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님의 역사(役事)
어네스트 타담
성령님의 능력
소망의 하나님이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너희에게 충만케 하사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롬
이 마지막 과에서 우리는 성령님은 하나님이시라는 사실과 전능하신 속성을 포함하여 하나님의 모든 속성들이 바로 성령님의 속성이라는 사실을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성령님의 능력은 그분의 창조사역에 잘 나타나 있으며 (욥 26:13, 33:4, 시 104:30), 그분이 성경 속에 나오는 어떤 사람에게 육체적인 힘을 주시는 것에서(삿
하지만 우리에게 가장 관심이 있는 것은 개인의 삶 속에 나타난 성령님의 영적인 능력입니다. 성령님의 그러한 능력을 오늘날 우리들도 동일하게 체험할 수 있을까요? 룰론 그렇습니다. 이 진리는 매우 실제적입니다 그러면 다음과 같은 부류에게 나타난 성령님의 능력에 관하여 각각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삶
그리스도의 삶은 그분이 온전히 거룩한 삶을 사셨다는 것뿐만 아니라 그분의 삶에서 표현된 하나님의 능력에 의하여 두드러집니다. 『그분은 자신의 하나님으로서의 권한을 직접적으로 사용하시지는 않았지만 그분 안에 충만히 임재하셨던 하나님의 성령님을 통하여 사용하셨습니다』(Ridout).
그분의 동정녀 탄생은 성령님으로 말미암은 것이었으며(눅
교회에게 주신 성령님의 은사
고린도전서 12장을 공부해보면 우기는 다양함 가운데서도 아름다운 조화와 균형이 이루어져 있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또한 한 성령님과 한 몸이 제시되어 있으며, 모든 참 신자는 그 몸의 각 지체들입니다. 머리(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은 모든 지체들 안에도 있으며, 머리는 온 몸을 지탱하고 조절해 주는 위대한 감독자이십니다. 그런데 우리의 몸의 구조에 있어서 각 지체들이 각각 고유한 기능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그리스도의 신비한 몸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그리스도안들은 봉사를 위하여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고유한 은사를 소유하고 있으며, 그 은사는 머리 되신 그리스도의 지시를 받아 사용되며, 다른 지체들과 상호보완적인 관계에 놓여있습니다. 따라서 거기에는 경쟁이 있을 수 없으며 다만 서로 도와주고 협력하는 일만이 있어야 합니다.
이 장에는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9가지의 독특한 은사들의 목록이 나와있습니다. 우리는 이 은사들이 어느 특별한 두 세 사람에게만 주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과 그렇다 해서 아무에게나 무분별하게 주어진 것이 아니고 오직 성령님께서 자기 뜻대로 각 사람에게 주셨다는 것, 그리고 온 몸의 건강은 각 사람이 자기가 받은 은사를 정상적으로 활용하느냐에 달려 있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을 한 몸으로 만드는 것은 우리의 임무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성령님께서 이 일을 이미 이루셨기 때문입니다. 즉, 우리가 이미 살펴본 대로 성령님께서 믿는 자들을 한 몸으로 만드시는 일을 이미 실제로 이루셨습니다. 그분은 모든 믿는 자들에게 침례를 베푸심으로써 놀라운 유기체인 교회를 만드셨습니다. 우리는 이제 이 사실을 깨닫고 에베소서 4장 2,3절에 기록된 말씀대로 순종해야 합니다.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그러므로 교회가 그 기능을 다 발휘하고 건강하게 성장하는데 필요한 능력은, 성령님을 근심시키지 아니하고 오직 성령님을 따라 행하는 데에 있습니다.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신(神)으로 되느니라”(슥
성령님과의 개인적인 교제
저의 한 영국 친구가 저에게 자기가 몇 년 전에 제네바에서 브뤼셀까지 기차여행을 하면서 겪었던 이야기를 해주었습니다. 그 친구는 기차내의 한 칸막이 방을 다른 한 사람과 함께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의 얼굴은 어디에서 보았는지 정확히 기억할 수는 없었지만 상당히 낯익은 얼굴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친구는 그것에 관해 그다지 신경을 쓰고 싶지 않아서 곧 다른 데로 생각을 돌렸습니다. 반나절이 지나도록 두 사람은 각자 책을 읽거나 창 밖을 내다볼 뿐 서로 한 마디도 나누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점심식사 시간이 되자 두 사람은 거의 동시에 기차내의 식당으로 들어갔습니다. 식당 안에는 사람들이 거의 없었으며 그들은 서로 다른 식탁에 앉은 채 식사를 끝냈습니다. 오후에도 두 여행자는 기차가 아름다운 아덴(Ardenne)계곡을 넘어가는 동안 아무 말도 없이 차창 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풍경만 내다보았습니다. 드디어 기차는 브뤼셀에 도착하여 서서히 속력을 줄이며 정거장에 멈춰 섰습니다. 정거장에는 기다렸다는 듯이 한 무리의 악단(樂團)이 벨기에 국가를 연주하기 시작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정거장에는 환호하는 수많은 군중들이 서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두 사람이 있던 칸막이 방의 문이 열리고 자주빛 카페트가 문에서부터 정거장의 계단 위에 깔려있던 또 다른 카페트에까지 깔려졌습니다. 그리고 제 친구와 하루 종일같이 있었던 그 사람이 객실에서 걸어 나왔습니다. 그는 바로 벨기에의 국왕 알버트(Albert)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제 친구가 그를 알아보고 정중하게 인사를 드리기에는 이미 때가 지났습니다.
그는 자기 생애에서 두 번 다시 얻기 힘든 기회를 영원히 놓치고 만 것입니다. 만일 이 영국 친구가 함께 여행하는 그 사람과 교제를 나누기만 했더라면 어떠한 대화를 즐겼겠으며, 어떠한 영예를 경험했겠습니까!
모든 참 신자(信者)는 천국의 영광에 이를 때까지 놀라운 위로자를 마음가운데 모시고서 여행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모든 신자가 다 그분과의 친밀한 교제를 즐기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고린도후서 13장 14절의 축복기도는 성령님과의 “교제” 혹은, “교통”에 관하여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성도들 간에 나누는 교제를 의미할 뿐만 아니라 아버지 하나님과 그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이루어지는 교제를 뜻합니다. 하지만 여기에는 우리가 우리 자신을 엄격하게 판단해 보아야 할 책임이 따릅니다.
주님께서 승천하시기 전 마지막으로 하신 말씀은 위로부터 놀라운 능력을 부여받는 것에 관한 것이었습니다(눅
하지만 우리는 그들을 초인(超人)으로 오인하거나, 오늘날 우리를 둘러싸고 괴롭히는 낙담과 시련에서 면제된 사람들로 여겨서는 안됩니다. 그들은 용기를 잃고 낙담과 실망에 빠진 적도 있었으며 때로는 하나님의 뜻을 잘 분별하지 못할 때도 있었습니다. 그럴 때에는 하나님께서 은혜로 그들을 바로 잡아주시고 다시금 교제 가운데로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예를 들어 사도행전 2장에서 성령님으로 충만함을 입은 제자들은 사도행전 4장에서 다시 한번 성령님의 충만을 입었습니다. 아마 고(故) H.P. 바커가 말한 다음과 같은 예화가 우리가 이 점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줄 것입니다. 그는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저는 언젠가 미국의 어느 수로(水路)에 만들어진 댐 저수지 곁에 서 있었습니다. 제 왼쪽에는 즉, 수로의 상류쪽에는 견고한 수문으로 막아진 물이 높이 서 있었으며, 수로의 하류 쪽에는 또 하나의 수문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수문과 수문 사이의 댐 저수지의 수위(水位)는 하류쪽 수문 아래로 흘러가는 물의 수위와 동일하게 매우 낮았습니다. 그런데 하류 쪽에서 올라오던 유조선이 하류쪽 수문 안으로 미끄러져 들어오자 하류쪽 수문은 굳게 잠기고, 상류쪽 수문은 천천히 열려 물을 방류했습니다. 이렇게 하여 얼마 후에 상류쪽 수문 위의 수위와 댐 저수지의 수위가 같아지자 드디어 유조선은 상류쪽으로 운항을 재개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이와같은 실례를 우리의 생활 가운데에서 어떻게 적용할 수 있을까요? 우리가 만일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부어주시기를 원하시는 놀라운 사랑에 대하여 마음의 문을 열어드렸다면, 그리고 성령님께서 우리를 충만케 하시고 우리의 모든 삶을 다스리시도록 맡겨 드리려 한다면 다른 쪽의 수문, 곧 우리 자신을 죄악된 세상으로 이끌어 가는 삶의 문을 닫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만일 우리가 그 문을 닫지 않는다면 놀라운 기쁨과 은혜와 축복의 강물은 영원히 흘러가 버리고 다시 오지 않을 것입니다.』
이 교훈을 생각해 하면서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는 에베소서 5장 18절 말씀을 주의깊게 읽어보십시오. 만일 어떤 사람이 술취한 상태에 있으면 그것은 그가 걷는 모습이나 말하는 것을 달리 보이게 만들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어떤 사람이 성령님으로 충만해진 상태에 있다면 그것은 그의 모든 삶에 새로운 특징을 지니게 만들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성령님의 충만을 입을 수 있을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함으로써, 그리고 우리를 사랑하시는 주님과 지속적인 교제를 나눔으로써 가능합니다. 주 예수님께서는 성령님과 믿는 자와의 교제관계를 삼중적으로 지적하셨습니다.
[1] “함께”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요
[2] “속에”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요
[3] “위에”(우리말 성경에는 “····에게”로 표현되어 있음- 역주)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 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행
이러한 일이 일어나려면 먼저는 성령님을 근심케 하는 어떠한 죄라도 마음이나 생활 가운데 용납해서는 안되며, 불순종으로 성령님을 소멸해서도 안되며, 자기나 육신이나 세상에서 난 것이 성령님의 능력을 방해하도록 조금도 용납해서도 안되고, 오직 행동과 봉사에 있어서 자기 자신을 그분께 온전히 드려야 합니다. 성령님을 거스리는 모든 것들이 우리의 마음과 생활가운데에서 비워질 때에야 비로소 성령님께서 그 충만으로 “임하십니다.”
이 책을 끝마치면서 모든 사람들이 영적으로 새로워져서 선지자 미가처럼 다음과 같이 고백할 수 있게 되기를 진심으로 기도합니다. “오직 나는 여호와의 신(神)으로 말미암아 권능과 공의와 재능으로 채움을 얻고····”
(1990년 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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