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혀진 명령-거룩하라
월리암 맥도날드
제9장: 그리스도인의 삶의 원리
문제는 “신자들에게 합당한 품행은 무엇인가?”이다. 무엇은 하고 무엇은 하지 말아야 하는가? 이 활동은 옳은 것인가 아니면 그른 것인가? 성경은 신자들이 하늘의 소명에 따라 어떻게 사는 것이 합당한 것인지 일반적인 개요를 말하고 있다. 성경은 많은 질문들에 직접적으로 답을 하고 있기 때문에 조금도 혼돈할 필요가 없다. 예를 들어 성경은 신자들이 불신자들과 멍에를 같이 하는 것은 절대로 옳지 않은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고후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의 삶에는 성경이 직접적으로 다루고 있지 않은 수백 가지의 상황들이 있다. 만일 성경이 삶에 대한 것을 하나하나 다 다루었다고 하면 성경이 너무 커서 아마 가지고 다니지도 못할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일련의 원리들을 주셨다. 어떤 문제가 생겼을 때 우리는 “내가 이것을 해도 괜찮은가?”라고 그 원리 하나 하나를 적용해보는 것이다. 이와같은 방법을 통하여 해결되지 않을 문제는 없으리라고 본다. 이것은 마치 컴퓨터에 문제의 정보를 입력하고 거기에 맞는 통제키를 움직여 문제에 대한 답을 찾는 것과 같다. 여기에 몇가지 질문의 원리들이 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만한 일인가?
우리는 언제나 “거기에는 어떤 해가 없을까?”라고 묻는다. 그러나 우리는 또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만한 일인가?”라고 물어야 할 것이다. 사도 바울은 우리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해야 한다는 원리를 전해주었는데 그 원리는 의식주까지도 적용된다(고전
세상에는 하나님께 영광이 되지 못한 일들이 많이 있다. 예를 들면 정직하지 못한 일, 깨끗치 못한 일, 의롭지 못한 일 또는 의문스러운 일들이다. 이러한 일들에 관여하면서 “주여 제가 하려는 일을 통하여 영광을 받으소서”라고 기도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세속적인 것은 아닌가?
거듭나지 못한 사람들은 그들 나름대로의 삶의 방식과 방법, 음악, 예술, 종교 그리고 철학을 가지고 있다. 이는 영 보다는 육, 즉 그리스도께서 주신 것보다는 타락한 인간의 본성에 맞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속하지 않은 것처럼 그리스도인들도 세상에 속하지 않았다(요
예수님 같으면 이 일을 하셨겠는가?
주님은 우리에게 그를 따라오도록 본이 되는 삶을 사셨다(벧전
당신이 그 일을 하고 있다가 주님이 오셔도 좋은가?
주님께서 오실 때를 아는 사람은 없다. 주님은 언제든지 오실 수 있다. 사도요한은 그분의 오실 때 부끄러움을 당할 수도 있다는 것에 대해 말하고 있다(요일
만일 그분이 우리에게 “너 지금 여기서 무엇을 하고 있니”라고 물으면 우리는 부끄러움을 당하게 될 것이다. 아니면 주를 부인한 베드로에게 물으셨던 것처럼 “네가 이것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라고 물으실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언제든지 오실 수 있다는 소망은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성결한 삶을 살게하는 촉진제가 된다(요일
어떤 신분에 맞는 것인가?
다른 장에서 두 성품에 대해 더 깊게 다루었다. 여기에서는 그에 대해 요약하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모든 신자는 옛성품과 새성품을 가지고 있다. 옛성품은 아주 악하고 새성품은 말할 수 없이 선하다. 이 두 성품은 지속적으로 서로를 향하여 대적하고 있는데 우리가 많이 먹이는 성품이 이긴다. 우리는 우리가 듣고 보고 행하고 가는 곳, 그리고 사귀는 친구와 생각하는 것을 통하여 우리 성품을 먹인다. 우리는 늑대를 먹이고 양은 굶기면서 양이 이기기를 기대할 수는 없다.
당신의 몸이 성령의 전이란 것을 생각할 때도 기꺼이 그것을 할 수 있는가?
사람이 구원받을 때 성령께서 영구적으로 그 안에 들어가 거하신다(고전
하나님의 자녀로서 합당한 행동인가?
우리는 다 왕자들로서 우리의 부르심에 합당한 삶을 살도록 부름을 받았다(엡
세상 사람들은 믿는 자들은 자기들보다 더 나은 삶을 살리라고 기대한다. 신자가 죄를 짓는 것을 보면 “나는 당신이 그리스도인인줄 알았는데····”라고 말한다. 그들은 그같은 죄를 습관처럼 범하면서도 그리스도인이 범하는 것을 보면 놀라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은 그래야 한다. 세상은 그리스도인들에게 더 나은 삶을 기대해야 하며 그리스도인 또한 더 나은 삶을 살아야 한다.
만일 그것이 돈을 사용하는 일이라면 더 가치있게 사용될 수는 없는가?
사람이 삶을 사는데 있어서는 좋은 것이 있고 더 나은 것이 있으며 또한 가장 좋은 것이 있다. 우리는 최고의 효과를 거두기 위하여 지속적으로 그 가치를 평가하지 않으면 안된다. 좋은 것이 때로는 가장 좋은 것의 적이 될 수도 있다. 우리는 죄짓는 것은 아니지만 하찮은 것이나 일시적인 것, 그리고 꼭 필요하지 않은 것에 돈을 쏟아 부을 수도 있다. 반대로 우리는 복음을 전하는데 돈을 사용하여 영광의 문에서 환영을 받을 수도 있다(눅
주어진 시간을 더 낫게 사용할 수 있지 않는가?
우리의 시간을 사용하는 것도 어떤 법에 매이는 것이 아니라 주의 영광가운데서 자유로워야 한다. 우리 모두에게는 하루 2신시간이 맡겨져 있기 때문에 어떻게 유용하게 사용할 것인지 결정해야 한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선을 위해서도, 느리고 악을 위해서도 사용되어질 수 있으며 낭비될 수도 있다. 우리는 선한 청지기로서 시간을 아껴야 하는데(엡
당신의 행동이 다른 사람들에게는 어떤 영향을 미치겠는가?
삶에 있어 어떤 행동들은 도덕적으로 중립적인 것이 있다. 그것들은 도덕적으로 중요하지 않은 것들이라고 말한다. 그리스도인들도 그와 같은 것들을 할 수 있는 자유가 있다. 그것 자체가 나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도덕적으로 중립적인 것이라 할지라도 다른 형제를 거치게 하거나 넘어지게 하면 잘못된 것이다. 사도 바울이 로마서 14장에서 이 주제에 대해 어떻게 다루고 있는지 주목하라. “····부딪힐 것이나 거칠 것으로 형제앞에 두지 아니할 것을 주의하라”(13절). “만일 식물을 인하여 네 형제가 근심하게 되면 이는 네가 사랑으로 행치 아니함이니라 그리스도께서 대신하여 죽으신 형제를 네 식물로 망케하지 말라”(15절). “식물을 인하여 하나님의 사업을 무어지게 말라”(20절). 그리고 고린도전서
의심스러운 것인가?
“믿음으로 좇아 하지 아니하는 모든 것이 죄니라”(롬 14 :23). 이 말씀은 도덕적으로 중립적인 것이나 본질적으로 나쁘지 않은 것들에 대해 말하고 있다. 만일 내가 어떤 것이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을 하고 그것을 하면 죄라는 것이다. 다른 그리스도인에게 있어 그것은 전혀 나쁘지 않고 또 그것을 할 수 있는 자유가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내 양심에 분명치 않고 또 그것을 믿음으로 하지 않거나 합법적이라는 양심의 확신이 없는데도 한다면 그것은 죄를 범하는 것이다. 때로 그것의 흑백을 분명히 가리기가 어렵다. 이에 대한 법칙은 “의심이 간다면 더러운 것이다”이다. 도덕적으로 중립적인 것들에 대한 법칙을 받아들이라. “의심스러운 것은 해서는 안된다.”
악의 모양은 없는가?
데살로니가전서
짐스러운 것은 아닌가?
죄와 짐은 조금 다르다. 죄는 언제나 그른 것이지만 짐은 그릇된 것이 아니라 할지라도 방해가 될 수 있다. 우리는 “모든 무거운 것을 벗어버리고 인내로서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해야 한다(히
구속적인 것은 아닌가?
어떤 것은 합법적이면서도 우리를 얽어매므로 피해야 할 것들이 있다. 사도는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내가 아무에게든지 제재를 받지 아니하리라”(고전 6:12하)고 말했다. 그는 그 자체로 볼 때는 전혀 잘못된 것이 없지만 그것이 우리를 구속할 때는 잘못된 것이 될 수 있는 것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어떤 음식이나 음료에 매이는 것을 허락지 않았다. 우리는 여기에 마약이나 스포츠 그리고 TV도 더해야 할 것이다.
그리스도의 눈에는 어떻게 비칠 것인가?
어떤 이는 그리스도인의 품행에 있어 가장 좋은 점검은 그리스도의 눈에 그것이 어떻게 비칠 것인가를 고려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분이 지지하실까? 우리 옆에 앉아 계신다면 부끄럽지 않을까? 사실 그분은 언제나 우리와 함께 계신다. 옛 흑인 영가는 “주는 우리가 하는 모든 것을 보시며, 우리가 하는 모든 말을 들으시네, 주는 우리와 언제나 함께 하시네”라고 말하고 있다. 거룩하신 구세주께서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을 늘 기억하는 것이 우리의 삶을 거룩하게 살아갈 수 있는 비결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도덕적인 문제를 결정하는데에 필요한 원리이다. 우리가 그것을 알고 기억하여 적용할 때 우리는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결정을 할 수 있을 것이며 거룩의 길을 갈 수 있을 것이다. 불행하게도 우리 모두는 크게 흔들릴 때가 있다. 우리는 승리하거나 아니면 패하게 된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우리 안에 거하고 있는 죄들로부터 건짐을 받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지속적인 부흥을 원한다. 우리는 모두 원하기만 한다면 그 길을 찾을 수 있다.♧
(1996년 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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