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굽에서 가나안까지(19,20)
죤 리치
시내광야
르비딤에서의 전투와 승리로부터 이스라엘은 이제 다른 광경으로 나아가지 않으면 안된다.
18장에서 천년왕국의 광경이 나타난다. 거기에서 이드로는 이방인들로 대표되며 우리는 그가 이스라엘에 대한 여호와의 선하심과 인도하심에 기뻐하는 것을 본다.
슬픔과 수고를 뒤에 두고 모인 족속들은 “대환란”의 맹렬한 시련 후에 그날에 있을 나라를 대표한다. 그때 그들은 그들의 왕인 구세주 밑에서 평화롭게 모일 것이다. 또한 십보라와 그의 아들들에게서는 교회 곧 그리스도의 신부를 본다.
여기, 광야여행의 어디에서나 마찬가지로 장차올 영광의 날이 언뜻 보인다. 그러나 구름 낀 날에 잠깐 동안 반짝 빛나는 햇빛처럼 보일 뿐이다.
“광야의 길”을 수고와 투쟁에 직면하면서 걸어가야 했던 그들은 이제 시내 광야에 도착하여 하나님의 산 앞에 진을 치게 되었다. 커다란 사건이 거기에서 일어났으며 또한 결코 잊을 수 없는 교훈들을 그들은 배우게 되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성도들의 생활사에서도 그러한 점들이 있다. 개인적으로 또는 모임적으로 우리는 진을 치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한다. 봉사와 투쟁이 끝나고 때때로 호렙보다도 더 큰 고독 가운데 있을 때에 하나님께로부터 규례와 은혜의 말씀이 주의 백성들에게 능력으로 임한다. 그와 같은 것이 임하게 될 때 놀랄 필요가 없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어떤 면에서 이스라엘은 잘 알지 못했지만) 말씀하시는 그분은 진노하시지 않고 마치 아버지가 자녀에게 하시듯 오직 그들의 기쁨과 축복을 위해서 말씀하시기 때문이다.
율법을 주심
율법을 주신 것은 시내 광야에 진친 기간에 기록된 큰 사건들 중의 첫번째 것이다.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이것은 여호와께서 그들을 다루시는 상황 중에서 하나의 새로운 시대의 시작이었다. 이제까지 은혜가 그들을 위해 역사하였고 그들의 죄와 불평은 여호와의 은혜로우신 손의 행사를 제 한하였다. 지금까지의 축복은 그들이 실패했음에도 불구하고 무조건적으로 주어졌다. 여호와의 손과 마음이 그들을 향하셨으며 그들의 조상 아브라함과의 언약으로 이루어진 약속이 성취되었던 것이다(창
그러나 이제부터는 그 축복이 그들의 순종에 근거하여 받을 수 있게 되었다. “만일 너희가 나의 목소리를 순종하고 나의 언약을 지레면 너희는 나에게 있어 모든 열국 중에서 뛰어난 희귀한 보화가 될 것이다. “
그러나 자신의 무능함을 깨닫지 못하고 거룩한 하나님의 요구의 특성을 올랐던 그 백성들은 즉시 그 말씀을 받고 말하기를 “주께서 명하신대로 우리가 다 행하겠나이다”라고 하였다. 율법의 특성이나 요구, 또한 이것을 지키지 못하는 인간의 실패나 범법자로서 그에게 다가오는 저주와 심판에 관하여는 여기서 자세히 살필 수가 없지만 한 사람의 중생을 전후하여 한 사람의 신령한 법과의 관계에 관하여는 하나님의 말씀이 증거하시는 것을 따라 간단히 살펴볼 수 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다루시는 하나의 원칙으로서의 “법”과, 시내산에서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에게 되어진 “율법”간에는 차이가 있다. 또한 율법의 시대와 은혜의 시대 관에도 현저한 차이가 있다.
법은 모든 시대에 했어 하나님의 다루심의 특징이다.
그분은 질서의 하나님이시며 또한 규율의 하나님이시다. 그의 나라의 모든 국면에서, 하늘과 땅, 이스라엘과 교회, 성도들과 천사들은 그의 규율의 대상이다.
거만한 이방인이었던 느부갓네살에게 세번씩이나 다니엘의 입을 통하여 하나님은 이런 말씀을 반복하셨다. “지극히 높으신 자가 인간 나라를 다스리시며 자기의 뜻대로 그것을 누구에게든지 주시는 줄을 알게 하려 함이니라”(단
“율법”은 특정한 시기에, 특정한 백성에게 그리고 명확한 목적으로 주어졌다.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그런 법이 없었다(롬
율법은 사람의 구원을 위하여 주어지지 않았다,
“그것은 범법함을 인하여 더한 것이다”(갈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그의 파멸과 정죄를 보여주시기 위한 목적으로 주신 것이, 노력으로 하나님의 기준에 도달하려는 사닥다리로 사용되어야만 한다는 것은 얼마나 어이없는 일인가! 아직도 인간의 외고집은 그와 같다.
만일 하나님께서 그에게 한 법을 주시면 그는 그것을 지키기로 약속하고서도, 그것을 돌판 위에 쓰기도 전에 공개적으로 그리고 고의적으로 첫 세 계명을 범하는 것이다(출
성도에게는 율법에 대한 요구가 따르지만 두려움을 줄 수는 없다. 이미 이에 대한 요구는 그리스도 안에서 모두 채워졌음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롬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롬
그리스도 안에서 성도는 율법에 대하여는 법적으로 죽었다. 율법은 더 이상 그에게 요구하지 않는다. 그는 당당히 그 법을 향해 마주보며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향하여 죽었나니 이는 하나님을 향하여 살려 함이니라”고 말한다(갈
율법은 죽은 사람을 가두거나 정죄할 수 없다. 또한 성도는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한 것”이 되었다(롬
그러나 어떤이는 “율법은 성도의 생활의 규율”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갈라디아인들이 그렇게 만들고자 노력했던 것이다. 그들은 은혜로 시작하여 하나의 “생활의 규율”인 율법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너희는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다”(롬
또한 이 모든 것은 그것과 함께 책임을 동반한다. 그러나 그의 순종은 사람으로 이루어진다. 그의 복종은 노예의 정신이 아닌 아들의 정신으로서 이루어진다. 그는 깊고 신성한 하나님의 사랑과 총애를 내적으로 누림으로 가까이서 환대받는 자로서 자유롭게 섬긴다. 그는 법 없는 자도 아니고 율법주의자도 아니다. 그는 “그리스도께서 자유케 하신 그 자유” 안에서 걷고 섬기는 자이다(갈
사랑하는 성도여, 당신은 인간의 유전이나 세상적인 것 때문에 그 귀한 것을 잃거나 버리지 않도록 하라.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목적이 되도록 하라. 그분을 당신의 것으로 삼으라. 그분만을 당신의 주로 경외하라. 그분의 말씀만을 당신의 규율과 안내로 삼으라.
(1983년 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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