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비로운 주 하나님
□ 울노쓰에 있는 성모 마리아 교회의 북쪽 벽 명판(名板)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새겨져 있습니다: “한 때 불신자이자 난봉꾼이었으며 아프리카 노예 상인이었던 성직자 죤 뉴톤은 우리의 주님과 구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풍성한 자비로 말미암아 보존되고, 회복되고. 용서 받고, 그가 오랫동안 멸절시키려고 애썼던 믿음을 전파하도록 부르심을 받았다.” 이 단순한 말들은 저 유명한 찬송 “자비로운 주 하나님”(Amagins Grace)을 작사한 저자의 약력을 간단하게 잘 묘사해 주고 있습니다.
그는 “악하고 방종한 난봉꾼”이 주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 변화 받을 때의 중대한 순간을 그가 지은 다음과 같은 찬송에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새로운 목적이 제 시야를 때리고
거친 제 역정을 막을 때까지
저는 부끄러움이나 두려움도 모르는 채
죄악을 오랫동안 기뻐했습니다.
저는, 나무에 달려 고통 중에
피 흘리시는 그분을 보았습니다.
제가 그분의 십자가에 가까이 서 있을 때
그분은 간절한 눈으로 저를 바라보셨습니다. “
무덤 사이에 있던 귀신 들린 자처럼 하나님의 율법과 사회의 속박과 문명의 힘에 조금도 구애되지 않았던 이 사람은 변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의 능력으로 갈보리의 희생 제물을 보자마자 사자는 어린 양으로 변했던 것입니다(롬
그것은 기독교라는 종교를 창시한 윤리적인 그리스도도 아니었고 현대 사상의 대상이 되는 모범적인 그리스도도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배척 받은, 가시관을 쓴, 창에 찔린, 죽어가는 하나님의 그리스도였습니다. 존 뉴톤은 자기 속의 죄악을 변화시키고 삶의 죄악을 제거하기 위해 기독교의 윤리보다 더 깊은 어떤 것, 완전한 인간의 본보다 더 강력한 어떤 것을 원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이것을 찾았습니다. 기도와 참회의 공들인 제도에 의해서가 아니라 아직 죄 가운데에 여전히 있을 때에···· 그는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람을 확증하셨느니라”는 말씀을 배웠습니다(롬
여러분은 죤 뉴톤처럼 죄악에 깊이 빠져 있을지도 모릅니다. 아니면 청렴결백하고 덕 있는 사람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만약 이 노예 상인에게 죄의 자각과 변화를 가져다 준 계시가 아직 여러분의 것이 되지 못했다면 여러분의 죄는 그의 죄처럼 큰 것이며 여러분은 여전히 “악독이 가득하며 불의에 매여 있습니다”(행
못 박히신 구주를 본 것은 그에게 죄를 깨닫게 했을 뿐만 아니라 평안까지 갖다 주었습니다.
“그분은 다시 저를 보시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피는 너의 속전으로 지불되고 있다.
나는 너를 살리려고 죽는다.’”
여기에서 뉴톤은 하나님의 거룩하심이요 요구했던 희생 제물을 공급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보았습니다(히
죤 뉴톤을 누그러뜨리고, 구원하고, 증인으로 일으키신 하나님의 은혜는 합당치 않는 자에게 거저 주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차별 대우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분의 은혜는 여러분에게 뻗쳐 있습니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엡
내 맘 속에 잠긴 근심 이제 사라지고
주 예수 믿음으로 곧 기쁨 얻었네.
하나님의 크신 권능 내 영혼 지키고
저 본향에 이르도록 날 인도하시네.
빛나고 높은 보좌 앞 주님만 모시고
할렐루야 노래 불러 큰 영광 돌리리.
(1987년 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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