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의 모임(5)
J. R. 리틀프라우드
Ⅳ. 섬김의 부양(扶養)
레위인은 이스라엘 가운데 기업(基業)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농사를 짓거나 다른 세속적인 생업으로 생활비를 벌지 않았습니다. 여호와께서 친히 그들의 기업이 되셨습니다(신
이것은 신약의 섬김과 오늘날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요한은 그의 세번째 서신에서 주님을 위해 수고하는 형제들을 돌보라고 교훈했습니다. 왜냐하면 ‘저희가 주의 이름을 위하여 나가서 이방인에게 아무 것도 받지 않기 때문입니다’(요삼 7절). 그들의 섬김은 믿음의 섬김입니다. 그들은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가 주님께 아낌없이 드릴 때 그들은 그것에서 유익을 얻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의 청지기 직분을 소홀히 여길 때 그들은 우리의 태만 때문에 고통을 받습니다.
이 일에 대한 우리의 의무는 세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1) 우리의 가정에서의 접대 - 요한3서:5,6, 상반절, 8절 참조. 사도행전
(2) 그들의 여행을 도움 - 요한3서 6 하반절 참조. 사도행전
(3) 그들이 떠난 후에 물질을 보냄 - 빌립보서
이 세 가지 방법으로 우리는 ‘진리를 위하여 함께 수고하는 자’가 됩니다.
그러나 주의해야 할 일이 요한2서 9~11절까지 나와 있는데, 거기에는 건전치 못한 교훈을 가르치는 자들을 돕는 것이 금지되어 있습니다. 그렇게 하다간 우리가 그들의 죄에 참예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Ⅴ. 섬김의 서투른 모방
사사기에서 우리는, 레위인의 섬김과 부양을 위해 하나님께서 주신 표준으로부터 멀리 이탈해 있는 한 슬픈 모습을 대하게 됩니다. 에브라임 산지에 미가라 이름하는 한 사람이 우거(寓居)하고 있었습니다. ‘이 사람 미가에게 신당(神堂)이 있으므로 또 에봇과 드라빔을 만들고 한 아들을 세워 제사장을 삼았더라’(삿
그 당시 유다 베들레헴에 한 소년 레위인이 있었는데, 그는 아직까지도 실로에 있었던 하나님의 집에서(삿
그러나 미가가 고용한 성직자는 그가 기대했던 축복을 갖다 주지 않았습니다. 다음 장(章)에서 우리는 단 지파가 그 땅을 침략한 것을 읽게 됩니다. 그들이 에브라임 산지에 이르러 미가의 고용인인 그 레위인을 발견했을 때 그에게 말했습니다. ‘····우리와 함께 가서 우리의 아비와 제사장이 되라 네가 한 사람의 집의 제사장이 되는 것과 이스라엘 한 지파, 한 가족의 제사장이 되는 것이 어느 것이 낫겠느냐?’ 이것은 그에게 더 나은 부름으로 보였습니다. 그는 이스라엘의 한 지파, 더 큰 회중(會重)을 섬기고 싶었습니다. 그러므로 ‘제사장의 마음이 기뻐하여’ 더 나은 그 부름을 수락한 후, ‘에봇과 드라빔과 새긴 우상을 취하고 그 백성 중으로 들어가니라.’ 그는 미가의 집에 축복을 갖다 주기는 고사하고 오히려 그 조직의 우상 숭배로 감염되어 이제 그것을 단 지파에 도입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사사기 18장의 마지막 두 구절은 슬픈 사실을 말해줍니다. 하나님의 참된 모임과 섬김이 실로에서 준수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새긴 신상(神像)이 단에 세워졌으며, 모세의 손자 요나단이 그 우상 숭배 조직의 제사장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명령으로부터 떠나는 것과,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것들을 인간의 조직으로부터 도입하는 것을 경계해야 합니다.
제5장 그분에게로 모임(구약)
‘이르시되 나의 성도를 내 앞에 모으라 곧 제사로 나와 언약한 자니라 하시도다’(시 50:5)
우리가, 하나님께서 자기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장소에 자기 백성들을 모으심에 관하여 지시하신 날로부터 거반 4세기를 앞으로 나아가 보아도 하나님께서 아직도 자기 성도들을 모으시는데 대단히 관심을 가지고 계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시편 50편 5절에서 그분은 그 모임의 원리를 제시하셨습니다. 이에 대해 6가지의 사항이 고려해 볼만합니다.
Ⅰ. 모임에 관한 권위
말씀하신 분은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사랑의 모든 행위에 대해 여호와의 명령보다 더 높은 권위는 없습니다. 우리의 모든 일을 처리함에 있어서 ‘여호와의 말씀이니라’라는 말보다 더 안전한 근거는 없습니다. 구약 시대의 성도들의 모임은 이 확실한 말씀 위에 근거를 두었습니다. ‘나의 성도를 내 앞에 모으라 곧 제사로 나와 언약한 자니라.’
모임에 모이는 문제에 대해 갈등하는 영혼이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마
Ⅱ. 모임의 지체들
하나님께서 모으시는 사람들은 그분의 성도들, 그분의 ‘거룩한 자들’, 그분의 ‘구별된 자들’입니다. 더 나아가서 그들은 ‘곧 제사로 나와 언약한 자’들이라고 정의되어 있습니다. 그와 같은 사람들, 오직 그와 같은 사람들만이 ‘나의 성도를 내 앞에 모으라’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똑같은 진리가 신약 성경에 고루 나타나 있습니다.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의 지체들은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입은 자들’이라고 묘사되어 있습니다(고전
그렇다면 성도란 대체 무엇일까요?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자면 먼저 거룩한(holy)이란 단어와 성도(saint)란 단어, 거룩하게 하다(sanctify)란 단어는 모두 같은 어원에서 생겨났음을 알아야 하며, 따라서 모두 똑같이 ‘구별되다(set apart)’라는 개념을 갖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성도들은 그분의 거룩한 자들이요, 그분의 구별된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란 단어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거룩함을 얻은’ 모든 사람들에게(히
그러나 구약 시대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성도들도 역시 하나님 자신과의 언약 관계(conenant relationship)로 인도함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그 언약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역에 기초를 두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주님의 만찬을 제정하실 때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 25:28).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죽음으로 이 언약을 협상하셨으며(히
Ⅲ. 모임의 중심
성도의 모임에 대한 여호와의 이상(理想)은 그들이 자기 주위에 모이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는 광야에서 성막을 짓는 데 대한 지시를 내리시면서 자신의 목적을 설명하시기 위해 다음과 같은 말씀을 사용하셨습니다. ‘내가 그들 중에 거할 성소를 그들을 시켜 나를 위해 짓되’(출 25:8). 그들이 애굽에서 구속(救贖) 받기 전까지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 중에 거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은 특정한 몇 족장들에게 나타나시긴 하셨지만, 그들이 피에 의해 구속(救贖) 받기 전까지 결코 그들 가운데 거하지 않으셨던 것입니다.
백성들이 아론이 만든 금송아지를 경배함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의 진(陣)에 우상 숭배의 죄가 발생했을 때 ‘모세가 장막을 취하여 진 밖에 쳐서 진과 멀리 떠나게’ 했습니다(출 33:7). 진 밖의 위치는 여호와 편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진 안의 악으로부터 분리했습니다. 이 사건에 비추어 볼 때 신약의 성도들에게 주신 다음과 같은 권면은 매우 타당합니다. ‘그런즉 우리는 그 능욕을 지고 영문(營門)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히
(1985년 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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