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14)
그리스도의 완전한 종되심(2)
-완전한 종에 관한 몇가지 사실들-
- W. E.바인 -
성경에는 그리스도 예수께서 세상에 오신 목적이 다양하게 진술되어 있다. 그분은 “잃어버린 자를 찾으러” 오셨다(눅
아버지를 향한 그분의 한결 같은 순종의 길은 여호와께서 선지자 이사야를 통해서 “내가 붙드는 나의 종, 내 마음에 기뻐하는 나의 택한 사람을 보라”고 말씀하신 바로 그분의 삶을 보여주었다(사 42:1). 하나님의 형상을 지니신-하나님을 닮았다는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의 본질적인 속성과 품격을 드러내는 그러한 모습으로 존재하셨다는 의미임 -분께서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자신을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셨다(빌
그분의 종(bondservant)되심
그분은 종(bondservant)의 형체를 취하셨다. 이것은 사람들과 관련하여 그렇게 되셨다는 뜻이 결코 아닌데 이는 그 단어가 심김을 받는 대상에게 의지를 완전히 굴복시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분은 실로 사람들의 증(Servant, 디아코노스)이셨다. 그래서 그분은 한 예로 제자들이 서로 으뜸이 되려고 다투는 모습을 바로 잡아주시면서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너희 증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디아코노스)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고 말씀하셨다(막
“디아코노스”는 자신의 판단에 의해 결정되는 섬김의 활등을 의미하는 반면 “둘로스”는 다른 사람의 뜻에 복종하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와 같이 후자의 단어는 그분을 보내신 분에 대한 그분의 섬김과 관련하여, 그리스도에 대해서만 언급된 것이다. 그분은 사람들의 “디아코노스”였고 하나님의 “둘로스”였다. “종의 형체”라는 문구가 그분의 종으로서의 신분의 실재와 특성을 표현하고 있듯이 “하나님의 본체”라는 문구는 그분의 신성의 실재를 표현하고 있다. 그분은 이 땅에 계실 때 종이셨듯이 그분의 선재하심 안에서나, 육신을 입으신 후에나 진실로 하나님이셨다.
그분의 하나님으로서의 속성
“종의 형 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빌
그분께서 드러내신 능력은 하나님께만 속해 있는 것이었다. 자연은 그분의 다스림에 완전히 복종했다. 그분은 물 위로 걸으셨으며 말 한마디로 폭풍을 잠잠케 하셨으며 물을 포도주로 만드셨으며 5천명을 기적적으로 먹이셨다. 또한 그분은 질병과 죽음에 대해 절대적인 권세를 가지셨으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셨으며”(마
또한 주님께서 자신이 계시지 않는 곳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알 수 있으셨다는 사실 역시 매우 중요하다. 그분은 나다나엘에게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 나무 아래 있을 때에 보았노라”고 말씀하셨다(요
그분의 아버지께 대한 순종
이제 그분이 성육신 안에, 그리고)후에 신성을 소유하셨음을 보여주는 빌립보서 2장 본문은 그분이 “죽기까지 복종하셨다”고 언급하고 있다. 그분의 전 생애는 아버지께 대한 한결같은 순종의 삶이었으며 그분의 죽음은 그러한 순종의 정점을 보여주는 행동이었다. 그분은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우셨다(순종하는 법을 배우셨다는 의미가 아니다)(히5:8).
그는 아버지를 떠나서는 아무 일도 하지 않으셨다. “아들이 아버지의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요
그분이 행하신 모든 것은 아버지와의 불가분한 연합 속에 행해졌다. 그분은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내 아버지께서 지금까지 일하시는 것처럼 나도 일하느니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초자연적인 능력은 절대적으로 아들이신 그분께 속해 있었다. 그러나 그분은 항상 그분의 인성으로 인해 그분의 아버지를 의지하고 그분께 복종하신 분으로서 행동하셨다.
그분의 자기 제한
그분의 “사람들과 같이 되심” 안에서 그분의 몸은 아버지의 뜻을 이루는 도구가 되었다. 시편 40편이 이 사실을 예언했는데 히브리서에 그 말씀이 인용되었다.
“그러므로 세상에 임하실 때에 가라사대 하나님 이 제사와 예물을 원치 아니하시고 오직 나를 위하여 한 몸을 예비하셨도다 전체로 번제함과 속죄제는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 이에 내가 말하기를 하나님이여 보시옵소서 두루마리 책에 나를 가리켜 기록한 것과 같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히
그분은 자신의 신성의 사용을 제한하실 수 있으셨으며 또 그렇게 하셨다. 그분은 한 마디 말로 체포자들을 엎드러뜨리심으로써 자신의 신성의 권능을 드러내신 후에 그들로 하여금 자신을 묶게끔 허락하셨다. 그분은 인간의 무력과 경멸에 스스로를 굴복시키셨다. 그분은 자신에게 십자가형을 요구하는 무리에게 그들의 원대로 행하라고 허락하셨다. 그분은 약함으로 인해 십자가에 못박히셨다(고후
인간의 힘은 거기에 복종하는 것이 그분의 뜻이 아닌 한 그분께 아무 도움도 줄 수 없었다. 그분은 어떤 인간에게도 적용할 수 없는 다음과 같은 놀라운 말씀으로 스스로를 변호하셨다. “내가 다시 목숨을 얻기 위하여 목숨을 버림이라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요
그분께서 스스로에게 부과하신 제한은 그분의 참 인성과 일치된다. 동시에 그분은 바로 이 제한 안에서 끊임없이 자신의 초자연적인 능력을 드러내셨다. 십자가에서보다 더 이 사실이 놀라웁게 나타난 대목은 없다. 그분의 죽음에 관한 어떤 사실들은 그것(그분의 죽음)을 단순한 인간의 십자가형과 구별 짓게 하는데 예를 들어 그분이 크게 외친 다음 고개를 아래로 떨구고 영이 떠나신 것은 마지막 호흡을 한 다음 고개가 아래로 쳐지는 일반적인 운명 순서와 대조된다. 그분의 죽음은 단순한 인간의 죽음일 수가 없었다. 하나님은 죽으실 수 없으므로 그리스도는 하나님이 아니셨다는 주장은 쓸모없는 주장이다. 하나님이신 그분은 죽으시기 위해 인간이 되실 수 있으셨으며 그리고 죽음을 맛보셨다. 그분의 죽음은 인간이자 하나님이신 분의 초자연적인 죽음이었다.
우리 주님의 참 인성의 증거는 그분의 본질적인 신성에 비추어 상고되어야 한다. 주님의 행사는 하나님의 속성이 인간의 속성에 전달된 결과가 아니라 두 속성을 소유하신 분의 행사였다. 그분은 결코 어떤 때는 인간으로서 행동하시고 어떤 때는 하나님으로서 행동하지 않으셨다. 그 두 속성이 그분 안에 완전하게, 뗄래야 뗄 수 없는 상태로 결합되어 있었으며 지금도 그러하다
그분께서 스스로에게 부과하신 제한은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지셨다”는 사도의 진술을 나타내 준다. 그 제한은 그분의 종의 특성의 본질적인 실재를 드러내주며 또 마땅히 그런 측면에서 고려되어야 한다. 그 제한은 단순한 그리스도론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는 그 온전하신 삶 가운데 나타난 그분의 온전하심을 바라보며 그분께서 “우리가 마땅히 좇아야 할 본을 우리에게 남기셨음”을 기억하고 그분의 뜻을 행하는 가운데 기쁨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한다. ♠ -다음 호에 계속 -
(1992년 10월호)
'횃불 > 1992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어느 날의 기도 (0) | 2013.06.12 |
---|---|
위험에 처하면 포기해 버리는 무신론 (0) | 2013.06.12 |
용서받지 못하는 죄(1) (0) | 2013.06.12 |
성경의 여인들(4) - 리브가 (2) (0) | 2013.06.12 |
성령은 있되 열매는 없는 기독인들이여! (0) | 2013.06.10 |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 제9장 주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1) (0) | 2013.06.10 |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하자 (0) | 2013.06.10 |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2) (0) | 2013.06.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