없어졌습니다. 사람이 성경을 믿고 순종하기만 한다면 성경은 그 사람의 모든 필요를 채워줄 수 있습니다.
전도출판사간 "성경은 해답을 가지고 있다"에서 -헨리 모리스
'성경은 해답을 가지고 있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어느 정도까지 언어의 자유를 주장해야 합니까? (0) | 2008.04.09 |
---|---|
십자가의 강도가 예수님과 함께 죽던 날에 낙원에? (0) | 2008.03.20 |
신약시대에도 십일조를 드려야 하는가? (0) | 2008.02.21 |
진화론은 열역학 제2법칙과 조화를 이룰 수 있습니까? (0) | 2008.02.02 |
다른 혹성에도 지성적인 존재가 살고 있을까요? (0) | 2008.01.23 |
진화는 과학적 사실이 아닙니까? (0) | 2008.01.23 |
사단은 진짜 인격체입니까? 만약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왜 그를 창조하셨습니까? (0) | 2007.11.12 |
창세기에 기록된 6일 간의 창조는 지질학적 연대와 일치합니까? (0) | 2007.11.0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