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그 이미지
징검 다리
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calendar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Recent Post

theWord Bible Software

Category

2013. 2. 1. 15:29 횃불/1990년

기도와 기도집회(2)

C. H. 매킨토쉬

우리는 반드시 지난 호에 언급한 사항들을 고려해야만 합니다. 하지만 또 한 가지 개탄할 만한 점은 공적인 기도집회에 경건한 자세가 결여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기도가 드려지는 동안 다수의 사람들이 축 늘어진 채로 앉아 있거나 입을 크게 벌리고 하품하는 것은 과연 합당한 일입니까? 이것은 참으로 충격적인 현상이며, 우리가 주님의 모든 백성들에게 간곡히 부탁드리고 싶은 것은, 이 문제를 진지하게 생각해 보고, 가르침으로나 본으로나 모든 방법을 강구하여 기도집회에서 더욱 경건한 자세를 갖도록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기도의 도덕적인 조건들, 혹은 속성들을 성경에 비추어 고찰해 보고자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실생활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최고의 권위로 삼는 것보다 더 나은 일은 없습니다. 성경말씀은 모든 문제에 있어서 결정적인 심판자가 되어야 하며, 우리는 이 사실을 결코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기도의 도덕적인 조건들에 관하여 성경은 어떻게 말하고 있을까요? 마태복음 18 19절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에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저희를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이 말씀에서 우리는 우리의 기도가 지녀야 할 한 가지 필수조건이 만장일치, 곤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동의, 마음의 온전한 하나됨이라는 것을 배을 수 있습니다. “두 사람이 합심하여라는 표현이 지니는 참된 의미는 교향곡을 연주할 때처럼 한 목소리를 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불협화음이 있어서는 안됩니다.

예를 들면, 우리가 복음의 진보를 위해서나 영혼들의 구원을 위해서 기도하려고 함께 모였을 때 우리는 그 문제에 있어서 한 마음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한 목소리를 내야 한다는 뜻입니다. 우리 각자가 다른 생각을 한다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우리는 마음과 심령의 거룩한 조화 가운데서 은혜의 보좌 앞으로 나아가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마태복음 18 19절을 근거로 응답을 주장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기도집회의 분위기와 성격을 생각할 때 이것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친 일이 아닐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중에서 이것의 중요성을 심사숙고 해 본 사람들이 얼마나 되는지 심히 의심스럽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기도집회가 뚜렷한 목적을 가지고 있지 않은 것에 대하여 개탄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어떤 뚜렷한 목적을 가지고 더욱 많이 모여 하나님의 응답을 기다려야 되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사도행전 1장에서 초기의 제자들에 관하여 다음과 같은 말씀을 읽을 수 있습니다: “여자들과 예수의 모친 마리아와 예수의 아우들로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전혀 기도에 힘쓰니라”(14). 2장에서는 다음과 같은 말씀을 읽을 수 있습니다.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저희가 다 마음을 같이하여 한 곳에 모였더니”(1, 우리말 성경에는 다같이로 나와 있음-역주)

그들은 주님의 지시대로 아버님의 약속인 성령님의 은사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확실한 약속을 가지고 있었으며, 보혜사께서는 틀림없이 오시기로 되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기도의 근거가 되었던 그 약속은 기도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기도를 드리되 한 곳에서, 마음을 같이하여 드렸습니다. 그들은 온전히 합심하여 기도를 드렸던 것입니다. 그들은 한 사람의 예외도 없이 모두 단 한 가지의 분명한 목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약속하신 성령님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계속 기다렸습니다. 그들은 성령님이 오실 때까지 한 마음으로 기다렸습니다. 남자든 여자든 오직 한 가지 목표만을 가지고 즐거운 화합 가운데 약속하신 능력을 위로부터 부여 받을 때까지 날마다 간절한 마음으로 기다리고 또 기다렸던 것입니다.

우리도 이와 같이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에게 이 마음을 같이 함한 곳이 결핍되어 있는 것은 슬픈 현상이 아닙니까? 물론 우리는 성령님의 오심을 구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분은 이미 오셨습니다. 우리는 성령님의 부어주심을 구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분은 이미 부어주신 바 되셨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분의 복된 능력이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도록 구해야 합니다. 영적인 죽음과 흑암이 지배하는 곳에 우리가 있다고 가정합시다. 단 한 번의 숨소리조차 없으며, 잎사귀 하나 까딱하지 않습니다. 하늘은 마치 놋과 같고, 땅은 마치 철과 같습니다. 구원의 소식 같은 것은 전혀 들어볼 수 없습니다. 형식주의가 온 지역에 자리를 차지한 것처럼 보입니다. 무기력한 고백, 활기 없는 절차, 사람의 영혼을 마비시키는 기계적인 종교성이 다반사(多般事)입니다. 이런 때 우리는 어찌해야 합니까? 우리를 감싸는 그 치명적인 분위기에 굴복해야 할까요? 물론 그렇게 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찌해야 할까요? 사태를 절감하는 사람들이 비록 단 두 사람뿐이라 할지라도 마음을 같이하여 함께 모여 하나님께 마음을 토해 놓읍시다. 하나님이 메마른 땅 위에 풍성한 축복의 단비를 보내실 때까지 거룩하면서도 확고한 일념으로 그분을 기다립시다. 팔짱을 낀 채 아직 때가 아니다라고 무익하게 말하지 맙시다. 소위 숙명론(宿命論)이라 불리는, 그 편파적인 신학의 한 분파에게 굴복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지 맙시다: “하나님은 주권자이시며, 자기 뜻대로 일하신다. 우리는 그분의 때를 기다려야지 인간의 노력은 헛되다. 우리는 부흥을 일으킬 수 없다. 우리는 일순적(一瞬的)인 흥분을 경계해야 한다.”

이 모든 말은 아주 그럴듯하게 들리며, 그 속에 어느 정도 진리가 포함되어있기 때문에 더더욱 그런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것들은 진리의 한 단면일 뿐, 온전한 진리는 아니기 때문에 해로운 성격을 띠고 있습니다. 편파적인 진리보다 더 무서운 것은 없습니다. 이것은 노골적이고 명백한 오류보다 훨씬 더 위험합니다. 어느 정도의 진리는 지니고 있으나 하나님의 온전한 진리는 아닌, 어떤 교리들의, 무분별한 강요로 인해 진실하고 유용한 많은 일꾼들이 반발을 받고 냉각된 채로 추수터에서 내쫓김을 당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어느 것도 그 진리를 건드릴 수 없으며, 마태복음 18 19절에 제시된 의의를 약화시킬 수 없습니다. 그것은 그 모든 축복의 충만한 자유로움과 귀중성을 지닌 채 믿음의 눈 앞에서 있으며, 그 조건들은 오해 받을 우려가 전혀 없는, 명백한 것들입니다. “너희 중에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저희를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바로 여기에, 우리의 마음에 얹혀지는 것이라면 그 어떤 것을 위해서라도, 함께 모여 위해서 기도할 수 있도록 정당한 근거가 나와 있습니다. 우리는 주위의 냉랭함과 메마름과 죽음에 대해 애통한 마음을 지니고 있습니까? 우리는 복음전파에 능력이 결여되어 있는 것과 그로 인해 열매가 거의 없는 것에 낙심하고 있습니까? 주님의 상()과 은혜의 보좌와 성경 앞에 모일 때에 느끼는 메마름과 둔함과 무거움으로 인해 우리의 영혼은 풀이 죽어 있습니까?

우리는 어찌해야 할까요? 팔짱을 낀채로 냉랭한 무관심 속에 있어야 할까요? 낙심 가운데 포기해 버려야 할까요? 아니면 불평 불만과 초조함과 짜증을 있는 그대로 표현해야 할까요? 그럴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어찌해야 할까요? “마음을 같이하여 한 곳에 모여우리의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얼굴을 땅에 대고, 마태복음 1819절을 주장하면서 우리의 마음을 한 사람의 마음처럼 토해 놓아야 합니다.

이것이 중대한 해결책이요, 확실한 자원입니다. “하나님은 주권자이시다라는 말은 틀림없는 사실이며,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을 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부흥을 일으킬 수 없다라는 말은 틀림없는 사실이며,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부흥을 하늘로부터 끌어내려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순간적인 흥분을 경계해야 한다라는 말은 틀림 없이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냉랭함과 죽음과 이기적인 무관심을 경계해야 한다는 것도 역시 사실입니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계시는 한, 성령님이 우리 의 가운데와 우리의 마음에 계시는 한,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손에 있는 한, 마태복음 18 19절이 우리의 눈 앞에서 그 빛을 발하는 한, 메마름과 죽음과 냉랭함과 무관심에 대한 변명이 있을 수 없으며, 무겁고 무익한 집회나 봉사에 대한 변명이 있을 수 없습니다. 거룩한 합심으로 하나님을 기다립시다. 그리하면 축복은 틀림없이 올 것입니다.

마태복음 21 22절을 살펴보면 우리는 효과적인 기도의, 필수적인 조건들 중의 하나를 또 하나 발견하게 됩니다: “너희가 기도할 때에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이것은 실로 놀라운 말씀이며, 하늘의 보고(寶庫)를 믿음에게 엽니다. 물론 이것에 한계란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의 복되신 주님께서는 우리가 단순한 믿음으로 구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받게 된다고 보장하십니다.

성령님의 감동하심을 받은 사도 야고보는 지혜를 구하는 문제에 관하여 비슷한 보장을 하고 있습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 1:5~7).

이 말씀에서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것은, 만일 우리의 기도가 응답을 받으려면 반드시 믿음으로 드려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구하는 것을 받게 되리라는 분명한 확신과 단순한 믿음으로 함께 기도하는 것은 기도의 형태를 갖춘 말로 그저 기도를 드리는 것과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소위 기도라고 일컬어지는, 우리의 기도들 중에서 어떤 것들은 천장보다 높이 올라가지 못하며, 이것은 우리가 크게 두려워해야 할 사항입니다.

이제 문제는, 우리의 기도와 기도집회가 이 점에 심히 결집되어 있지 않은가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결핍은 우리가 기도 응답을 거의 받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명백해지지 않습니까? 우리는 일치단결과 확신이라는, 이 기도의 두 조건을 얼마나 깊이 이해하고 있는지 자신을 살펴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두 사람이 합심하여 믿음으로 구하기만 하면 무엇이든지 얻게 된다는 이 진리가 만일 사실이라면(물론 이것은 그리스도의 입으로부터 나온 말씀이기 때문에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왜 우리는 더욱 풍성한 기도응답을 받고 있지 못할까요? 결함은 우리에게 있지 않겠습니까? 우리에게 한 마음과 확신이 결여되어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마태복음 18 19절에 제시되어 있는대로 우리 주님께서는 최소 단위의 복수(複數), 최소의 회중(會衆)두 사람만 모여 있어도 그곳으로 내려오십니다. 물론 그분은 이 약속대로 열명, 스무 명, 혹은 백 명이 모여 있는 곳에도 함께 계십니다. 중요한 점은 회중이 온전히 합심하느냐 하는 것이며, 우리가 구하는 바를 받게 되리라고 온전히 확신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만 한다면 이것은 기도의 일치단결을 위해 새로운 분위기와 특성을 창출해낼 것입니다. 대단히 슬프게도 평소 우리의 기도집회는 충심에서 우러나오는 합심과 흔들리지 않는 믿음으로 이루어져 있기는커녕 오히려 가련하고, 냉랭하며, 죽어 있고, 목표가 없으며, 산만하고, 보이기 위한 것일 때가 많은데, 상기(上記)한대로만 한다면 이것은 기도집회를 훨씬 더 실제적이고 살아 있는 것으로 만들 것입니다.

어떤 사항에 대하여 하나님을 기다리는 가운데에 믿는 영혼들이 두 사람이상 함께 모여 충심에서 우러나오는 일심(一心)으로 응답될 때까지 인내하며 기도한다면 그 결과는 얼마나 달라지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와 같은 기도집회를 너무나 볼 수 없습니다! 우리는 매주마다 기도집회에 참석하고 있으며, 이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기도제목들에 대하여 얼마만큼 합심하는지를 하나님 앞에서 살펴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 문제에 대한 답변은기도의 도덕적인 조건들 중 다른 한가지 사항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 다음 호에 계속

 

(1990 1월호)

 

posted by 징검 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