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해석의 원칙(13)
수리상의 원칙
숫자 4
앞 장들에서는 숫자 1에서 3까지를 살펴보았다. 숫자 1은 으뜸과 통일의 숫자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수인데 이는 그분 외에 다른 첫째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분리와 구분은 숫자 2와 관계가 있다. 첫번째 숫자가 차이를 배제하는데 비해 두번째 숫자는 차이가 있음을 확증해 준다. 그리고 숫자 3은 하나님의 완전함과 온전함을 말해 준다.
이어서 창조의 수인 숫자 4에 대해서 간략히 살펴보고자 한다. 4는 특별히 땅과 관계가 있다. 제 4일에 물질적인 창조가 완성되었다. 땅은 동서남북의 네 영역으로 구성된다. 하루는 아침, 점심, 저녁, 그리고 밤의 네 구분으로 되어 있다. 1년은 봄, 여름, 가을, 겨울의 네 계절이 있다. 족속과 방언과 지방과 나라는 인류에 대한 사중적인 구분을 암시해 준다(창
넷째 계명은 땅에 대한 것이다. 주기도문의 네번째 문구는 땅에 대한 것이다. 사복음서가 우리 주님의 지상생애를 제시해 준 다. 우리 주님의 지상적인 계보에는 다말, 라합, 룻, 우리아의 아내 등 네 여인들이 언급되어 있다. 고린도전서
이스라엘 자손이 광야에서 방황하는 이야기가 성경의 네번째 책인 민수기에서 발견되는 것은 놀랄 일이 못된다. 그것은 사실 지상적인 책이요 이 땅에서의 우리의 삶에 대한 그림이다.
많은 메시지들이 마태복음 13장에 나오는 우리 주님의 비유에 언급된 네 종류의 토양(길가, 돌밭, 가시떨기, 좋은 땅)을 주제로 선포되고 있다.
우리가 믿기에 현 시대처럼 사단의 권능과 궤계가 현저히 나타난 때는 이제까지 없었다. 우리는 교리적으로 전천년주의자이다. 우리는 천년왕국이 아직 오지 않았으며 그리스도께서 그 분의 왕국을 세우시기 위해 오실 것이라고 믿는다. 사단의 이 땅에서의 현재의 권세가 천년왕국 때에 이르러 종식되는 모습을 그린 계시록
계시록 5장을 읽으면서 12절과 13절 사이의 병행구를 살펴보라. 천상의 피조물들은 어린양에 대해 일곱가지 사항으로 찬양을 돌리는데(12절) 비해 지상의 피조물들은 네가지 사항만으로 찬양을 돌리고 있다(13절).
우리는 만 왕의 왕께서 다윗의 나라를 세우시기 위해 재림하실 그날을 홀로 기다리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한 왕이 보좌 없이 계신데 그분은 자신의 강림을 갈망하는 백성들에게 다시 오실 그 날을 기다리신다. 그날은 거절의 날이었던 그분의 초림과 얼마나 다른지! 우리 주님께서는 자신의 재림에 앞서 나타날 사건들에 관한 감람산 강화(講話)를 말씀하실 때 네 명에게만 말씀하셨다.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과 안드레가 종용히 묻자오되 우리에게 이르소서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사오며····?” 이와같이 숫자 4뒤에는 영적인 의미와 암시가 숨겨져 있다. 그러한 영감받은 기록들 뒤에는 한 절대자의 뜻이 있음이 분명하며 그 절대자는 하나님 자신이다.
성경에 나오는 이름들의 산술치를 조사해보면 놀라운 사실들을 발견케 된다. 히브리어와 헬라어의 알파벳의 산술치, 즉 각 알파벳이 나타내는 수를 합하면 그리스도의 수인 888이 된다. 이 세자리 수와 대조적으로 우리는 계시록에서 불법의 사람이 666인 것을 보게 된다(6은 사람의 수이다). 얼마나 놀라운가! 선의 삼위일체와 악의 삼위일체가 대립되어 있다. 그러나 숫자 4로 돌아가 보자.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인 다메섹은 산술 치가 444이다.
숫자 5
숫자 5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의미한다. 창세기
나는 이 숫자에 대해서 쓰기가 두려운데 이는 그것이 은혜를 말해주기 때문이다. 누가 감히 그 은혜를 설명하거나 정의 내릴 수 있겠는가? 그것은 이해를 거절한다. 인간이 내린 정의들은 심히 불충분하다. 내 생각에 가장 간략히 설명한다면 은혜는 “보상을 전혀 구하지 않는 순전한 친절과 호의”이다. 그리고 가장 기억하기 쉽게 표현한다면 “은혜란 그리스도를 댓가로 치른 하나님의 부요”이다.
그러나 이 숫자 5가 과연 성경에 어떤 의미로 사용되었는지 좀더 상고해보기로 하자. 사실 우리 안에는 하나님의 거룩한 호의를 불러낼 만한 요소가 전혀 없다. 이것은 아브라함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를 부르시고 그의 후손과 더불어 영원히 언약을 맺으셨다. 하나님께서 이 언약을 맺으실 때 그것은 숫자 5로 인쳐졌다.
다섯 짐승이 죽임을 당했다(창
광야에 있던 성막도 숫자 5로 특징지워진다. 그 구조 전체에는 무력한 죄인들에 대한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나 있다. 공교히 싼 세마포를 지지하는 바깥 뜰의 기둥들은 5규빗씩 떨어져 있었고 높이가 5규빗이었다. 제물이 드려지는 놋제단은 가로 세로 5규빗씩이었는데 이는 대속물이 드려지는 장소, 즉 죄 없으신 분께서 죄인을 대신하여 고난 받으신 갈보리 언덕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의 어떠함을 보여준다. 한편 이 단은 높이가 3 규빗이었는데 이는 하나님의 가까이 오심을 말해준다.
생소의 동면 끝에는 다섯 기둥이 있었다. 이것은 성막 문으로 불리웠으며 이사야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 무언가를 알고 있었다. 어떻게 모세가 2백만의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할 수 있었겠는가? 그는 할 수 없었다. 하나님께서 하신 것이었다. 하나님께서 크신 은혜로 그들을 이끌어내셨으며 그들은 다섯 계층으로 계수, 정렬되었다. 그들은 완전한 무력 가운데 있었으나 여호와의 보이지 않는 권능이 그들과 함께 했다. 하나님께서 “너희 중 다섯 이 일백명을 물리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분은 “다섯이 일백을”라고 말씀하시지 않고 “너희 중 다섯이”라고 말씀하셨다.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겠는가? “여호와를 기다리는 자들은 새로운 힘을 얻으리니”
예수님은 굶주린 무리를 바라보시고 “우리가 무엇을 해줄 수 있을까?”라고 말씀하셨다. 제자들이 “무리를 보내소서”라고 말하자 주님은 “너희에게 있는 것이 무엇이냐?”라고 말씀하셨으며 이에 그들은 “떡 다섯개니이다”라고 대답했다. 주 예수님은 이 떡 다섯개를 취하여 오천명을 먹이셨다. 그 다섯으로부터 전체 무리를 넉넉히 채울만한 풍부함이 흘러나온 것이다.
에베소서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지상생애를 묘사하실 때는 사복음서를 통해서 그렇게 하셨는데 반해 그분의 은혜를 묘사하실 때는 다섯가지 제사를 통해서 그렇게 하셨다(레 1-7장). 이 제사들은 우리의 알고 지은 죄와 모르고 지은 죄, 우리의 죄악된 성품과 죄악된 행실 등으로부터 용서와 고침을 받게 하는 그리스도의 은혜에 관해서 말해 준다.
아마도 시련 중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깨달아야 할 성경에서 가장 어려운 구절은 로마서
바울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그러나 교회에서 네가 남을 가르치기 위하여 깨달은 마음으로 다섯 마디 말을 하는 것이 일만 마디 방언으로 말하는 것보다 나으니라”(고전
성경의 숫자에 대한 본 연구에서 우리는 일부 단어들의 용례를 살펴보고 있다. 여기서는 “돕도록 부름받은 자”라는 뜻의 헬라어 단어 “파라클레토스”를 제시해 보겠는데 이 단어는 다섯 차례 사용되었으며 요한일서
또 “지극한 기쁨 혹은 즐거움”을 뜻하는 “아갈리아시스”가 누가복음
또한 시편에는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는 문구가 다섯차례 나온다(시 103:1,2, 22, 104:1,35).
숫자 6
숫자 6은 인간의 수로서 인간의 불완전한 상태의 비참함을 밝히 드러내 준다. 인간은 제 6일에 창조되었다. 하나님께서는 6일이 인간의 노동의 수를 특징지울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6은 자신의 능력을 신뢰하고 자신이 하나님의 도움 없이 잘 살아갈 수 있다고 믿는 인간을 상징한다. 인간은 악하고 타락했으며, 전능자를 대적한다는 점에서 사단적이다.
성경이 “악한 자에게 속하여 그 아우를 죽였으니”라고 증거하고 있는 가인에 대한 계보는 여섯 차례 나온다.
하나님의 사랑은
앞서 숫자 5에 대한 연구에서 우리는 어떻게 그 숫자가 아브라함의 생애에, 심지어 그와 그의 아내의 개명(改名)에 이르기 까지 지배적이었는가를 살펴보았다. 여기서도 아브라함과 롯 사이의 병행구를 보여주기 위해 그 사실을 반복해서 살펴보겠는데 이는 롯이 소돔을 보고 즐거워하면서 여섯 단계의 행동을 취했기 때문이다. (1) 그는 눈을 들었으며, (2) 선택했으며, (3) 동쪽으로 여행했으며, (4) 거했으며, (5) 소돔을 향하여 장막을 쳤으며, 그리고 (6) 소돔 안에 거했다.
구약성경에는 악인이 두 차례 부각되어 있는데 두 경우 모두 숫자 6으로 특징지워진다. 골리앗은 키가 6규빗이었고 여섯 종류의 장비로 무장했으며 그의 창날은 무게가 철 600세겔이었다. 또 느부갓네살이 금신상을 세웠는데 그 높이가 60규빗, 폭이 6규빗이었으며, 숭배시간을 알리기 위해 나팔, 피리, 수금, 삼현금, 양금, 생황 등 여섯 종류의 악기가 연주되었다.
또한 사무엘하 21장에는 매 손과 매 발에 가락이 여섯씩 있는 “키 큰 자”가 언급되어 있다(20절).
성경에는 사람에 대해서 여섯 단어가 사용되었는데 구약성경에서는 “아담”, “이쉬”, “게벨”, “에노스이고”, 신약성경에서 는 “안쓰로포스”와 “아네르”이다.
호세아서는 놀라운 책으로 상정적인 가르침으로 가득하다.
그것은 호세아의 아내와 관계가 있다. 하나님은 진리를 예시하기 위해 이 둘의 관계를 사용하셨다. 호세아는 부정한 여자, 즉 그에게 합당하지 않은 여자와 결혼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네가 내게 합당치 않을 때에 내가 너를 취했노라. 그런데 내가 너를 취한 후에 네가 나를 버렸도다”라고 말씀하셨다. 호세아의 아내 역시 그를 버렸다. 악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축복을 구하는 대신에 우상을 섬기는 열국에게서 좋은 것들을 구했다. 호세아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에 있을 때에 먹은 것으로 기억된 식물의 수는 여섯이었다. “생선과 외와 수박과 부추와 파와 마늘들을 먹은 것이 생각나거늘”(민
레지날드 T. 나이쉬는 이 숫자에 관하여 다음과 같은 흥미로운 사실을 알려준다: “시편 9편과 10편에는 그 영적인 의미를 보여주는, 6에 대한 흥미로운 예가 나와있는데 그 시들은 원문 상 각 구절이 히브리어 알파벳의 한 문자로 시작되는 형태의 시에 의해 연결되어 있으며, 그러한 형태의 시는 두 편 모두에 걸쳐 연속적으로 이어져 있다. 그러나 그 중간에 히브리어 알파벳 중 멤, 눈, 사메크, 아인, 페, 차데 등 여섯 글자가 생략되어 있다! 그 이유를 연구해보면 이 두 시편의 주제가 “세상에 속한 자”(시
그 다음 단어가 현재 우리가 상고하는 숫자와 아무 관련이 없어 보일 때는 아마도 어떤 단어를 위에서 말한 형태의 시와 관련하여 다음으로 연결시키는 것은 부적절해 보인다. 우리가 깨 닫기에 성경 기자들은 물론 영감을 받긴 했지만 그들의 문학적인 능력에 놀랐을 것이다. 예를 들어 히브리어 알파벳에는 스물 두개의 문자가 있다. 아마도 당신은 시편 119편에서 8절 간격으로 히브리어 문자가 새롭게 시작되는 것을 보았을 것이다. 처음 여덟 구절은 알파벳의 첫 문자로 시작되며 9-16절은 각각 두 번째 문자로 시작되며, 그 이하는 마찬가지이다.
예레미야 애가는 5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1, 2, 4, 5장은 22절로 되어 있는데 각 구절은 히브리어 알파벳의 한 문자로 시작되되 모두 제 위치대로 사용되어 있다. 3장은 66절로 이루어져 있는데 처음 세 구절은 첫번째 히브리어 문자로 시작되며 다음 세 구절은 두번째 문자로 시작되며, 이런 식으로 세 구절씩 66절을 이루고 있다. 물론 이것은 원어 성경에서만 식별이 가능하다.
신약성경에는 666으로 특징지워지는 사람이 있다. 그것은 사람의 수인데 성경이 그렇게 증거하고 있다(계
창세기 22장에서 우리는 “번제”란 단어가 인간의 제물에 대 하여 6회 언급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일곱번째(수양)는 하나님께서 제공하신 제물이다. 인간의 제물은 완전에 미치지 못한다. 한 마리의 어린 양이 하나님에 의해 제공되는데 그것이 일곱번째 제물이다.
그리스도께서 심문을 당하고 십자가에 못박히셨을 때 그분의 결백을 증거한 여섯 사람이 있었다. (1)빌라도-눅
유다서의 주요 여섯 구분을 보라.
1. 서론- “거룩케 함과 지키심을 입다”
2. 권면 - “힘써 싸우라”
3. “어떤 사람들 “예증된 거짓 교사들-”이들은”
4. “어떤 사람들 “예언된 거짓 교사들-”이들은”
5. 권면- “사랑안에서 자기를 지키라”
6. 결론- “보호함과 거룩케 함을 업다”
이러한 구분이 서로 어떻게 일치되는지를 보라-1번과 6번, 2번과 5번, 3번과 4번. 인간의 반역을 묘사하는 이러한 책이 숫자 6으로 특징지워진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예수님 당시 사람들은 예수님이 귀신들렸다고 여섯차례 말하였다. 이것은 인간의 참람하기 짝이 없는 고소이다. 이 고소는 오늘날에도, 아마 다른 형태로 계속되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우리는 성경에서 이들이 그분에게서 아무 잘못도 발견하지 못했다는 기록을 대한다. 그분은 실험실로 끌려가 해부되어 왔으나, 그러나 그분을 주의 깊게 관찰하기만 한다면 인간은 그분 발 아래 엎드려 경배드리게 될 것이다. 그러나 완고한 인간은 오늘 날 자신의 의지를 행사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행하도록 내버려 두셨다. 오늘날 세상은 얼마나 죄악되고 혼란스러운지!
숫자 7
이것은 하나님의 충만, 완전, 그리고 완성의 수이다. 그것은 완전한 수 중 하나이며 “완전해지다”, “충만해지다”, “만족하다”, “충분히 가지다” 등을 의미하는 히브리어 단어에서 파생되었다.
먼저 성경 밖에서 이 숫자가 어떻게 사용되는지를 살펴보기를 원한다. 식물학은 일곱 부류로 나눠진다. 과실을 맺는 나무의 생애에는 과실, 줄기, 잎, 꽃꼭지, 꽃, 뿌리, 씨 등의 일곱 단계가 있다. 곡물로서 인간에게 유익을 주는 나무들은 그 수가 일곱이다. 그 나무들은 세계 모든 지역에서 발견된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식물로 만드신 곡물은 밀, 귀리, 보리, 옥수수, 쌀, 호 밀, 기장(수수 혹은 조) 등이다. 인간의 목소리는 베이스, 바리톤, 테너, 카운터 엘토, 메조 소프라노, 소프라노 동 일곱 단계가 있다. 음악에 있어서도 일곱가지 강세용어가 있다(ff, f, mf, m, mp, p, PP).
인간의 신체에서 숫자 7을 살펴보는 것도 흥미롭다- 인간의 몸은 뇌, 신경, 피 등 일곱가지 조직으로 구성되어 있다. 몸은 사지(四股), 머리, 목, 몸통 등등 일곱 부분으로 되어 있다. 머리에는 두개의 눈, 두개의 귀, 두개의 콧구멍, 한개의 입 등 일곱 구멍이 나 있다. 흉골(胸骨)에는 좌우에 각각 일곱개의 갈비뼈가 연결되어 있다. 손목에는 일곱 뼈가, 손과 발의 뼈 사이에는 일곱 근조직이, 눈에는 일곱 색상조직이, 목에는 일곱구멍이 있으며, 그리고 어린아이의 척추에는 어른보다 일곱개의 뼈가 더 많다. 치아는 태어나서 일곱달이 될 때 나기 시작하며 일곱살이 될 때 새 이로 교체되기 시작한다. 그리고 몸에는 일곱가지 유형의 연결 조직이 있으며, 심장에는 일곱층의 심실이, 목에는 일곱 뼈가 있다. 인간의 성장에는 유아기, 유년기, 청소년기 등 일곱 단계가 있다. 신체에는 매 7년마다 두드러진 변화가 일어난다. 직계가족 관계에는 아버지, 어머니, 형제, 자매, 아내, 아들, 딸의 일곱 요소가 있다. 인간의 행동을 지배하는 요소에 언제, 어디에서, 누가, 무엇을, 어떻게, 왜, 어떤 도움으로 등 일곱가지가 있다. 맥박에는 7일의 주기가 있어서 6일간은 저녁보다 아침에 빨리 뛰고 제 7일에는 아침보다 저녁에 더 빨리 띈다. 우리는 휴식을 필요로 한다. 인간의 방법은 항상 하나님의 방법에 비하면 빈약한 대체물일 뿐이다.
그러면 이 숫자 7이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차지하는 위치에 우리의 관심을 돌려보기로 하자. 그것은 계시록에서 연구하기에 좋은 숫자인데 계시록이야말로 숫자 7의 용례에 대한 더없이 좋은 표본이라 하겠다. 이 성경의 마지막 책은 성경을 채우고 완성하는 책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완성시키며 그 이상 아무것도 추가될 수 없다. 계시록에서 우리는 일곱 교회, 일곱 인, 일곱 나팔, 일곱 인물, 일곱 대접, 일곱 심판, 일곱가지 새로운 것 등을 발견한다. 계시록 1장에는 머리, 머리카락, 눈, 발, 손, 입, 얼굴 등 인자의 일곱 영광이 나타나 있다. 계시록
에베소서에는 일곱가지 행함이 있다. 베드로서에는 일곱가지 보배로운 것이 있다(벧전
아브라함이 소돔과 고모라를 위해 중보기도를 올리는 창세기 18장에는 의인이란 말이 일곱차례 나온다. 창세기 22장에서 여호와의 천사가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라고 불렀는데 이같이 두번의 부름을 받은 사람은 아브라함, 야곱, 사무엘, 모세, 마르다, 시몬 베드로, 사울(바울) 등 성경 전체에 걸쳐 일곱명이다. 성경에는 일곱 지진이 기록되어 있다:
(1) 호렙산에서 -출
(2) 요나단과 그의 창을 든 자의 승리시에 -삼상
(3) 하나님이 호렙산에서 엘리야에게 자신을 계시하셨을 때 -왕상
(4) 웃시야 통치시에-암
(5) 그리스도의 죽음시에 -마 27:54
(6) 그리스도의 부활시에 -마 28:2
(7) 바울과 실라가 옥에 갇혔을 때-행
여러분은 이사야
성경에서 일곱번만 사용된 중요한 단어들의 수를 살펴보면 유익한 교훈을 얻을 수 있다. 헬라어 단어 “아프탈토스”는 “불멸의”, 혹은 “썩지 않는”을 뜻하며 로마서
사랑을 뜻하는 헬라어 단어 “아가페”는 요한복음에 일곱번 나온다.
“새 노래”라는 문구는 구약성경에서 일곱번 나오며 항상 우리 주님의 재림과 관련하여 기록되어 있다. 시편 29편에는 “여호와의 소리”라는 문구가 일곱번 발견된다.
실로 현재 상고하는 숫자 7은 영적인 완전의 수이며, 성경의 저자이신 성령께서 완전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그 숫자의 빈번한 동장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이에 대한 성경의 예를 다 소개하려면 책 한권은 족히 채울 것이며 여기서는 그 일부분만 인용해보았을 뿐이다.
성경 첫장 첫 구절에서 우리는 이 숫자의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실례를 볼 수 있다. 그 첫 구절은 일곱개의 히브리어 단어를 포함하며 이 일곱 단어들은 28개의 문자, 혹은 7의 4배수를 지닌다. 이 구절에 나오는 “하나님”, “하늘”, “땅”이란 세 명사의 산술치는 정확히 777이다. 처음 세 단어와 끝의 네 단어는 각각 14문자를 지니며 네번째와 다섯번째 단어 및 여섯번째와 일곱번째 단어는 각각 일곱 문자를 지닌다. 이와같이 성경 첫 구 절에 30가지가 넘는 숫자 7의 다양한 조합이 있다는 것은 가히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것은 실로 하나님의 저작권을 드러내 준다! 성경 첫 구절에 나타나 있는 그러한 산술적인 특정을 고안해 낼 수 있는 사람은 세상에 아무도 없다.
끝으로 한가지 예만 더 추가해 보겠다. 성경에는 9백살 이상 산 사람이 아담, 셋, 에노스, 게난, 야렛, 므두셀라, 노아 등 일곱명이 있는데 그 중 일곱번째인 노아는 완전한 사람이었다. 노아의 아들 라멕은 777세의 연령으로 특징지워진다.
(79년 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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