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중심 성경공부(3)
요 나
W. W. 페러데이
큰 도성에서
놀라운 결과를 가져온 요나의 니느웨 방문 사건은 아마도 세계 역사상 유일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 당시 최대 도성의 전체 백성이 하나님 앞에 엎드려 부복했으며 그들의 절대 군주가 그 일에 모본을 보였습니다.
그 상황을 면밀히 검토해 봅시다. 선지자는 분명히 단신으로 갔습니다. 바울과 그밖에 많은 사람들이 증거하듯이 다른 이들과 동역한다는 것은 큰 기쁨을 줍니다. 그러나 요나에게 동역자가 있다는 암시가 일절 없습니다. 그는 자신의 두려운 멧세지의 결과를 그 홀로 직면했습니다. 어떤 조직체도 배후에 없었고 어떤 열렬한 선전문구도 그의 도래를 알린바 없으며 군중을 모으기 위한 어떤 합창단이나 유명한 가수들도 동원된바 없습니다. 오늘날 많은 전도자들은 군중을 모으기 위해서는 그런 방법들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인간의 재치가 고안해 낼 수 있는 모든 방법보다 훨씬 가치가 있다는 것을 우리는 언제나 배울 수 있을는지! 베드로와 바울 같은 무일푼인 사람들도 단순히 성령을 의지한 결과로 하나님을 위해 큰 일을 이루지 않았던가요?
요나는 니느웨 거리를 행하며 그의 엄위한 멧세지를 “외쳤습니다.” “사십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
니느웨 왕은 아무리 독단적이고 잔인한 명령일지라도 즉시 복종할 준비가 되어 있는 관리들에 둘러싸여 왕궁에 기거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어떤 신하가 동양의 군주에게 가까이 간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에스더는 왕후의 신분이었으나 왕의 소환 없이 왕 앞에 나아가는 것을 생명을 건 모험으로 여겼습니다(에
누가복음 11장 30절은 요나에 대한 하나님의 섭리가 사람들에게 알려졌음을 암시해 줍니다. “요나가 니느웨 사람들에게 표적이 됨과 같이····”이것은 그의 멧세지에 중요한 점을 부여해 주는데, 사실 누가 하나님의 뜻을 대적하던 자들을 낮추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그 자신의 경험을 통해 입증한 사람처럼 임박한 멸망을 충분히 경고할 수 있겠습니까? 니느웨와 그 왕이 회개한 일은 요나가 육체적인 면에서 겪은 경험만큼 도덕적인 면에서 큰 기적입니다.
요나서보다 시대가 늦은 한 책에서 하나님은 민족이나 국가에 관한 그분의 원칙을 분명히 밝히십니다. “내가 언제든지 어느 민족이나 국가를 뽑거나 파하거나 멸하리라 한다고 하자 만일 나의 말한 그 민족이 그 악에서 돌이키면 내가 그에게 내리기로 생각하였던 재앙에 대하여 뜻을 돌이키겠고”(렘
엘로힘과 여호와
성령께서 성경에서 하나님의 이름과 칭호들을 사용하시는 예들은 매우 교훈적이며, 또한 모든 시대에 걸친 사람들과 특히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섭리를 배우고자 하는 모든 이들에 의해 주의 깊게 상고되어야 합니다. 불행히도 전반적인 면에서 훌륭한 역본인 흠정역은 이 점에 있어 기대할 만큼 도움을 주지 못합니다. “하나님”과 “주”(the Lord) (후자는 때로는 대문자로 때로는 소문자로 쓰인다)는 실로 중요한 진리를 내포합니다. 요나서에서 우리는 “하나님”과 “주”라는 표현을 대합니다. “하나님”은 히브리어 “엘로힘”을 의미하며 15회 나옵니다. “주”는 “여호와”를 의미하며 26회 나옵니다 하나님의 칭호들은 성경 전체에 걸쳐 풍성하며 각각 그 의미를 지닙니다 또한 그러기에 각각 우리 마음에 뜻깊은 멧세지를 전해줍니다. 시편 68편은 하나님의 이름과칭호가 풍성한데 우리는 거기서 적어도12가지 명칭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가장 최근의 가장 완전한 계시는 “아버지”란 이름인데 이 이름은 그분의 사랑하는 아들에 의해 우리에게 전해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이름 아래 오늘날 성도들은 그분과 관계를 지니고 있습니다. 성도들은 그분의 자녀요 아들이요 후사입니다.
성경은 “엘로힘”이란 명칭으로 시작합니다. 창세기 2장 3절까지는 다른 명칭이 나오지 않습니다 이 명칭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뛰어나심-모든 것의 능한 원인자로서의 하나님-을 말해 줍니다. “여호와”는 관계성에 대한 그분의 칭입니다(그분께서 자신의 비천한 피조물인 인간과 관계를 맺기 위해 내려오셨다니 얼마나 놀라운 일인지). 따라서 창세기 2장(4절부터) 전체에서 우리는 “주 하나님”, 즉 “여호와 엘로힘”이란 표현을 볼 수 있습니다. 그 장에서 다음의 다양한 관계를 살펴봅시다.
4~6절-천지와 그분과의 관계. 그분이 천지를 창조하셨다. 천지는 그분의 손의 작품이다.
7~15절-인간과 그분과의 관계. 그분은 인간에게 특별히 생기를 불어넣으셨다.
16~20절-인간과 나머지 피조물과의 관계. 인간은 그들의 주인이다. 21~25절 -인간(남자)과 여자와의 관계. 남자는 여자의 머리이다.
요나서에서 우리는 사공들이 처음 하나님을 표현한 말이 “엘로힘”임을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그분과의 특별한 관계에 대해 아는 바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분을 원하면 대풍을 멈추게 할 수 있는 절대자로 인정했습니다. 복음의 빛이 비추는 오늘날 슬프게도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창조주를 사공들이 아는 정도로 밖에는 생각지 않습니다. 그분의 능하신 손길이 명백히 나타나자, 또 그들이 1장 9절에서처럼 요나의 신앙고백을 들은 후에, 그들은 “여호와께 부르짖었고” “여호와를 두려워했고”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고 서원을 했습니다.” 이것은 진정한 회심으로 보입니다.
“바다와 육지를 지으신 하늘의 하나님”이 그들에게는 단순한 창조자 이상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아버지의 사랑하는 아들께서 아버지를 충만히 선언하기 위해서 하늘로부터 오시기 전까지 계시될 수 있는 최대한도로 하나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사공들의 단순한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소유한 채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우상숭배의 길을 좇던 요나의 동족을 부끄럽게 하기에 충분했습니다.
그러면 요나가 하나님을 어떻게 표현하는지를 살펴봅시다. 요나서 전체에 걸쳐 그는 한결같이 “여호와”라는 칭호를 쓰고 있는데 그것은 계몽된 모든 유대인들에게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의미해 줍니다(말
요나와 대조적으로 니느웨 왕과 그의 백성은 비록 회개를 했지만 하나님(“엘로힘”)에 대해서만 알았습니다. 이스라엘이 그 아래서 그분과 관계를 맺은 그 이름에 대해서는 그들은 아는 바가 없었습니다. 그것은 국가적인 각성이었습니다. 백성들은 그들의 창조주께 그들이 큰 죄악을 범 했음을 깨닫게 되었으며 그분의 심판에 대한 경고를 듣고 두려워 떨었으며 그분 앞에 겸손히 엎드렸습니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예레미야 18장7~10절은 하나님의 민족들에 대한 섭리의 원칙을 보여줍니다. 그분의 눈은 그들의 행위를 감찰하시고 그분은 때때로 그들에게 진노를 보이시기도 하지만 언제나 자비를 베풀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치리가 그분의 은혜와 혼동되어서는 안됩니다. 니느웨 백성들이 경험한 그러한 집행유예는 복음 멧세지를 통해 온 세상 만민에게 선포된 영원한 죄사함(행
오늘날 많은 나라들은 극심한 도덕적인 타락에 처해 있습니다. 만일 그들이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보고 그들의 죄악을 뉘우치고 돌이킨다면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징벌하려는 자신의 뜻을 돌이키실 것입니다. 용서가 베풀어지고 평화와 안정이 임할 것입니다. ♠
(1995년 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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