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생 라합의 신앙행위
1938년판 복음신보에서
只今(지금)으로부터 약 삼천칠백년 전에 기생 라합은 가나안 민족(民族)의 한 사람으로 하나님의 구원(救援)의 事業(사업)에 한 몫을 착실히 본 성서역사적 인물이었다. 저는 조의 都城(도성)을 탐정)하러 온 이스라엘의 사자를 빼어 돌린 것이었다. 인간의 상식으로 보면 저는 分明(분명)히 가나안에 對(대)한 변절한이라고 배척할 것이었다. 그러나 이것이 도리어 가나안을 救援(구원)할 유일의 길이었다. 저는 당시 천하의 대세를 正當(정당)하게 認識(인식)하는 총명이었다는 것보다 하나님의 성의(聖意)가 어디에 있는가를 신앙으로써 잘 이해하였던 것이다. 즉 “여호와께서 이 땅을 너희에게 주셨으니”라 하여 하나님의 命令(명령)에 基因(기인)한 것이었다. 가나안은 滅亡(멸망)하게 되었다.
그러나 틈에 구원의 길이 있게 됨은 복음이다. 가나안을 엿보러 온 탐정은 도리어 가나안에 구원의 길을 내어주는 복음의 使者(사자)가 되었다.
가나안에는 도덕가, 종교가, 애국자 같은 것으로 자만하는 자들이 없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여리고 城門(성문)과 같이(여호수아
周(주)가 은(殷)의 계통을 끊었으되 殷의 後商(후예) 孔子(공자)는 周를 존숭(尊崇)하였고 공자가 血子(맹자)의 祖先三家(조선삼가)를 공격하였으나 맹자는 所願(소원)이 學孔子(학공자)라 하여 大聖賢(대성현)의 公觀正行(공관정행)함을 後人(후인)은 찬송하였다. 그러나 가나안의 라합이 이스라엘을 좇게 된 것은 자기의 義(의)를 세우지 않고 하나님의 義(의)를 복종함이 되는 同時에 이것이 가나안 민족으로서 起死回生(기사회생)의 길을 얻게 함이었다(롬
가나안을 亡(망)한 者는 가나안이요 이스라엘이 아니었다. 라합의 집에는 붉은 끈으로 매어논 창문이 높이 열리어 누구든지 오면 구원을 받으리라는 복음의 大意(대의)가 보여 있었다.
그러나 저희들은 신종(信從)치 아니 하였다. 刻一刻(각일각)으로 멸망은 다가왔다. 畢竟(필경) 이스라엘의 單隊(군대)는 저희들의 여리고 城(성)을 둘러싸게 되었다. 그러나 7일 동안을 두고 城의 주위(周圍)를 돌고 있음은 가나안인의 悔改(회개)와 信從(신종)의 여유(餘裕)를 充分(충분)히 주어서 寬待(관대)함이었다. 즉 7일 동안이면 회개하여 라합의 집으로 올만한 餘地(여지)가 充分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신앙으로 기생 라합은 信從(신종)치 아니한 者와 함께 멸망하지 아니하였나니”라 함에 가나안인의 멸망은 저의 不信從(불신종)이 원인이었음을 알 수 있다. 라합의 信從 즉 순응(順應)의 연고로 그 집에 있는 一同(일동)은 生存權(생존권)을 얻는 同時 (동시)에 그 창문의「붉은줄」은 만 인류의 구원을 높이 계시(啓示)한 것이었다(히
라합은 信從(신종)한 결과로 가나안에서 자기만이 구원을 얻을 뿐 아니라 그 친족 일동이 살게되는 동시에 하나님의 당당한 選民(선민) 이스라엘의 국적(國籍)에 편입(編入)되었다. 그래서 가장일즉 그리스도의 구원을 예고하는 하나님의 사업에 參與(참여)하는 영광을 입게 됨은 자기도 夢想(생각)할 수 없던 하나님의 은혜이었다. 그래서 저는 다시 大王(대왕) 다윗의 할머니가 되는 一方(일변) 그 후예에서 그리스도의 탄생을 보게 되었다. 신약 첫머리 “예수 그리스도의 世系(세계)”에는 유명한 사라나 리브가를 제하고 라합의 이름이 特書(특서)됨은 우리의 주목을 要(요)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라합을 擇(택)하셔서 거룩한 使命(사명)을 지우신 同時(동시)에 우리들에게 그 신앙의 행위를 목표로 하여주셨다.
우리들도 기생 라합과 같은 타락 자중에서 또는 여리고 성과 같이 될 이 세상에서 부르심을 받아 그리스도 안에 들어가게 되며 우리의 姓名(성명)이 하늘에 기록된 일은 놀라운 恩惠(은혜)이다(마
이스라엘의 사자가 여리고 성에 간 것은 위험한 것이었으나 이를 逮捕(포박)할 자에게 내어줄 라합에게 도리어 대접함을 입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자기의 땅에 오시되 그 백성이 대접(待接)지 아니하고” 십자가에 못을 박았다. 여리고 성이 다 망하는 中에 라합은 붉은 노끈을 창문에 두르는 수고라도 하고 살았거니와 우리들은 종사(從事)한 것 없이” 오직 그리스도의 보혈을 흘리심으로 구원을 입게 되었다. 이를 신앙하게 된 결과 우리들은 도덕(道德)종교(宗敎) 사상(思想)을 초월하여 그리스도를 수종할 수 밖에 없다. 이 세상은 조만간 여리고 성의 운명을 免(면)하기 어렵다. 여리고 성에는 7일 동안의 신종할 여유를 준 것이나 이 세상에는 약 이천년 동안이나 은혜의 기한을 두어 주는 것이다. 자기의 의(義)와 道(도)와 사상(思想)주견(主見) 같은 모든 고집을 타파하여서 구주의 복음을 듣고 받으며 그 보혈 안으로 들어와 있게 되는 자는 곧 기생 라합이다. 세인에게는 如何(여하)히 판단되든지 하나님 앞 에는 참 빛나는 야광주(夜光珠)이다.
“세리(稅吏)와 창기(娼妓)들도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리라” 하신 주의 성언은 모든 자의자만(自義自慢)을 분쇄하시는 칼이었다.
이 칼날에 부서진 영혼이 라합과 같은 신앙의 행위에 걸음을 옮기기 시작할 것이다. “하나님께서 세상에 천하다 하는 것과 멸시를 받는 것과 없는 것을 택하사 있는 것을 폐하시나니” 하심과 같다(고전
(1980년 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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