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의 열매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약
야고보는 본절에 언급된 사람이 믿음이 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 스스로 그렇게 말하고 있을 뿐인데, 만일 그가 진정으로 구원의 믿음이 있다면 그는 행함도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의 믿음은 말뿐인데 그러한 종류의 믿음은 아무도 구원할 수 없습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
구원은 행함으로 말미암지 않습니다. 그것은 믿음과 행함의 합작품도 아닙니다. 그것은 선한 행실을 낳는 그런 류의 믿음으로 말미암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야고보는 24절에서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게 된다고 말하고 있을까요? 이것은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고 한 바울의 가르침과 명백히 모순되는 것이 아닐까요?
사실 이 둘 사이에는 아무 모순도 없으며 둘 다 옳습니다.
신약성경에 의하면 칭의에는 다음과 같은 여섯 측면이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에 의해 의롭다 함을 얻습니다(롬
우리는 은혜로 의롭다 함을 얻습니다(롬
우리는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습니다(롬
우리는 피로써 의롭다 함을 얻습니다(롬
우리는 능력으로 의롭다 함을 얻습니다(롬
우리는 행함으로 의롭다 함을 얻습니다(약
구원받은 경험을 간증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습니다. 우리는 중생에 필수적으로 따르는 선행으로 그 진실성을 입증해야 합니다.
믿음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것은 영혼과 하나님 사이에 일어나는 보이지 않는 교통입니다. 사람들은 우리의 믿음을 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구원의 믿음의 열매인 선행은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행함을 볼 때까지 우리의 믿음을 의심할 충분한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선행은 그 아들을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로 기꺼이 죽이고자 한 것이었습니다(약
라합의 선행은 그의 민족을 배신한 것이었습니다(약
그것들이 ‘선한’ 행실인 이유는, 그것들이 여호와께 대한 믿음을 나타내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것들은 악한 행실, 즉 살인과 반역이었을 것입니다.
영혼과 분리된 몸은 죽은 것입니다. 그것을 가리켜 우리는 죽음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행함이 없는 믿음 역시 죽은 것입니다. 그것은 생명도, 활력도, 기능도 있을 수 없습니다.
살아있는 몸은 보이지 않는 영혼이 그 안에 있음을 드러냅니다. 그러므로 선행은 비록 보이지는 않지만 그 사람 안에 구원의 믿음이 있다는 확실한 표증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